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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2_ 제 2장 양생술_샘_발제.hwp

성적 행동에 관한 그리스인들의 도덕적 성찰은 금지들을 정당화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자유, ‘자유인인 남자가 자신의 활동 속에서 행사하는 자유를 양식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적 쾌락이 그 자체로 악이라거나 아니면 그것이 과오의 자연적 상흔들의 일부일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 의사들은 성적 활동과 건강의 관계를 염려했고 그러한 행동의 위험에 관한 일련의 성찰을 전개시켰다. 유의해야 할 점은 이들의 성찰 대상이 본질적으로 성적 활동의 여러 병리학적 결과에 대한 분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의 성찰에서는 또한 성적 행동을, 정상적 행동과 비정상적이고 병리학적인 행동들을 나눠놓을 수 있을 영역 같은 것으로 조직화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 같은 성찰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육체를 돌보는 어떤 방식에 따라 쾌락의 활용-그것에 알맞은 조건, 그것의 유용한 실천, 그것의 필연적 감소-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치료법이라기보다는 양생술에 가까웠다. , 건강을 위해 중요하다고 알려진 활동의 조절을 목표로 하는 관리법의 문제였던 것이다. 성적 행동을 의학적으로 문제 삼게 된 것은 그것의 병리학적 형태를 제거하려는 배려보다는 건강관리와 육체의 삶에 가능한 한 성적 행동을 통합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일반적 관리법에 대하여

그리스인들이 관리법에 얼마만한 중요성을 부여했는지, 그들이 양생술에 어떤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것의 실천을 의학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시켰는지를 보면, 관리법이라는 것이 인간의 행동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본적 범주임은 분명하다. 그것에 의해 사람이 자기 존재를 영위해 가는 방식이 특징지어지며 행동에 대한 규칙들의 총체가 정해지는 것이다. 관리법은 삶의 기술 전체이다.

 

적절하게 숙고하여 결정된 관리법이 담당해야 할 영역은 하나의 일람표에 의해 정의되는데, 그 일람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의 규범적인 가치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운동, 음식, 마실 것, 수면, 성 관계”-이 모든 것들은 절도가 있어야만 한다. 예로, 배설-하제를 써서 씻어내는 것과 토하기-은 섭생행위와 그것의 과도함을 바로잡아 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각각의 인간 활동에 대해, 관리법은 육체와의 관계를 문제로 설정하고 어떤 삶의 방식을 발전시키는데, 이 삶의 방식의 형태, 선택, 변수들은 육체에 대한 배려에서 정해진다. 그러나 육체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관리법이 요구되는 여러 영역에서 관리법은 절도를 확립해야만 한다. 이러한 절도는 육체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 차원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정해 놓은 섭생상의 수많은 금기에는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먹을 것, 마실 것, 운동과 성적 활동 차원에서의 모든 남용에 대해 가했던 비판은 도덕적 계율로서의 가치와 동시에 건강을 위해 유효한 충고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관리법은 대체로 이중의 영역, 즉 양호한 건강이라는 영역과 영혼의 바른 태도라는 영역에서 정의된다. 신체적 양생 생활의 엄격함, 이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결단성에는 도덕적 강인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 강인함 덕택에 이 양생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보기에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힘과 아름다움과 육체의 건강을 얻으려 하는 실천들에 부여해야 할 진짜 이유이다. “그는 자기 영혼 속에 조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의 육체 안에 조화를 세울 것이다.”(국가, IX) 따라서 육체적 관리법 그 자체를 위해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그것에 열중해서는 안 된다. 관리법의 목표는 과도함을 피하는 것이다, 관리법의 실천에서 육체에 지나친 정성을 들일 위험,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지나친 관리법에 대한 경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식이요법의 목표가 삶을 가능한 한 연장시키는 것도, 그 성과를 가능한 한 높이는 것도 아니라는 것, 그보다는 삶을 그 정해진 한계 내에서 보다 유익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식이요법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조건들을 결정적으로 고정시켜놓을 작정을 해서도 안 된다. 관리법의 유용성은 분명 그것이 개인들을 여러 다른 상황에 맞설 수 있도록 해줄 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관리법이 운명을 피하게 해주거나 자연의 방향을 바꿔놓길 바랄 수도 없거니와 그러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관리법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제시되는 그대로의 예기치 못했던 사건들에 대해 맹목적이지 않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양생술은 합리적이고 유용한 방식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전략적 기술이다.

