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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사법 행정

§209

보편성의 형식 안에서 개별자[des Einzelnen]의 의식으로서 사유(thinking)를 하는 것, 다시 말해 교육(Bildung) 의 일부는, 내가 하나의 보편적 인격(universal person) 으로 파악된다는 데 있다. 그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존재로 인정된다. 인간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이기 때문에, 독일인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인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인정된다. 다만 그것이 국가의 구체적인 삶에 대립하는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 와 같은 고정된 입장을 취할 때에만 불충분하게 된다.

Addition (H)

권리를 사유 속에서 이해하려면 사람은 사유하는 법을 배우는 교육을 받아야 하며, 단순히 감각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대상들[Gegenständen]에 보편성의 형식을 적용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도 보편적 원리에 따라 규율해야 한다.

인간이 수많은 욕구를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 욕구들의 획득이 그 충족과 서로 얽혀 있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법(laws)을 만들 수 있게 된다.

§210

권리의 객관적 현실성은 부분적으로는 권리가 의식 앞에 현존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알려져 있다는 데 있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현실성을 가지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권리는 타당성을 가지며, 그 결과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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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종교와 민족을 말할까? 헤겔은

  • 독일인
  • 유대인
  • 가톨릭
  • 개신교

같은 모든 특수성을 제거한다. 그리고 법 앞에서는 사람은 오직 인간이다. 라고 말한다. 이건 칸트와도 매우 가까운 생각이다. 권리는

  • 국적
  • 종교
  • 민족

보다 더 높은 보편성이다. 그런데 왜 세계시민주의를 비판할까? 바로 다음 문장이 중요하다. 헤겔은 cosmopolitanism을 비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걸 민족주의라고 오해한다. 그게 아니다. 그의 뜻은 인간 일반만 말하고 국가를 무시하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류애”를 말하는 건 좋다. 하지만 실제로 법을 만들고 세금을 걷고 재판하는 건 국가다. 권리는 반드시 제도를 가져야 한다. Bildung이 또 나온다. 헤겔은 계속 Bildung을 말한다. 왜? 권리는 그냥 느낌으로 아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배워야 한다. 교양이 있어야 권리를 이해한다. 왜 욕구 다음에 법이 나오나? 이 순서가 정말 중요해. 욕구가 복잡해질수록/분쟁이 생긴다./재산 문제가 생긴다./계약 문제가 생긴다./법이 필요하다. 시장은 자동으로 법을 낳는다. §210 헤겔은 권리가 실제로 존재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권리를 알아야 한다.권리가 실제로 효력을 가져야 한다. 법은 책 속에만 있으면 안 된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편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 부분은 뒤르켐의 "도덕은 사회적 사실이다."와도 통한다. 헤겔은 권리가 개인의 마음속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인정하는 것이 될 때 비로소 현실성을 가진다고 본다. 그래서 권리는 인정(recognition)을 통해 현실성을 획득한다. 는 명제가 나온다. 이것이 훗날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인정이론(Theory of Recognition) 의 중요한 철학적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된다.

