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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2 – 쾌락의 활용

화니짱

성의역사 2권 4,5장 리딩 가이드.hwp

4장 연애술

그리스인들은 동성에 대한 사랑과 이성에 대한 사랑을 배타적인 두 개의 선택이나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행동유형으로서 대립시키지 않았다. (215)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절제하는 남성과 쾌락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남성의 대립이 있었다. 여자와 소년에 대한 취향, 두 성향은 둘 다 있을 법한 것으로.(216) 그러나 이는 욕망의 이중적이고 양면적이며 양성적인 어떤 구조에 의거해 있지 않았다. 도식적으로 오늘날에는 동성애가 특별한 구조의 욕망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욕망이 보다 아름답고 명예로운 대상을 향하는 매우 고귀한 것이라는 조건하에 동일한 욕망이 그 대상이 될 만한 모든 것-소년이든 소녀이든-에 관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욕망이 두 남성 간의 관계 속에 자리잡았을 때는 특별한 행위 방식을 유발한다고 생각했다. (221) 여성을 사랑할 때 요구되는 것과 다른 도덕적 형식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22)

성인 남자와 소년 사이의 사랑은 공동의 공간-김나지움을 포함한 집회장과 거리의 공간에서 개방적으로 이뤄졌다.(227) 유혹자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자신의 위신/재능/선물을 유리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하고, 결정권은 소년에게 있었다.(228) 소년과의 관계에서 쾌락의 윤리는 연령의 차이를 매개로 상대방의 자유와 그의 거부능력, 또한 그에게 필요한 만족을 고려한 섬세한 전략을 작동시켜야 했다.(229) 한편 소년이 갖추어야 할 자질로 요구되는 절제는 육체적 접촉에서의 판별력 내포. 양도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으며 가장 강한 자로 남아 있는 것, 또 그의 저항력, 단호함, 절제에 의해 추종자들과 애인들을 능가하는 것, 이것이 청년이 사랑의 영역에서 그의 가치를 입증하는 방법이다. (242)

성관계와 사회적 관계 사이의 동형성의 원칙. 성적 관계가-언제나 능동성과 수동성이라는 양극성과 삽입의 행위-모델에서부터 출발하여 생각되는-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복종시키는 자와 복종하는 자 사이의 관계와 동일한 유형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쾌락의 실천 행위들은 경쟁적이고 위계화된 사회 계층들의 영역과 동일한 범주를 통해 성찰된다. 능동성-우월함, 수동성-열등함. 노예과 여성의 수동성은 본성과 조건의 열등함. (248) 한편 자유인 남성에게 열등함이나 예속의 수락은 수치. 자신을 다른 사람의 쾌락의 대상으로서 제공한다면 그의 수치심은 커진다. 이럴 때 자유인 신분의 소년의 지위는 난해하다. (249)

젊은이는 연인에 대해 경탄, 감사, 애정의 감정들을 느껴 연인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만 자신의 몸을 내맡겨야 한다. 사랑받는 자와 사랑하는 자 사이에 단순한 ‘항복’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음을 보여준다. (257) 그는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에 만족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년과의 성관계는 두 파트너 각자에게 특별한 행동을 요구한다. 성인 남자와 소년의 관계에서 성행위는 가능한 한 성행위를 연기해보려는 가부와 몸 빼기, 달아나기의 게임 속에서, 또한 성행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할지를 결정하는 교환 과정을 통해 행해져야 한다.

