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β.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존재한다.

인간적 실존이 가능성이 결핍되는 데까지 끌려가는 경우 그것이 절망 상태이다(p.86)

 

결정적인 것은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가 그때 문제가 된다(p.86).

 

누군가가 절망하려고 할 때는, “가능성을 만들어라! 가능성을 만들어라!” 하고 외칠 것이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만이 구원이 된다. 즉 신앙이 문제이다(p.87).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신에게 전부 맡겨버린다. 그는 오직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있다. 사람들은 한 번도 자기의 오성을 동원하여 구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일조차 없이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비명을 지른다. 신앙인은 절망에 대해 영원하면서도 확실한 해독제, 즉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p.89).

 

가능성의 결핍은 모든 것이 필연적이든가 또는 모든 것이 일상적이든가 둘 중 어느 것을 의미한다(p.90).

 

숙명론자는 절망해 있고 절망자로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다. 숙명론자는 절망하고 신을 상실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다. 신을 가지지 않은 자는 역시 자아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p.91).

-> 미다스(Midas)왕을 사례로 들고 있음. 어리석은 소원, 만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신에게 말함. 만지는 음식은 모두 황금으로 변하여 먹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자기 딸까지 황금으로 변함.

 

자아가 정신이 될 때까지 자아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동요됨으로써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이른 인간만이 신과 교제할 수 있다(p.91).

 

속물성과 일상성에도 역시 본질적으로 가능성이 결핍되어 있다. 속물성은 무정신성이고 숙명론은 정신의 절망이다. 그러나 신에 착안하기에 이를 정도의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속물적인 인간은 언제나 그렇다. 그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무엇이 가능하며 보통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와 같은 여러 가지 경험의 집적, 즉 어떤 종류의 통속적인 집체 속에서 살고 있다(p.92).

 

숙명론과 결정론에는 필연성의 긴장을 늦추고 진정시키는 조절 가능성, 다시 말해 완화 작용으로서의 가능성이 결핍되어 있고 속물성에는 무정신성으로부터 깨어나기 위한 각성 작용으로서의 가능성이 결핍되어 있다(p.93).

<참고> 행운에 속지마라, 나심 탈레브 저

사람들이 결정론으로 치우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은 항상 필연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몽테뉴와 데카르트의 차이가 주는 의미에 심취했다. 데카르트처럼 확실성을 추구하다가 우리는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몽테뉴처럼 모호하고 비정형적이지만 중요한 판단을 하는 대신에, 데카르트처럼 정형적인 사고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생각할 여지를 없애 버렸다. 몽테뉴처럼 회의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수적이며, 특히 자기성찰을 통해서 자신을 직시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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