§211

권리가 그 자체로(right in itself) 객관적 현존(Dasein) 속에 정립될 때, 다시 말해 그것이 사유되고 알려지며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무엇이 권리이고 무엇이 타당한가가 규정될 때, 권리는 법률(law) 이 되며, 이러한 규정을 통해 권리는 곧 실정법(positive right) 일반이 된다. 어떤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정립한다는 것은 그것을 모든 사람의 의식 앞으로 가져와 보편적인 것으로 알리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러한 형식은 가장 추상적인 형태에 불과하다. 권리는 오직 법률이 되었을 때에야 자신의 참된 규정을 획득하며, 그때 비로소 자신의 보편성이라는 형식과 자신의 참된 내용을 동시에 갖게 된다. 따라서 입법은 단순히 어떤 내용을 선언하여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이다’라고 말하는 과정이 아니라, 권리의 내용 자체가 그 규정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동물은 본성만을 가지며 그 의지는 본능에 의해 규정되지만, 인간은 관습(Gewohnheit), 관습법(customary rights), 그리고 법률을 가진다. 그러나 관습은 주관적이고 우연적인 방식으로만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충분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사유의 보편성 또한 그 안에서는 아직 불명확하다. 그 결과 권리에 대한 인식(Kenntnis)은 일반적으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독점하게 된다. 문명국가에서 법을 아는 것이 특권층이나 법률가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은 삶에 대한 가장 큰 착각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한 민족의 법은 단지 기록되고 정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관습이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삶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는 영역에서 사유는 삶과 생성(Becoming)의 운동을 가장 풍부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관습법(customary rights)은 결국 반드시 수집되고 정리되어야 하며, 이러한 작업은 어느 정도의 교양과 교육 수준에 도달한 모든 민족에게서 일어난다. 이러한 수집의 결과가 바로 법전(legal code) 이다. 그러나 법전은 단순히 법규들을 모아놓은 집합이 아니라, 권리의 원리들이 그 보편성 속에서, 다시 말해 그 규정성(determinacy) 속에서 사유를 통해 파악되고 표현된 체계이다. 따라서 법학(science of law)은 성문법(written law)뿐 아니라 관습법(unwritten law), 그리고 문헌 속에 기록되어 전승된 법까지 모두 포괄한다. 영국에서 사법행정과 민사 문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혼란은 이러한 자료들이 실제로 법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판사들의 판결은 이전 판사들의 권위에 의존할 뿐이므로 그들은 독립적인 입법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불문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일 뿐이며, 따라서 이전 판결이 불문법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권한만을 가진다. 이와 유사한 혼란은 로마 제국 후기에 수많은 유명 법학자들의 권위가 서로 충돌했던 사법행정에서도 나타났으며, 황제는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른바 ’법률가들의 인용법(Law of Citations)’을 제정하여 다수 의견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문명국가나 법률 전문가가 법을 마음대로 위나 아래로 바꾸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할 권리는 없으며, 법체계가 반드시 완전무결한 내용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법의 현존하는 내용은 사유를 통해 그 규정된 보편성 속에서 파악되고 그에 따라 적용되어야 한다.

Addition (H.)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과 달리 스스로 법을 만들지만, 동물은 자연법칙을 따른다. 야만인들은 관습(Sitten), 감정, 충동에 따라 행동하며, 아직 이러한 것들의 보편성을 의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감정(Empfindung)의 우연성과 의견의 우연성이 지배하며, 충동과 욕망은 충동 그 자체로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개인은 자신의 욕망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오직 훈육(discipline) 을 통해서만 존재는 보편성을 획득하며, 사유는 개별적 충동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입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법의 집행은 단순한 기계적 절차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결정을 판사의 재량에 맡기는 것은 훨씬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그 경우 판결은 개인적 의견에 좌우되어 자의(arbitrariness)가 법을 대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관습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것이 살아 있는 법이며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므로 성문법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관습이 언제나 주관성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법은 반드시 사유를 통해 보편적 형식으로 정립되어야 하며, 개별 사람들의 기억이나 관행 속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최근에는 어떤 이들이 민족에게는 입법할 소명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법을 보편성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야말로 현대 국가의 필수적인 과제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법전은 역사와의 연관을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 속에서 형성된 권리를 보편적인 사유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영국법의 사례 역시 그러한 법전화(codification)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혼란을 낳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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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절에서 헤겔이 말하려는 핵심은 단 하나다. 권리(Recht)는 법률(Gesetz)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권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있으면 아직 객관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권리 → 법률 이라는 과정을 객관화(objectification) 라고 본다.

권리(Recht)

보편적으로 알려짐

입법(Gesetzgebung)

법률(Gesetz)

객관적 현실성

헤겔이 관습법을 비판하는 이유 헤겔은 관습(custom)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관습은

  • 지역마다 다르고,
  •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되고,
  • 판사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아직 주관성에 머물러 있다. 진정한 법은 누구나 알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도록 보편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헤겔은 관습법을 넘어 성문화된 법(code) 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212

