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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강의정황 발제
알료샤
요약
1. 첫 강의. 이 강의는 녹음된 목소리가 아니라 청중에게 들려주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2. 이 해의 강의 때문에 우리는 푸코가 기술한 지식들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한다는 점에서 처음이다. 즉, 고전적 이성과 그것의 환원 불가능한 대립물인 비이성의 대결을 구성한다. 우리의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지식과 우리의 근대 의학 등 이런 경험적인 지식들은 언제부터 스스로를 진리의 담론, 인식 이론으로 자처한 철학의 전통과 관계 맺었는지 묻는다. 푸코가 니체를 읽으면서 명확히 하려는 것이 바로 이 관계이다.
3. 은밀한 극작법 하나가 이 첫 강의를 조직한다. 진리의 말이 천천히 내려와 마침내 “인간 속에 진리의 태양을 놓는다.”는 극작법. 즉, 재판 속에, 말하기와 보기가 절합되는 목자의 증언 속에 진리를 놓는 극작법. 이는 푸코의 이전 두 저작의 주요 테마였고 그 경로의 중간에 소피스트가 있다. 시련 맹세의 발언도 아니고 확인된 사실도 아닌, 말과 사물을 혼동하는 말. 그런데 대화 형식의 말과 함께 기원전 5세기 아테나이가 발명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된 인간이다. 신들과의 대화, 세계와의 대화, 자기와의 대화가 혼란해진다. 오이디푸스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혼란의 상징이다. 아고라는 로고스와 비극적 감정이 함께 출현하는 장소이다.
4. 니체는 인식을 능력으로 보는 모든 이론을, 철학의 전통 이론을 폭파하는 지식의 계보학을 수립한다. 니체는 계보학을 과학의 지식으로 취급하면서 인식의 중심에 놓았지만 그것을 도덕적 가치 전도만의 쟁점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강의의 진짜 테마는 계보학의 가능성이라기보다 인식 이론의 토대에 있는 주체-객체 이론에 계보학이 미치는 효과, 플라톤 이래 우리의 진리 개념, 한마디로 철학 자체에 계보학이 미치는 효과이다.
5. 니체적인 인식의 계보학은 여전히 하나의 인식인가 아니면 인식의 파괴인가? 인식은 인식과 함께 구축된 형이상학 전체의 이미지에 연관돼 있다. 반대로 니체에게 관건은 정념, 본능, 투쟁, 도전, 절차, 사건, 불연속 등 인식을 근본적으로 문제화하는 것을 재발견하는 데 있다. 계보학은 인식 이론을 파괴한다. 계보학은 사회적 힘들을 유지한다. 권력이론과 스스로를 절합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러나 니체의 계보학은 모든 계보학과 마찬가지로 우선 가치에 대해 묻는다. 누가 말하는가? 고귀한 자인가 않은 자인가?
6. <<광기의 역사>>의 추론 방식을 되살리면서 푸코는 참과 거짓의 나눔을 논리적 나눔도 아니고 존재론적 나눔도 아닌, 하나의 배제 행위로서, 결국 나중에 소피스트를 배제함으로써 실현된 사회적 폭력으로서 참조한다. 플라톤은 이 배제를 도덕적 행위, ‘정화’로 규정하곤 했다.
7. <<지식의 고고학>>을 집필하면서 푸코는 언어가 아니라 언표 가능성의 한계가 자신의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규칙을 갖춘 담론적 실천 없이는 지식도 없다. <<지식의 고고학>>부터 푸코는 다음의 사실을 강조한다. 지식은 철학사 전체에 걸쳐 이론화된 능력으로서의 인식과 동일하지 않고 과학과도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의 과학은 지식의 요소 안에 기입되며 거기서 기능한다. 지식이라는 영토 덕분에 푸코는 참과 거짓, 과학과 이데올로기라는 나눔에 기댈 필요 없이 ‘에피스테메들’을 기술할 수 있었다.
