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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광기와 습관

알 수 없는 사용자 2017. 9. 7. 09:20

2017. 9. 7

 

"습관은 광기의 불균형을 안정시키는 방법이다."

 

"지인을 만났을 때 "반가워! 오늘 어때?"라는 말하는 경우 두 사람 모두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행위를 '기만적인 것'으로 낙인찍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확실히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의 겸손한 교환은 두 사람 사이의 일종의 협약을 맺어준다. 내가 통조림화된 웃음을 통해 '진지하게' 웃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우리를 광인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규정으로 데려가는데, '진지한 거짓말'의 이러한 논리에 가담할 수 없는 주체라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광인)는 친구가 "만나서 반가워! 어때?라고 인사를 하면 "정말 나를 만나서 반가운거야 아니면 그냥 그런체 하는 거야? 누가 네게 내 상태를 염탐할 권리를 준 거지? 라고 분노를 폭발할 것이다."

 

슬라예보 지젝의 <헤겔 레스토랑> 책에는 본문 사이로 간주곡이란 형태의 글이 몇 개 들어 있다. 간주곡 2의 제목은 "광기의 역사 속의 코키토"다. '코키토'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sum)"라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에서 온 거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일체의 의식 내용은 의심할 수 있어도 의심하는 의식 그 자체, 의식하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자아의 확실성이 일체의 인식을 확실히 하는 거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명제에 대하여 내노라하는 현대 철학자의 두 거성인 푸고와 데리다가 격돌을 한다. 지젝은 간주곡 2에서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룬다.  

 

이 두 철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의 '성찰'이 광기를 포용했느냐, 배제했느냐 하는 데 있다. 푸코의 주장은 꿈이나 환영에는 진리에 의해 극복될 수 있지만, 광기는 회의하고 사유하는 주체의 자격 요건(미친 놈은 사유하는 자가 될 수 없다) 때문에 배제된다는 입장이고, 이에 반해 데리다는 데카르트가 광기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푸코는 "광기를 침묵하게 만든 이상한 폭력적 수단, 그것이 다름아닌 이성이고, 그 이성을 정립한 것이 데카르트다."라고 그의 유명한 저서 "광기의 역사' 중 고작 세 페이지를 할애한 '성찰' 부분에서 지적한다. 데리다는 여기에 딴지를 건 것이다. 광기는 감각적 오류의 한 사례이며, 따라서 데카르트가 사유에서 광기를 배재한 것은 아니라는 것. 결국 '푸코의 오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두 사람은 이 문제로 끝내 사이가 갈라진다.

 

지젝이 소개한 두 철학자의 격돌은 결국은 이 책의 주인공인 헤겔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그 내용을 '진지하게' 소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 아마도 안 읽을 거니까. 사실은 나도 이 대목을 한 번 읽고 대강 넘어가려고 했었다. 이걸 안 읽는다고 해서 내 인생에 큰 손해가 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요즘 기억력이 많이 감퇴해서 한 번 더 읽고 가자고 읽었던 것인데 처음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희열을 느끼며 꼬박 5시간을 책에 빠져 있었다. 특히 '습관'이라는 일상어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탐구가 인상적이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일독을권한다.

 

"자유는 결코 습관(같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습관이 된다면 더 이상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없다."라는 칸트적 근대(성)에 대해 헤겔은 '내재적 교정책'을 마련해준다고 지젝은 말한다.   

 

"헤겔은 재삼재사 습관 없이는 자유도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습관은 자유의 모든 행사에 배경과 토대를 마련해준다. 다시 언어를 예를 들어보자. 언어를 사용할 때 자유를 행사하려면 습관에 완전히 익숙해야 하며, 그것 속에서(그것에 의해서)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써먹은 법을, 그것의 법칙을 '맹목적으로', 기계적으로 습관으로 적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오직 기계화된 습관들 속에서 배운 것을 외부화할 때만이 주체는 "보다 진전된 활동과 일에 대해서 열릴 수가 있다. 인간 주체가 창조적 사유와 노동이라는 '보다 높은 수준'의 기능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언어뿐만 아니라 일군의 훨씬 더 복잡한 정신적 신체적 활동들이 습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 습관들을 통해 인간 존재는 몸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동적 습관으로, 영혼의 도구로 변형되는데, 이제 그것을 의식적으로 초첨을 맞추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봉사한다. 간단히 말해 습관들을 통해 주체는 몸을 전유한다." (615쪽)