어떻게 이 관계를 더 넓은 전체 속에 통합시키고 그것을 다른 유형의 관계로, 다시 말해 육체적 관계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두 파트너가 동일한 감정과 이득을 나눌 수 있는 안정된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겠는가? (258) 소년애는 이 사랑을 결정적이고 사회적으로 소중한 관계, 즉 ‘필리아’의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을 때에만 도덕적으로 명예로울 수 있다. 철학적 연애술이 그 출발점으로 삼게 되는 것은 ‘어떻게 쾌락의 대상을 훌륭한 자기 쾌락의 주체로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제기와 연결되어 있다. (259)

 

5장 진정한 사랑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찾는다는 신화. 이에 대해 플라톤의 연애술은 다르다. 사랑 그 자체는 무엇인가? 문제제기한다. (266) 이제 연애론은 더 이상 예찬이 아니다. (270) 소년의 명예의 문제로부터 진리에 대한 사랑의 문제로 이행한다. 에로스가 진실과 관련된다면, 사랑을 받는 자도 동일한 에로스의 힘에 의해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만 두 연인은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274)

따라서 사랑에서 가장 현명한 자는 진리의 지배자일 것이며, 그의 역할은 사랑 받는 자에게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그 자신보다 더 강하게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된다. 사랑하는 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자신에 대해 행사하는 완벽한 지배력에 의해 게임의 방향을 역전시키고 역할을 뒤바꿔 놓으며 ‘아프로디지아’의 포기라는 원칙을 제시하고, 진리를 갈망하는 모든 젊은이에게서 사랑의 대상이 되는 스승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제 소크라테스를 사랑하는 것은 소년들이다.(275) 소크라테스는 소년들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한에서만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그들에 대해 사랑도 욕망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실한 사랑의 힘에 의해 지탱되어 사랑해야 할 진실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에 관하여 정통한 이는 소크라테스다. 그 이후로 스승의 지혜는(더 이상 소년의 명예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대상과 굴복하지 못하게 하는 원칙을 동시에 나타낸다.

플라톤의 연애술은 세 가지 측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276) 1. 사랑받는 개인의 문제를 사랑 그 자체의 본질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쾌락의 대상의 난점을 해결하였다. 사랑의 관계를 진리와의 관계로 구조화함으로써, 이 관계를 이분하여 그것을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에게 똑같이 위치시켰다. 이를 통해 플라톤의 연애술이 사랑의 관계에 진실의 문제를 근본적 문제로서 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자의 임무는 그를 사로잡고 있는 사랑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즉,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은 그 자신의 다른 반쪽이 아니다. (277) 그의 영혼이 다가가는 것은 진실이다. 그 결과 그가 해야 할 윤리적 작업은 결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자신의 사랑의 숨은 지주인 진리와의 관계를 발견하고 유지하는 일이 될 것이다. (278)

이로부터 우리는 그리스 문화에서 소년애와 관련하여 성 윤리의 몇 가지 요소들이 형성되는 것일 볼 수 있다. 이 성윤리는 바로 이 원칙의 이름으로 소년애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연애 관계에서의 균형과 상호성의 요구, 자기 자신과의 투쟁의 필요성, 진실한 존재 그 자체에만 관여하는 사랑의 점진적 정화, 그리고 욕망의 주체로서 그 자신에 대한 인간의 질문이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금욕주의가 소년애를 평가절하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반대로 소년애를 양식화하는 방식이자, 그것에 형식과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가치화하는 방식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욕망의 문제에 주어진 특권과 철저한 금욕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바로 이것이 과거에 쾌락의 활용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덕에서 쉽게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은 요소들을 도입한 바 있다.

 

결론

결국, 인정된 실천들(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의 영역에서 그리고 그 실천들을 완성하려는 성찰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인들은 도덕적 문제로서 성행위에 대해 의문을 가졌으며, 거기서 요구되는 절제의 형식을 규정하고자 했다.(281) 언뜻 보기에 이러한 여러 형식의 성찰들이 그 후의 서양 기독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한 형식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있다. 기원전 4세기 이후로 성적 활동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하고 희생이 뒤따르며, 생명체의 손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필요하지 않는 한 세심한 관리로 성행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이 매우 명확하게 표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부부관계 밖의’ 쾌락을 부부 쌍방에게 요구하는 부부관계의 모델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보편적 절제의 원칙, 성적 쾌락은 악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일부일처제의 엄격한 충실성의 도식, 철저한 순결의 이상 등의 모델에 따라 살았던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 형성된 철학적/도덕적/의학적 사고는 이후의 도덕-기독교 사회의 도덕-과 유사하다. 규율은 형식상 비슷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금지사항의 빈약함과 단조로움을 증명해 줄뿐이다. 허용되거나 금지된 것, 권장되거나 만류된 사항이 같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성적 활동이 도덕적 문제로 구성되고 인정되고 조직화된 방식이 동일하지는 않다.

