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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연 170321(화) / 헤겔세미나 /찰스 테일러의 헤겔/헤겔 청년기 2장 발제/낭만샘
알 수 없는 사용자 2017. 3. 21. 17:24전사연 170321/ 찰스 테일러의 헤겔/헤겔 청년기 2장 발제/낭만샘
1.
1780년대 청년기를 보낸 헤겔은 당시의 표현주의적 조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조류는 인간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내의 다른 사람들과도 통일되어 있다는 생각, 소위 포괄적인 통합된 삶의 이미지는 가지고 있었는데, 헤겔은 이런 이미지의 범례를 고전기 그리스에서 발견했다. 이 외에도 두 가지 다른 요소가 그의 사유와 열망에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는 계몽의 도덕적 열망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마침내 이성을 통한 자기 규정의 자유에 이른다. 다음은 기독교였는데 이는 그가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지만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보다 훨씬 더 깊다. (101)
이 세 조류는 잠재적으로 서로 깊은 갈등 속에 있었으나 헤겔은 이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시대는 헤겔과 그의 많은 동시대인에게 자발성이 분열하고 억압된 시기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자발성을 표현적 총체성 속에서 회복하고자 했으며,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활동과 사회적 삶은 단순히 죽어 있는 공식에 의해 규제되기보다는 통일성과 선에 대한 생동적인 경험으로부터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표현적 열망은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계몽의 요청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102)
따라서 헤겔과 튀빙겐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을 그리스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을 계몽에 대한 충성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는 초자연적 권위를 내세우며, 영적인 영역과 세속적 영역 모두에 걸쳐 있는 명령의 위계질서를 지지하고 있었고, 인간 안에서 죄 많은 본성과 정신(영) 사이의 엄격한 분열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관계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그들이 이해한)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표현적 통일성의 요청과, 그리고 이성의 요청과 교환 가능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예수는 문자가 삶을 죽이는데 반해 영(정신)은 삶을 살린다고 가르친 교사였으며, 아가페(헌신적 사랑)의 자발성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러온 선생이었다. (103)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로 희망의 불꽃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점화되던 그 무렵, 헤겔과 교류하고 있던 튀빙겐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언어로 자기 자신 및 자신의 이성과 관련하여 이 세 조류(고대 그리스의 통일적 삶, 기독교, 계몽)의 모든 관점을 성찰했다. 청년 헤겔이 생각하기에 독일은 재탄생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은 계몽의 자율적 이성의 승리, 그리스의 정신에서 꽃피웠던 것의 재창출, 그리고 예수의 순수 가르침의 회복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었다. (104)
헤겔의 종교는 전통적인 경건의 종교가 아니다. 이 단계에서 계몽의 종교는 대개 칸트에 의해서 정의 되었다. 칸트적 정의가 유행한 이후 종교는 도덕성의 관점에서 고찰되었다. 이에 따르면 나는 내가 당위적으로 해야 하는 것을 종교적 신앙이나 신의 명령에 따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합리적 존재로서의 나 자신이 부여한 명령에 따라 규정한다. 사실 종교의 합리적 핵심, 즉 신에 대한 믿음과 불멸성의 토대는 최고의 선이 실현되려면 반드시 요청되는 것으로서 도덕성의 요청이다. 헤겔의 초기 글들은 우리가 칸트에서 본 것, 즉 인간은 순수한 도덕 의지의 주체로 행동할 때 성스러움에 근접하게 된다는 생각에 잘 들어맞는다.(105)
이제 종교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수많은 명제들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외적인 실천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동적인 경건으로서 전인(온전한 인간)을 위해 좋은 것을 수행할 동기를 부여하는 위대한 원천이다. 그래서 헤겔은 이 단편을 객관 종교와 주관 종교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객관 종교는 그저 신학일 뿐이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실천일 뿐이다. 주관 종교는 선과 이 선의 입안자로서의 신에 대한 인간의 생동적 경험이다. 물론 여기서 이런 경험은 신앙과 제의의 형태로 표현된다. (106)
헤겔은 사적인 종교와 민중 종교를 구분했는데 그에게 민중 종교의 가장 중요한 모델은 고대 그리스의 공적 종교들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 종교들은 사회적 삶의 필수적 일부였고, 도시의 공동의 실존을 유지하는 다른 측면들과 떨어질 수 없었으며, 심지어 도시의 정체성 형성에 본질적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재생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도덕적 자기 규정이라는 자유에 도달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성이 정열과, 혹은 정신이 감성과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자발적으로 도덕적 선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전체성과 통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헤겔이 추구하는 재생은 따라서, 그리고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그 안에 사람들이 자유롭고 분열되지 않는 그런 사회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스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그리스에서 공적 삶은 도전할 수 없는 권위에 의해 주체가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 표현, 공동의 표현이었다. (107)
헤겔은 표현적 통일의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에게 이성과 감성의 칸트식 급진적 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한 것은 인간의 오류 가능성이라는 단순한 생각보다는 오히려 이런 표현적 통일이라는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그를 루소에게 근접하게 했으며, 궁극적으로 칸트에 대항하게 했다. 그런데 온전한 인간(전인)을 포함한 이러한 유의 재생은, 헤겔에 따르면, 종교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하기 위해 종교는 철저히 주체화되어야 한다. 즉 종교는 한 인간을 자기 내부에서 통합하기 위해 어떤 교리나 실천에 대한 외적인 충성 이상이어야 하며, 생동적인 경건이어야 한다. (108)
이것은 헤겔이 이 초기 수고의 말미에 제시한 세 가지 요청으로 표현된다. 새로 태어난 종교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1)그 교설은 보편적 이성에 근거해야 한다.