8. 진리의 의지는 니체에게 자주 나타나지만 푸코는 다른 형태의 의지를 식별하고 있었다. 니체에 관한 강의에서 사건의 특이성으로 기술된 지식을 지적하면서, 푸코는 니체 사상의 지배적인 두 해석을 이동시킨다. 전통적인 해석, 그것은 니체에게서 나타나는 위험하고 죽음을 초래하는 인식과 삶 사이의 끈질긴 적대 관계에 바탕을 둔 해석이다. 니체는 자기중심적인 인식 의지의 그 어떤 표명에도 반대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존재하는 것의 기쁨이다. 이 취향을 가장 멀리 지니고 가는 것, 그것이 주인의 임무이다.”(<소포클레스 비극 서설>), “인식 본능은 자신의 한계에 이르고, 이제 지식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립한다. 최상의 삶에 봉사하기 위한 인식. 여기에 비극적인 것이 있다. 과격하게 무차별적으로 진행되는 인식 본능은 삶이 늙어버렸다는 표시다.”(<<유고(1872년 여름~1874년 말>>) ㅡ 그리고 이제 철학에서 더 큰 영향력을 지닌 하이데거의 해석. 하이데거에게 인식의 의지, 존재와 권력 의지는 혼동되는 경향이 있다. 푸코는 인식과도 동일시할 수 없고, 하이데거가 이 점에서 니체를 따라 권력의지와 동일시한 진리의 의지와도 동일시할 수 없는 지식의 의지를 식별했던 것 같다.
제목
1. 1967년에 지식의 의지를 따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푸코는 일련의 강의에서 니체를 다뤘다. 이 강의들의 소산이 장문의 논문인 <니체, 계보학, 역사>이다. 벵센 실험대학에서 푸코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 전까지 계보학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았지만,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지식의 의지를 식별했음을 강조한다. 푸코가 지식의 의지로 번역하는 단어는 wissensgier이다. 즈느비에브 비앙키는 그 단어를 지식욕이나 지식에 대한 갈증으로 번역한다.
2. <<비극의 탄생>>은 변증술로 비극적 지식을 소멸시켰다는 죄목으로 “이론적 인간” 소크라테스를 고발한다. “우리는 그가 이해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문학 장르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이솝 우화이다.” “우리에게 지식이라는 저 본능의 손에 이끌려 살 수 있었을 뿐아니라 죽을 수도 있었던 최초의 사람은 퀴클롭스의 눈처럼 큰 눈으로 비극을 바라본다.”(<<비극의 탄생>>) 그리고 소크라테스에게는 “비극 예술이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여, 이게 너의 비밀이었던가? (...) 지금의 나라면 그것을 지식의 문제 자체였노라고 말하리라. 처음으로 지식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의문스러운 것으로 포착되었노라고. (...) 이 대범한 책이 처음으로 과감하게 접근한 과제가 그것이다. 학문을 예술의 관점에서 보고 예술을 삶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과제.”(<<비극의 탄생>>)
3. 비극의 탄생부터 인식의 계보학의 가능성, 갈망, 본능에 감싸인 인식의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표상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이성, 진리, 주체, 객체의 범주들에서부터 시작해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인식의 계보학의 가능성이 거기에 이미 있는 것이다. 더 뒤, 즉 <<도덕의 계보>>에서야 가치들의 가치에 관한 물음이 제기된다.
4. 푸코는 이 두 계보학을 겨냥하며 두 번에 걸쳐 ‘지식의 의지’라는 똑같은 제목을 사용한다. 1970~1971년의 이 강의, 그리고 1976년의 <<성의 역사>> 1권에 말이다. 후자는 섹슈얼리티 장치를 구성하는 지식의 계보학이자 근대 도덕의 계보학이다. 두 연구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 책에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책에는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한 열두 번의 강의뿐 아니라 강의원고에서 사라졌던 니체에 관한 강의와 <오이디푸스의 지식>이라는 제목이 붙은 강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의 지식>은 마지막 강의를 훌륭히 발전시킨 것인 동시에 푸코가 여섯 차례에 걸쳐 진리진술 체제의 패러디임으로 사용했단 걸작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문학적 분석이다.