권리가 그 자체에 있는 것(an sich) 과 정립된 것(gesetzt) 의 동일성 속에 있을 때에는, 오직 법률(law) 로 정립된 것만이 권리로서 구속력을 가진다. 그러나 정립된다는 것은 객관적 현존(Dasein)의 측면을 이루며, 그 안에는 개인의 자의적 의지와 여러 특수한 요소들의 우연성이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의 법률은 내용상 권리 그 자체(Recht an sich) 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정법(positive right)의 영역에서 합법적인 것(gesetzmäßig) 은 따라서 무엇이 권리(Recht)인지를 인식하는 출발점이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이 적법한 것(Rechtens)인지를 인식하는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실정법학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원리로 삼는 역사적 학문이다. 그 밖의 문제들은 오성(understanding)의 과제이며, 법률의 외적 분류, 체계화, 귀결, 적용 등을 다룬다. 그러나 오성이 법의 대상(Sache)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려고 할 때에는, 예컨대 형법 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의 연역적 추론(Räsonnement aus Gründen)이 얼마나 쉽게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지가 드러난다. 한편으로 실정법학은 자신의 실정적 자료로부터 권리 규정들의 역사적 발전과 그 적용 및 세부적인 귀결을 충실히 도출해내야 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모든 설명이 끝난 뒤에도 어떤 권리 규정이 과연 이성적인가(rational)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면, 실정법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러한 질문을 엉뚱한 것으로 여기더라도, 적어도 그 질문 자체에 놀라서는 안 된다. (법을 이해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3의 주석을 참조.)

§213

권리는 우선 정립된 것(posited) 으로서 객관적 현실(Dasein)을 획득하지만, 동시에 시민사회의 다양한 물질적 관계에 적용됨으로써 내용 면에서도 객관적 현실을 획득한다. 즉, 끊임없이 증가하고 복잡해지는 재산과 계약의 여러 관계들, 그리고 감정, 사랑, 신뢰에 기초한 윤리적 관계들(다만 그것들이 추상적 권리의 측면을 포함하는 한에서만, §159 참조)에 적용됨으로써 권리는 구체적인 내용을 갖게 된다. 반대로 도덕(Moralität)과 도덕적 명령은 의지의 가장 내면적이고 고유한 주관성과 특수성에 관계하는 것이므로, 그것들은 실정 입법의 대상(Gegenstand)이 될 수 없다. 또한 권리의 실정적 내용은 사법행정 자체와 국가 등으로부터 발생하는 권리와 의무들에 의해 더욱 풍부해진다.

추가(Addition)

결혼, 사랑, 종교, 국가와 같은 보다 높은 차원의 관계에서는, 본성상 외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측면만이 입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족마다 입법의 범위는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남편이 첫 번째 아내를 다른 아내들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을 법으로 규정하였고, 이를 어기면 체벌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오래된 여러 법체계에는 충성(loyalty)과 정직(honesty)에 관한 규정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본래 법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적으로 인간의 내면성(innerness)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맹세(oath)의 경우처럼 외적인 행위가 개인의 양심과 직접 연결되는 상황에서는 정직과 충성 역시 실질적인 문제로 고려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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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절은 헤겔이 “법이 다룰 수 있는 영역과 다룰 수 없는 영역” 을 엄격히 구분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특히 §213은 훗날 자유주의 법철학에서 말하는 “법은 내면의 도덕을 강제할 수 없다” 는 명제를 헤겔이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212에서 헤겔은 ’권리(Recht)’와 ’법률(Gesetz)’의 차이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한다. 권리는 개념적으로는 이성적인 것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반드시 입법이라는 과정을 거쳐 법률의 형태를 취해야만 객관적 효력을 가진다. 그러나 바로 이 객관화 과정은 인간의 자의적 의지와 역사적·정치적 우연성을 포함하기 때문에, 실제 법률은 언제나 ’권리 그 자체(Recht an sich)’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을 갖는다. 그래서 헤겔은 실정법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실정법학이 역사적 발전과 법 적용을 연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인정하지만, 동시에 “이 법은 과연 이성적인가?“라는 철학적 질문 역시 결코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즉 법학은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철학은 그 법이 정당한지를 묻는다. 이 두 작업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모두 필요하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13에서는 법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헤겔은 법이 시민사회의 재산, 계약, 상속, 국가와 시민 사이의 권리와 의무처럼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규율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간의 양심이나 사랑, 신앙, 도덕적 동기 자체를 직접 입법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러한 것들은 의지의 가장 내면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이나 종교도 법과 관계를 맺지만, 법은 오직 외적으로 확인 가능한 측면만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중국의 사례처럼 사랑 자체를 법으로 강제하거나, 충성이나 정직을 일반적인 법률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법의 본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다만 맹세처럼 내적 의사가 외적 행위를 통해 공적으로 표현되는 경우에는 법이 그 진실성과 책임을 문제 삼을 수 있다. 여기서 헤겔은 법과 도덕을 분리하면서도, 양자를 완전히 단절시키지는 않는 자신의 독특한 법철학을 보여준다.

