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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가정관리술

 

발제_성의 역사 2_3장_160731.hwp


결혼의 지혜

그리스 사상에서 남편과 아내의 성 관계는 어떻게, 어떤 형태로, 어디서 출발하여 “문제시되었는가”?

데모스테네스가 저술했다 여겨지는 ≪네에라에 대한 반론≫에는 이런 격언이 나온다. “우리는 쾌락을 위해 창녀를, 매일 매일의 시중을 위해 첩을, 합법적 후손과 가정의 충실한 관리를 위해 아내를 얻는다.” 이 문구는 일부일처제 사회의 체계와 일견 유사해 보인다. ‘합법적 아내’라는 원칙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이 문구는 ‘쾌락의 영역’을 부부관계 밖에 위치시킨다. 쾌락의 문제는 혼외 관계에서만 논의된다. 즉 남편에게 합법적 자손을 낳아 주는 것을 제외하고, 부부생활에서 성 관계가 문제되는 경우를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고대 아테네에서 남편과 아내가 각각 갖는 지위와 의무에 비추어 보면 더더욱 그렇다. 성생활에 관한 한, 결혼제도에 의해 부부에게 허용되거나 금지되고 강제로 부과되는 것들은, 아주 단순하고 명백히 불평등하다. 도덕적 통제로 보완할 필요가 없어 보일 정도다. 아내들의 모든 성적 활동은 부부관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곧 남편이 유일한 파트너여야 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의 상속인이자 시민이 될 아이를 낳아주어야 했다. 그러므로 ‘간통’에 대한 처벌은, 사적 영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공적 영역에도 속했다.

반면에, 남편도 아내에 대해 일정한 의무를 가졌으나, 합법적 아내하고만 성 관계를 갖는 것이 그의 의무는 아니었다. 남성은 기혼자로서 또 다른 결혼을 하는 것만이 금지될 뿐,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로 인해 어떠한 성 관계도 금지되지는 않는다. 그는 다른 성 관계를 가질 수도, 창녀들과 교제할 수도, 소년의 연인이 될 수도 있다.

즉 간통은, 기혼여성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경우에만 범법행위가 된다. 이는 도덕적 차원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상호 충실성”이라는 범주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속하지만, 남편은 단지 그 자신에게만 속하기 때문이다. 성적 충실성은 결혼생활의 가장 고상한 표현도, 필수 보증도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고대 아테네에서 ‘성적 쾌락’의 문제와 ‘결혼생활’의 문제가 서로 겹쳐지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결혼은 성적 쾌락의 윤리와 무관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자기 아내와의 관계보다, ‘자기 자신의 육체와 가질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성행위를 성찰하려는 관심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로서 여성의 행동이 너무나 강압적으로 규제받고 있었다고, 따라서 고려해 볼 필요조차 없을 만큼 상황이 단순하다고 생각하거나, 남편으로서 남성의 행동이 너무나 자유로워서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성적 질투’에 대한 증거들, 남편의 바람에 대한 비난, 결혼한 남성의 성적 행동 변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 등등이 이 시기에도 있었다. 니코클레스는 자신이 정당하게 신하들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결혼한 이후로 아내하고만 성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다른 여자와 남편과의 관계, 다른 남자와 아내와의 관계를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예외적 현상일까, 아니면 새로운 윤리의 탄생 조짐일까? 어쨌든, 다음 의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왜 도덕적 성찰에서 결혼한 남자들의 성행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이러한 관심과 그것의 원칙, 그 형식들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두 가지 유형의 해석은 먼저 제외시키자.

첫째.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부부관계는 두 가정, 두 전략, 두 재산을 결합시키고 후손을 생산하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그 외에 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에라에 대한 반론≫에 나오는 세 역할의 정의는, 그 역할들의 ‘누적’에 집중해 해석될 수도 있다. 결혼은 현실적으로 유일한, 부부가 동거하고 합법적 후손을 생산할 수 있게 해 주는, 특별하고 특권적인 결합이다. 더욱이 아내의 아름다움에 부여된 가치, 아내와 가질 수 있는 성 관계의 중요성, 상호적 애정의 존재를 보여 주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결혼과 열정, 쾌락의 작용을 근본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고대의 결혼생활을 적절히 포착할 수 없다.