정황들
1. 이 강의의 출생지가 니체라는 사실은 쉽게 읽어낼 수 있다. 게다가 거의 동시에 세 저작이 출간됨으로써 그 정세가 형성됐다. 마르셀 데티엔의 <<상고기 희랍에서 진리의 대가들>>,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푸코와 절친한 철학자 앙젤르 크레메르-마리엣티가 번역한 니체의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가 그것이다. 이 정세는 하이데거의 전철을 밟아 희랍적인 인식의 길로 모험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푸코의 의지를 지지해줬다.
2. 데티엔은 상고기 희랍(기원전 7~6세기, 바젤 체류 시기 니체가 연구한 시기)의 역사 깊숙한 곳에서 1960년대 말에 중요해진 물음, 즉 “누가 말하는가? 어떤 권리에서? 어떤 의례에 따라?”의 물음을 재발견한다. 데티엔은 희랍 도시 국가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진리의 효력 및 구속력을 갖는 말이 겪은 변환을 되새겨 이야기할 수 있었다.
3.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를 반플라톤적인 방식으로 다시 논의한다. 들뢰즈는 회화에서 콜라주 기법을 들여오면서 철학사의 코드들을 뒤엎어 놓았다. 이로부터 머지않아 <<지식의 고고학>>이 출간된다. 그 책 자체가 담론적 실천들의 고유한 규칙들에 대한 면밀한 기술이다. <<지식의 고고학>>은 언표들의 분산 및 무한한 재이식에 관한 책이다. <<차이와 반복>>은 존재론적 강도와 차이, 그리고 항상 어긋난 동일자의 영원 회귀에 관한 책이다. 두 철학자 각각의 도정에서 두 핵심 저작, 두 도달점, 그리고 아마도 10여 년간 줄곧 인접한 궤도를 그리던 그들의 사유에서 발생한 두 전환점, 사실 들뢰즈는 하이데거의 문제틀을 전도시킨 듯 보였다.
4. 마지막으로 이 삼각형은 크레메르-마리엣티에 의해 닫힌다. 그는 니체의 텍스트를 번역하고 언어활동과 진리의 관계에 관한 밀도 있는 연구를 제시했다. 이 쟁점은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3~4강에서 잘 설명된 궤변 효과를 언어활동에 위치시킬 때 핵심이 된다.
5. 들뢰즈의 저작은 사건의 차이와 독특성, 그리고 사건의 반복과 그것의 어긋난 영원 회귀를 동일한 다원주의적 존재론에 묶어뒀다. 이 책(<<차이와 반복>>)은 사실 1945년 이후 프랑스에서 조르주 바타유, 모리스 블랑쇼, 장 발, 클로소프스키가 기획한 니체 사상의 장기적 해명 작업에 포함된다. 이 연구에 화룡정점을 한 것이 조르조 콜리와 마치노 몬티나리가 주도한 프랑스어판 니체 <<전집>>이었다.
6. 들뢰즈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 철학에 할당한 과제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고 푸코는 상기시킨다. 플라톤주의의 전복은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피스트 이후 철학의 정의 자체였을 수도 있다. 들뢰즈는 이렇게 쓴다. “플라톤주의 전체는 ‘사물 자체’와 모상들 사이에 어떤 구별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플라톤주의는 차이를 그 자체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 대신 차이를 이미 어떤 근거에 관련짓고 동일자에 종속시키며, 또 신화적 형식을 통해 매개를 도입한다.” 그런데 근거를 사고할 때 플라톤은 신화에 기댄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이것을 플라톤의 게임이라고 지칭한다.
7. 나눔에 관해 플라톤이 쓴 세 번째 대작 <<소피스트>>에서 나눔은 신화없이 이뤄진다. 소피스트를 전형적인 가짜 후보자로, 모든 것을 모상의 상태로 돌리는 사람으로 떼어내면서, 플라톤의 변증술의 최고 목적은 나눔이 아니라 차이의 선별, 즉 가치평가, 신화적 원환의 설립이다.