2)상상, 마음, 그리고 감성이 공허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3)민중 종교는 삶의 모든 욕구, 공적인 국가 행위가 이 종교와 연결되게 하는 특성을 가져야 한다. (109)
예수는 유대 율법의 도덕성에 대항해 이성과 마음에 기초한 가르침을 제시했다. 그의 복음의 원리는 하나님의 의지였지만, 동시에 자기 마음에서 나온 “의무와 권리에 대한 살아 있는 감정”이기도 했다. 바로 이 예수는 칸트 윤리학의 요청과 표현주의적 이상을 놀랍도록 결합한다. 헤겔의 예수는 타율성을 자율성으로 대체한다. 「기독교의 실정성」 수고의 주된 목적은 예수의 종교에서 발생하는 일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종교가 어떻게 오늘날 기독교로 격하되었는지는 보여주는 것이다. (111)
기독교의 파토스는 예수의 가르침이 법의 엄격한 유지와 계율을 지키는 데 고착된 세대와 사람들에게까지 침투할 수 없었다는 데서 생겨난다. 여기서 실정 종교는 신의 의지를 마음속에서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명령했기 때문에 선을 행해야 하는 그런 종교이다.(112)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을 일단 이해할 경우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실패한 종교이다. 실패는 예수가 죽어야만 했다는 사실에서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세계는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의 기독교는 어느 정도 멜랑콜리로 특징지어지는데,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자기 기독교적 예배의 중심에 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 종교와 엄청난 대조를 이루는데, 그리스 종교에서 신은 공동체의 자기 확신과 엮여 있다. 그러나 이런 멜랑콜리는 더 나아가 심오한 분열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이 분열은 기독교가 극복하고자 했던 인간 정신적 소명과 자연 속에서의 그의 삶 사이의 균열을 의미한다. 이런 생각은 헤겔이 이런 균열의 깊이와 중요성을 의식하는 가운데 헤겔의 사유에서 점점 더 성장해간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분열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 칸트를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113)
칸트와의 갈등은 칸트적 사유의 중심인 도덕성과 경향성의 분리를 헤겔이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 처음부터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갈등은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기독교 정신과 그 운명」에서 바로 그 중심적인 생각에서 칸트와 대비가 된다. 예수는 칸트적 의미에서 ‘도덕성’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경향성과 선의 자발적 통일을 따라서 법을 초월하고 ‘완성’할 것을 설교한다. 의무와 욕망을 분리시키는 칸트에 대립하여 헤겔은 예수의 비전을 이 양자의 연합으로 본다. 이 연합에는 화해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으며, 사랑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다른 사람들과의, 그리고 자연과의 통일을 회복한 정신이다.(117)
칸트에 대한 헤겔의 주된 비판은 인간에 대한 문제이다. 헤겔은 칸트의 도덕성이 인간을 분리하여 인간의 한 측면인 이성을 다른 측면인 감성과 경향성 위에 둠으로써 “파괴할 수 없는 실정성의 잔존물”을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실정 종교의 신자들과 칸트적인 의미의 도덕적 인간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으며, 그 차이는 단지 “전자는 자신 밖에 있는 주인을 섬기는 반면 후자는 자신 안에 있는 주인을 섬긴다는 점이며, 따라서 후자는 자기 자신의 노예라는 점이다”. 도덕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노예’라는 헤겔의 주장은 인간에 대한 단순히 영특한 논의 이상으로서, 그의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118)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헤겔은 운명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자연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주변의 자연 및 인류와 지배의 관계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유대 민족은 반복되는 노예 상태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120)
운명은 형벌이다. 그러나 법의 형벌과는 달리 운명의 형벌은 삶의 거대한 흐름에 의해 부과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과 화해할 수 있고, 삶이 우리와 하나라는 사실을 볼 수 있으며, 위반을 삶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 운명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인지하며 삶은 자신의 상처를 다시 치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운명 속에서 상처받은 우리 자신의 삶을 인지하는 정신, 상처를 치유하고 분열을 극복하는 정신은 헤겔이 사랑이라고 부른 것이다. 헤겔은 그의 수고에서 기독교적 아가페(헌신적 사랑)를 이런 사랑으로 해석한다.(121)