양생술은 육체와 육체의 활동을 세심히 돌보는 가운에 개인에게 두 가지 아주 특별한 형태의 주의를 촉구한다. 첫 번째로, 연속에 대한 주의를 요구한다. 활동은 단순히 그 자체로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연속되는 활동들은 그 결과가 상호 보충적이어야 하지만 그것들 사이의 대조가 지나치게 심해서도 안 된다. 두 번째로, ‘상황적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외부세계와 그 외부세계의 요소·감각들에 대단히 예민하면서도 광범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리법은 보편적이고 획일적인 규칙들의 실체 같은 것으로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처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개론서이다. , 상황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맞추기 위한 하나의 개론인 것이다.

 

양생술은 결국 의사의 충고들을 수동적으로 실행하라고 개인에게 전달해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존재의 기법이 된다. 명심해야 할 것은 양생이 타인의 지식에 대한 순진한 복종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개인 편에서 보자면 자기 자신과 육체를 신중하게 실천하는 것이어야 했다. <회상록>의 짧은 구절 하나가 자기와의 관계를 구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측면에서의 관리법을 잘 보여준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유용한 것의 한도 내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 알아야만 하는 것을 배우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지식에 행해야 할 이러한 배려와 더불어 주요한 것은 기록하고 확인하는 작업이다. “각자가 스스로를 관찰하고 어떤 음식, 어떤 음료, 어떤 운동이 그에게 적한한지, 그리고 가장 완벽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적어두도록 하자.” 육체의 훌륭한 관리가 존재의 기술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주체의 기록 작업을 거쳐야만 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율성을 획득하고, 모든 것을 헤아려 그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한다. “자네들이 이렇게 스스로를 관찰하면 자네들보다 자네들 건강에 좋은 것을 더 잘 분별하는 의사는 찾아보기 어려울 걸세.”

결국 삶의 기술로서의 관리법의 실천은 질병을 피하거나 그것의 치료를 끝내기 위한 예방법들의 총체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자신의 육체에 대해 적절한, 필요 충분한 배려를 하는 주체로 세우는 방식이다. 이것은 일상생활을 총괄하는 배려이다. 삶의 일상적인 대다수 활동들을 건강과 도덕의 관건으로 삼으려는 배려, 육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요소들 사이에 상황적 전략을 규정하려는 배려, 종국적으로 개인 자신을 합리적 행동으로 무장시키고자 하는 배려, 이 같이 삶을 합리적이고 자연스럽게 관리함에 있어 이들은 아프로디지아에 어떤 자리를 내주겠다고 동의하고 있었던 것일까?

 

2. 쾌락의 관리법

히포크라테스 전집 가운데, 양생술에 관한 두 개의 논문(건강관리법, 관리법) <관리법>에는 아프로디지아에 관한 일련의 권고와 처방이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관리법의 두 가지 기본 요소로서 섭생과 운동을 들고 있는데, 운동이 체력을 소비시키면 음식과 음료는 그것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이 문헌의 II부는 관리법에 속하는 요소들의 특성과 효과의 관점에서 양생술의 실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지역에 대한 고찰에 이어 음식, 목욕, 구토, 수면, 운동이 차례로 검토된다. 열거한 관리법의 기본 요소들 가운데 성행위는 한편으로는 목욕과 기름 바르기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목욕과 구토 사이에서 겨우 눈에 띄며, 성행위의 세 가지 효과에 관해서만 기술되어 있다. “성교는 몸을 야위게 하고 습하게 하며 열이 나게 한다. 그것은 운동과 땀의 배출에 의해 몸에 열을 내며, 사출에 의해 몸을 마르게 하고, 운동이 야기한 몸의 용해가 신체에 남긴 것에 의해 몸을 습하게 한다.”