푸코의 게임
1. 이 해의 강의 서두에서부터 푸코는 콜레주드프랑스라는 제도의 엄숙함과 새로 들어온 자에게 기대되는 지적 엄격함과 달리 “그가 여기서 하고 싶은 게임”을 내세운다. 들뢰즈가 플라톤적 형이상학의 근거로 기술한 신화적-존재론적 내지 신화적-존재론적 게임과 연관시켜 본다면 이 표현은 놀랍지 않다. ‘푸코의 게임’은 역사를 통해 그 게임에 응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2.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새로운 역사기술의 그 윤곽을 제안했다. 그것은 지방사도 아니고, 사건사도 아니고, 전체사도 아닌, 계열들의 계열, 즉 이미 니체적인 역사기술이다. 서론에서부터 푸코는 자신이 포함된 현대 역사기술의 특징을 언급했다.
3. “전체사의 테마와 가능성이 소멸되기 시작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일반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윤곽이 잡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체사의 기획은 한 문명의 총체적 형태, 한 사회의 물질적 또는 정신적 원리, 한 시대의 제현상에 공통되는 의미작용, 그들의 정합성을 설명해주는 법칙 등을 찾아내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가 계열, 마름질, 극한 (...) 그렇게 해서 열리는, 일반사의 과제를 정의해주는 문제는 이 상이한 계열들 사이에서 어떤 형태의 관계가 합법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가를 (...) 어떤 계열들의 계열들이, 달리 말하면 어떤 ‘표’가 구성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4. 푸코가 이 해의 강의에서 사용하는 것은 이 역사이다. 푸코는 자신이 탐사 기획을 세울 수도 있을 미지의 문서고어세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사학자 집단에 의해 지금도 완벽히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는 문집을 참조한다. 푸코는 니체를 반복하거나 니체를 주해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푸코는 니체의 철학적 직관을 역사의 밧줄사다리로 시험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논리의 밧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진리를 파악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이데거가 니체의 양면성을 자신이 직접 만든 역사와 역사의 구분, 다시 말해 사건과 역사학을 통한 사건 읽기 사이의 구분 속에 집어넣었음을 잊지 말자. 이리하여 들뢰즈가 규탄한 신학적-존재론적 게임에, 푸코는 신적 게임 대신 “내-세계적 게임”이라 오이겐 핑크가 규정한 게임을 맞세운다. 내-세계적 게임이란 곧 인격의 게임, 세계와 맺는 사회적 관계, 세계의 가상과 접촉하는 인간들의 게임이다.
5. 이상의 전제를 바탕으로,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이 해의 강의 쟁점을 잘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텍스트를 순서대로 읽길 제안한다. <<차이의 반복>>에 관해 푸코가 쓴 두 편의 서평과 <<차이와 반복>>. 그리고 1971년에 작성된 <<니체, 계보학, 역사>>라는 논문. 이 텍스트들을 순서대로 읽으면 푸코-들뢰즈 잔치에 여러분들은 초대되어 있을 것이다.
6. 계보학은 악착같은 고증이다. 계보학은 역사가 없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예를 들어 감정, 의식, 본능, 신체, 사랑의 영역에서 사건들의 독특성을 탐지한다. 계보학은 서로 다른 역할들 속에서 사건들의 회귀를 파악한다. 역사학과 계보학을 구별해야 한다. 계보학의 대상은 기원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유래이다. 유래는 사건의 증식을 가리키는 것인바, 그것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계속되는 불일치라고 했던 것이다.
7. 발생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똑같은 연극이 반복되는 장소 없는 극장이다. 사건의 독특성인 동시에 사건의 항상 어긋난 반복이다. 푸코는 자신의 논문에서 <<차이와 반복>>의 강도, 질료, 쟁점을 자신의 고유한 어휘로, 막대한 역사적 조사 작업에서 출발해 다시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게임과 역사의 게임이 여기에 다시 나타나 서로 대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니체에게 계보학은 아직 역사를 갖지 않은 것, 즉 감정, 영혼, 신체, 본능 등 우리가 인간에게 있어서 변하지 않은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을 옮겨 적는 것이었다.
