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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감정 덴노제론

[E북 기준]p9 : ‘감정화는 사람들의 온갖 자기 표출이 감정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상호 욕망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성이나 합리가 아니라 감정의 교환이 사회를 움직이는 유일한 엔진이 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감정이외의 커뮤니케이션을 기피하게 되는, 감정만이 유일한 관계성으로 통용되는 제도를 감정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13) 민의가 반지성주의 그룹의 정치 세력을 내팽기치는 사태가 요즘 들어 확인되고 있다. 지성과 권력이 연결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구시대적 반지성주의세력을 건너뛰고 감정이 권력을 빼 버린 채 국민화된 것이다. 그것이 우파와 좌파 중 어느 쪽에 경도될지와는 별개로, 반지성주의조차 내팽개치는 감정적인 정치가 선택될 수 있다는 리스크 속에 지금 세계가, 그리고 그 일부인 일본이 있다.

이렇듯 감정이 우리 가치 판단의 최상위에 놓이고 감정을 통한 공감이 사회 시스템으로 기능하게 되는 사태를 이 책에서는 감정화라 부른다.

p14 :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타인의 행위감정에 대한 공감이 사회 구성의 근간에 놓인다. 여기서 그는 나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직접 공감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중립적인 관찰자를 두고 그것이 자신과 타인의 감정 및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형성하는 단계를 밟는다. 그 결과로 규범, 도덕이 형성된다.

문제는 이와 같은 회로가 이제는 상실되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화란 감정이 도덕’(넓은 의미의 규범 및 공공성)을 형성하는 회로를 상실한 사태를 가리킨다고 해도 좋다. 보이지 않는 손도 감정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재산을 좇는 길을 가고자 하는 약한 인간과 윤리적인 덕의 길을 가고자 하는 현자가 존재하며, 이 둘의 균형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이루어진다고 읽어야 할 것이다. 전자만 기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임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신자유주의는 본능적이라는 의미에서 감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스미스의 논의에 따를 때 현재 우리는 단순히 감정적이고 공감적이며, 우리 마음속에는 중립적 관찰자가 없다. 그리고 이 중립적 관찰자를 결여했을 때 감정은 다만 서로 공감해 더 거대한 감정이 될 뿐이다.

p15 : ‘공감할 수 없는 감정(즉 타자)을 어떻게 이해할지를 묻는 단계를 건너뛰고 공감이 직접 커다란 감정에 직결될 때, 본래 우리가 설계했어야만 했던 사회혹은 국가와는 이질적인 존재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사회나 국가가 아니라 감정이 공명되어 혹은 융해되어 만들어진 무엇이다.

> 인류보완계획 : 개인으로서 인간절멸, 하나의 통합적인 정신체. (젤레)

p27 : 황실에 속한 사람들은 선거권, 직업 및 주거와 국적 선택의 자유, 정치적 발언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 역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헌법상 인권의 예외 규정인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감정 노동은 요구받는다.

->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학부모, 학생, 관리자(및 교육청) 사이에서 고도의 감정노동을 요구받는 대한민국 교사의 상황과 유사하다.

2. 이야기 노동론 인터넷의 새로운 노동 문제에 관하여

p66 : 포스트포드주의 문제는 플랫폼과 유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간신히 보이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만들어지고 있는 노동의 쾌적한 전인격화, ‘소비무상 노동화가 현실 사회의 노동으로 반전되어 피드백되면서 노동관을 형성하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블랙 기업이나 개호 노동 문제도 낡은 노동 문제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터넷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 자체가 무상 노동인 삶을 살기를 전인격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요구받고 있다.

