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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제는 옷을 입고 있지 않다
1976년 ‘포르노그래피 및 미디어의 폭력에 반대하는 여성 WAVPM’이 등장여 197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페미니즘 관점 회의’를 열었다. 이 회합은 재빠르게 뉴욕 시의 ‘포르노그래피에 반대하는 여성 WAP’를 형성하는 데 불을 붙였고, 포르노그래피는 인기 있는 페미니즘 쟁점으로 급부상했다.
1978년 당시에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우월주의의 문화적 표현을 고발하고, 다른 가치를 지닌 새로운 예술, 소설, 아동문학, 영화, 학문적 작업들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대중매체까지도 변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문제가 되는 영역이나 활동 분야의 폐지를 요구한 적은 없었다. 포르노그래피는 미디어나 재현의 다른 범주와 달리 페미니스트들이 회복시킬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취급되었다.
별다른 논쟁 없이도, 반포르노 주장은 강제적인 도그마이자 성급한 통설이 되었다. 근거가 없으며 종종 이상하기까지 한 주장들은 의문시되지 않는 가정이 되었다. 포르노그래피는 종종 단순히 폭력과 동일시되곤 했다. 반포르노 입장이나 결론에 의구심을 가진 이들도 종종 반포르노 지지자들의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들로 표현했다.
선동가들은 일반적으로 인화성이 높은 이미지를 사용해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이성적 토론의 범위를 넘어 증오하게 만드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런 상황이 포르노 ‘논쟁’에서 발생했다. 어떤 담론이 양극화될 때, 이 논쟁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표현된 의견의 양극단 사이에 진실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종종 편견과 증오를 선동하는 이들의 메시지가 그들이 받아야 할 것보다 더 많은 신뢰를 받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위험하다. 포르노 ‘논쟁’에서는 이런 일들이 너무 자주 발생한다.
‘포르노그래피 문제’, 적어도 통상적으로 제시된 대로 보면 거짓된 문제다. 포르노그래피는 자신의 책임이 아닌 문제에 대한 손쉬운, 순종적인, 과잉 결정된 희생양이 되고 있다.
가정들, 예상들, 그리고 정의들
포르노그래피와 폭력의 융합
반포르노 진영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은 포르노그래피가 폭력적이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는 무엇을 묘사하든 그 성격과 내용이 폭력적이고/이거나 성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폭력 행위를 묘사하는 포르노그래피는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포르노 전체를 폭력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주요한 ‘증거로’ 사용되는 S/M 포르노는 상업적 포르노에서 아주 적은 비율을 차지할 뿐이며, 한정된 소수를 위한 것이다.
S/M물은 해석에 필요한 관습을 이해하고 있는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 사도마조히즘은 폭력이 아니라 서로의 안전과 쾌락을 보장하기 위해서 마니아들이 수행하는 의식이자 계약에 근거한 섹스 플레이의 일종이다. S/M 판타지가 가지고 있는 강압과 성행위라는 이미지는 외부 사람들에게는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사도마조히즘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 오히려 가장 상업적인 S/M 포르노를 제작하고 있으며, S/M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S/M 포르노는 일반적인 S/M 행위가 아니라 제작자의 편견을 반영하곤 한다.
WAVPM이 가장 먼저 시작하고 WAP가 채택한 슬라이드 쇼와 영화는 반포르노 집단의 기본적인 조직 도구가 되어왔다. 슬라이드 쇼와 영화는 포르노그래피의 표면적 폭력을 ‘증명하기’ 위해 포르노그래피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는 S/M물이나 폭력적이고 역겨운 포르노 이미지 표본을 전시한다. 이러한 나쁜 예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효과적이지만 무책임하다. 이는 부정적인 전형을 널리 알리는 전통적인 방식이며, 다양한 형태의 인종주의, 심한 편견, 증오와 외국인 혐오증을 전파하기 위해 선호되는 수사적 전략이다.