둘째. 때로 남편의 훌륭한 행동이 ‘성적 충실성’의 형태로 성찰의 대상이 되고 가치 부여를 받는 문헌에서, 사람들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도덕 규칙의 초안을 보려 든다. 사람들은 크세노폰 또는 이소크라테스의 구절을 ‘그 시대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예외적인’‘ 글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들 문헌이 미래의 도덕이나 새로운 감성을 예고하는 징표라 여기는 건 온당한가? 이러한 도덕적 성찰과 성적 엄격성의 요구를 동시대 사람들의 행동, 태도와 단절시키는 게 옳을까?

이 ‘예외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규범적 요소가 아니라 남성의 성적 행동방식이 어떻게 문제시되고 있는지 고찰해 볼 때, 우리는 남성의 성적 행동방식이 부부관계 그 자체,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상호적이고 동등한 직접적 의무에서 출발하여 문제시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남성이 자신의 가정을, 또는 자신의 파트너를 제한해야 하는 것은 분명 그가 결혼을 했을 경우다. 그러나 결혼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이며 권한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가정”에서 적용되는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 시민으로서 그의 평판에 영향을 미치는 의무를 가정에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결혼과 남편의 훌륭한 행동에 대한 성찰은 어김없이 오이코스(oikos, 가정과 가족)에 대한 성찰과 결합한다.


이즈코마쿠스의 가정

크세노폰의 ≪가정관리술≫에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것은 상속재산을 보존하고 증식시키는 ‘관리 기술’에 대한 성찰이다. 여기서 관리의 주체는 ‘지주들’이다. 집안의 재산을 유지하고 증식시키며, 그들의 성(姓)을 가진 사람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지주들의 활동은 오이코스에서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오이코스는 단순히 가정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정원과, 어디에 있는 것이건(도시 경계선 밖에 있는 것까지) 모든 재산을 의미한다. “한 남자의 가정은 그가 소유하게 된 모든 것”으로서, 전 활동 공간을 규정한다.

이러한 활동에는 삶의 양식과 윤리적 질서가 연결된다. 지주가 영지를 훌륭하게 돌본다면, 이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유익하다. 그의 생활이 일종의 지구력 훈련이고, 몸과 건강 및 기력에 좋은 신체 단련이 되기 때문이다. 또 신에게 풍성한 제품을 바칠 수 있게 됨으로써 신앙심을 드높이고, 관대한 태도로 폭넓게 사람들을 받아들여 대접하면서 시민들에 대한 자신의 호의를 표현할 수 있게 됨으로써 우정 어린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이 활동은 도시의 부에 기여한다.

지주의 생활이 갖는 이 모든 이점들은 곧 “가정관리” 기술의 주된 장점이다. 지주는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지휘의 실무경험을 습득하게 된다. 오이코스를 이끌어간다는 것은 곧 통솔하는 것이고, 가정의 통솔은 그가 도시에서 행사해야 할 권력의 방식과 유사하다.

크세노폰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문제 삼는 것은 “가정관리술”의 범주 내에서다. 아내는 주부인 한, 오이코스의 관리에서 핵심 인물이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교육하는 동시에 방향을 잡아 지도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처녀가 아주 어린 나이에(때로는 15세 정도에) 그녀보다 두 배 정도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사회에서 부부관계의 토대이자 배경이 되는 것은 오이코스이며, 따라서 부부관계는 교육과 처신의 지도라는 형식을 취한다. 바로 이것이 남편의 책임이다. “만약 어떤 양의 건강상태가 나쁘면 사람들은 대개 그 책임을 목동에게 돌리고, 만약 말이 사납다면 기술을 비난할 것이다. … 남편이 아내에게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올바른 일을 모른다면, 그 책임을 남편에게 돌리는 것이 정당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부부의 관계는 한 남자와 한 여자로 구성되어 각기 다른 영역에서 가정과 가족을 떠맡을 수 있는 단순한 커플의 관계로서 고찰되지 않는다. 크세노폰은 오이코스의 범위 내에서 남편이 어떻게 아내를 합리적 가사 관리의 협력자, 배우자, 동료, 수네르고스(sunergos, 함께 일하는 사람)로 만들 수 있는지 밝히려 하면서, 부부관계를 남편의 관리 책임 측면에서 다룬다. 