운명은 순수한 자도 포획한다. 왜냐하면 이런 순수한 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위반으로 이끌려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의 권리를 즐겁게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며, 이 권리들을 철회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타자와 분리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용인하는 것이다. 뺨을 때린 사람에게 반대 뺨을 대는 것, 1마일을 함께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2마일을 동행하는 것 등 이런 방식으로 권리의 상처라는 우리 사이에 놓은 장벽 없이 나에게 해를 끼친 자와 화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취한 길, 헤겔이 “영혼의 아름다움”이라 부른 퇴각의 길이다. (122)
기독교의 실패에 대한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우리는 기독교에 내재한 특성들을 끌어낼 수 있다. 우선, 그리스의 종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공적 표현을 포기한, 그리고 그 근원에서 카이사르의 것과 신의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적 종교이다. 그리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런 분리는 보다 심오한 균열의 외적 표현이다. 이런 분열된 삶에서는 온전한 사랑이 통합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124)
헤겔은 교회가 성장하여 궁극적으로 세상에 확실히 토대를 형성할 때 불가피하게 겪게 될 부패를 지적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불가피하게 세상과 엮이게 되었을 때 위선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양심의 가책도 증가했다. 세상에 자리 잡은 또 다른 교회가 세상에서 권력을 가짐으로써 필연적으로 양자(교회와 세상) 모두 부패해지고 말았다. 순수함이 이미 불순함과 섞여 있을 때 불순함에 대항한 순수함의 투쟁을 “끔찍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순수함을 얻고자 하는 이런 노력은 실정적 종교로 전이 되어서 때 묻지 않은 신앙을 유지하고자 하는 투쟁이 되며, 교회사에서 아주 많이 드러나듯 박해와 이단 사냥을 산출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진실로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기독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헤겔은 자기에게 아주 중요한 세 사유의 조류를 결코 통일시키지 못한 것 같다. 기독교는 그리스의 통일성과 통합될 수 없으며, 또한 칸트의 도덕적 자유 역시 양자와 조화하지 못한다.(126)
2.
삶으로부터의 정신의 이러한 분리가 인간 규범으로부터의 무익한 타락은 아니라는 통찰과 더불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종합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헤겔은 자신의 원래 임무를 통일성의 회복과 분리의 극복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립자의 화해를 그 임무로 본다. 이전에는 분리를 단순히 타락으로, 없어져야할 것으로 봤는데, 성숙한 체계에서는 자유의 발전과 불가피하게 얽힐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의 완성이라는 요구와 인간의 역사적 곤궁 사이에 갈등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의 실현을 위한 서로 다른 요구들 사이에도 대립이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통일의 정신 속에서 분리를 단순히 제거함으로써 한 측면이 다른 측면을 일방적으로 정복한다고 해서 해소될 수 없다. 오히려 두 측면의 각각의 요구ㅠ가 통합적으로 만족될 때 다소간 통일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헤겔의 성숙한 체제가 도달하고자한-아마도 불가능한-과제이다. (130)
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새로운 경력을 시작할 때 나온 최초의 출판된 저서인 1801년의 「피히테와 셀링 철학 체계의 차이」에서 헤겔의 변화된 관점을 볼 수 있다. 그는 철학의 형식적 과제를 “분리의 지양”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를 푸는 방식이 대립자의 한쪽을 파괴하고 다른 쪽을 무한성으로 올리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분리와 동일성 둘 다 고유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름과 같은 유명한 공식이 나온다.
그러나 절대자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다. 대립과 통일은 절대자 안에서 두 측면이다.
