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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3강.hwp



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3강 발제 

알료샤 

 

소피스트들 : 그들의 등장과 배제 / 진리와의 관계에서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 철학 담론은 시학 담론과 지위가 같을 수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세기 동안 통용될 철학의 역사적 존재 방식을 설정하다 / 소피스트들을 배제함으로써 가능해진 철학의 존재 / 소피스트라는 인물. 궤변이라는 기술 / 궤변술은 단어의 물질성을 변조한다 / 소피스트 배제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맡은 상이한 역할

 

푸코는 자신의 연구에 두 가지 모델을 가지고 출발했다. (철학 전통을 특징짓는 듯한) 모델에서 지식의 의지는 자신이 전개할 사전(事前)의 인식 안에서 시차(時差)이자 내적 유예로 파악된다.

다른 모델에서 인식 활동은 그 자체로 인식에 속하지 않는 과정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순수 사건으로 분석돼야 한다. 이 사건들의 집합을 푸코는 지식이라 부른다. 또한 진리는 정당한 권리를 갖고서 인식에 연결된 것이 아니다. 진리와 인식은 서로 상대의 전거가 되는 동시에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에 있다.

 

Q : 진리는 정당한 권리를 갖고서 인식에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푸코의 기획은 이렇다. 주체와 객체 체계(인식 이론)에 준거하지 않고, 지식의 사건들과 그 사건들 안에서 일어나는 인식 효과에 관계하는 역사연구를 수행할 수 있을까? 인식을 형식, 능력으로 설정해두고 이것을 현실화하거나 능력의 형식을 변경할 수 있는 특이한 행위를 지식의 사건으로 설정해온 전통적 짜임새를 뒤집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

Q : 인식 이론에 준거하지 않고, 지식의 사건과 그 사건 안에서 일어나는 인식 효과에 관계하는 역사연구를 푸코는 왜 수행하려는가?

 

소피스트와 관련해 푸코가 하고 싶은 연구는 그들이 등장했다가 배제된 과정을 지식의 사건으로, 즉 어떤 진리 유형을 야기하고 나중에 규범적 형식이 되는 인식 효과를 야기한 사건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이 분석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궤변술의 역사의 귀결점으로 보이는 것을 푸코는 다루려 한다. 그것은 궤변술의 배제 행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배제 행위는 플라톤에서 찾을 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아야 한다고 푸코는 생각했다. 소피스트적 논박, 분석론, 형이상학의 몇몇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배제 행위를 평가하자면 형이상학의 다음 구절에서 출발해야 한다.

궤변술은 겉모양은 철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고유한 원인론을 확증하려 한다. 자기보다 앞선 철학자들이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 이외] 다섯 번째 원인을 찾았다면 그가 틀린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의 신념이 확증되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어느 정도 진리의 요소 안에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어떻게 진리의 요소 안에 있는가? 이 모든 상이한 철학 담론들은 진리와 무슨 관계를 맺을까?

1) 우선 각 철학은 저마다 하나 혹은 여러 요소들을 진리의 요소로 파악하기 때문에 다른 철학과 구별된다. 각 철학은 진리와 상이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갖는다.

2) 그 다음, 한 철학의 고유한 발전이나 한 철학에서 다른 철학으로 가는 이행은 진리에 의해 강제된다.

이렇게 철학자들이 앞으로 나아가며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 길을 터놓고 탐구의 길로 그들을 함께 내몰았다.”(형이상학)

사물들의 본성을 발생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다시 진리 자체의 힘에 강제로 이끌려 또 다른 원리를 찾게 됐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이라는 원리, 아낙사고라스와 클라조메나이, 헤르모티모스의 NOUS[지성]”(형이상학)

3) 사물들의 원리를 진술하며, 철학자들은 존재 자체를 진술한다. 진리는 철학의 질료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에서 진술된 원리는 그 자체로 가장 많은 존재와 가장 많은 진리를 갖는 것이다.