§214 

권리가 특수한 것(the particular)에 적용된다는 점과는 별도로, 권리가 정립(posited) 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또한 개별적인 사례(the individual case)에 적용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로써 권리는 양(量, the quantitative) 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영역은 개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하나의 질적인 항목이 다른 질적인 항목과 교환될 때 그 가치가 양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같다.) 개념에 의한 규정은 단지 일반적인 한계(Grenze)만을 설정할 뿐이며, 그 한계 안에서는 다양한 변동도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것이 현실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는 순간에는 이러한 변동은 제거되어야 하며, 결국 그 일반적 한계 안에서 하나의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결정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보편적인 규정을 특수한 경우뿐 아니라 개별적인 사건에 직접 적용하는 것, 즉 그것의 즉각적인 적용에서 법의 순수하게 실정적(positive) 인 측면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어떤 범죄에 대한 정당한 형벌이 태형 40대인지 39대인지, 벌금이 5탈러인지 아니면 4탈러 24그로셴과 20그로셴 이하인지, 혹은 징역이 정확히 1년인지 364일인지, 또는 1년 1일인지 1년 2일인지 1년 3일인지를 이성(reason) 만으로 결정하거나 개념으로부터 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반대로 형벌이 채찍 한 대만 더 많거나 적어도, 벌금이 1달러나 1그로셴만 더 많거나 적어도, 혹은 징역이 하루나 일주일만 더 길거나 짧아도 부정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성 자체 가 이러한 우연성과 모순, 그리고 외견(Schein)이 비록 제한된 영역에서나마 정당한 위치와 권리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러한 모순을 절대적으로 완전한 등가관계로 환원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현실적인 집행(actualization)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다시 말해 일정한 한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최종적인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정은 형식적 확실성(formal self-certainty), 즉 추상적 주관성에 속한다. 따라서 그것은 주어진 한계 안에서 적절한 선에서 문제를 종결시키는 능력에 의존할 수도 있고, 혹은 단지 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반올림된 숫자를 선택하거나, 예를 들어 40이 아니라 41이라는 숫자를 선택하는 식의 근거에 의존할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법은 현실적 집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러한 최종적 규정을 스스로 명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은 다만 판사에게 최대와 최소의 범위를 제시하면서 그 범위 안에서 판단하도록 제한할 뿐이다. 그러나 최대와 최소 자체도 결국 이러한 종류의 둥근 숫자에 불과하며, 그것만으로는 판사가 순수하게 실정적인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를 제거하지 못한다. 오히려 법은 이러한 결정을 판사에게 하나의 필수적인 과제로 맡겨 둔다.

추가(Addition)

법과 사법행정에는 본질적으로 우연성(contingency)에 맡겨질 수밖에 없는 측면이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법이 보편적인 규정인 반면, 그것이 언제나 개별적 사건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만약 이러한 우연성을 이유로 반대한다면, 그 반대 자체는 법을 순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예를 들어 형벌의 정도는 어떤 개념적 정의(Begriffsbestimmung)와도 완전히 일치하도록 결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점에서는 언제나 어느 정도 자의성이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성 자체가 오히려 필연적인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바로 이러한 이유를 들어 법전 전체를 비판하며 그것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완전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바로 그 영역을 간과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불완전성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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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4는 헤겔 법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논점 가운데 하나이다. 헤겔은 흔히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결정된다”고 이해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한다. 이성은 어디까지가 이성으로 결정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부터는 더 이상 개념이 결정해 줄 수 없는지를 아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법은 “살인은 처벌해야 한다”는 원칙은 이성적으로 정할 수 있지만, 형량이 정확히 364일인지 365일인지는 이성이 계산해 줄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정하는 것도 아니다. 개념이 허용하는 합리적 범위 안에서, 현실의 집행을 위해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점에서 헤겔은 법의 본질 속에 일정한 자의성(Willkür) 이 불가피하게 존재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자의성은 법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보편적 개념이 개별적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판사의 재량(discretion)은 법의 결함이 아니라, 보편적 법을 현실 속 개별 사건에 매개하는 필수적인 기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현대 법철학에서 논의되는 재량권(discretion) 이론과도 직접 연결되는 헤겔의 중요한 통찰이다.