분리의 생성은 더 이상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필연적 발전으로 간주한다. 즉 그러한 분리는 인간에 의해 회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의 자기 실현에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 실현은 인간이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부족(部族)의 상태를 깨뜨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합리적 사유만을 하고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유롭고 합리적인 주체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성에 호소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의, 한 사회의 수백만의 전통과의, 그리고 보편적 이성의 검열을 견딜 수 없는 자기 공동체의 편협한 풍습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132)
헤겔은 분리가 자유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그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보다 더 늦게 수용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인지한 이후 그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보다 더 일관되고 철저하게, 그리고 더 열렬하게 이 문제를 생각했다. 헤겔은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를 피할 수 없으면서도 본질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그는 이 새로운 전망과 더불어 역사의 개념을 어떤 인간적 운명의 필연적 전개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섭리에 대한 헤겔의 재해석이다.(133)
18세기에는 잘 결합된 우주가 인간을 향한 신의 목적에 완벽하게 부합한다는 아주 낙관적인 섭리 개념이 지배했는데 그런 생각에 반대해 헤겔은 역사는 비극적 갈등으로부터, 그런 갈등 내에서, 그런 갈등을 관통해 보다 더 높은 화해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견해를 발전시켰다. 이런 갈등이 본질적이어서 회피할 수 없다면 두 가지 목표가 서로 완성되는 보다 높은 화해가 있어야 한다. 역사는 자신이 만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움직인다. 즉 역사는 원환, 아니 오히려 나선으로서, 이 안에서 통일은 분열에 자리는 내어주고, 그런 다음 다시 높은 단계에서 회복된다. (134)
이런 의미에서 통일은 오성을 넘어서 있다. 사실 오성(Verstand)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요소들을 경험으로부터 추상하여 분석함으로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으로 인간과 세계를 대립의 범주 아래서 기술하는 사유양식인 반성(Reflection)의 과정을 거친 뒤 이성(Vernunft)의 언어로 진화된다. 합리적 자율성의 종합은 이성의 언어로 표현된 철학적 해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낭만주의자들과 갈라진다. (137)
예나 시기에 겪었던 세 번째 주요한 변화는 그의 사유의 무게 중심이 인간에서 정신(Geist)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의 정신 개념은 유신론의 초월적 신도 아니고, 인간의 정신과 단순히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 정신은 우주의 정신이지만, 이 정신적 담지자는 인간이다.(138)
헤겔의 초기 신학적 수고들에게서 인간의 재생이라는 인간 중심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숙한 헤겔은 정신을 절대자 개념으로 채택했다.(139) 인간의 자율성의 요청은 전체와의 통일성의 요청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끌린다고 알게 됨으로써 헤겔은 자신의 전체적인 사물관에서 인간 중심적 자율성의 장소를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 중심적인 자율성은 더 이상 절대적 목표일 수 없다. 그보다 더 넓은 종합 속에 놓여야 하고, 이것이 성숙한 헤겔이 하고자 한 것이다.(140)
또 성숙한 헤겔은,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를 당시 프로이센의 옹호자라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1989년의 원리들을 자기 시대의 프로이센에 구체화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강조한다. 그리고 그가 자본주의 경제의 돌진에 대항하여 예견적 불신을 보여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떤 점에서 그는 당시의 부르주아 작가들보다도 뛰어나다.
헤겔이 초기에 추구했던 재생에 대한 인간 중심적 관점은 당연히 요구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제도들의 의도된 변혁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간보다 더 큰 주제라는 정신 개념을 전개함으로써 헤겔은 의식적 인간의 목적에 의해 설명될 수 없고 오히려 정신의 보다 콘 목적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역사적 과정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제도들의 변혁은 더 이상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임무로 간주 되지 않는다. 그 임무들이 사람들에 의해 완수되더라도, 이 임무들이 완전히 실현된 이후에야 사람들의 역할이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헤겔의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라는 사상이며, 역사에 대한 회고적 이해의 사상이다. 헤겔은 이를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공식화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어서야 날갯짓을 한다.(법철학 서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보다 큰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헤겔의 사유에서 역사의 주체로 이동했는데, 이 역사의 주체는 더 이상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그가 분명히 말했듯이-정신이다. 따라서 행해져야할 것은 역사적 변혁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발전 과정에서 산출한 것을 인식하고 그렇게 산출된 것과 인간 자신이 맺는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청년 맑스가 ‘철학자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기만 해왔다고 불평했을 때 저항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143)
이 네 번째 입장 변화는 헤겔이 예나로 이주할 때쯤 발생하여 예나 시기 동안 그의 성숙한 입장으로 변해갔는데, 이런 입장의 변화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분리를 궁극적 통일성의 일부로 수용하는 것, 철학을 결정적 매체로 인정하는 것으로의 이동, 인간 중심적 이론에서 정신에 중점을 둔 이론으로의 이동, 인간의 자기 실현은 인간 자신에 의해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런 변화된 입장들이다. 인간의 자기 실현의 정점은 정신의 자기 실현으로 변화되는데, 그것은 철학적 인식에 놓여 있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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