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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정치 / 에티엔 발리바르 / 2부 3장 스피노자, 루소, 맑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 / 2025.01.16./태정
fairliar 2025. 1. 16. 22:17「스피노자와 정치」
II부. 스피노자. 반오웰
3장_ 스피노자, 루소, 맑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
pp. 230-246
발제: 태정
원제: Le politique, la politique: De Rousseau à Marx, de Marx à Spinoza. <정치적인 것, 정치: 루소에서 맑스로, 맑스에서 스피노자로>
3장에서 발리바르는 루소에서 맑스로, 그리고 맑스에서 스피노자로 이어지는 궤적을 분석하면서 정치적인 것(Le politique)과 정치(la politique)의 개념을 구분한다.
“‘맑스 이전’과 ‘맑스 이후’ 사이의 대조가 스피노자를 포함하는 정치적 전통에 대한 우리의 독해의 부재하는 중심을 구성하지 않는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p.230
“『사회계약』 첫 부분(1부 5장)에 나오는 유명하 구절에서 루소는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 따라서 그 내적 통일성의 원리에 관해 질문했다. … 맑스와 엥겔스는 그들 나름대로 계급투쟁과 대중운동 및 사회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 반성하면서, 국가 속에서 제도화된 하나의 인민의 내적 통일성이라는 문제로부터 인만 자체의 혁명적 통일성이라는 문제로 질문을 전위 시킨다. … 그들은 ‘인민 중의 인민’이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노동자 계급 안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 아래 이를 찾아내려고 한다.” pp. 231-232
루소에서 맑스로
발리바르에 의하면 근대의 철학이란 결국 ‘주체의 능동적인 자기-구성’에 관한 이론인데, 이러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관점의 탁월한 대표자”(234)가 바로 루소이다. 루소의 사회계약 사상에 따르면 입법은 인민주권의 표현으로서 내재적인 것이 된다. 주권은 통치와 분리되고, 정치는 규칙들의 집합이나 통치기술art로부터 단절된다.(232) 정치는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신을 포함한 그 어떤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민 스스로의 입법 활동과 인민 스스로 구성한 권력에 기초한다. 이런 관점에서 루소가 말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란 ‘정치의 ‘진리’와 ‘현실성’은 그것의 고유한 영역 속에 그것의 고유한 자기의식이나 활동에 존재하는 것’(234)이다.
하지만 맑스에게 ‘정치의 ’진리’와 ‘현실성’은 그 자체의 바깥에, 그 ‘외적’ 조건들과 대상들에 존재’하고, 이러한 정치의 외재성은 정치를 내생적으로 구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치의 타율성이 핵심적인 문제로 부상하게 된다.
“맑스는 개인들 및 사회적 집단들의 활동이 포함되어 있는 정치적 과정을, 그것의 타자, 곧 넓은 의미에서 경제의 모순들의 발전과 변증법적으로 동일시했다. 그렇다면 정치적 실천의 존재를 무화시키거나 부정하는 게 문제인가? 반대로 좀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게 문제다. 이 경우 그것은 ‘계급정치’가 된다. 곧 그것은 양쪽 모두에서 인정된 정치적인것의 제도적 한계들을 영속적으로 넘어서야하는 사회적 실천으로 사고된다.” p. 234
맑스는 루소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타자를 발견함으로써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관점을 제시”(234)하고, 정치 외부의 경제 영역에서 새로운 정치의 장소를 찾는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타자를 경제 영역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맑스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규정하는 타자로서 경제를 제시했을 때, 그 말이 경제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초월적 지위, 곧 최종 심급의 지위를”(323) 갖는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타자가 꼭 경제, 한 가지만 존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맑스에서 다시 스피노자로
맑스 이후 정치의 타율성이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사회적 변화와 맑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다시 한 번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 관한 이론으로 ‘정치철학’이라는 관념이 재등장했다. (235)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하고 맑스의 기획은 새로운 성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문제는 다시 루소, 로크 또는 칸트로 회귀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측면에서 스피노자를 끌어오기가 어려워서 스피노자는 드물게 회귀된다.