3장 스쿨 카스트 문학론

p70 : 학교 안의 격차, ‘서열 짓기문화란 로스제네라 칭해지던 2000년대 비평과 문학에서 표현화된 문화이자 주제였다.

p71 : 버블 붕괴는 부동산 가격 상승이 지탱해 주던 중류화를 무너뜨리고 자산이 많은 이와 그렇지 못한 이 사이의 격차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20속에서 계급이 부흥했다. (73) 2000년대에 이르러 학생들이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스쿨 카스트1980년대 말까지 진행된 수평 혁명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고, 동시에 신자유주의 경제를 배경으로 학교 밖에서 진행 중이던 재계급화가 불러온 두려움 혹은 예감에 대한 적응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사람들이 수평적 차이에서 안심을 얻지 못하고 히에라르키라는 수직적 차이를 통해 안심하게 되는 현실에서 인간의 본질적 야비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낮잡아 볼 수 있기만 하면 계급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된다. (74) 자신이 였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스쿨 카스트도 결국 감정이구나 싶기는 하다.

p98 : 스쿨 카스트 문학을 개관해 볼 때 새삼 발견되는 공통점은 사회학자적 입장’(가장 높은 곳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를 조감함)제도에 대한 긍정이다. 이것들이 의외로 현재 각 플랫폼에서 창작되는 문학의 특징 같기도 하다. (99) 약자란 곧 생존 경쟁의 패자라는 것이다. (100) 여러 의미에서 승자의 문학에 손을 뻗음으로써 강자 쪽에 가담하고자 한다. (101) 승자의 품에 안기고, 눈물 흘리고, 거기에 마음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때 이 나라 전후 문학의 한 영역이었던 패자의 문학은 확실히 죽어 버린 것이다.

 

4. 라인은 문학을 바꾸었는가

p102 : 라인 등 인터넷상의 언어가 만화의 말풍선처럼 표시된다는 사실이 나 같은 구세대에게는 흥미롭게 느껴진다. (139) 이 나라에서는 사가적으로 대화하는 시리나 혐오 발언을 할 만큼 정치적인 테이가 아니라 여고생 AI 챗봇 린나가 만들어졌고, 이는 이 AI가 근대 문학사의 가장 끝머리에 자리하고 있음을 우연찮게 보여준다.

-> , 타자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닌 내뇌 망상으로 이루어진 세카이, 미연시게임이나 아이돌 오타쿠가 꿈꾸는 섹슈얼리티의 세계.

5. 문학의 구전화와 보이지 않는 언문일치 운동

p160 : 내가 기능성 문학이라고 부르는 추상화문체의 소멸, 알레고리화, 철학화 등의 상황 역시 문학이 인터넷상의 구전화에 적응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3줄 요약, 가성비, 가심비

애초에 인터넷에서 일어난 말하는언어와 쓰는언어의 일치는 언문일치 운동의 반복일 뿐이다. 우리는 이 두 번째 언문일치 운동을 이미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기에 그것이 초래하는 리스크와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64) 하나시(언문일치체)의 기술을 공공을 구축하는 데 쓰지 않고 탈사회적인 를 자동 생성하는 도구로 사용한 데 이 나라 근대 문학의 착오가 존재한다. -> 개인주의 vs 집단주의 (공공성) 

6장 기능성 문학론

p168 : 감정에 대한 직접적 효능을 찾는 독해 방식이 예전보다 훨씬 당연시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74) 문체는 초보적인 AI가 학습할 수 있는 작가 개인의 어휘 데이터베이스와 그 샘플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편차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체 어째서 그런 정보론적인 뒤틀림이 발생하는 것일까. (180) 그것은 세계와의 알력, 그리고 타자기도 한 독자와 빚은 알력의 결과로 탄생한다. 그러나 마타요시의 묘사에는 자아가 억제되어 있고, 이처럼 그가 타자 및 사회와 적절한 거리를 두는 방식이야말로 독자들이 원하는 바이다. (191) ‘역사-사회에서 사가-세계관으로의 변화 혹은 사회학적 사회에서 정보론적 혹은 기호론적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아즈마 히로키적인 게임적 리얼리즘 문제를 생각해보자. 오타쿠 문화나 서브컬처 문학이 1980년대 이후 사회나 현실과의 알력을 회피하고 가상의 사가로 도주한 것과 변행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182) 소설과 세계가 정보론화하는 과정의 끝에 미소녀 게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세계의 모에화, AT 필드]