'이즈코마쿠스'의 경험담은 그 구체적 사례다. 15세의 어린 아내를 얻은 후, 그는 그녀를 아주 잘 교육시켜 매우 소중한 협력자로 만들었고, 그녀에게 집안일을 맡기게 되었다. 그 결과 그 자신은 밭이든 광장(agora)든 남성의 활동이 특권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에서 자기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1. 이즈코마쿠스는 결혼한 뒤 얼마 후, 그의 아내가 그와 “친숙해지고”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길들여졌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내가 당신과 결혼했고, 왜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을 나에게 주었겠소?”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자식들을 위해 결합 가능한 최상의 배우자에 대해 심사숙고하였기 때문이오.” 이처럼 부부관계는 그 출발에서부터 불평등에 의해(남성은 그 자신을 위해 결정하지만 딸을 위해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녀의 가족이다), 그리고 가정과 자식이라는 이중의 목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젊은 아내는 우선 훌륭한 주부가 되어야 한다.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로 그들의 재산을 유지하고 합법적이면서도 신뢰할 만한 방법으로 그것을 최대한 증식시킨다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활동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2. 부부 각자가 맡은 임무를 규정하기 위해 크세노폰은 “보호처(stegos)”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집 밖에서 씨를 뿌리고 경작하고 일하며 가축을 키우는 것은 남성이다. 그는 자신이 생산하고 벌어온 것, 또는 교환한 것을 집안으로 들여온다. 집안에서 여성은 그것을 받아서 보관하고 필요에 따라 할당한다. 두 역할은 정확하게 상호보완적이고, 어느 한쪽의 부재는 다른 쪽을 무용하게 만든다. 두 장소, 두 가지 활동의 형태, 시간 편성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편으로는 생산, 계절의 리듬, 수확의 기대, 지키고 예측해야 할 적절한 시기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장과 소비, 정돈, 필요할 때 분배하기, 배치가 있다. 이즈코마쿠스는 아내에게 가정을 질서와 기억의 장소로 만듦으로써 저장해 두었던 것을 다시 찾아낼 수 있도록 집안의 여러 공간에 적절히 배치하는 기술을 설명한다.또 이즈코마쿠스에 따르면, 뚜렷이 구별되는 임무를 그들이 함께 수행할 수 있도록 신들은 남녀양성에게 특별한 자질을 부여했다. 남성이 추위와 더위를 견디고 오랫동안 걸을 수 있는 반면, 여성은 그보다 덜 강인한 신체를 가졌다. 또 여성들은 타고난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비축품에 대해 염려하고 그것의 손실을 두려워하며 소비를 꺼리도록 만든다. 그러나 신은 또한 그들에게 공통의 자질을 갖추게 했다. 서로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에, 또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분배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똑같이 기억력과 세심한 주의력을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오이코스의 필요와 관련하여 규정되는 일정한 성질과 활동 형태, 일정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때 노모스(nomos), 곧 법은 정확하게 자연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으로, 각자에게 그의 역할과 위치를 분담함으로써 적합하고 훌륭한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정해 주는 통상적 관습이 된다.

