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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 미셸푸코 / 219701216/ 2017.10.29.() / 닥홍

 

인식과 진리의 함축 관계 해체를 분석하기 위하여욕망, 진리, 인식이 하나의 이론적 구조를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서 진리가 점하는 모호한 우위. 스피노자, 칸트, 니체가 이 체계성을 뒤집으려 하다쾨니히스베르크의 늙은 중국인에게서 해방되기, 하지만 스피노자를 죽이기니체가 진리와 인식의 귀속 관계를 걷어내다

 

지난주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 분석을 통해 지식에 대한 본성적 욕망이 쓸모없는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으로 표현됐음을 알게 됐다.

1/ 욕망의 뿌리에는 욕망이 표면화되어 작용하기 전에도, 인식이 있다. 인식은 인식에 관한 욕망의 전제조건이다. 욕망은 인식을 지연시켜 인식의 진정한 본성인 관조에 단숨에 도달하게 만드는 유예와 상관관계를 맺는다.

2/ 감각에서 어떤 형태의 즐거움(agapesis)를 얻을 수 있다.

텍스트 아래 인식에 대한 일종의 본성적 욕망, 모든 인식에 앞서는 욕망이 논의 된다. 두 가지 조작이 있다. 하나는 인식을 욕망 아래에 욕망의 원리 자체에 재도입하는 것. 다른 하나는 진리를 욕망과 인식 사이의 제3의 요소로 도입하는 것. 감각과 그것의 즐거움이 진리와 관계맺음을 전제한다. 이 모든 것이 진리의 질서 속에서 전개된다.

 

인식에 대한 욕망을 보증하고 근거 짓는 것으로서의 진리.

 

진리와 맺는 관계가 인식과 욕망 양자를 지배하기 때문에, 인식과 욕망은 하나의 동일한 주체만 가질 수 있다. 인식의 주체와 욕망의 주체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들이 진리와 동일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진리는 세 가지 역할을 한다. 진리는 욕망에서 인식으로 가는 이행을 보장한다. 욕망에 대한 인식의 선차성을 강조한다. 욕망하는 주체와 인식하는 주체의 동일성을 야기한다.

욕망 및 인식과 관련해 진리가 하는 작용이야말로 이 모든 체계성의 강력한 계기를 구성한다. 니체 전까지 욕망과 의지가 인식에 대한 종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은 진리와 맺는 관계 탓이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뒤집을 정도로 가까이 갔었다. 스피노자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식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욕망이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가 유지될 수 있으려면 관조적 행복이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관조가 잠재적으로 감각적 행복과 인식에 대한 욕망에 새겨질 필요가 있었다. 스피노자는 고전 형이상학을 가능케 했던 것을 분명히 지명한다. 바로 이 의지-인식-진리 관계가 니체에게 문제가 된다.

a - 인식의 뿌리에, 인식이 돌발하는 역사적 지점에 욕망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욕망이 인식과 목적 수준에서, 기원이나 본성에서도 근친 관계가 없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배하고 이기기 위해 인식하는 것이지 인식하기 위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b - 의지의 어떤 규칙이 금욕주의임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c - 인식의 배후에서 자아들, 폭력들, 욕망들의 투쟁이 전개됨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인식의 저편, 바깥으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은 위협받으면 불안정하게 머물 위험이 있다. 인식의 외부를 어떻게 인식할까? 인식의 한계를 바깥에서 정의하기 위해 우리가 의거해야 하는 그런 진리를 전제해야 할까? 우리가 그것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이 인식에 의거하지 않고서 우리는 어떻게 이 진리를 접근할 수 있을까?

니체의 담론의 경계에서 그 담론 위로 칸트가 여전히 고개를 내밀고 위협하는 모습이 보인다. 진리와 인식이 정당한 권리로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되지 않을 때만 우리는 인식할 수 없는 동시에 알려지지 않은 진리의 역설에 빠지지 않고 인식의 저편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욕망, 본능, 인식에 대한 의지에 관한 니체의 모든 분석은 진리와 인식의 함축 관계를 해체할 수 있게 해주는 작업에 의해 배가된다. 오늘 진리와 인식의 함축 관계 해체에 대해 분석해보고 싶다.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를 지적하자.

a 이 작업은 니체가 인식 저편으로 넘어가 인식을 비판하기 위해 과학(생물학, 역사, 문헌학)에서 대거 차용한 지식 내용을 사용할 때 보여준 대담함과 순진함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지식 내용을 이렇게 쓰는 것은, 만일 그 용과 동시에 인식과 진리의 함축 관계 해체가 작동하지 않거나, 오히려 그 사용 자체가 그 자체로 인식과 진리의 함축 관계를 해체하지 않은 채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때, 곧바로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니체의 실증주의는 인식 바깥과 인식과 진리의 비장소로 향한다. 이 실증주의적 비판 안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b 두 번째 지적을 말하면 니체에게 칸트는 위험, 미세한 일상의 위기이다. 칸트는 함정들로 이뤄진 망이다. 스피노자는 위대한 타자, 유일한 상대이다. 니체가 보기에 스피노자는 탁월한 철학자이다. 진리와 인식을 가장 엄밀한 방식으로 연결한 것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를 죽여야 한다. 비판에서 벗어나려면, “쾨니히스베르크의 늙은 중국에게서 벗어나려면 진리와 인식의 이 소속 관계를 해체하는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칸트의 조건이다. 우리는 스피노자에게서 해방된 이후에야 칸트에게 벗어날 수 있다. 회의주의자들의 순진함, 신칸트 학파의 순진함, 비판에서 출발해 스피노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칸트 자신의 순진함. 스피노자에게 의지해 철학 담론의 관념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의 순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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