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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3_ 제1장 자신의 쾌락을 꿈꾸기_윤명_샘.hwp


1. 아르테미도로스의 방법

아르테미도로스는 현실로 확인된 꿈의 전조들 중에서 널리 알려진 예들을 편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했다. 그는 해몽에 대한 방법서 서술에 착수했으며, 그것은 유용한 개론서인 동시에 해석방법의 타당성에 관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론서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꿈의 분석이 삶의 기술에 속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꿈의 이미지들 중 적어도 어떤 것들은 현실의 징조나 미래의 전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해독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작업 없이는 합리적 삶 또한 거의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들은 꿈을 통해 충고나 조언을 하고 때로는 엄명까지도 내리기 때문이다. 아쉴 타티우스는 <레우시페와 클리토폰의 모험>에서 신은 종종 꿈을 통해 인간들에게 미래를 계시하기를 즐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불행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운명의 신보다는 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고통을 보다 쉽게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밀어닥친 일은 정신을 격렬한 충격으로 뒤흔들어 그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일을 겪기 전에 그 일을 예상하는 것은 그것에 점차적으로 익숙하게 함으로써 슬픔을 감소시킨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의 책을 삶에 관한 개설서로서, 생활의 여러 상황 속에서 유용한 도구로서 제시하고자 했기에 그러한 것들의 분석에도 삶에서와 같은 질서, 같은 순서를 부과하고자 했다. 아르테미도로스에게서는 종교적 경이를 위한 자리가 거의 없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저서는 문화적 요법의 관행들에는 의존하지 않는다. 아르테미도로스가 대상으로 삼는 꿈을 꾸는 사람의 전형은 일개 평범한 개인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남자, 그 중에서도 가정과 재산, 직업을 가진 남자, 종종 하인과 노예들을 거느리기도 한다.

그는 결과에 대한 적나라한 설명보다는 신중한 조사방식과 방법적 논쟁을 통해 어떠한 형태의 점술도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 회의주의자들을 설득시키고 싶어 한다. 그는 이전의 문헌들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읽는 데 신경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흔히 사람들이 하듯 이전의 문헌들을 다시 베끼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이야기된 것속에서 그의 주의를 끄는 것은 기성의 권위라기보다는 풍부하고도 다양한 경험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경험을 몇몇 위대한 작가에게서가 아니라 그것이 형성되는 장소, 바로 그곳에서 찾고자 했다.

아르테미도로스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그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이를 자신에게는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의 척도이자 증인경험의 심판에 맡기고 싶어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이 의거하는 정보를 다른 출처에 접근시켜 보거나 그 자신의 고유한 경험과 대조해 보고, 추론과 증명 작업을 통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어떤 것도 경솔히이야기되거나 단순한 억측에 의해 이야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저술은 전통적이고 광범위한 문헌조사작업을 토대로 꼼꼼한 성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장점을 지닌 책이다. 이와 같은 문헌에서는 준엄한 도덕의 정식화나 성적 품행에 관한 새로운 제약의 출현을 살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헌은 그보다는 차라리 당시 통용되던 평가방식이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태도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문헌에서 철학적 성찰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책 속에서 당대의 문제들과 논쟁들에 대한 상당히 명확한 언급들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언급들은 가치판단이나 도덕적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해석절차와 분석방법에 관한 것이다. 도덕적 원칙은 그 자체로서 제기되지 않고 오로지 분석과정을 거쳐서만, 다시 말해서 해석을 재해석함으로써만 드러난다. 바로 이점에서, 성적인 꿈의 분석 밑에 감춰진 도덕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먼저 아르테미도로스가 적용한 분석방법에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르테디도로스는 꿈을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에누프니아(enupnia)”로서의 꿈은 주체의 현재 감성 상태를 나타내는데, 육체적 측면에서 결핍되거나 과도한 것을, 그리고 정신적 측면에서 두려워하거나 욕망하는 것을 드러낸다. “오네이로이스(oneirois)”로서의 꿈은 가까운 미래에 사건으로서 나타날 그 어떤 것이며, 또한 마음을 변화시키고, 형성하며, 또 규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위탁한 전언을 지니고 다녔던 이타크의 거지, 이로스의 이름을 알아보게 된다. 따라서 용어 자체로만 보면, “에누프니온(enupnion)”오네이로스(oneiros)”는 서로 대립된다. , 전자는 개인에 관해 말하는 반면, 후자는 세상사에 관해 말한다. 또 전자는 육체와 영혼의 상태로부터 파생된 것인 반면, 후자는 시간의 사슬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미리 말해 주는 것이다. 전자가 욕망과 혐오감의 영역에서 너무 과도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결핍된 것의 작용을 드러낸다면, 후자는 영혼에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영혼을 형성한다. 한편으로 욕망에 대한 꿈이 현재 상태에서의 마음의 현실을 드러낸다면, 다른 한편으로 존재에 대한 꿈은 세계의 질서 속에서 사건의 미래를 말해 준다.