우리는 성행위가 그리스 사상에서 ‘아프로디지아’, 즉 통제하기 힘든 힘들의 투쟁의 장에 속하는 쾌락행위들의 형태로 도덕적 실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행위는 합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양식을 갖기 위해 절도와 시기, 횟수와 호기의 전략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282) 이 전략은 그것의 완성 지점과 최종 목표로서 철저한 자기통제를 지향한다. 이러한 자기통제에서 주체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 있어서까지 그 자신보다 더 강하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주체의 형성에 내포된 엄격성의 요구는 각자 그리고 모두가 따라야 할 보편적 법칙의 형태로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자신의 삶에 가장 아름답고 완성된 형식을 부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행동을 양식화하는 원리로서 제시된다. 우리의 성도덕에 형식을 부여했던 몇 가지 주제들(위험한 악의 영역에 속하는 쾌락, 일부일처제의 충실성의 의무, 동성의 파트너를 배제하는 것)의 기원을 결정하려 할 때, 이 주제들을 단지 유대-기독교의 도덕이라 불리는 그런 허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특히 거기서 금지의 초시간적 기능 또는 법률의 영원한 형태를 찾아서도 안 된다. 그것은 개인을 도덕적 행동의 주체로서 성립하게 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양식의 완성으로서 이해된 ‘윤리’의 역사이다. (283)

그리스 사상에서 전개된 세 가지 자기 기술은 그 각각이 성적 행동의 변형을 제안했다. 양생술의 측면에서 우리는 ‘아프로디지아’의 적절하고 절도 있는 활용에 의해 정의되는 절제의 형식을 볼 수 있다. (283) 가정관리술의 측면에서는 부부의 상호 충실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권한 하에 있는 합법적 아내에 대해서 남편이 가진 어떤 특권에 의해 규정되는 절제의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남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에서도 자기 통제를 실천해야 하는 것은 가정 조직에 고유한 계급 구조의 영속성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 연애술이 요구하는 절제는 또 다른 유형의 것이다. 이것은 무조건적 금욕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금욕을 지향하며, 이와 더불어 거기에는 모든 육체적 관계의 포기라는 이상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소년애에 대한 성찰에서 플라톤의 연애술은 사랑, 쾌락의 포기, 그리고 진리에 대한 접근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284)

부분적으로 현대 윤리의 기원이 된 성 윤리는 매우 냉혹한, 불평등과 억압(특히 여자와 노예에 대해) 체계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고 속에서, 자유로운 남성의 자유의 행사와 그의 권력의 형식들, 그리고 그의 진리에 대한 접근 사이의 관계로서 문제시되었다. (285) 연대순에 따라 이러한 윤리와 그 변화를 보면, 우리는 무엇보다 강조점이 이동한 것에 주목할 수 있다. 먼저 문제의 초점이 조금씩 여성에게로 집중된다. 이는 처녀성의 주제, 부부 사이의 상호 균등한 관계라는 형식을 취한다. 더욱이 우리는 17세기 이후로 어린아이의 성에 대해 표명된 관심 속에서 문제제기의 핵심이 또 다시 이동(여성에서 육체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동과 동시에, 쾌락을 활용하는 여러 ‘기술들’ 속에 분산되어 있던 요소들 사이에 어떤 통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 결과 성적 행동에 대한 문제제기의 중심에는 그것의 활용의 미학과 더불어 쾌락이 놓이지 않고, 욕망과 그것을 정화시키는 해석학이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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