포르노그래피가 다른 매중매체보다 더 폭력적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신뢰할 만한 비교연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전체적으로 볼 때, 포르노그래피에는 다른 주류 영화, 텔레비전 혹은 소설보다 폭력에 관한 이미지나 묘사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접하는 미디어는 모두 극단적으로 폭력적이며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종 성적인 동시에 젠더 특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사실이다. 저녁에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보내면, 치명적인 다중추돌 사고, 총격, 주먹다짐, 강간, 그리고 여러 끔찍한 악당들에게 위협받는 여성을 보게 된다. 매춘부들과 성 노동자들은 경찰물과 탐정물에서 종종 폭력의 희생자로 등장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들은 냉혹하게 방치되고 살해당한다. 여성에 대한 끔찍하고 선정적인 폭력을 특징으로 하는 슬래셔 무비도 수십 편에 달한다. 이러한 미디어의 다수는 성화되어 있지만, 성적으로 노골적이거나 법적으로 외설에 해당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 결과 이들은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새로운 법적 장치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을 것이다. 만약 문제가 폭력이라면, 왜 성적으로 노골적인 미디어를 지목하는가?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미디어보다 성적으로 노골적인 미디어를 겨냥한 사회운동이나 법적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반포르노 분석은 여성 종속의 창출, 유지, 재현에 포르노그래피가 기여한다는 과장된 인과론을 암묵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젠더 불평등과 여성을 업신여기는 태도는 이 사회에 고유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광고와 포르노그래피를 포함한 거의 모든 미디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강간, 여성에 대한 폭력, 억압, 착취,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권장하고 정당화하는 태도가 인간 역사에 존재했으며, 상업적 성애물의 등장보다 수천 년 앞서 존재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의들: 포르노그래피란 무엇인가?
『아메리칸 헤리티지 영어사전』(173)에 따르면, 포르노그래피는 “음탕한 느낌을 자극하기 위한 의도로 쓰여진, 그려진, 혹은 다른 형태의 의사소통”, 에로티카는 “성적 욕망에 관련되거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해 고안된 문학이나 예술”이다. 에로티카와 포르노그래피 둘 다 그 자체로는 불법이 아니다. ‘외설’은 법적으로 제한되는 성적 발언이나 이미지의 범주다. 최근까지 미국에서 포르노그래피가 법적 범주가 아니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약 100년간, 성적으로 노골적인 것들은 외설적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만 불법이 되었다. 포르노그래피는 법이 아니라 판단의 용어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다른 미디어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기 보다는 개선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왔다. 포르노그래피를 다른 미디어와 구분하는 것은 그 이미지가 가진 폭력서의 양이나 정치적 올바름의 질이 아니라 성적인 노골성의 정도이다. 그렇다면 왜 포르노그래피만 페미니스트의 구제를 받을 수 없으며, 포르노그래피의 박멸을 여성의 자유를 위한 조건으로 여겨지는가? 이 기막힌 논리의 비약은 단순히 포르노그래피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함으로써 가능하다. 즉, 포르노그래피는 정의상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말이다.
성적으로 노골적인 모든 매체를 억압하자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거의 없기 때문에, 많은 반포르노 진술은 성적으로 노골적인 매체를 다 포르노그래피라고 하는 건 아니라고 부인하는 성명을 포함하고 있다. 그 나머지 범주는 ‘에로티카’가 된다. ‘포르노그래피’(페니미스트들이 마땅히 싸워야만 하는 불쾌한 것들)와 ‘에로티카’(페미니스트들이 승인할 수 있는 나머지 성적인 것들)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은 무엇이 에로티카와 포르노그래피를 구분하는지를 정확히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 문제가 분명해진다. 에로티카와 포르노그래피를 정의하려는 대부분의 시도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에로티카이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포르노그래피이다”라는 진술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성교육 영화의 상당수를 제작하고 있는 이성애 남성들과 상업 포르노 제작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이성애 남성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상업적 포르노와 성교육 영화 모두 폭력을 촉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소수의 성교육 영화만이 페미니즘에 귀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게 이러한 유사성은 더 많은 여성들이 제작자, 작가와 감독 등의 두 영역 모두에 진입하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몇몇 반포르노 활동가들에게 이러한 유사성은 성교육 영화들을 그들의 일반적인 포르노그래피 검열 대상에 포함시키고, 반포르노 캠페인에서 기인한 법적 처벌과 책임을 묻는 구실이 되었다.
누가 무엇을 ‘포르노그래피적’이라고 결정하는가, 레즈비언 섹슈얼리니티는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그리고 레즈비언은 어떤 읽을거리를 선택해야 하는가? ‘에로티카’가 합의될 수 없다면, 성교육 영화들이 ‘포르노그래피’의 정의에 부합한다면, 그리고 토착적 레즈비언 섹스 잡지가 ‘이성애적 포르노그래피’라면, 어떤 성적인 이미지가 페미니스트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법적인 괴롭힘에서 면제될 만큼 ‘포르노그래피적이지 않은가?’
