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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정치 옮긴이 해제 (진태원) 25.01.23.
p252 : 9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맑스주의의 일반화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소주제로 나뉜다.
1) 근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
-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한 연구
- 근대철학에서 의식과 정신, 주체 같은 범주들이 발명되고 전개되어 온 과정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
- 근대 정치철학의 범주들에 대한 재고찰
2) 구조주의 운동에 대한 철학적 평가
3) 자본주의의 세계화 및 유럽의 구성이라는 정세에 대한 이론적-정치적 분석
(253) 이 중 근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연구는 구조적 맑스주의의 이론적 축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던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이론적으로 정교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프로이트의 경우는 의식을 인간의 사고 활동의 한 부분으로 국지화시키고, 무의식 개념을 정신 장치의 핵심으로 파악함으로써 탈주체적인 문제설정을 제시했다면, 맑스의 경우는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라는 근대의 정치적(또는 자유주의적) 이념을 경제과정의 착취를 위해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보충물로 간주함으로써 근대 주체 개념을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254) 프랑스 혁명과 독일 관념론이라는 이중적인 전환점을 통해 등장한 ‘시민 주체’라는 개념 및 그것의 아포리아, 곧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으로 또는 봉기적 주체와 예속적 주체로의 분할을 얼마간 (상상적으로)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p267 :1) 자기 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
대중들이 스스로의 정념적인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절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자율적인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대중들에 대한 공포와 대중들의 공포를 낳는 핵심 원인이라고 발리바르는 분석한다. (268) 대중들의 복귀는 주권의 통일성의 와해, 따라서 정치체의 해체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자연상태로의 복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한편으로 민주정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통치자의 위치에 놓여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체의 안전(269)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대상의 위치에 놓이기도 하는 셈이다.
따라서 형식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을 정치의 공간에서 배제하거나(홉스) 아니면 대중들이 이미 자치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부당전제[네그리/촛불혁명]해야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두 가지 노선을 모두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대중들이 모든 정치체의 기초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자치의 불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대중들이 그 자체로 통치의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곧 대중들이 스스로의 정념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들의 통치 역량을 증대시키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고유한 정치적 과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는 모든 민주주의는 항상 자기 내부에 분열을, 따라서 갈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중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대중들이 둘로(그 이상으로) 분할된다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갈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구조적으로 민주주의는 이분법적 분열, 내전상태로 향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을 음모론이나 윤석열이나 트럼프같은 특정한 빌런들의 해악성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돌리면 안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내전 상태를 구조적 약점으로 인정하고, 이를 어떻게 관리하거나 통제할지에 대한 고민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2) 신정 분석의 의미
p272 : 자신들의 욕망은 의식하되 그러한 욕망을 낳은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가상을 낳으며, 다(273)른 한편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현실의 진정한 창조주(곧 전능한 의자와 권능을 가진 존재자)에 대한 또 다른 가상을 낳는다. 이러한 자유와 목적론의 가상은 인간의 근본적인 두 가지 가상이며 미신의 온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서의 서사가 이러한 가상에 기초해 전개된다는 것은 스피노자 인간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고 할 수 있다.
p276 :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들은 초월적인 타자와의 동일시/정체화를 통해서만 통일성을 얻을 수 있으며, 이 경우 대중들의 역량은 쉽게 자기 자시에 맞서 파괴적인 역량으로 전도되기 쉽다는 점에 상상적인 동일시/정체화의 위험이 존재한다.
-> 이번 계엄 및 탄핵사태에서 극우세력이 한기총 등 기독교 세력을 통해서 강력한 조직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닌 셈이다. 기독교의 교리 자체가 인간이 가진 무지성을 공략하는 것에 핵심을 두고 있기에, 그 교리는 강력한 독재자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무지하고 순종하는 대중을 양성할 수 밖에 없다. 내려놓음 등 주체의 주체됨을 부정하는 성경적 인간 해석은 반대로 강력한 힘에 대한 축복과 긍정 속에서 전지전능한 아버지로서의 군주, 신의 대체자로서의 왕을 요청한다.
p275 : 히브리 신정국가는 민주주의에 대해 중요한 보편 교훈을 제공한다. 그것은 첫째, 법적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는 충분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대중들의 정념적 삶을 조절할수 있는 별도의 매커니즘 내지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 이 매커니즘의 부재를 공략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파시스트들의 전략. 우리는 새로운 시민종교의 창출이 요구되는 것일까? 최소한 그릇된 종교적 매커니즘을 신봉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광신도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p279 :스피노자가 실체의 자립성을 엄격하게 강조한다면, 이는 유한양태들의 실재성을 박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처럼 다른 개체들과 독립해서 실존할 수 없으며,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실체만이 자립성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개체들의 실재성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개체들의 실존형식, 곧 개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원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곧 개체성은 실재적인 실존 형식이고 (반범신론),
개체는 하나의 통일체라는 것(반원자론),
그리고 ‘개체들의 구성과 활동은 원초적으로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함축한다는 사실’(반기계론)을 처음부터 강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에크리에서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실체와 양태의 관계를 신학에서 이해하는 신과 인간의 관계로 오해하면 안된다. 개체의 특성을 관계로 해석하면, 신학-자유주의적 인간론적 전제를 부술수 있다.
p282 :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정치학의 진정한 과제는 계약의 타당한 절차를 형식화함으로써 주권의 정당성을 근거짓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들의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 대한 분석에 있다. 푸코가 제안하듯이 권력 또는 정치를 분석하는 데서 법적 모델이 아니라 관계론을 채택함으로 의미한다.
-> 태극기부대와, 이대남 테러리스트들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생애사적 연구, 계보학적 분석이 필요한 이유이다.
스피노자는 주체의 의지에 따라서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힘/능력 개념을 비판하고, 그 대신 필연적으로 실행될 수 밖에 없는 힘/역량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존재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삼고 있다.
(283) 정치학의 영역에서 이러한 관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역량이 폭력으로 전도되는 것, 곧 대중들의 역량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위해 활용되는 것(다시 말하면 파시즘)을 하나의 문제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역량 개념이 주체의 역량으로, 주체의 소유물로 이해되면, 원칙적으로 역량은 주체의 자율적인 통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정치적인 역량(가령 노동자 계급 또는 다중)이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으면 부여 받을수록, 그것의 도착 가능성은 점점 더 인식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해하면 역량은 항상 수동성과 능동성의 차이(차이의 차이)로 나타나고, 수동성은 정의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들뢰즈), 곧 이러저러한 타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량이 전유되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역량의 전도, 역량의 도착에 대한 비판과 퇴치의 노력은 정치의 가장 본원적인 목표 중 하나가 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반폭력의 정치 또는 시빌리테의 정치로 부르는 것은 역량에 대한 이러한 관계론적 요구이고, 또 역으로 이 후자는 반폭력의 정치를 정치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부과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종의 만능열쇠는 아니며, 발리바르가 세번째 논문에서 지적하듯이 자신의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발리바르는 특히 “하나 국가’장치‘나 국가장치 전체 속에 조직되어 있는 지배(또는 소외)와 차별(또는 불평등)에 저항하는 모든 봉기가 함축하는 부정성의 측면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그리고 우리가 그를 뒤따를 때, 우리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부정성은 ’근대 정치의 보편성이 전체하는‘ 것인 만큼 이 점에 관한 스피노자의 무능력은 중요한 이론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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