p184 : 오에가 세카이 구축에 문화 기호론을 이용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사회적 문학은 사회 시스템을 분석하는 장치며, 그런 문학이 과거에 있었고 시도되기도 했지만 결국 이 나라에서는 뿌리내리지 못했다. 구조주의적 문화 인류학세카이를 정보론적으로 서술하는 서식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일본은 세카이이자 사가인 것이다.

-> 레비스토로스의 사이버네틱스AI 계발과 연결되는 지점.

 

7. 교양 소설과 성장의 부재

p193 : 현재 AI는 그 문화권의 근대 문학을 답습하는 형태로 인격 형성(빌둥)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린나가 교양 소설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 나라의 근대가 교양 소설을 만들지 않았거나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혹은 기피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소세키, 무라카미 하루키, 데즈카 오사무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에 이르는 모든 작가가 교양 소설적인 구조를 차용하면서도 마지막에 주인공이 성숙을 거부하거나 보류하거나 실패하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교양 소설의 기능 부진을 일으켜 온 것이 이 나라의 근대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이는 성숙에 대한 거부며 긍정적인 의미를 찾자면 국민화에 대한 거부.

p202 : 여기서 되새길 필요가 있는 사실은 교양 소설의 시조인 괴테가 생물학 영역에서 형태학을 다룬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는 점이다. (203) 동물이나 식물의 신체로 형성(빌둥)되는 것은 교양 소설(빌둥스로만)과 평행 관계에 있다. 빌둥스로만에서 형성되는 것은 내면이고, 이는 생물의 형태가 빌둥(형성)되는 것을 그 비유로 채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혼의 형성을 신체의 형성에 비유한 셈이다. (207) 국가가 미리 제시한 청년의 형식을 향해 빌둥해가는 것이 파시즘 하의 교양 소설이라고 한다면, 교양 소설로서 <다자키 쓰쿠루>가 지닌 성질이 보다 명백해진다. (215) 이 책은 육체를 빌둥하는 가운데 정신을 보충하는 빌둥스로만이다. 그러나 정신이란 역사 수정주의자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216) 형식의 미를 내용보다 우위에 두는 주장이야말로 형식주의며 이것이 나치즘 미학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자명하다. 미시마 유키오에게 형식은 철저히 그저 형식일 뿐이었고 그 형식 속의 부재를 견디기는 커녕 철저히 형식적이고자 한 나머지 형식으로 죽기를 중단하려 하지 않았다. 무라카미의 형식=교양소설은 지극히 단순한 역사 수정주의적 우의를 통해 보전될 뿐이기 때문이다.

-> 빌둥이라는 개념, 비판적 사유. 홈볼트가 국가나 교육당국이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식의 교육을 없애야 한다, 그것에 대한 비판으로, 스스로 사유하고, 국가주의적인 비판하는 개인을 만드는 것으로서의 빌둥. // 파시즘의 빌둥, 교양소설 -> 진짜 역사를 객관적으로 직면하는 게 아니라, 역사 수정주의. 

p217 : 자기 계발서는 구조밖에 없는 교양 소설이며, 교양 소설에서 말 그대로 묘사를 철저히 벗겨 낸, 기능성에만 특화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자기 계발서를 읽는 의식 높은 계열사람들이 고쿄 주변에서 마라톤을 하는 신체 빌둥 계열이라는 인상도 있다. 자기 계발서가 신자유주의 경제화에 따른 빌둥스로만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8. AI 문학론