b. 법의 현존(Dasein)

§215

법이 구속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의식의 권리(§132 및 그에 대한 주석 참조)의 관점에서 볼 때, 법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어야 한다. 시민 누구도 읽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법을 걸어 두었던 폭군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행위는, 오늘날 법을 방대한 학술서와 상반된 판례집, 외국어로 쓰인 전문 용어 속에 파묻어 두어 현재 유효한 법에 관한 지식(Kenntnis)을 오직 그것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들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과 정확히 같은 종류의 부정의(Unrecht)이다. 반대로 자기 국민에게 법률을 하나의 집성으로 제공한 사람들―비록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처럼 체계 없는 집성이었더라도, 아니면 더 나아가 질서 있고 체계적인 법전(code)의 형태로 국가의 법(Law of the Land)을 마련한 사람들이었더라도―그들은 자기 민족에게 가장 위대한 은인들이었으며, 마땅히 찬양과 감사를 받을 만하다. 그들이 행한 일은 동시에 위대한 정의의 실현이었다.

추가(Addition)

법률가 집단(Juristenstand)은 법에 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종종 그것을 자신들의 독점물처럼 여기며,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은 괴테의 색채이론을 비판했는데, 그는 물리학자가 아니라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발이 맞는지를 알기 위해 반드시 구두장이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편적 관심사인 법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특정한 직업 집단에 속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권리(Recht)는 자유와 관련되며, 자유는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하고 가장 신성한 소유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인간에게 실제로 구속력을 가지려면, 인간은 반드시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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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5에서 헤겔은 법은 반드시 공개되어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원리를 제시한다. 앞의 §214에서는 법을 개별 사건에 적용할 때 필연적으로 판사의 재량이 개입한다고 설명했는데, 이제 헤겔은 그러한 법이 시민에게 정당한 권위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누구나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이 전문가들의 언어나 방대한 판례, 난해한 학술서 속에 숨겨져 있다면, 그것은 높은 곳에 법을 걸어 시민이 읽지 못하게 했던 폭군 디오니시우스의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비공개된 법은 자유로운 시민을 위한 법이 아니라 전문가 집단의 지배 수단이 된다. 여기서 헤겔은 당시 유럽의 법률 실무도 비판한다. 법률가들은 전문성을 이유로 법을 자신들의 독점 영역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법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법은 특정 직업집단의 사적 재산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 모두의 공적 자산이다. 괴테가 물리학자가 아니더라도 색채에 대해 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시민 역시 법률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지배하는 법을 이해할 권리를 가진다. 이 점은 헤겔의 자유 개념과도 직접 연결된다. 자유는 단순히 국가가 보장해 주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을 규정하는 법을 스스로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승인하는 상태이다. 따라서 법이 일반 시민에게 이해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면, 그 법은 아무리 형식적으로 유효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 법이라고 할 수 없다. §215는 이러한 의미에서 법의 공개성(publicity) 과 법에 대한 시민의 접근권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216

한편으로는 공적인 법전에는 단순하고 보편적인 규정이 요구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규율되어야 하는 유한한 대상(the finite material) 의 본성은 끊임없이 새로운 규정을 요구한다. 따라서 법의 체계는 한편으로는 완결되고 자기 안에서 충족된 전체여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법 규정이 계속해서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그 자체로는 변하지 않는 보편적 원리들이 특수한 경우들 속으로 점점 더 전문화(specialization)되는 데서 생겨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완전한 법전을 가질 권리는 그대로 유지되며, 동시에 이러한 단순하고 보편적인 원리들은 그것들의 개별적 세분화와는 구별되어, 또 그것을 참조하지 않고도 이해되고 서술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 역시 그대로 유지된다.