꿈의 이러한 두 가지 범주마다 또 다른 형태의 구분, 이른바 제 2의 분류가 시도된다. , 해독이나 해석을 필요로 함이 없이 투명한 방식으로 자신을 명확히 드러내는 정리적인 꿈, 비유적 방식으로 처음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말하는 이미지들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우의적 꿈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구분 사이의 작용은 해석자에게 실제적 문제를 제기한다. 꿈에 나타난 하나의 장면을 가정해 보자. 그것이 상태의 꿈과 관계되는지 사건의 꿈과 관계되는지 어떻게 구별하는가? 이미지를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을 직접적으로 예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그것과 다른 어떤 것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지 어떻게 결정하는가? 이를 위해 그는 꿈을 꾸는 주체에 대해 자문해 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상태의 꿈이 덕성스런영혼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사실 그러한 사람들은 비이성적 충동, 따라서 욕망이나 두려움 같은 정념들 또한 다스릴 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에 대해서도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균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동요가 없으며, 고로 언제가 감성적 상태의 표출로 이해되어야 할 에누프니온(enupnion)”으로서의 꿈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해석할 줄 아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징후를 통해서만 그러나는데,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보다 교활한 방법으로 그들을 골탕 먹이기때문이다.

하건에 대한 꿈으로 말하자면, 덕성스런 영혼은 대개 정리적 꿈들이 제시하는 명백한 비전만을 알아본다. 아르테미도로스는 이러한 특권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순수한 영혼들에게는 신이 직접 이야기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상태에 대한 꿈

사건들에 대한 꿈

직접적으로

징조에 의해

정리적

우의적

덕성스런 영혼의 경우

 

결코 일어나지 않음

대개의 경우

 

평범한 영혼의 경우

전문가

 

대개의 경우

 

대개의 경우

비전문가

대개의 경우

 

 

해몽 작업의 영역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 표의 마지막 칸, 즉 평범한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우의적 꿈이다. 해거의 여지가 생기는 것은 바로 이 경우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꿈에서는 어떤 광경이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말하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석은 직접적이지 않은 사건에 대비할 수 있게 해준다.

 

꿈의 알레고리에 대한 해독은 2가지 유추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꿈의 이미지와 그것이 예고하는 미래의 요소들 사이의 성질상의 유추이다.

) -미래: 몸이 불편함-건강이나 재산이 나쁜 상태가 됨(질적 동일성), 사자에 대한 꿈-육상경기에서 우승(상징적 유사성), 병자가 처녀와 결혼하는 꿈-죽음(관습의 유사성)

또한 가치상의 유추가 있는데, “자연이나 법률, 관습이나 기술, 또는 이름이나 시기에 부합되는 꿈의 모든 장면은 길조이며, 그와 반대되는 장면은 상서롭지 못하거나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하나의 일반 원칙이다.” 아르테미도로스는 분명, 이 원칙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며 예외를 포함한 것이라고 즉각 덧붙일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어떤 불확실성이 아니라, 꿈의 이미지가 지닌 모든 양상, 예컨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의 상황과 같은 모든 양상을 고려해야 하는 어떤 복잡항 영역인 것이다.

아르테미도로스가 행한 성적인 꿈들의 분석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가 행한 다소 긴 이러한 우회는, 해석의 메커니즘을 포착하고 또 성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그러한 행위를 재현하는 꿈의 점술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규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사실 이 문헌을 성행위가 지닌 가치나 정당성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로 이용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 될 것이다. 아르테미도로스는 그러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도덕적인지 비도덕적인지 말하지 않고 다만 그런 행우를 저지르는 꿈을 꾸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이로운 것인지 위험한 것인지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원칙도 행위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의 창조자, 아니 꿈의 장면에서 꿈의 창조자를 대표하고 있고 바로 그 점에서 그에게 일어나게 될 행운이나 재난을 점치게 하는 만큼 차라리 성행위자라고 말해야 할 사람에 대한 것이다.