반대로 이 <관리법>III부에서는 아프로디지아에 관한 몇 가지 처방을 찾아볼 수 있다. III부의 첫 부분은 마치 일종의 큰 건강 달력, 절기와 각 절기에 맞는 식이요법을 제시한 영구적 연감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운동과 음식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정할 수 있는 일반적 공식을 제시하기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상황과 개인별·지역별·시기별 차이를 고려해야 할 필요성도 강조한다. 따라서 그 달력은 일단의 강제적 처방들로 읽혀서는 안 되고, 상황에 맞게 적용할 줄 알아야 하는 전략적 원리들로 읽혀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일반적 맥락에서, 이 문헌의 제II부에 나와 있는 일반 공식을 따라 아프로디지아가 추위와 따스함, 건조함과 습기의 작용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고려하여 아프로디지아의 활용이 조정된다. 몸이 차가워지는 경향이 있는 나이든 남자들의 경우에는 좀 더 자주 성 관계를 가져야 하며, 공기가 더 따뜻하고 더 건조해지고, 신체의 성장을 준비해야 하는 봄에는 성 관계의 양을 줄여야 한다. 묘성이 뜨고 난 후 여름이 되면, 관리법이 맞서 싸우어야 하는 것은 특히 건조함으로 이 시기에는 가능한 한 성행위를 줄여야 한다.

이 쾌락의 관리법에서 몇 가지 특성들이 주목을 끌 만하다. 우선 운동과 특히 섭생에 할당된 자리와 비교해볼 때, 성 관계의 문제에는 제한된 자리를 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 관리법에 대한 관심이 결코 행위들의 형식 자체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성 관계의 유형, “자연스런체위나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들과 자위행위에 대해서, 또 이후로 너무나 중요해지는 성교의 중단과 피임 방식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오로지 그것이 어느 정도의 빈도로, 어떤 상황에서 행해져야 하는가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게다가 양적인 측면에서도 정해진 정확한 숫자의 형태로 고찰되고 있지 않다. 언제나 총괄적 평가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 쾌락을 보다 충분히”, 혹은 더 소량으로, 가능한 한 적게 활용하라는 식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체와 그것이 처해 있는 환경 사이에서 여러 가지 성질들-건조함, 더위, 습함, 추위-을 작용하게 만드는 어떤 행동의 리듬을 일괄적으로 미리 단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관리법이 횟수를 정하거나 리듬을 결정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그 전체적 특성들만 규정할 수 있는 관계들 속에서 질적 변화와 그에 따라 필요해진 조정을 절충해야 한다.

기독교의 경우에도 성행위를 제한하기 위해 사용된 몇몇 기준들은 시간순서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이 기준들은 성행위가 허용되는 시기와 그것이 금지되는 시기를 정할 터인데, 이러한 엄격한 구분은 여러 다양한 변수들, 즉 성스러운 해, 월경주기, 임신기간 혹은 산후조리 기간 등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고대 의학의 관리법들에서는 이와 반대로 변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성행위는 그 행위가 포함되어 있는 시간적 제한에 따라 적법하거나 불법적인 것이 되는 행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과 세계 체질과 기후, 신체의 특질과 계절의 특성 사이의 교차 지점에서 어느 정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다소간 제한을 가하기도 하는 경제적 체계에 따라야만 하는 활동으로서 고려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획일적으로 성적 쾌락의 근무일수를 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절한 시기와 적합한 빈도수를 최대한 계산해내는 것이 문제이다.

 

3. 위험과 해독

아프로디지아의 주체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는 육체의 상태와 외적 상황에 따라 조정해야 할 일종의 활용법의 문제이다. 그러나 세심한 관리법에 호소하고 성적 행동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필요성은 두 부류의 이유에 의해 정당화되는데, 여기에는 성적 활동이 가져오는 여향에 대한 일종의 불안이 드러나 있다.

 

첫 번째 부류의 이유들은 성행위가 개인의 육체에 미치는 영향과 관계가 있다. 피타고라스의 소견을 인용하면, “그것은 모두 계절에 고통스럽고 건강에 해롭다.”, “사랑을 하기 위해 어떤 시기를 택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피타고라스는 몸이 쇠약해지고 싶을 때라고 답했다. <여러 가지 문제들>에선 긴박하게 필요할 경우에만 관계를 갖도록 충고한다. 성적 쾌락을 느끼는 것이 언제 유용하고 언제 해로운가를 결정해야만 하는 양생술을 통해, 우리는 제한을 통한 경제적 관리로 나아가는 전반적 경향이 그 윤곽을 드러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불신은 많은 신체 기관들이,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들이 성적 활동의 영향을 받고 그것의 남용으로 고통 받을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드러난다.(아리스토텔레스-/ 디오클레스-방광, 신장, 허파, , 척수/ <여러 가지 문제들>-, 허리)