입법이 복잡해지는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성적인 것, 즉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하여 정당한 것(rightful in and for itself) 이 부정의(Unrecht)를 포함하고 따라서 단지 역사적 의미만을 갖는 원시적 제도들 속으로 점진적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로마의 제도들(§180 주석 참조)과 봉건법 등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러나 유한한 대상 자체의 본성은, 그 자체로 보편적이며 또한 그 자체로 이성적인 규정들이 그것에 적용될 때 무한한 진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법전이 절대적으로 완전하여 더 이상 어떠한 규정도 추가될 수 없을 정도로 포괄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이러한 요구는 주로 독일인들의 고질적인 집착이라고 헤겔은 덧붙인다). 또한 그러한 완전성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실제화하지 않는 것 역시 잘못이다. 이 두 가지 오류는 모두 민법(Privatrecht)과 같은 유한한 대상의 본성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민법의 이른바 완전성이란 완성을 향한 영속적인 접근(perennial approximation) 일 뿐이며, 또한 이성의 보편성과 오성의 보편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후자의 보편성을 유한한 대상과 개별성(Einzelheit)에 적용하는 방식을 오해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한한 대상은 본질적으로 무한한(infinite) 것이다. 따라서 “더 좋은 것이 선의 가장 큰 적이다(Le plus grand ennemi du bien, c’est le mieux)“라는 말은 공허한 추론과 반성의 상식이 아니라 참된 상식을 표현하는 말이다.

추가(Addition)

완전성(completeness)이란 어떤 영역에 속하는 개별 항목들을 빠짐없이 수집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의미에서는 어떤 학문이나 지식(Kenntnis)도 완전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이나 다른 학문이 아직 불완전하다고 말할 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더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으니 나머지를 기다려야 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옳지 않다. 기하학에서도 이미 하나의 닫힌 체계처럼 보이는 분야 안에서 새로운 규정들이 계속 등장하며, 철학 역시 보편적 이념을 다루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세분화와 전개가 가능하다. 보편적 법은 과거에는 십계명과 같은 형태였다. 따라서 법전은 결코 완전할 수 없으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법도 제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불합리이다. 더욱이 공허한 반성은 모든 법전이 개선될 수 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언제나 더 위대하고, 더 고상하며, 더 아름다운 것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된 나무는 새로운 가지를 계속 뻗는다고 해서 새로운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장차 더 많은 가지가 자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무를 심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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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6에서 헤겔은 왜 법전은 완전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결코 완성될 수 없는가라는 역설을 설명한다. 법의 기본 원리는 단순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은 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 사회는 끝없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므로 그 원리를 적용하는 규정들은 무한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법전의 원리는 유한하지만, 적용은 사실상 무한하다. 헤겔은 당시 독일 법학의 경향도 비판한다. 한쪽에서는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규정하는 완벽한 법전을 요구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완벽함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성문화 자체를 회의했다. 헤겔은 양쪽 모두 오해라고 본다. 법전은 원리에서는 완결적일 수 있지만, 현실에 대한 적용은 끝없이 확장된다. 따라서 법은 언제나 수정되고 보완되지만, 그렇다고 법전의 체계 자체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다시 이성과 오성의 차이가 중요해진다. 이성(Vernunft) 은 보편 원리 자체를 세우지만, 오성(Verstand) 은 그 원리를 현실의 수많은 사례에 적용하면서 점점 더 세분화한다. 따라서 법조문이 계속 늘어나는 것은 이성의 변화가 아니라 오성의 적용이 확대되는 결과이다. 마지막의 나무 비유는 헤겔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좋은 나무는 살아 있으므로 계속 가지를 뻗는다. 가지가 계속 생긴다는 이유로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마찬가지로 법전이 앞으로도 계속 수정될 것이라는 이유로 성문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헤겔에게 살아 있는 법은 완결된 원리와 끝없는 발전을 동시에 포함하는 체계이다.