 

2. 분석

법률에 부합되는행위

아르테미도로스는 꿈에 나타나는 여자들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떠맡게 된 활동에 대한 이미지라는 점을 전제한다. “따라서 그 여자가 누구이든, 그 여자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그 여자의 활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을 그 여자가 처해 있는 바로 그러한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는 아르테미도로스에게서 꿈의 예측적 의미, 고로 일정한 방식으로 꿈에 나타난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의 형태가 아니라 남자가 됐건 여자가 됐건 파트너의 조건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때 조건이란 말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사회적 신분이다.(미혼-기혼, 자유인-노예, 젊음-늙음, 부자-빈자, 상대방의 직업, 상대방을 만난 장소 등)

이 책이 처음 언급하는 세 사람은 아내, 애인, 창녀로 전통적인 여자의 세 가지 범주를 재현하고 있다. 자기 아내나 애인과 관계를 맺는 꿈은 길한 징조인데 자연스러운 유추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창녀의 경우는 다르다. 사람들이 쾌락을 얻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은 그 자체로는 긍정적 가치를 지니지만, 이런 부류의 여자들을 자주 찾는 것은 다소 부끄러운일이며 수치이자 또한 낭비이기 때문에 그러한 여자들이 등장하는 꿈이 예고하는 사건은 분명 어느 정도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특히 부정적 가치를 가져오는 것은 매음장소이다. 매음굴은 모든 사람을 위한 장소”, “공공장소로 불리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자손의 생산이라는 소득도 없이 정액만 헛되이 낭비, 소모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꿈속에서 창녀집에 가는 것은 죽음을 예고할 수 있다.

그 외 우연히 만나게 된 여자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는데, 이때는 꿈에 나타난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가치를 지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부자이고 잘 치장한, 남자의 뜻을 잘 따르는 여자가 나오면 길한 것을 예고하고, 늙고 못생기고 가난하다면, 그리고 자진해서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불긴한 꿈이다.

한 집안의 동거인들은 하인과 노예라는, 성적 파트너의 또 다른 범주를 제공한다. 이들은 재산을 암시하는데, 꿈속에서 이러한 유형의 인물을 상대로 느끼는 쾌락은 당연히 자신의 소유물로부터 즐거움을 끌어낼 것이며, 필시 재산이 점점 더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상대가 소녀이든, 소년이든 간에 파트너의 성은 물론 거의 중요치 않으며, 요점은 그가 노예라는 사실이다. 그 반면에 하나의 중요한 구별이 있는데, 그것은 성행위 시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의 체위에 관련된 것으로, 그가 능동적인가 아니면 수동적인가 하는 점이다. 아르테미도로스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에 위배되는 과실이 아니라 사회적 위계질서의 훼손, 정당한 역학관계에 대한 위협임을 분명히 한다.

곧 이어서 관계군이 등장한다. 길한 것은 평소 알고 있던 미혼의 부유한 여자와 관계를 맺는 꿈인데, 그 이유는 모을 허락하는 여자는 육체뿐만 아니라 몸과 관련된것들, 즉 몸과 함께 자신이 소지한 모든 물적 재산들을 주기 때문이다. 꿈꾸는 사람이 여자이고, 남자와 관계를 맺는 꿈을 꾸면 그 꿈은 모든 경우를 막론하고 길한데, 여자의 본성적·사회적 역할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남자가 자신의 육체를 소유하는 꿈을 꾸는 사람이 남자일 경우, 파트너 양자 간이 상대적 지위에 따라 다른데, 나이가 많고 부자일수록 좋고(선물에 대한 약속), 젊고 가난할수록 나쁜(지출) 꿈이다.

 

법률에 위배되는행위

근본적으로 근친상간으로 이루어지며, 그중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라는 매우 한정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 또는 딸의 관계는 그러한 행위로부터 어떠한 이득도 얻을 수 없는 만큼 그것은 금전상의 커다란 손실을 예고하는 쓸데없는 낭비이다.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은 종종 길조의 조짐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어머니를 무수한 사회적 관계와 활동형태에 대한 일종의 모델이자 원형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에 종종 길조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곧 직업이다. 따라서 어머니와 결합하는 것은 직업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곧 조국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와 관계를 맺는 꿈을 꾸는 사람은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처지라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정치샐활에서 성공을 거둘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어머니는 또한 그가 태어난 풍요한 대지이다. 따라서 만약 꿈을 꾼 사람이 경작자라면 그것은 풍부한 수확을 얻게 된다는 꿈이다. 그러나 병자들에게는 위험한 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지인 어머니에게 몸을 파묻는다는 것은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위배되는행위