발리바르는 루소에서 맑스로 넘어갔던 새로운 주체의 문제를 스피노자에게 넘긴다. 스피노자와 맑스는 공통으로 ‘대중들’의 문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역사에서 대중들의 역할’에 관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236)
또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중요한 지점은 ‘대중들에게 국가를 구성하는 기능’을 부여한다는 것과 더불어 “역사 속에서 ’대중운동들‘의 현상의 양면성을 탐구하는 방식’이라고 소개한다.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대중운동들이 국가들의 보존에 필수적인 ’민주적‘합의의 필수적 기초를 구성하면서 또한 동시에 그들의 실존을 가장 강력하게 짓누르는 파괴의 위협을 이루기도 한다는 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정치적인 문제이며, 이는 대중들의 ’존재론‘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236-237) 여기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서 인간 본성에 대한 독창적인 ’관-개체적‘관점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유물론적 자유 개념을 읽어”낸다. (238)
하지만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종의 만능 열쇠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지배나 차별에 저항하는 봉기가 함축하는 부정성의 측면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그 이론의 한계를 그러내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표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혁명들을 항상 고대적인 관점에 따라 대중적인 폭동들을 동반하는 정체형태의 변화나 통치자들의 개인적인 교체로 생각했다. 분명 여기에는 민주주의 정치의 또 다른 측면, 곧 하나의 국가’장치‘나 국가장치 전체 속에 조직되어 있는 지배(또는 소회)와 차별(또는 불평등)에 저항하는 모든 봉기가 함축하는 부정성의 측며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이 존재한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그대 정치의 보편성이 전제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p.238
근대의 혁명의 텍스트(특히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들은 평등 없이 자유가 없으며, 자유 없이는 평등이 없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불가분한 형식으로 평등과 자유를 제시한다. 하지만 평등한 자유 명제는 안정적인 공리, 자기규제적인 법적 질서의 근본규범을 구성하지는 못한다. 일단 언표가 되면 무시될 수 없지만, 동시에 모순이나 갈등 없이 제도들 속에서 실현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들은 근대 정치 제도 속에 존재하는 평등과 자유, 곧 소유와 공동체에 불가분하게 관련되어 왔다. (289)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란 무엇일까?
피히테의 ‘민족’과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는 분명한 대칭성(따라서 이론적 유사성)이 존재하는데, 마치 지난 두 세기 동안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들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들 사이에 항상적인 대칭성이 존재했던 것처럼, 이 두 개념은 또한 (도덕적) 공동체와 정체성에 관한 개념이다. 그러나 또한 맑스의 ‘유물론’에는, 정확히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에 주체의 표상의 해체라는 분명한 요소가 존재한다. (243)
“이러한 해체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생산과정의 조직형태로서 착취에 대한 분석과, 적대나 ‘계급의식’의 단순한 발전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계급투쟁들 및 그에 고유한 정치적 복합성에 대한 구체적 묘사로부터 분리 불가능하게 도출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p.243
해체는 ‘자연의 인간화natural-human’ 과정으로서의 착취 분석과 계급투쟁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의 결과이다. 여러 측면에서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의 주체라기보다는 역사 속의 비주체인 것이다.(244) 이러한 주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를 재소환한다.
맑스와 스피노자를 비교해보면 맑스는 스피노자가 설명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고,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맑스가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다. 즉, 스피노자는 대중들의 이론에서 ‘심리적 이론’을 가지고 있으며, 맑스는 대중의 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대한 ‘역사적 이론’을 가지고 있다. (245) <스피노자 반오웰 : 대중들의 공포>에서 발리바르는 물티투도가 가지고 있는 양가성, 대중들이 느끼는 공포와 대중들이 만드는 공포 그 자체에서 민주주의 개념의 원리를 다시 발견한다.
“스피노자에게는 (정서들의 모방으로부터 시자되는) 대중의 동일화/정체화에 대한이론 속에서 심리학적 분석 또는 ‘상호개인적인 정신현상’에 대한 분석의 한 요소가 존재하며, 우리는 이것을 단지 맑스주의ㅡ이 한계로서만이 아니라 유물론적 역사관에 본래적인 아포리아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분명히 정치에 내재적인 경제적 조건 및 더 나아가 껏에 내재적인 적대들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의 ‘생산’에서 개인적 역량들의 합성을 보는 공리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인) 관점 때문에 본질적으로 스피노자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p.245
끝으로 발리바르는 맑스주의에서 나타난 모순들을 스피노자 정치학의 아포리아와 연결시켜보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과 타율성이라는 반정립을 넘어서, 맑스의 질문들과 스피노자의 질문들의 상호보완성을 정치에 대한 현재의 사고를 위한 특권적 지평으로- 적어도 하나의 연구방향으로서-파악할 수 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p.246
옮긴이는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와 맑스의 ‘아포리아적’ 탐구를 통해서 맑스주의 이론이 결국 그 내적 모순들 때문에 붕괴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반대하며 20세기 후반 ‘세계-경제’, ‘세계정치’의 새로운 형태와 기능에 관한 문제들을 탐구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 2부의 3장에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고 설명한다:
“주체를 전제하지 않은 가운데, 자기만족적인 해방의 주체의 가상에 굴복하지 않은 가운데 어떻게 정치적 부정성을 사고할 수 있을 것인가? 시빌리테의 정치는 어떻게 해방의 정치, 변혁의 정치와 접합될 수 있는가?”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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