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쪽 : 무의식의 주체 Wo Es War, Soll Ich Werden(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 vs 주체성의 포기 (기독교적 내려놓음 / 자본주의적 에고이즘) - > 자아와 주체는 다르다.
65쪽 : 악마에게는 그를 변명해 줄 만한 **어떤 불분명함(obscurity)**도 없으며, 따라서 그의 절망은 가장 완전한 형태다. 그의 절망은 가장 극단적인 상태이다.
절망의 최소치는, 인간적 관점에서 표현하자면, 일종의 무지의 상태이다. 즉 어떤 순진한 상태 속에서 절망하고 있음에도 그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죄 없는 자는 자신이 절망 중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따라서 무의식이 최대치일 때 절망은 최소치이며, 반대로 절망의 본질을 가장 깊이 인식한 자의 저항(defiance) 속에서 절망은 최대치에 도달한다.
실제로 이 상태를 진정한 절망이라 부를 수 있는지 dialectical하게 따져볼 문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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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자기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절망, 즉 자기 자신과 영원한 자아의 존재를 모른 채 절망하는 무지의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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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태가 진정한 절망임은 틀림없으며, 이것을 “진리의 자기의식(self-righteousness)”이라고 부를 수 있다.
Veritas est index sui et falsi [진리는 참과 거짓을 스스로 판별하는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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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자기 의는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진리나 최고선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듯, 소크라테스처럼 오류에 빠지는 것을 가장 큰 불행이라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의 **감각적 반응(sensuous reactions)**에 좌우되며, 그 반응은 종종 이성보다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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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운이 좋은(fortunate)” 사람은,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불행한 자이며, 보통은 그 오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to be snatched out)**도 별로 없다.
반대로, 이런 오류를 지적해주는 자를 만나면 그는 분개하고(indignant), 그를 최악의 적으로 간주하며, 살인과도 같은(bordering on murder)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즉, 마치 **분위기를 깨는 사람(kill-joy)**에게 하듯 반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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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그가 전적으로 감각적 반응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든, 불쾌든, 쾌락이든 구분하지 않고 감각적(sensate) 반응 범주 내에 살고 있으며, **영(靈, spirit)을 조롱(pooh-poos spirit)**하고, 진리를 감당할 용기를 지니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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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아무리 허영되고 자만심이(vain and conceited) 강해 보여도, 자신의 영적 본질에 대한 **개념(conception)**은 보통 매우 미약하다.
즉, 그들은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아에 대한 개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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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자면, 지하실, 1층, 2층으로 구성된 집이 있다고 하자. 이 집은 계층에 따라 **입주자들이 다르게 거주(tenanted)**하고 있으며,
이걸 인간 존재에 비유하면, 대부분의 인간이 어떤 어이없는(ludicrous) 상태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있다.
67쪽 : 사람들이란, 안타깝게도 (alas) 자신이 사는 집에서 지하실을 선호한다. 모든 인간은 정신과 육체가 통합된 존재, 즉 영(靈)으로 계획된 건축물이다. 하지만 그는 감각의 영역인 지하실에 머물기를 선호한다.
더 나아가, 그는 지하실에 사는 것을 단지 선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며, 누군가 그에게 **윗층의 근사한 방(suite)**에 가보라 권하면 **분개(indignant)**한다. 어쨌든 그는 자기 집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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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류 속에 있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다. 이 사실은 **엄청난 규모(stupendous scale)**로 드러나는 사례들 속에서 보인다. 예컨대 어떤 사상가는 거대한 건축물—즉 하나의 사유 체계—를 세우며, 그 체계 안에는 삶 전체와 세계사 전반이 포함되어(encompasses) 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개인적 삶에 눈을 돌리는 순간, 그는 자신이 그러한 궁전이 아닌, 경악스럽고(appalling) 우스꽝스러운 현실 속, 지하 저장고나 **높은 천장의 궁전(high-vaulted palace)**이 아닌 **관리인(janitor)**의 방, 아니면 개집(kennel) 같은 데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만약 누군가 이런 모순을 지적이라도 한다면 그는 모욕당한 듯 반응할 것이다. 그가 체계를 완성할 수 있는 한, 그의 오류를 도와주는 한, 오류에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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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절망하는 자가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해도, 그는 여전히 절망 속에 있다.
만약 절망 [Fortvivlelse]이란 곧 **산만함(distraction)**이라면, 이 사실을 모른다는 건 곧 착각(illusion) 속에 있다는 뜻이다.
무지와 절망의 관계는, **공포(dread)**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공포가 존재하듯 같다. 공포는 무감각한 사람의 ‘안온한 무감각’ 아래 잠재해 있다.