아르테미도로스는 자연이 각 종마다 그 종에 걸맞은 성행위 형태, 즉 동물들이 버릴 수 없는 자연스럽고도 유일한 체위를 결정해 놓았따는 사실을 전제한다. 마찬가지로 인간들도 자연으로부터 아주 뚜렷한 결합방식을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남자가 여자 위에 누운 자세이다. 그러한 형태하에서 성교는 하나의 완전한 소유행위로서, 일단 상대방 여자가 순응하고” “동의하기만 한다면, 남자는 그 여자 몸 전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 외 다른 모든 체위는 성적 도취에 의해 생기는 비정상적이고 무절제한, 본능 과다의 부산물이다. 그러한 자연적이지 못한 관계 속에는 항상 불완전한 사회관계의 전조가 들어 있거나, 아니면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나쁜 상황에 대한 예고가 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랄 에로티시즘에 대한 그의 비난은 격렬하다. 그것은 흉악한 직이자 도덕적 죄로서, 꿈에서 그러한 행위가 나타나는 것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의 직업적 활동에 관계될 경우(연설가, 플롯 연주자, 수사학자)에만 긍정적 가치를 지니며, 정액을 헛되이 배설하는 이러한 행위가 꿈에 나타나는 것은 쓸데없는 지출을 예꼬한다는 것이다. 또 그것은 자연에 부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입맞춤이나 여러 사람과 다같이 식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관습이기 때문에 결별, 적대관계, 때로는 죽음의 전조가 되기도 한다.

또 다른 자연을 벗어난 성관계 방식에는 여자들끼리의 관계가 있다. 여자는 모종의 책략을 사용하여 남자가 할 역할을 찬탈하고 남자의 위치를 부당하게 차지하여 다른 여자를 소유한다는 것이다. 남자들 사이에서 더할 나위 없이 남성다운 행위인 삽입은 그 자체로서 자연의 위반은 아니다. 반면에 여자들 사이에서의 그 같은 행위는 둘 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술책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 만큼, 인간과 신, 인간과 동물 간의 성 관계만큼이나 자연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위에 대한 꿈을 꾼다는 것은 쓸데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남편과 헤어지거나 과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자들의 비밀이 전달되거나 알려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3. 꿈과 행위

아르테미도로스는 꿈을 거의 기의가 아닌 기표’, 의미가 아닌 이미지, 재현된 사건이 아닌 재현의 측면에서만 나타나게 한다. 그의 해석작업은 성행위와 꿈속에서 주체 스스로가 드러내는 바대로의 주체의 역할에서 출발하여 그 주체가 일단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에게 일어날 일을 해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것이다. 성적인 꿈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처하게 될 운명을 예고한다. 꿈속 성행위 장면에 등장한 행위자는 가족, 직업, 사업과 도시국가의 무대 위에서 자신이 행하게 될 역할을 앞질러 행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언어의 특성에 기인한 이유로, 그리스어에는 성적 의미와 경제적 의미가 매우 모호한 단어들이 있다. (육체(soma)-부와 재산, 물질과 재산(ousia)-정자와 정액, 금전적 손실(blabe)-폭력의 희생물, 성행위에서 수동적 대상물 등)

두 번째 이유는 저술이 갖는 특수한 형식과 목적에 기인한다. 그의 책은 본질적으로 남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남자들에게 바쳐진 남성용 책이다. 꿈을 해석하는 일은 남성들이 생활을 관리하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에 대비하기 위해 유용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가 꿈의 이미지들을 통해 밝혀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가족적, 경제적, 사회적 삶의 짜임이다.

 

아르테미도로스가 다루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의 꿈 세계는 육체적 특징이 거의 없고, 꿈꾸는 사람과 별다른 애정 또는 치정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개인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대략 사회적 윤곽으로서만 나타난다. 젊은이, 늙은이, 부자 또는 가난뱅이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그러한 인물들과 꿈을 꾸고 있는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에 관한 한, 아르테미도로스의 담백함은 주목할 만하다. 애무도, 복잡한 결합도, 환상도 없다. 단지 삽입이라는 본질적 형태를 중심으로 매우 단순한 몇몇 변형이 있을 뿐이다. 성행위의 본질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삽입이다. 삽입은 검토될 만한 유일한 것이며, 꿈의 분석에서 의미를 만드는 유일한 것이다.