이처럼 수많은 기관들 간의 상관관계들은 성적 활동이 필수적인 경제적 관리법의 규칙에 따르지 않을 때 흔히 그것과 결부되는 수많은 병리학적 영향을 설명해준다. 대개는-적어도 남자들에게서는-전적인 금욕에 의해 야기될 수도 있는 혼란에 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주목해야만 한다. 성적 활동의 부적절한 분배로 인해 생겨난 질병은 대개는 과도함으로 인한 질병이다.

육체가 생식능력을 가진 물질의 활발한 움직임을 조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을 인체에서 뽑아내어 몸 밖으로 내버리는 행위 자체도 원칙적으로 자연에 부합하는 것이지만 또 그만큼 해로운 영향을 미칠 위험도 있다. , 육체 전체가 가장 중요한, 혹은 가장 허약한 기관들과 더불어 이러한 손실, 그러나 자연이 원했던 이 손실에 대해 큰 대가를 치를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 자체의 힘에 의해 빠져나오고자 하는 이러한 물질을 억류하는 것은 육체에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손에 대한 배려가 또한 쾌락을 활용하는 데서 발휘해야 할 경계심을 정당화한다. 개인이 쾌락을 과도하게 즐기는 것은 위험하다. 그가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생식행위를 한다면, 그 가족의 장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임신하기 쉬운 기간에는 고의로 건강을 해치는 일이나, 과도하거나 부정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이의 영혼과 육체를 뚫고 들어와 각인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보잘것없는 아이들을 낳을위험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위험과 그래서 권고하는 예방은 크게 세 가지 문제를 대상으로 한다. 첫 번째로, 부모의 나이이다. 남녀 사이에 적절한 나이 차이가 있어야 자손의 원기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또한 이 정도 차이가 있어야 두 배우자가 함께 수태 능력이 약해지고 또한 생식활동을 하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나이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예측한다. 두 번째는 부모들의 양생이다. 당연히 그것은 과도함을 피하고 취한 상태에서 아이를 갖지 않도록 주의하며, 또한 일반적이고 항구적인 관리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훌륭한 자손을 얻기에 가장 유리한 계절이나 한 해의 시기가 있다.

이 모든 필수적 배려를 통해 우리는, 만일 우리가 생식행위를 위협하는 모든 위험을 피하고 그로부터 기대하는 성공을 확실히 보장하고자 한다면, 생식행위를 할 때 매우 도덕적인 어떤 태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부부가 둘 다 도시국가에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아이들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를 닮지 않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부모들이 성행위 시에 그들이 그 순간에 하고 있는 행위만을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음이 동요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이들을 통해 사후에도 명맥을 이어가고 또 도시국가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 자연이 쾌락에 부여한 목표를 위협하는, 쾌락의 활용을 둘러싸고 있는 위협을 멀리 떼어놓으려는 항구적인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4. 행위, 소모, 죽음

분명 그리스인들은 성행위를 악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성행위는 윤리적 가치 폄하의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문헌들에는 이러한 활동 자체에 대한 불안감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감은 세 가지 근거를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 행위의 형식 자체,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 그것과 연결된 죽음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적 활동에는 인간의 자기제어와 힘과 생명이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성적 활동에 관리법의 축소되고 양식화된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미래의 질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아프로디지아의 신체 관리법은 일종의 건강에 대한 대비책이며, 동시에 존재의 훈련-아스케시스-이다.

 

행위의 격렬함

히포크라테스 총서의 <발생론>은 그 전체가 사정 도식이라 불릴 수 있는 상황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성행위는 그 시초에서부터, 정액의 배출을 향해 가는 격렬한 역학으로 분석된다. 그의 설명은 남자의 성행위와 여자의 성행위 사이에 전반적인 이질동형성을 설정하고 있다. 몸이 더워지는 출발점이 여자의 경우에는 성교 중 남자의 성기에 의해 자극된 자궁에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 절차는 동일하다. 그러나 저자는 몇 가지 차이점을 주장하는데, 이 차이점들은 행위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에 고유한 격렬함, 이와 더불어 그것에 수반되는 쾌락의 강도 및 지속과 관계되어 있다. 또한 여자의 쾌락은 성 관계 전체를 통해 남자에게 달려 있다.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놓아줄때에야 끝난다.