3. ≪가정관리술≫에서 성 관계에 대한 내용은 매우 적다. 그러나 이 문헌의 몇몇 대목에는 성 행위나 필요한 절제, 부부 사이의 육체적 접촉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즈코마쿠스는 가정에서 각자의 역할을 자기 방식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자연이 남녀 양성에게 부여한 다른 자질들을 연결하면서 자제력(enkrateia)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자제력을 양성에 공통된 미덕으로 취급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절제가 그 자체로 어떻게 드러나고, 또 자기 아내의 절제를 어떻게 유도해 가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즈코마쿠스는 어느 날 아내가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실제보다 더 깨끗한 얼굴빛과 장밋빛 뺨, 날씬한 몸매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굽 높은 신발을 신고 분과 염료로 화장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그는 화장이란 속임수와도 같은 것이라고 비난한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이러한 속임수는 결혼의 기본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더욱 비난한다. 부부가 같이 관리하는 재산에 대해 서로를 속이면 안 되듯이, 각자의 육체에 대해 속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부 사이의 성 관계에서, 그리고 그들이 이루는 육체의 공동체에서 원칙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연적 매력이다.둘째, 이즈코마쿠스에 의하면 어떤 경우라도 여성의 실제 미는 그녀가 집안일을 훌륭하게 돌볼 때 그 일에 의해 충분히 보장된다. 실제로 그녀가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임무를 수행할 때, 그녀는 늘 서서 감시하고 관리하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진행 중인 작업을 점검하러 다닐 것이다. 똑바로 서 있는 자세와 걸음걸이는 그녀의 신체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자유로운 개인의 형상을 특징짓는 행동방식과 태도를 갖도록 해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육체의 아름다움이 형성되고 유지된다. 아울러 이로써 아내는 언제나 복종하고 속박 받는 노예처럼 의무로서 강요당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 한다는 이점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크세노폰은 강제로 얻은 쾌락은 기꺼이 주어진 쾌락보다 덜 유쾌하다는 원칙에 의거한다. 특권적 지위와 분리될 수 없는 육체적 아름다움의 형태에 의해, 그리고 매력적이고 싶어 하는 자유의지(charizesthai)에 의해 주부는 항상 한 가정 내의 다른 모든 여성들보다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가정(아내, 하인들, 상속재산)을 다스리는 ‘남성 본위’의 경영술로 채워져 이는 이 문헌에서, 여성의 성적 충실성 또는 남편이 그녀의 유일한 성적 파트너여야 한다는 사실은 암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일반적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결혼에 대한 위협은, 남성이 여기저기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이 아니라, 가정에서 차지해야 할 위치와 우선권 행사를 두고 아내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쟁에서 기인한다. “충실한(pistos)” 남편은 결혼을 다른 여자와 가지는 모든 성적 쾌락의 포기와 연결시키는 자가 아니라, 결혼에 의해 여성에게 인정된 특권들을 끝까지 지켜 주는 사람이다.

훌륭한 남편이 지켜 주는 아내의 이러한 우위는 단번에 획득되지 않으며, 남편이 도의적 약속을 한다 해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크세노폰의 ≪가정관리술≫과 이즈코마쿠스의 담론은, 만약 남편의 현명함이 아내의 특권을 인정해 줄 용의가 있을 때, 아내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역으로 가정에서 그녀의 역할과 일들을 최대한 잘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즈코마쿠스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가장 달콤한 쾌락을 맛볼 수 있을 때는 당신이 나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나를 당신의 노예로 만들 때, 그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당신이 집안에서 덜 존경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워함이 없이, 남편으로부터는 협력자로서, 자식들로부터는 주부로서 더욱더 높이 평가받으며 집안에서 한층 존경받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질 때일 거요.”

그러므로 결혼생활의 윤리에서 남편에게 권장되는 ‘충실성’은 결혼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성적 독점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이것은 아내의 지위, 특권, 다른 여자들에 대한 우위를 지켜 주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만약 이것을 두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행동의 일정한 상호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아내의 정숙한 성적 행동에 대해서라기보다 그녀가 집안에서 처신하고 가정을 이끌어 가는 방식에 남성의 충실성이 보답한다는 의미에서다. 남편에게 절제란 관리하는 기술, 자신을 다스리는 기술,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집안의 여주인인 이상 그가 지켜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할 아내를 다스리는 기술에 속하는 것이다.