 

하지만 습관의 최고 수준은 사유의 매체로서의 언어이다. (...) 여기서 언어를 '유창'하게 하려면 언어의 규칙을 기계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통달해야만 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으로 통찰과 맹목의 공동 의존이 이해라는 행위 자체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단어를 들을 때 나는 즉각 소리를 추상하고 '그것을 통해' 그것의 의미를 처리할 뿐만 아니라 도대체 의미를 경험하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만약 헤겔에게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습관의 존재라면, 습관이 주체의 의식적 참여 없이 일어나는 자동적인 반응으로 받아들여질 때 현실화되는 것이라면, 마지막으로 만약 주체성의 핵심을 의도적인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의식적인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 속에서 위치시킬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인간 주체는 가장 근본적인 측면에서 '사라져가는 주체'이다. 습관의 '무반성적 자발성'은 주체적으로 객관적 필연성을 선택한다는,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을 의지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준다. (618쪽)

 

"일단 어떤 습관이 형성되면 그것의 기원은 지워지고, 그것은 이미 항상 거기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된다. 따라서 결론은 명확한데, 거의 사르트르적이다. 즉 인간은 영원한 실체 또는 보편적 본질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핵심 자체에서 습관의 창조물이며, 우연적인 외적 사건들 또는 만남들이 내적인(내면화된) 보편적 관습으로 격상되는 것을 통해 정체성이 형성되는 존재이다." (620쪽)

 

"내가 스크린적 페르소나(가면)의 일부로 느끼고 가장하는 감정들은 단순히 거짓된 것이 아니다. 비록 나의 진정한 자아(로 내가  생각하는 것)는 그러한 감정들을 느끼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이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른 남자들을 마구 때리고 여자들을 강간하는 것을 꿈꾸는 사디즘적 성도착자라면 어떨까? 실생활에서의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는 그러한 진정한 자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따라서 나는 보다 겸손하고 공손한 페르소나를 받아들인다. 이 경우 나의 진정한 자아는 내가 허구적인 스크린적 페르소나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훨씬 더 가까운 반면 실생활에서의 자아는 진정한 자의의 폭력성을 감추는 가면이 아닌가?

 

습관은 그러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다. 어떻게? 주체의 '진정한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진리를 '무심한' 표현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 이것을 우리가 광인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규정으로 데려가는데, '진지한 거짓말'의 이러한 논리에 가담할 수 없는 주체라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 친구(광인)가 "만나서 반가워! 어때? 하면.........." (633쪽)

 

처음에 소개한 그 대목으로 돌아왔다. 중구난방식으로 이야기를 여기까지 끌고왔다. 사실은 여기서부터가 흥미롭다. 헤겔의 의미심장한 변증법적 '부정의 힘'이 발동한다. 하지만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그래도 그냥 접기는 아쉬움이 크다. 마지막으로 "헤겔의 급진적인 결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나로서는 아침 글 명상)을 갈무리할까 한다. 

 

"헤겔의 급진적인 결론은 이렇다. 즉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기호 즉 개인의 신체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아무것도 지사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습관은 "아무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이상한 기호이다. (...) 거기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긍정적인 무게를 갖게 된다. 즉 '사실은 아무것도 지시한 바가 없는' 기호는 라캉이 '시니피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다른 시니피앙을 위해 주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주체 자체의 공백으로, 따라서 궁극적 참조항의 부재는 이 부재 자체가 궁극적 참조항이며 이 부재가 주체 자체임을 의미한다.(635쪽)

 

부재가 주체 자체라니?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 말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떠올리게 한다. 세상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거기서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삶이란 의미가 따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만큼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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