아르테미도로스는 성행위를 우세와 열세의 게임으로 본다. 그는 성행위를 또한 손실과 이득의 경제적게임으로 본다. 이득이라함은 성행위로부터 얻는 쾌락 또는 기분 좋은 감각을 말한다. 손실이라 함은 행위에 필요한 정력, 생명의 귀중한 본질인 정액의 소모,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피로를 말한다.

 

아르테미도로스가 길하고좋은 징조라고 보는 꿈은 꿈을 꾸는 사람이 파트너와 성생활이 아닌 사회생활 속에서 실제 맺고 있거나 혹은 맺어야만 하는 관계에 따라 성행위를 하는 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꿈에 나타난 성 관계의 질을 규정하는 것은 깨어있을 때의사회적 관계와의 합치여부이다.

꿈에 나타난 성행위가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동형성이라는 일반원칙에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위치의 유사성의 원칙과 경제적 합당성의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꿈을 꾸는 주체가 꿈속 파트너와의 성 관계에서 그 파트너와 실제 현실 속에서 맺고 있는 위치와 부합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 성행위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하는 꿈이 긍정적 가치를 얻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동질성의 원칙 덕분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꿈에서 주체가 그를 낳고 길러준, 그리하여 이번에는 보답으로 대지, 조국, 도시처럼 그가 가꾸고, 존경하고, 봉사하고, 부양하고, 부유하게 해 주어야 할 존재인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능동적 위치에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또한 경제적 합당성의 원칙에도 따라야 하는데, 그러한 행위에 내포된 지출과 이득이 적절하게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원칙이 노예와 성 관계를 맺는 꿈을 좋은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을 자기 재산을 이용하는 것이며, 노동 이익을 위해 구입한 것이 쾌락이라는 이득까지 덤으로 주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꿈은, 삽입과 수동성, 쾌락과 지출이라는 대단찮은 극작법 속에서 운명이 마련해 준 바대로의 주체와 존재양상을 말해 준다. 남근-아낙카이온(anagkaion)-도시국가 및 세계 속에 개인의 지위를 고정시키는 모든 관계와 활동에 대한 기표이다.

남근(자궁)은 생식원칙을 견지하기에 부모에 비교되며, 사랑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아내와 정부에, 가존 전체의 기원이 남근(자궁)에 달려 있기 때문에 형제와 모든 부계(모계) 혈족에, 육체적 힘과 남성다운(여성다운) 육체의 원인이기 때문에 육체점 힘과 남성다운(여성다운) 육체에, 담론보다도 더 큰 생식력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담론과 교육에 비교된다. [] 게다가 남근(자궁)은 때론 긴장되고 때로 이완되기 때문에, 그리고 제공하거나 퍼뜨릴 수 있기 때문에 벌이와 이익에, [] 비교된다. 또한 속박하는 것으로 불리고 구속의 상징이기 때문에 가난, 노예상태, 속박에 비교된다. 그 외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경배또는 존경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높은 신분이 불러일으키는 존경심에 비교된다.

 

보다시피 남근(자궁)은 이 모든 지배 게임의 갈림길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그것은 자기 절제의 게임이다. 왜냐하면 남근(자궁)의 요구는 만약 그것이 우리를 구속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우리를 노예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그것은 성행위 파트너에 대한 우월성의 게임인데, 삽입(흡입)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남근(자궁)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출생의 특전과 지위의 게임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남근(자궁)은 혈족 관계와 사회활동의 모든 영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르테모도로스의 장들이 환기시키는 정경은 고대에서는 친숙한 정경으로, 남성적 인물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와 성 관계에서 남성 역할에 부여된 중요성이 매우 강하게 부각되는 세계이며, 결혼이 성적 쾌락을 위한 최상의 환경으로서 간주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부여받은 세계이다.

물론 규약의 여러 요소가 존재함을 주목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수가 극히 적을 뿐 아니라 매우 불분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주된 문제는 하나의 자연적 구조나 실제적 규제에 대한 행위의 적합성 여부보다는 주체가 자신의 가족적, 사회적, 경제적 생활의 다른 측면들과 성행위 사이에 설정한 관계, 즉 주체의 행위약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기울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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