  

절제의 세 가지 전략

기원전 4세기와 3세기 초의 다른 문헌에서도 결혼이 남성에게 최소한의 성적 절제를 요구한다는 주제가 나온다. 플라톤의 ≪법률≫, 이소크라테스가 니코클레스라는 기혼남성의 생활방식에 대해 상술한 것,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가정관리술≫이다. 차이는 있지만, 이 세 문헌은 크세노폰보다 더 명백하게 “이중의 성적 독점” 원칙이라 할 수 있는 것을 표명하는 듯 보인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남편도 아내 외의 다른 여자를 상대로 쾌락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무로 여기거나, 적어도 그것을 지지하는 듯하다.

다른 한편, 이 세 문헌은 부부생활의 형태에서 법적·도덕적 장치의 역할을 하게 될 원칙과 동일한 “상호작용적 성적 충실성”의 원칙을 소급 적용하려는 것이 잘못임을 알려 준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 문헌들이 남편에게 아내만을 성적 파트너로 삼는 것과 같은 절제의 의무를 제시하거나 권유하는 근거는,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개인적 약속에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제로 부과되거나, 남성이 그 자신의 권력에 대한 일종의 신중한 자세를 통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1. ≪법률≫에서, 바람직한 결혼이란 그 도시에 유용한 결혼이다. 아이들이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해야” 하는 것도 그 도시에 이익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젊은 부부들이 그들이 생산 임무를 잘 준비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감독하라거나, 생산하기에 적합한 나이일 때 어떤 다른 성 관계도 가지지 않고 합법적 아내하고만 관계하라는, 처벌을 동반한 이 명령은 자발적 억제의 노력에 근거를 둔 절제 양식과는 다르다. 한편, 플라톤이 이러한 법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토록 격렬한 욕망을 제어하려면 법률과 위협 이외에 다른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플라톤은 네 가지를 든다. 첫째, 여론. 비난받아 마땅한 성 행위에 관해, ‘대중의 일치된 한 목소리’가 있어야 하다. 둘째, 영광. 쾌락이라는 내부의 적에 대한 승리는 아름다운 것으로 상찬되어야 한다. 셋째, 명예. ‘순결을 유지하고 전혀 교미하지 않는 생활’을 하는 동물도 있는데, 인간이 이보다 못한 존재는 되지 말아야 한다. 넷째, 수치심. 수치심은 그 자체로 성 행위의 빈도를 줄인다. 플라톤의 ≪법률≫은 부부가 ‘성적 충실성’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문헌이 아니다. 균형은 그들 사이의 상호적이고 직접적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을 지배하는 요소, 즉 그들이 다 같이 복종하는 법률과 원칙에 근거하여 확립된 것이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내적 확신을 갖고 법률과 원칙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내적 확신은 그들이 서로에게 가져야 할 애정이 아니라 법에 대한 존중, 자기 자신과 자신의 평판, 명예에 대한 배려와 관련되어 있다. 