히포크라테스의 문헌은 남자와 여자의 이러한 이질동형적 행위 사이에 인과적인 동시에 적대적인 하나의 관계를 상정한다. 이른바 경쟁 관계인데, 거기서 남성은 선동자의 역할을 맡고 최후의 승리를 견지해야 한다. 결정을 내리고 조절하고 선동하고 지배하는 것은 남자의 행위이다. 쾌락의 처음과 끝을 결정하는 것도 남자의 행위이다. 여성의 기관들이 잘 기능하도록 해주면서 그것들의 건강을 보장해주는 것 역시 남자의 행위이다. 남성의 삽입과 정액의 흡수는 여자의 신체적 특질들의 균형을 잡아주는 원칙이며 체액의 필수적 배출의 열쇠이다.

성적 활동 전반을 이해하게 하는 이러한 사정 도식은 남성과 여성에게서 남성적 모델이 차지하고 있는 거의 절대적인 우위를 분명히 보여준다. 어성의 행위는 남성적 모델의 복제, 쾌락과 건강의 측면에서 남성적 모델에 종속되어 있는 약화된 형태의 복제이다. 모든 관심을 이 방출의 순간에 집중시킴으로써, 사람들은 성적 활동의 중심에 그 격렬함과 거의 억제할 없는 역학,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힘으로 특징지어지는 과정을 위치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쾌락의 활용에 관한 중요한 문제로서 관리술과 소모의 문제를 제기한다.

 

소모

살아있는 존재가 정액을 배출할 때 그는 체액을 과도하게 배출해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실존을 위해서 대단히 귀중한 요소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정액 물질은 자신이 부여한 존재를 빌려 그 물질의 근원이었던 생명체로부터 그 물질을 분리해내야만 했다. 모든 정액의 사정에는 개인의 가장 귀중한 요소들로부터 나온, 그리고 그에게서 빼낸 무엇인가가 있다.

개인의 성장과 그의 번식은 같은 요소들에 근거하고 있으며 같은 실체 속에 그 원칙을 지니고 있다. 성장 요소들과 정액은 개인의 생명을 유지하고 또 다른 개인의 탄생을 가능하게 해 주는 영양분의 동화 결과 생겨난 쌍생아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 같은 정액의 배설이 육체에서 중대한 사건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육체로부터 귀중한 실체를 뽑아내는데, 그 실체는 유기체의 오랜 작업의 마지막 결과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그 본성상 신체의 모든 부분에 갈수 있고 따라서 그것들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육체를 성장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그 안에 농축시켜놓고 있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다.

정액을 배출하는 성행위는 살아있는 존재에게 값비싼 소모이다. 존재 자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의 한 부분을 모두 다 포기한다는 것은 존재 자신에게는 적잖이 힘든 타격이다. 이런 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성 관계에 따르는 명백한쇠진을 설명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적 쾌락의 남용이 어떤 경우에 어떤 식으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죽음과 불멸성

의학적·철학적 성찰이 성적 활동과 죽음을 연결 짓는 것은 단지 지나친 소모에 대한 두려움의 측면에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양자를 번식의 원칙 자체로 볼 때도 연결시키는데, 이는 그것이 살아 있는 존재들의 소멸에 대처하고 그 종족 전체에게 각 개인에게는 부여될 수 없는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을 생식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들이 성 관계를 가짐으로써 교미하고 이 관계를 통해 새끼가 남겨지는 것은 종족이 시간의 진전을 지속적으로 따르기 위해서이다. , 그들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그 나름의 방식인 것이다. 성행위는 죽을 운명인 개인의 생명과 종속의 존속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나 불멸성의 교차점에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생명 사이에서 성 관계는 개인에게 그자신의 재생을 확보시키는 기술인 것이다.

