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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92 엄기호 해설) 이 책은 에번과 같은 사고를 특권 의식(entitlement)이라 부른다. 특권 의식은 자기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온다. 신분이나 계급 혹은 가문과 같은 것 말이다. 내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내가 속한 곳으로부터 부여되는 타이틀에 의해 나라는 존재의 위치가 정해지고 그 위치에 분배되어 있는 특별한 권리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것이 특권 의식이다.

 

이런 특권 의식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관계나 사회를 피라미드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특권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가 서로 넘나들기 힘든 장벽으로 나누어진 피라미드이며, 피라미드의 단계마다 권리도 차별적으로 나눠져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특권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신분이나 계급에 속한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이들에겐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세계가 있으며, 그 폐쇄성은 오히려 특권의 징표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가정에 기초한 근대 공화주의 국가에서 특권 의식이 비난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권 의식을 가진 이들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의 평등한 시민이라는 환상은 깨진다. (394) 이런 점에서 에번과 같은 특권 의식을 가진 엘리트는 구엘리트일 뿐이다. 이들은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성격으로 인해 더할 나위 없이 개방적이고 개인주의화된 현대 세계에서는 더는 유능한 엘리트일 수 없다. 이에 반해 신엘리트들은 지위 내에서 상승하기 위해 노력하는 법을 배운다. 그 결과 성공한 신엘리트들에게는 독특한 의식이 생겨난다. 첫 번째로 이들은 사회의 불평등한 위계를 고정된 피라미드가 아니라 사다리로 인식한다. 이 사다리는 자신이 가진 재능과 능력, 노력을 통해 타고 올라가면 된다. 위계가 피라미드가 아니라 사다리가 되면 이것은 더 이상 불평등이 아니라 기회가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서 그 기회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 구엘리트와 신엘리트의 차이 : 다양성 존중(다양한 계층, 인종, 성별, 정체성)-> 이게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다양성 (개인) vs 평등(집단주의, 계층의식) : 공동체적인 정신이 사라짐. 

 

그 결과 두 번째로 신엘리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자기 노력의 결과로 받는 당연한 보상이라는 의식이 생긴다. 소위 말하는 능력주의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은 특권 의식처럼 자신과 무관하게 자기가 달고 있는 타이틀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이 모든 것은 그런 특권 의식을 내려놓고 밤새 노력해 꽃피운 자신이 재능과 능력의 결과이다. 이런 것이 바로 (특권의식과는 다른) 신엘리들의 특권(privilege)이다.

이 신엘리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더 구엘리트들의 특권 의식에 반대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다. 신엘리트들의 경멸은 사회의 아래로도 향한다. 자신들의 성취는 다른 사람들을 귀족주의적으로 배제해 얻은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실천을 통해 획득한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성취를 이루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노력과 재능이 부족해서이지 결코 불평등한 사회구조 때문이 아니다.

여기서 가장 나쁜 점은 약자들이 무기를 잃어 간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불우한 이들의 무기는 언제나 그들의 숫자와 조직화였다. 약자들은 집단적 정체화와 집단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쟁취했다. 개인이 아니었다. 저자가 집단주의라고 말하는, 약자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공통의 운명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유대감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가 약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런데 성공과 실패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재능과 노력의 문제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불평등을 설명할 언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계급이나 인종, 젠더 등 불평등을 설명하고 약자들의 유대감을 결성하는 말들은 집단주의적개념이기에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된다. 나약한 자들이나 이런 집단주의적 언어에 자신의 게으름을 감춘다. (398) 저자가 민주적으로 불평등한 사회라고 부르는 사회에서 무엇보다 불길하고 나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불평등을 설명하고 약자들의 유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우리의 언어를 되찾아 와야 한다. : 1970년대 세대 구분할때, we generation -> me generation. (happycracy) // 판옵티콘 : 테라스(개인들간의 감시), CCTV(위계적인 감시망 / 눈치 : 안위를 살피는 심기노동이 필요한 수직적 관계)  // 개인주의의 강화, 집단주의의 약화(멸칭화) 현상은 자연스러운 진보적 단계가 아니라,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도달한 한 상태. 개인주의를 진보라고 착각하는 서구적 사고방식(자유주의자)이 문제의 원흉이다.  : 개인화 - 연대 : 정체성 운동이 최대치 / 혁명 (혁명적인 변화 - 기존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구도 자체를 뒤집는 합의) : 데모스의 집단주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 개인주의 vs 집단주의 //  초격차사회, 초불평등사회를 만든 원흉이다. // 오늘날의 정치적 난관 - 극우화 : '집단주의'의 힘(데모스의 정서를 움직이는 힘)을 이용하는 자들이 누구냐? : 극우파/ 진보는 이런 거를 안해. 왜냐면 집단주의는 틀렸다고 생각하니까. 

