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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후반부(35~44쪽)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에 대한 욕망’이 인간의 본성에 이미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욕망은 ‘감각’과 ‘신체’의 차원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은 이미 항상 ‘관조’를 최종 목적으로 한다. 달리 말해 욕망의 운동, 즉 감각에서 출발해 평온하고 비신체적인 인식으로 향하는 운동에는 ‘지혜’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전제되어 있다. 욕망은 인식에 앞서지도 않고 그 바깥에 있지도 않다.

이러한 논리 전개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과 관련된 다음 테마들을 배제한다.

첫째, 비극적 지식의 테마. 희랍 비극에서 지식은 예언, 수수께끼, 소문의 형식으로 주어진다. 주인공은 이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듣고 안심하면서 불안해한다. 주인공이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주인공을 덮친다. 그 결과 주인공은 지식에 목숨을 빼앗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식의 욕망은 인간 본성에 새겨진 자연적 운동에 의해 작동하는 것, 감각적 즐거움에서 관조의 행복으로 향하는 것이다.

둘째, 학습-상품의 테마. 지식이 욕망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재화처럼 교환되거나 사고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의 욕망이 인식 자체에 속한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이러한 화두를 사전에 배제해 버린다.

셋째, 인식-기억의 테마.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테마(상기 신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플라톤과 달리 기억을 이데아가 아닌 감각과 관련짓는다. 그러나 이처럼 방법은 다르지만, 그 목적은 같다. 인식에 대한 의지가 인식이라는 사전 조건 외에 다른 것에 바탕을 두게 하지 말 것.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을 욕망의 외부성과 그 폭력성에서 보호하려 한다. 이로써 인식에 대한 욕망은 인식이 인식 자체와 하는 게임이 된다. 인식에 대한 욕망은 인식의 발생, 지연, 운동을 드러낼 뿐이다. 욕망은 지연된 인식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다면, 지식을 욕망하는 자는 폭력 없이, 전유 없이, 투쟁 없이, 거래 없이, 자신의 본성을 그저 현실화함으로써 결국 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

(용어를 정의해 보자. 욕망과 지식에 미리 앞서 단일성, 상호 소속, 동일 본성을 부여할 수 있게 해 주는 체계를 인식이라 부르자. 반대로 바람의 대상, 욕망의 목적, 지배의 도구, 투쟁의 쟁점을 재발견하기 위해 인식의 내부성에서 뽑아내야 하는 것을 지식이라고 부르자.)

마지막으로 ‘철학은 진리 자체의 운동이다’, ‘철학은 자기를 의식하는 의식이다’, ‘세상에 눈을 뜬 자는 이미 철학자다’ 등 진부하게 반복되는 테마를 보자. 이러한 테마는 가장 거칠고 가장 신체적인 인식에 이미 ‘관조’가 있다는 전제, 이 관조가 그 고유한 논리 또는 지식이 관조하는 대상의 필연성에 따라 인식의 운동 전체를 이끈다는 전제를 유포한다. 여기서 욕망은 원인이 아니다. 인식이 인식 자체의 원인이요, 인식과 관련된 욕망의 원인이다. 욕망의 주체와 인식의 주체는 하나다. “모두가 다소 철학자다”라는 낡은 테마에는, 인식에 대한 욕망을 인식 자체 안에 봉쇄하는 기능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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