인위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이러한 관계는, 모든 소멸하게 되어있는 자연에 고유한 영생불명의 욕망에 의해 유지된다. 성적 활동은 죽음과 삶, 시간과 생성과 영원성이란 넓은 지평 위에 자리 잡는다. 그것은 개인이 죽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필수적이다. 개인과 종족, 시간과 영원성, 삶과 죽음에 대해 이러한 설명을 하는 것은 시민들이 공감하면서, 그리고 그 공감 덕분에 유순하게그들의 성적 활동과 결혼, 절제된 삶의 합리적 관리법을 지배하는 규칙들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의 의학과 철학은 아프로디지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해로운, 혹은 비정상적인것들을 구분하는 데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의 활동의 표현으로 뭉뚱그려 전체적으로 고려하면서 개인으로 하여금 상황에 따라 그것의 유용한 강도와 올바른 분배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원칙들의 설정을 목표로 삼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리법의 명백히 제한적인 경향은 이와 같은 성적 활동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낸다. 이때 불안감이란, 남용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결과에 대한 불안, 또한 특히 항상 그것 하나만으로 모든 성적 활동을 특징짓는 남성적 사정의 격렬한도식에 따라 이해되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한 불안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행위와, 횟수를 줄인 성적 활동형태에 부여되는 중요성이 육체에 대한 성행위의 부정적 효과뿐만 아니라 성행위 자체에 본래 내재해 있는 바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서는 격렬함, 힘을 약화시키는 소모, 개인의 미래의 죽음과 연결된 생식이다. 성행위는 개인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도덕적 주체로서의 형성을 방해하고 위협하기 때문에 불안감을 준다. , 성행위는 만약 절제하지 않고 적절히 배분되지 않는다면, 의지를 넘어선 힘의 폭발, 에너지의 쇠진, 고귀한 자손을 남기지 못한 죽음, 이러한 결과들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된 관심사인 이 세 가지 주제가 고대문명에 특유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성행위를 정액의 방출이라는 남성적형태와 동일시하면서, 그것을 격렬함, 극도의 피로, 그리고 죽음과 연결 짓는 이러한 불안감이 표명되어 있는 것을 다른 곳에서도 대단히 자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육신에 대한 기독교 교리에서 우리들은 매우 유사한 불안함의 테마들을 쉽게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세세한 일정표 위에 행위들의 자세한 형태에 따라 그것들이 따라야 할 관리술의 규칙들을 정하게 될 것이다. 결국 결혼의 교리는 생식의 궁극 목적에다 신의 백성들의 생존과 심지어 번식까지도 보장해주는 이중적 역할을, 또 개인들이 이 활동에 의해 자신의 영혼을 영원한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자체로 부정적 가치들을 지니고 있는 활동을 정당화하는 행위와 순간, 그리고 의도에 관한 법률상 도덕상의 규약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규약은 성적 활동을 교회제도와 결혼제도의 이중적 영역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스인들의 경우 똑같은 불안감의 테마들(격렬함, 소모, 죽음)이 삶의 기술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성찰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기술은 사람이 행위들로부터 그 원리의 자연성을 박탈한다고 가정하지 않으며, 또한 그 행위들의 쾌락 효과를 증가시키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효과들을 자연이 요구하는 것과 가장 근사하게 분배하려고 한다. 그것이 완성시키려 하는 것은 총체로서 파악되는이 성적 활동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며, 그 활동을 지배하고 제한하며 적절히 분배하는 능력이다. 기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자기 행동의 주체로 세울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해 스스로를-질병에 대해 의사가, 암초 사이에 끼인 조종사가, 아니면 도시국가에 대해 정치가가 그런 것처럼-적절한 정도와 시기를 탁월하게 짐작해내는, 능란하고 신중한 자기 자신의 안내자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 성의 남용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혼란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나, 해야 할 일이나 해서는 안 될 것에 관한 명확하고 세세한 결정이 전혀 없는데, 어떤 이유로 인해 아프로디지아에 관한 양생술의 필요성이 그토록 집요하게 역설되는가 하는 점이다. 성행위는 어떤 쾌락보다 강렬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대부분의 신체 활동들보다 대가가 크고, 또한 삶과 죽음의 작용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의 윤리적 형성에서 특권적 영역을 이룬다. 좀 더 주체는 자신 속에서 느슨하게 풀어지는 힘을 통제하고, 자기 에너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그의 일시적 존재를 넘어서 지속될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자기 능력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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