2. 이소크라테스의 문헌은 니코클레스가 시민들에게 행하는 간단한 연설 형식을 띤다. 이 연설에서 개진하는 절제와 결혼에 대한 고찰은 정치권력과 결부되어 있다. 니코클레스의 연설은 자신이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왕인 자신에게 취해야 처신을 설명해 주는 일종의 권고다. 이 연설의 첫 부분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데 할애되는데, 자신이 갖춘 자질을 늘어놓으면서 성적 쾌락의 억제라고 생각하는 절제(sophrosune)를 말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나라에서 그가 행사하는 통치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절제의 형식과 근거를 설명한다.그는 절제라는 키워드를 통해, 한 국가의 통치와 한 가정의 관리 사이의 연계성과 동질성을 지적한다. “훌륭한 군주는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만이 아니라 그가 사는 집과 영지를 일관된 정신으로 다스리고자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은 절제와 공정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절제와 권력 사이의 연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와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 사이의 본질적 관계로 생각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만큼이나 너 자신(arche sautou)에 대해서도 권한을 행사하라. 그리고 왕에게 가장 합당한 행동은 어떤 쾌락의 노예도 되지 않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보다 자시의 욕망을 더 잘 다스리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 엘리트들, 가장 덕망 높은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 짓고자 한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행동들을 다스릴 줄 앎에도 불구하고, 가장 뛰어난 사람들조차 소년과 여자가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욕망에 사로잡혀 버린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엄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으며, 그 점에서 대중뿐만 아니라 자신의 덕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까지도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군주의 절제력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일종의 계약을 수립하는 데에 이용된다. 피지배자들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지배자에게만 복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군구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와 그가 자신을 도덕적 주체로 내세우는 방식은 정치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로 여겨지는 ≪가정관리술≫은 사물보다는 인간을 다스리는 기술은 이야기한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의 결합(koinonia)은 동물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특징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 결합의 궁극 목적이 ‘생존’만이 아니라 ‘행복’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부부라는 관계는 그들의 삶 전체를 통해 상호 보조와 상호 구원을 가능케 한다. 후손은 단지 종족의 보존만을 확보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 ‘자연이 두 개의 성을 만든 것은’ 공동생활을 위해서다. 이러한 얘기 이후에 ≪가정관리술≫은 성 행위 문제에 접근한다. “아내에 대한 첫 번째 의무는 어떤 부정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도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게 되는데, 일반적 도덕이 도달해야 할 곳이 바로 이런 상태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말한 것처럼, 여자는 집안에서 애원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내몰린 사람과도 같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남편 쪽에서의 부정이란 비합법적 교제(thuraze sunousiai)이다.” 여기서 ‘부당함’이란 ‘가정 밖에서의 교제(sunousias)’다. 이 ‘교제’를 ‘관계’라는 폭넓은 의미로 이해한다면, 혼외 관계, 축첩, 비합법적 자식 등 아내의 특권적 위치를 위협하는 상항을 발생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이는 크세노폰이 암시한 것과 유사한 맥락을 갖는다. 

이처럼 남편의 절제는 부부 사이의 사적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도 아니고, 아내에게 요구할 수 있는 엄격한 충실성이 남편에게 동일하게 강요되는 것도 아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권력과 역할의 불평등한 분배라는 문맥 속에서다. 귀족적 권력을 잘 관리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남편이 부부 각자에게 의무로 부과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자발적 태도(이해관계 또는 현명함에 근거한)에 의해서이다.

***

우리는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 부부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활동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듯한 결혼윤리의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기독교의 보편적 형식, 강압적 가치, 최초로 법률화된 결혼생활의 형태, 상호적 충실성이라는 윤리의 초안으로 볼 수는 없다.

남편에게 요구된 절제와 아내에게 강요된 절제는 동일한 원리와 형식을 띠지 않는다. 후자의 절제는 법적 상황과, 아내를 남편의 권한하에 두는 법률상의 종속에서 비롯한 것이다. 반대로 남편의 절제는 그의 삶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고 싶다는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에 근거해 있다. 말하자면 양식(style)의 문제인 것이다. 남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지배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자제와 관련하여 그의 행동을 절제하도록 요청된다. 그로부터 이러한 엄격함이 세련된 품행으로 나타난다. 그런 엄격함의 본보기적 가치는 보편적 원리가 되지 않는다. 또 부부관계 이외의 모든 관계의 포기가 강요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 단념은 결정적 계약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공적 형태를 취한다.

남편에게 절제가 요구되는 것은, 그가 남자라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플라톤적 국가가 원하듯이, 그 국가가 결정한 형식에 따라 그 국가가 필요로 하는 시민을 생산하기 위해 결혼을 한다. 또 기혼자의 자격으로 질서 속에서 번창해 나가야 할 가정을 관리해야 한다. 가정의 잘 정돈된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훌륭한 관리의 보증이자 이미지가 된다.

요컨대 그리스 시대에 부부의 성행위는 그들의 개인적 관계를 토대로 하여 의문시되지 않았다.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성과 지위에 상응하는 형식과 이유로써 절제를 행해야 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각자 상대편이 육체의 죄를 범하지 않도록 유도하면서 그의 정절을 책임져야 하는 기독교 사목교서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여자의 미덕은 순종적 행동 방식의 보증이자 그것의 상관물이었고, 남자의 엄격함은 스스로를 제한하는 일종의 지배 윤리에 속하는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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