포르노의 폐해: 혐의, 주장, 그리고 창조적인 인과론
연구
미디어에서의 폭력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염려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염려보다는 정당하다. 현재 미국에서 미디어에서의 섹스 재현에 대한 법적 규제들이 많은 반면, 미디어에서의 폭력에 대한 법적 금지는 없다. 엄청난 양의 미더오 폭력은 손대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반면, 성적으로 노골적인 재현에 대해서는 많은 제한을 두는 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포르노는 ‘학대의 다큐멘터리’인가?
캐서린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는 문자 그대로 학대당하는 여성에 대한 사진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학대적이라는 행동들은(묶이고, 고문당하고, 모욕당하고, 구타당하고) 변태적인 성행위가 아닌 평범한 일상용어라고 생각한다. 소변을 받고, 대변을 먹도록 강요당하고, 살해당하는 등의 이미지는 다수의 포르노그래피에서 부재하다. 오히려 매 맞고 살해당하는 여성들은 포르노그래피보다 황금 시간대 텔레비전과 할리우드 영화에서 더 많이 나온다.
또한 그는 포르노그래피에 나온 여성들이 “단지 끌려가서 이용되는” 여성들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가 다른 미디어를 볼 때 배우들이 보여지는 장면 그대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미지에서 나타나는 강압의 정도가 출연 배우들에 대한 대우를 보여주는 지침으로서 신뢰할 만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매키넌은 포르노를 “들어가기도 힘든 목구멍 속에 페니스를 넣으며 강간한다.”라고 묘사한다. 많은 게이 남성들과 또 많은 수의 이성애자 여성들이 자지 빨기를 즐긴다. 심지어 딜도를 핥는 것을 즐기는 레즈비언도 있다. 포르노를 학대의 다큐멘터리로 보는 생각에는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이 배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성적 다양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결여하고 있다.
반포르노 활동가들은 종종 성 산업에서 (그리고 성 산업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고 싶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한 분석의 대부분은 성 노동자들을 향한 거들먹거리는 태도와 멸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포르노그래피가 성적 학대의 다큐멘터리라는 생각은 성 산업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모두 예외 없이 강요당하고 있고, ‘포르노 제작자’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가정한다. 이는 악의에 찬 스테레오타입이고,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강화하고 있기에 더 부적절하다.
실제로 어떤 성 노동자가 더 많은 착취와 위험한 근무 환경에 노출되는가는 낙인, 불법성, 혹은 성 노동의 주변적 합법성으로 인한 결과이다. 낙인찍힌 혹은 불법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같은 보호, 특권, 그리고 전직 기회를 획득하기가 어렵다. 그들이 노동자로서 보호를 위해 노조를 만들거나 집결하는 것은 더 어렵다.
우리는 어디에서 일하는지에 상관없이 여성들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낙인과 법적 규제는 성 산업 안에 있는 여성들을 취약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 노동자를 지원하기를 원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성 노동을 비범죄화, 합헙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스캔들이나 감금의 위협에서 안전한 성 노동자들은 더 나은 지위에서 자신의 일과 작업환경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갖게 될 수 있다.
포르노가 여성 종속의 핵심에 있는가?
1960년대 이래로 페미니즘 이론가들과 학자들은 여성 종속과 억압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탐구해왔다. 그 원인에는 사유재산, 국가 사회의 형성, 노동의 성적 분업, 경제적 계급의 출현, 종교, 교육적 배치, 문화적 구조, 가족과 친족 시스템, 심리학적 요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생산에 대한 통제 등이 포함된다. 나는 포르노그래피나 매춘에서 여성의 종속이 유래했다는 설명 중에서 포르노 논쟁보다 선행하는 것을 떠올릴 수가 없다. 그런 입장을 지지할 어떤 신뢰할만한 역사적, 인류학적, 사회학적 논의를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현재 서구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포르노그래피와 매춘은 근대적인 현상이다.
왜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반대는 페미니즘에서 그토록 수용될 수 있는가
1. 포르노그래피는 이 사회에서 이미 깊이 낙인찍혀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고, 그 오명의 아우라에 전염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낙인은 또한 사람들이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잘못된 진술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2. 전통적으로 포르노그래피는 남성의 영역이었다. 성 산업에서 일하지 않는 대부분의 여성은 포르노물과 그 의미, 해석 관습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과장된 기술을 받아들이기 쉽다. 비디오 혁명으로 여성들은 영화를 빌려서 자신의 집에서 편안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여성들이 성인용 극장과 서점에 익숙해질 것이다.