8. 오이디푸스를 통해 니체가 제기한 물음, “누가 말하는가?”는 바로 1970년대의 물음이다. ‘정치’란 결국 푸코의 강연에 모여든 청년들이 사유하고 행동하는 현재성이다. 정치란 결국 법/권리의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아니라 권력의 신비적-종교적 형태들의 변환속에서 일어나는 개체화의 증대이다.
9. 정치란 질서를 폭로하는 조건으로서 순수함의 윤리가 출현하는 것이다. 이 윤리는 플라톤 철학의 도덕주의의 효과로서 사유되는 것이 아니라 노모스의 구성된 효과로서 사유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란 이 모든 변환 과정에 대중권력이 현전하는 것이다.
니체의 희랍
1. 1970년에 니체에서 출발해 희랍을 철학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더 이상 승산이 없다. 철학적 희랍 연구는 더 이상 헤겔적이지도 니체적이지도 않다. 적어도 프랑스에서 그것은 하이데거의 방식이다.
2. 푸코의 강의는 희랍의 전영토를, 이오니아에서 코린토스와 시켈리아까지 주파한다. 아테나이에 특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강의는 <<오이디푸스 왕>> 혹은 <<오이디푸스(참주)>>로 끝난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비극을 제국을 지배하는 아테나이 참주정의 은유로 읽으려 했다. “초기 희랍 철학은 정치인들의 철학이다. (...) 소크라테스 이전 사람들의 경우 소크라테스 때부터 생겼던 ‘행복에 대한 흉측한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훗날 아폴론의 ‘너 자신을 알라’는 오인되고 말았다.” 푸코는 이 델포이 격언을 <<주체의 해석학>> 1강에서부터 해석하게 된다.
3. 니체 이해와 관련해 푸코는 하이데거가 행한 연구의 핵심 지점들을 훑어본다.
3-1. 첫째, 정의에 대한 사상이 진리에 관한 니체의 고찰을 지배한다는 주장. 하이데거는 “니체가 플라톤 이전의 형이상학에 대해 숙고할 때, 특히 헤라클레이토스의 형이상학을 숙고할 때, 정의가 니체에게 떠올랐다는 것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밝힐 수 있다. 정의에 대한 드물고 결정적인 생각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푸코는 정의의 역사를 아폴론적 호메로스와 디오니소스적 소포클로스 사이에서 서술한다.
3-2. 둘째, 하이데거는 1906년과 1911년에 편집된 <<권력의지>>의 사후적, 자의적 구성을 다시 사유함으로써 권력 의지로 가는 경로의 비밀을 복원하고, 인식 개념이 권력 의지의 구조임을 보이려 한다. 권력 의지 자체가 존재의 운명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 대응하게 된다. 이는 니체의 진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3-3. 셋째, 하이데거에게 니체는 형이상학의 전통에 포함되며 그 전통의 도달점이다. 반면 푸코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를 지식의 의지의 두 패러다임으로 대립시킨다. 또한 하이데거는 알레테이아(Aletheia)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맞세운다. 즉, Aletheia를 부정 접두사인 a로부터 출발해서 탈망각, 탈은폐라는 어원적으로 부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4. 이에 대해 푸코는 이렇게 답한다.
4-1. 하이데거가 철학을 이렇게 나눈 것을 이동시키면서, 정의(디케)와 세계(코스모스)의 질서의 발생 사이의 관계를 헤라클레이토스(하이데거에 따르면 형이상학의 시작)가 아니라 헤시오도스(들뢰즈는, 철학자는 헤시오도스라고 <<니체와 철학>>에 썼다.)에서, 특히 희랍의 사회적 투쟁을 통해 수립된 측정/적도에서 출발해 분석한다.
4-2. 푸코는 문헌학이 아니라 역사학, 특히 장-피에르 베르낭과 데티엔의 작업에서 출발한다. 언어활동과 존재의 관계가 아니라 언어활동과 진리의 관계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소피스트들에 관한 분석이다. 푸코에게 진리의 본질은 자유가 아니다. 푸코는 <<지식의 의지>>, <<성의 역사>> 1권에서 “진리는 본래적으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라는 언명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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