p219 : 근대라는 것이 앞으로 인터넷에서 재실행되리라는 예감을 쓴 적이 있다. (220) 형식주의는 정보론의 기원이기도 하므로 이야기 만드는 행위를 하나의 장치로 재검토하는 것이 내 관심사가 되었다. (237) 이렇게 AI가 소설을 쓰고, 비평하고, 편집함으로써 작가도 비평도 편집자도 죽는다. 그러면 독자는 남을까. (238) 작가화한 유저 역시도 논리적으로 불필요하다. 결국 인터넷상에서 무위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그저 AI를 위해 빅데이터를 투고해 주기만 하는 존재로 바뀌어 갈 수밖에 없다. (239) 이렇게 근대 문학을 지탱해왔던 작가도 독자도 비평도 편집도 이미 본질적으로는 죽었다. 비유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감정 노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까지 모두 AI가 대행한다. 그런 식으로 감정화 사회를 끝장낼 수도 있다.

후기. 역사의 특이점을 향하여

p240 : 투고 잡지라는 공간을 향한 무명의 투고들로 일본 근대 문학이 만들어졌고, 그것은 무수히 많은 말하듯이 쓰기(언문일치)’의 표출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문체는 지극히 불안정한 라는 1인칭으로 말함으로써 가능해졌다. 타자와 충돌하고 또 사회를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근대를 살았던 이들이 걸은 길을 인터넷을 통해 만인이 반복하고 있다. 즉 문학이라는 특권적인 장소에서만 가능했던 경험이 보편화되어 제공한다. 그런 근대의 재실행, 갱신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나는 책에서 주장했다. 철저하지 못하게 끝나 버린 일본의 근대화를 인터넷상에서 철저하게 재실행해 보자는 것이 내 입장이었다.

p244 : 특이점을 역사에 적용하면 그 자체의 진화가 재귀적인 갱신으로 인터넷에서 급속히 진행되어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변화하려는 국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구시대적 합리’, 구시대적 근대에 입각한 반지성주의 따위의 비판 자체를 무효화하고 있지 않은가. 세계 각지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비합리적인 역사적 선택은 더 이상 역사가 역사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부주의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이를 역사에 있어 그레이 구’(나노 머신의 무한증식으로 인한 지구 종말 시나리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p247 : 플랫폼은 연령, 계급, 직업과 무관하게 모두 유저로 만들며 안락함을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둔다. 우리는 손님은 왕이라고 말하는 기업 그 자체가 아니라 기업 종사자들에게 감정 노동을 강요해 평안한 생활을 영위한다. 그런 시대에 문학은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 독자들이 자신을 유저로 정의하며 대접받기를 바라고 문학도 안락을 제공하면서 그 욕구를 충족시킬 뿐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문학일 수 없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독자에게 불편함을 제공하는 것도 원래 문학의 기능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스토리 중간중간에 잘 생각해보면 불편한 지점을 집어 넣고 잘 생각해 보는 독자가 그 부분에서 한 번쯤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는 이야기다. -> 테크노 퓨달리즘에서의 감정정치와 감정노동의 의미. 

(249) 지은이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자국 또는 민족의 콤플렉스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창작을 하거나 아예 터부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251) 철학적 사유에도 세줄 요약을 원하는 작금의 세태는 세상에 직접 참가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서비스를 받는 유저로, 즉 손님 마인드만을 가진 채로 마음 편한 플랫폼 안에 틀어박혀 사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252) 그런 안락함 속에는 그 플랫폼을 유지하기 위해 플랫폼에 속한 노동자들이 노동처럼 보이지 않는 플랫폼 노동물질 노동이 아니라 감정 노동으로 행하고 있음을 일부러 모르는 척한다는 선택이 포함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편할 것 같다고 느끼면 바로 차단이나 뮤트’, ‘언팔을 하면 되니 점점 더 확증 편향이 심해지고 자기 확신에 빠져든다. 그 과정에서 인간=유저에게는 플랫폼의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 말하자면 <매트릭스> 세계에서 인간들이 기계를 위한 배터리로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역할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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