3. 대부분의 포르노그래피는 성차별적이다. 전통적으로 포르노그래피는 남성 관객과 주류 남성의 가치를 겨냥했다. 결과적으로 가장 상업적인 포르노에서도 여성은 평균적인 남성 소비자들이 자위할 때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재현할 뿐이다. 대다수의 포르노그래피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잘못 재현하며, 남성들이 유혹의 기술을 배우게 하거나, 그들의 섹스 파트너를 욕구를 가진 독립된 인간으로 생각하도록 권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포르노산업에 연루됨에 따라 포르노 산업은 이미 변화하는 중이다. 더구나 포르노 산업은 여성을 잠재적 소비자로서 인지하고 여성 관객에게 호소하기 위한 의도로 상품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4. 상업적 포르노는 할리우드 영화처럼 아름답게 꾸민 섹스가 아니다. 대부분의 포르노는 염가로 제작되기 때문에 싸 보인다. 5. 이 사회에서 우리는 나체 상태에 있거나 간음하거나 다른 성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일이 없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섹스는 뭔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하고, 섹스를 할 때 우스꽝스러워 보일까 봐 두려워한다. 반포르노 이데올로기는 그런 감정을 조작해서 사랑스럽지 않은 섹스는 추하고 존엄하지 않으며 부끄러운 것이라는 메시지를 강화한다.
6. 정통파 페미니스트들은 성적으로 노골적인 매체에 대해 염려한다. 그러나 포르노에는 발전의 여지가 충분하며, 잘 만들어지고 창조적인, 더 다양한, 더 여성의 판타지에 맞춰진, 그리고 더 페미니즘 인식에서 우러난 포르노그래피가 나올 여지도 충분하다. 이는 더 많은 여성들과 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성적으로 노골적인 미디어 산업에 관계할 때에만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반 포르노 정치의 대가와 위험
포르노그래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실제 폭력을 하찮아 보이게 만들고, 그 폭력의 심각성을 무시하게 만든다. 또한 반포르노 운동은 여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쟁점에서 관심을 딴 데로 돌리게 하고, 여성운동의 힘을 소모시킨다. 포르노는 몇백 년간 변하지 않은 남성 특권 같은 다루기 힘든 문제보다 더 섹시한 주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포르노 캠페인은 오도되었으며, 효과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달하려고 주장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반포르노 정치는 무고하지만 멸시당하는 행위들, 미디어, 그리고 개인들을 그들의 책임이 아닌 문제들에 대한 희생양으로 삼는다. 반포르노 정치는 포르노그래피, 매춘, 변태(도착)에 대한 낙인과 법적 처벌의 증가라는 결과를 내도록 고안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관념이나 괴물이 아니다. 성적으로 노골적인 매체에 대한 범죄화가 늘어나고 성적 다양성에 대한 낙인이 증가한 결과가 바로 현실이다.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은 우익과 그들의 반동적인 정책에 놀아나고 있다. 직접적인 음모는 없을지 몰라도, 분명히 의도와 목적의 융합이 있다. 우리는 몇 년 안에 보수적인 입법 물결이 지방, 주, 그리고 연방 단계를 통과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엄청난 위험의 시대이다. 우리는 사회적 태도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법적 규제가 거대한 변화를 경험하는 시기에 놓여 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법, 정책, 그리고 믿음은 페미니즘, 여성, 성 노동자들, 레즈비언, 게이 남성, 그리고 다른 성소수자들을 몇십 년 간 괴롭힐 것이다.
페미니즘과 성 정치
페미니즘 운동이 다가올 성적 폭풍에 이미 먹이를 주었다는 것은 비극적이다. 반포르노 이데올로기는 자신들의 모든 표명을 통해 성 정치에서 진보적 목소리로서의 여성운동을 훼손했다. 여성운동이 성적 자유에 대한 더 이상의 침식을 반대한다는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페미니즘은 포르노와 싸우는 대신 검열에 반대하고, 매춘의 비범죄화를 지지하고, 모든 외설법의 폐지를 요청하고, 성 노동자들의 권리와 성 산업에서 관리직에 있는 여성들, 성적으로 노골적인 매체의 가능성, 젊은이들에 대한 성교육을 지지하고, 성적 소수자의 권리와 성적 다양성의 정당성에 동의해야 한다. 이는 페미니즘이 성 정책 문제에 있어 리더십과 신뢰성을 회복하게 해줄 것이다.
논의할 거리
1. 포르노그래피에 여성들이 관여하면 발전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하는데(p.523), 꼭 여성들이 참여해서 포르노그래피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2. 이 장에선 포르노그래피의 연령 규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있는데요. 연령 규제에 대해서는 어떻게들 생각하시나요?