§217

시민사회에서 그 자체의 권리(right in itself) 가 법(law)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직접적이고 추상적인 존재(Dasein)만을 가졌던 나의 개별적 권리(individual right) 역시, 그것의 존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existierenden) 보편적 의지와 보편적 인식의 일부로 승인될 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따라서 재산의 취득과 그것에 관한 거래는 반드시 그러한 존재가 그것들에게 부여하는 형식에 따라 이루어지고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재산은 계약(contract)에 기초하며, 또한 법 앞에서 그것을 증명하고 유효하게 만드는 여러 법적 형식(formalities) 에 기초하게 된다.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취득 방식과 권원(titles)(§54 이하 참조)은 시민사회에서는 사실상 폐기되며, 오직 예외적인 개인적 사건이나 제한된 경우에만 나타난다. 주관성 속에 머무는 감정(feeling)도, 자신의 추상적 본질에 집착하는 반성(reflection)도 이러한 형식들을 거부한다. 반대로 죽은 오성(dead understanding)은 사태(Sache) 자체보다 이러한 형식들을 더 중시하며 그것들을 끝없이 증식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Bildung)의 과정은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형식을 지닌 내용에서 출발하여, 길고 힘든 과정을 거쳐 그 내용에 적합한 사유(thought)의 형식에 도달하고, 마침내 그 내용에 단순하면서도 적절한 표현을 부여한다. 권리의 발전도 바로 이러한 과정을 따른다. 권리의 발전이 아직 시작 단계에 있을 때에는 의식(ceremonies)과 형식(formalities)이 지나치게 복잡하게 발달하며, 사람들은 사태 자체보다는 그 상징(symbol)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로마법에서도, 사유에 의한 규정과 적절한 표현 방식으로 대체되기보다는, 오래된 의식에서 유래한 수많은 규정과 특히 일정한 관용구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추가(Addition)

권리가 그 자체의 모습대로 정립(posited)될 때, 그것은 곧 법이 된다. 나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던 물건을 점유하여 재산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재산은 사회 속에서 나의 것으로 인정되고 공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에는 재산과 관련된 여러 형식들이 존재한다. 경계석(boundary stones)은 다른 사람들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세워지고, 저당부와 토지대장(property registers)도 작성된다. 시민사회에서 대부분의 재산은 계약에 기초하며, 계약의 형식 또한 확정적이고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형식을 싫어하여, 국가가 수수료(Obrigkeit)를 거두기 위해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거나,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훼손하는 불쾌한 절차라고 여길 수도 있다. “사람의 말이 곧 계약이다(a man’s word is his bond).“라는 속담을 들며 이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본질은 그 자체로 권리인 것이 동시에 권리로서 공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나의 의지는 이성적 의지이며, 따라서 그것은 타인에게도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주관성과 타인의 주관성은 뒤로 물러나야 하며, 의지는 오직 이러한 형식이 부여하는 안정성, 확실성, 객관성을 획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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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7에서 헤겔은 왜 현대사회에서는 계약서·등기·등록 같은 형식이 반드시 필요한가를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절차를 관료주의나 형식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헤겔에게 이러한 형식은 권리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현실 속에 존재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예를 들어 내가 땅을 샀다고 하자. 내가 마음속으로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권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계약을 체결하고, 등기를 하고, 사회가 그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그 자체의 권리’가 ‘현실의 법’**이 된다. 이것이 앞 절들에서 계속 등장했던 Dasein(현존, 현실적 존재) 의 의미이다. 헤겔은 여기서 두 가지 극단을 동시에 비판한다. 하나는 형식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만 믿으면 되지 계약서가 왜 필요한가?“라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형식만 중시하는 오성이다. 이들은 계약의 목적은 잊고 도장, 문구, 절차만 끝없이 늘린다. 헤겔의 입장은 그 중간이다. 형식은 내용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내용도 형식 없이는 객관적 현실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계약, 등기, 토지대장 같은 제도는 단순한 행정절차가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 의지를 모두가 인정하는 객관적 권리로 전환하는 매개인 것이다. 이 절은 현대 법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헤겔은 법의 본질은 개인의 의사 자체가 아니라, 그 의사가 공적으로 승인되는 형식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법적 형식은 권리를 제한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권리를 보편적으로 인정받게 만드는 조건이다.