약자들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유대의 언어, 이 언어의 가능성에서 특히 문제적인 것이 계급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계급적 결집의 가능성을 인종이나 젠더와 비교하며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유색인종이나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세인트폴의 세계관과 삶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세상을 포기하는 데 덜 적극적이다. 반면, 백인 노동계급 출신의 남학생들은 세인트폴의 세계관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왜 그럴까. 단적으로 말해 지난 시기 젠더와 인종이라는 정체성은 그 정체성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자는 문화 운동과 함께 했다. (399)반면 계급은 그렇지 못했다. 흑인들의 자부심은 지난 50년간 부유하고 세련된 생활 방식이 되었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자부심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400)하층은 노력을 통해 위로 올라가 극복해야 할 위치이지 결코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노동에서 하층으로의 전환은 기가 막힐 정도로 세인트폴의 능력주의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전환의 방향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하층에서 노동으로의 전환이다. 문제는 이 노동계급의 자부심을 지금 누가 주도하고 있는가이다. 폴 윌리스가 <학교와 계급 재생산>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밝힌 것처럼, 노동계급의 자부심은 다른 한편에서는 성차별주의, 인종주의와 강력한 친화력을 갖고 있다.

진보-좌파들이 양극화와 격차 사회를 문제 삼으며 전략적으로 노동계급을 하층으로 부르면서 그들의 자부심을 깍아 먹고 있는 동안, 이들을 노동계급으로 호명하며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로 계급 정체성을 반동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 이것이 지금 우파 정치 아닌가. -> 좌파정치에서 우리가 감정정치를 생각한 적이 있는가. 하층계급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나, 어떻게 자부심을 느끼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우리가 답을 한적이 있나. 

(401) 한편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사실 한국은 오래전부터 능력주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한 번의 시험이 평생을 좌우했고 그것이 신분처럼 고정되었다. (402) 문제는 공정이 결과에 따른 차별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능력주의와 결합한 한국에서의 공정 담론은 결과의 지나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다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점만 부각되고 있다. -> 시험능력주의 / 선비 - 사대부문화 -> 과거시험 (중국 송대의 제도) : 관료제 -> 유교질서 (사대부라는 새로운 계급의 질서) : 사대부는 출신이 아니고, 유교경전(주희)을 해석한 것을 세상의 진리로서 생각하는 사람들 vs 오늘날의 능력주의 

여기에서 한국의 신엘리트들은 이 책이 묘사하는 미국의 신엘리트들과 갈라진다. ‘공정을 중심 가치로 내세우며 구엘리트들의 특권 의식에 도전하는 신엘리트들은 그들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겠지만 사회를 지도하는 지도력을 구성하는 데에는 무능함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 무능함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엘리트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신엘리트는 다르다. 그렇다고 미국의 구엘리트와 같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구엘리트는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니까. 

이들은 어디를 가서 자기가 특별한 존재임을 내세우지 않고 유연하게 사람을 다루면서 세상을 이끌어 가지 못한다. 자신의 출신을 드러내지 않고 역량으로 지도하는 게 아니라 출신을 드러내는 것만을 통해서 자기들의 우월함을 정당화한다. 이를 상징화하는 것이 몇 년 전 서울대에 등장한 출신 특목고 이름을 새겨넣은 과티의 등장이다. 이런 모습은 이 책에서 세인트폴이 양성하는 태도와는 정반대되는 행태이다. 그 차이의 원인은, 세인트 폴은 변화된 세상을 지도할 역량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반면, 한국의 엘리트 양성 교육기관은 이런 지도력 마저도 대학 입시를 위한 스펙 쌓기의 도구로 만들어 버린 데 있다.

(404) 왜 한국의 엘리트들은 사회를 지도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일까? 엘리트의 구조 변동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미국과 같은 다른 세계와 마찬가지로 함께 겪고 있고 그 양상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의 엘리트들은 사회를 지도하는 데 무능하고 그 지도를 정당화하는 데 실패하는 것일까? -> 개인의 무능에서 오는게 아니라, 구조적인 원인 : 포스트-콜로니얼적 상황. 한국에서 강남 서울대 특목고 출신 엘리트라도 2등시민 : 미국이 1등 시민 사회. -> 한국의 엘리트들은 한국에서 사회를 통합하고 잘 지도하고 이럴 생각이 없어요. 그럴 여유도 없어요. 미국이란 1등 사회에 본인들이 보통시민들로 인정받기 위해 인정투쟁하느라 바쁘거든요. 미국의 신엘리트의 덕목은 특권의식없지만, 여유가 있어야 돼요.(노력안하는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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