참고도서 사서들이 개별적으로 내게 와서 여성 자선가에 대한 섹션이나 수감 여성들에 대한 책이 내 관심을 끌 것이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자선에 대한 책은 실제로 사교계 명사 인명록에 있는 여성 인맥을 통해 연애했던 부유한 양성애 여성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수감 문학은 중산층 사회복지사가 자신들의 감독 아래에 있는, 대부분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들의 성생활에 분개하여 쓴 격노의 보고로 가득 차 있었다(타 인종 간의 정사는 특히 더 큰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히르슈펠트는 (주로 베를린의) 동성애 여성 및 남성의 공동체 생활과 모임 장소들에 대한 장에서 심장박동의 사회학을 상세하게 전개시켰다. 그는 동성애쟈들의 대중 극장 사용, 동성애 목욕탕, 남성과 여성 모두를 위한 드랙(어떤 성별의 사람이 반대 성별로 차려입고 반대 성별처럼 행동하는 것) 파티, 동성애자들이 선호하는 호텔과 게스트하우스, 공원과 화장실에서 섹스 파트너 찾아다니기, 파트너를 찾기 위한 개인 광고 사용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하위문화에 근거한 이 도시의 중요성은 “거의 날마다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며, 이곳에 와서야 마치 해방된 것처럼 느끼는 많은 이들”에 의해 증명되며, “지방에서 온 동성애자들이 그런 바에 처음 발을 들여놓고 감정에 복받쳐 격하게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을 보곤 했다”고 언급했다.
지질학적 기록에서, 부분적으로는 풍부한 생물 형태를 만들어내는 조건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화석 형식 속에 그것을 보존하기에 좋은 조건 때문에, 어떤 지층은 화석이 풍부해진다. 그와 유사하게 어떤 시기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은 퀴어 지식을 번성하게 하는 데 유리한 반면, 다른 조건들은 그것을 보존하거나 아예 파괴하도록 강제한다. 퀴어 지식의 퇴적 형성을 발견하고, 파헤치고, 목록을 만들고,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활용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다음 세대에 달려 있다. 안타깝게도 퀴어 지식의 신뢰할 만한 전승을 보장할 지속적인 구조적 기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그 지식들을 잃어버리고, 묻어버리고, 잊는다.
퀴어 연구의 과거에 대한 기억상실증이 만연되어 있다. 나는 LGBTQ 연구가 1990년대 어느 때에 시작되었다고 가정하는 이들에게 계속 충격을 받곤 한다. 퀴어 학문에서 중요한 것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현재의 흐름, 최신 유행, 번쩍거리는 새로움에 의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우리가 현재를 형성한 그리고 현재가 깊게 뿌리 박혀 있는 더 긴 과정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한다. 평가 가능하고, 입증 가능하며, 갱신 가능하고, 비판 가능하고, 가공 가능하고, 향상될 수 있으며, 연구의 새로운 길을 제공하는 데 사용 가능한 지식의 축적으로부터 모든 학문적 기획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퀴어 연구의 동시대 정전에 더 오래된 자료를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좀 더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제한된 기억의 원인은 스타일보다는 구조적인 데 있으며, 교육과정의 결정보다는 제도적 방해에 의해 발생한다. 나는 보다 오래된 지식에 접근하는 데 제약을 가하는 제도적 결핍을 극복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계속해서 퀴어 지식의 보존, 전승, 발전을 보장할 조직적 구조를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더 많은 자료를 축적하는 데 힘 쓰고 더 나은 관료 체계를 세워야 한다.
많은 이들은 본능적으로 관료화라는 생각에 흠칫 놀라고 그것을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관료제와 일상이 없다면 주변성과 카리스마도 없을 것이다. 오래된 지층의 퀴어 지식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손상된 이유 중 하나는 그 지식을 생산했던 제도와 조직이 사라져버렸다는 데 있다. 퀴어한 삶은 엄청나게 멋진 폭발적 사례로 가득 차 있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아예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퀴어들에게 주변성은 넘쳐나고, 안정성은 결핍되어 있다. 막스 베버는 한번 충분히 자리를 잡은 관료제는 가장 파괴하기 어려운 사회구조 중 하나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저주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전성을 얼마간 이용할 수 있고, 퀴어 연구에서 안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자원이 요구된다. 그러나 단단해 보이는 모든 것은 심장박동 속제 사라질 수 있다. 자신의 역사를 확실하게 전하지 못한 자는 결국 자기의 역사를 잃게 되고 만다.
논의할 거리
퀴어 연구는 다른 연구들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띨까요?
퀴어 연구가 중요하다면, 연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지식이 보존되는데 참여를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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