§218

재산(property)과 인격(personality)이 시민사회 안에서 법적 승인과 효력을 획득함에 따라, 범죄(crime)는 더 이상 단지 주관적이고 무한한 인격(subjective infinite personality) 에 대한 침해(Verletzung)가 아니라, 그 자체로 안정성과 강고함을 지닌 보편적 실체(the universal Sache) 에 대한 침해가 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범죄가 사회 전체에 대한 위해가 될 수 있다는 견해가 생겨난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범죄의 중대성을 더욱 크게 만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힘이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침해가 갖는 외적인 중요성은 오히려 감소하며, 그 결과 처벌은 더욱 관대해진다. 사회 구성원 한 사람에게 가해진 침해가 곧 모든 구성원에 대한 침해라는 사실은 범죄의 개념(Begriff)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범죄의 현실적 존재(Existenz) 와 관련해서만 그러하다. 왜냐하면 이제 그 침해는 직접 피해를 입은 개인의 존재(Dasein)만이 아니라 시민사회 전체의 의식과 사회 구성원들의 표상(Vorstellung)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영웅시대, 즉 고대 비극에서 볼 수 있듯이, 시민들은 왕가의 구성원들끼리 서로에게 저지른 범죄를 자신들에 대한 범죄로 여기지 않았다. 즉자적 범죄(crime in itself) 는 무한한 침해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 속에 존재하는(Dasein) 이상, 그 침해는 질적·양적 차이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96 참조). 그리고 범죄의 현실적 존재는 본질적으로 법의 효력에 대한 표상(Vorstellung)과 의식으로 규정되므로, 시민사회에 대한 위험성 자체가 범죄의 중대성을 결정하는 하나의 기준, 또는 질적 규정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성이나 질적 성격은 시민사회의 상태(condition)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이 몇 푼 또는 순무 한 개를 훔친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보다 수백 배나 더 큰 절도에 대해서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부과하기도 하는 이유이다. 범죄가 시민사회 전체를 위협한다는 관점은 겉으로 보기에는 범죄를 더욱 무겁게 취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형벌을 완화시키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해 왔다. 그러므로 형법전은 본질적으로 그 시대와 그 시민사회의 상태의 산물이다.

추가(Addition)

사회에서 저질러진 범죄는 더 중대한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동시에 더 가볍게 처벌된다는 것은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가 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범죄가 곧 권리로 인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면, 범죄는 사회 전체와 비교할 때 언제나 단지 개별적이고 불안정하며 고립된 현상으로 나타난다. 사회 자체의 안정성은 범죄를 점점 더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며, 범죄는 의식적인 악의 산물이라기보다 자연적 충동의 산물처럼 보이게 된다. 따라서 처벌 역시 이전보다 완화된다. 반대로 사회 자체가 아직 내적으로 불안정하다면, 처벌은 본보기를 세우기 위해 더욱 엄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형벌은 범죄라는 본보기에 맞서는 또 하나의 반대 사례(counter-example)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이미 내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면, 범죄의 현실적 존재(positedness)는 매우 약해지고, 따라서 그것을 폐기(Aufhebung)하는 형벌 역시 그에 상응하는 정도만 가지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가혹한 처벌도 온건한 처벌도 각각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에 비추어 보면 모두 정당할 수 있다. 하나의 형법전이 모든 시대에 똑같이 타당할 수는 없다. 범죄는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적 존재(Scheinexistenz) 이며, 시대에 따라 사회가 그것을 더 강하게 혹은 더 약하게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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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절은 헤겔의 형벌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는 “범죄가 사회 전체를 공격하는 것이므로 더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헤겔은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다. 시민사회가 충분히 안정되고 법질서가 굳건할수록 범죄는 사회 전체를 흔드는 사건이 아니라 일시적인 예외로 보인다. 따라서 사회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과도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안정된 사회일수록 형벌은 오히려 온건해질 수 있다. 반대로 사회가 불안정한 시대에는 범죄 하나가 사회 전체를 흔들 수 있다. 따라서 형벌은 단순히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상징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고, 그 결과 더욱 엄격해진다. 헤겔이 “몇 푼을 훔쳐도 사형을 선고하는 시대가 있었고, 오늘날에는 거액 절도도 훨씬 가볍게 처벌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이를 단순히 인도주의의 발전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형벌의 정도는 시민사회의 객관적 안정성과 자기 확신의 정도를 반영한다. 따라서 헤겔에게 형법은 영원불변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각 시대 시민사회의 자기 이해와 자기 안정성을 표현하는 제도이다. 같은 범죄라도 사회가 얼마나 성숙하고 안정되어 있는가에 따라 적절한 형벌의 수준은 달라질 수 있으며, 이것이 “형법전은 그 시대와 시민사회의 상태의 산물”이라는 마지막 문장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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