그 아래에는 공포가, 그리고 또 그 아래에는 절망이 있다. 그리고 환상이 깨지고 삶이 흔들리는 그 순간, 그 밑에 깔려 있던 것이 바로 절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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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이 절망 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진리와 구원으로부터 더 멀어진 부정성 속에 있다.
절망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부정성이며, 그 부정성에 대한 무지는 새로운 형태의 부정성이다.
하지만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정성을 통과해야만 한다. 마치 어떤 마법 주문을 깨려면 그것이 거꾸로 완전히 연주되어야 한다는 옛이야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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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는 단지 변증법적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자신이 절망 중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은 진리에서 더 멀어져 있으며,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도 더 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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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절망 중임을 알고도 그 절망 안에 머무는 자보다, 자신이 절망 중임을 모르고 그대로 남아 있는 자가, 윤리적·변증법적으로는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의 절망은 더 강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지는 절망에서 벗어나거나 **구원(deliverance)**을 받는 데 있어서 전혀 효과가 없다는 점에서 가장 위험한 절망일 수 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절망 중임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자기 안에 절망을 지워버릴 수 없도록(expunging) 만들어져 있다. 즉 그는 절망의 손에 안전하게 붙잡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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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절망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영(spirit)’이라는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자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 즉 자신이 영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절망이다.
이 절망은 두 가지 양상을 띤다. 첫째는 완전히 사라진 듯한 무기력하고 식물적인 상태(vegetative life). 둘째는 활력에 넘치지만 그 근원을 모르는 상태이다.
이 두 경우 모두 영의 부재, 즉 절망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그는 스스로를 건강하다고 여기며, 남들에게도 절정의 건강 상태처럼 보인다(consumptive).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의 병은 절정에 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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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절망의 무지 상태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유형이다. 즉, 일반적으로 ‘세상(world)’이라 불리는 것, 좀 더 정확히는 기독교가 ‘세상’이라 부르는 것, 그리고 기독교 세계(Christendom) 안의 이교주의(paganism) 속에 이 절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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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주의는 절망 상태이지만 그것을 모른다는 점에서 절망이다. 사실 이교도나 자연적 인간은 절망에 빠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그런 구분은 애초에 **‘사랑’과 ‘자기애’**를 구분하려는 시도처럼 불확실하다.
이교도는 자기를 넘어서 발전할 수 없으며, 이 구분을 넘어설 수 없다. 왜냐하면 절망의 핵심은 그것이 절망임을 모른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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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으로(masse), 이교적 세계 속에서 살았던 자들조차도 놀라운 업적들을 이뤘고, 수많은 작가들이 그들로부터 **영감(inspiration)**을 받아왔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받아들일 것이다.
이교주의는 감탄할 만한 미적 즐거움으로 가득 찬 삶의 예시를 제공하며, 자연적 인간은 이 삶을 누릴 수 있다. 모든 특혜를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즐기며, 예술과 과학마저도 그 쾌락을 과장하고(embellish) 세련되게 다듬는 데 동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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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적 관점은—그 속엔 영(spirit)이 부재하므로— 무엇이 절망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취해야 할 관점은 윤리-종교적 관점이다. 즉, ‘영’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다.
영으로서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신 앞에서 영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모든 인간 존재는,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국가나 민족, 이념 같은 추상적 보편자 안에 머물며, 자기 자신의 근원을 불투명하게(opaquely), 또는 더 깊은 무의식 속에서 그냥 **불가해한 것(unaccountable)**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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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존재에 대해 책임을 묻는 질문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이러한 존재는 아무리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더라도, 그 전체 존재가 미적 쾌락으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절망이다.
이것이 바로 **초기 교부들(Church Fathers)**이 이교적 미덕을 **화려한 악(splendid vices)**이라고 부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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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교의 핵심이 자기 자신을 영으로 자각하지 못함에 있음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교도는 자살에 대해 놀라울 만큼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찬양하기도 했던 것이다.
영의 관점에서 볼 때 자살은 가장 본질적인 죄악이며, 존재를 포기하는 행위이자 신에 대한 반항이다. 그러나 이교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살을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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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도둑질, 간음(fornication) 등에 대해서는 혹독했으나, 자살에 대한 신학적 통찰, 즉 신과의 관계나 ‘자기’라는 개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살은 **중요하지 않은 일(inconsequential)**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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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자살은 누구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개인적인 일로 여겨졌고, 만일 이교적 관점에서 자살을 경고해야 했다면, 그건 아마도 굉장히 우회적인(roundabout) 방식으로 “타인에 대한 책임을 어기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해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