4) 철학은 필요가 아니라 경이에서 생겨난 학문이다. 경이는 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고, 인식의 효과에 의해서만 그리고 인식의 을 위해서만 무지에서 벗어나고 싶게 만든다.

초기 철학자들이 무지를 피하기 위해서 철학을 시작했다면, 그들은 분명히 인식 때문에 학문을 추구한 것이지 유용성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형이상학)

진리는 철학의 목적인이다. 이런 조건에서 철학이 어떻게 참이 아닐 수 있을까? 철학이 어떻게 오류를 포함할 수 있을까?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철학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들은 마치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하는 것과 같은 행태를 보여줬다. 가끔 멋진 타격을 하지만, 학문적 인식에 의거하는 건 아니다.”(형이상학)

철학자에게 부족한 것은 자신을 이끄는 동시에 강제하는 이 원리들에 대한 학문, 이 진리에 대한 학문이다. 철학자에게 부족한 것은 제1원리들과 네 가지 원인들에 대한 체계였다. 진리는 철학자가 논하는 모든 주제에서 목적 구실을 한다. 철학자는 진리의 네 가지 인과성의 지도를 받는다.

이 모든 초창기 철학들을 둘러싼 우연, 미망, 침묵의 여백이 있다. 이 철학들은 자신들의 네 가지 원인 노릇을 하는 진리의 필연에 붙들려 있다. 하지만 이 철학들은 이 네 가지 원인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알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않고서 네 가지 원인에 대해 말했다. 닥치는 대로 응전할 뿐 자신들을 끌고 가고 에워싸는 전장의 전략도 이해하지 못한 풋내기 병사가 그렇듯 말이다.

 

결론 /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사를 진리의 요소 안에서 이뤄지는 강제이자 우연의 운동으로 이야기한다. 진리의 요소는 그 운동 속에서 표명되는 동시에 감춰져 있다. 이 철학사는 그 독특성에 있어서 세 가지 중요성을 갖는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담론을 몇몇 해석 및 분석 기술에서 떼어낸다.

a) 진리가 철학자에 의해 말해진 동시에 말해지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는 문법학자들이 시인들을 주해할 때 유행했던 해석 방법에 훨씬 더 가까이 간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의 애매함, 철학자의 발언에서 진리가 감춰진 동시에 현존하도록 만드는 이 공백 없는 거리, 그림자인 이 빛은 진리를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신중하게 유보한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진리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인자해서 진리의 끔찍한 얼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자신들에게 어떤 지식이 결여되어 있어서이다.

철학 담론은 우의적 주해에서 벗어나는 만큼 실증주의적 비판에서 벗어나야 한다. 철학 담론은 시학 담론과 더 이상 지위가 같을 수 없다.

b)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담론을 정치적 유형의 파악 방식에서 (또는 사법적 파악 방식이나 수사학적 파악 방식에서) 떼어낸다. 철학자가 자신의 철학 담론에서 무슨 말을 하든, 설령 그가 덕이 모자란 사람이든 불량 시민이든, 어쨌든 그 철학자는 진리 안에 있을 것이다. 철학자의 담론은 결코 진리의 역사에서 완전히 없어지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어느 식으로든 철학자는 진리의 역사 속에서 무한정 자신을 반복할 것이다. 철학의 도편 추방은 없다.

철학자는 헤시오도스가 말하던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수사적이고 정치적인 경쟁의 인간도 아니다. 형이상학에서 신화적이자 합리화된 철학사를 말하는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가 원인이거나 진리가 문제가 되는 담론을 다른 실천에서 고립시켜 게임 바깥에 제쳐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담론을 시학적이고 신화적인 말에서 근본적으로 떼어낸다. 그에게 철학 담론은 다른 담론에서 그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것을 찾을 수 없는 역사적 연쇄와 귀속의 방식을 뜻한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수 세기 동안, 필시 지금까지 통용되는 철학의 역사적 존재 방식을 설정한 데 있다. 그의 분석에서 다른 이들이 모방한 모델을 찾을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거기서 다른 분석의 가능성을 본다. 철학사는 개별 작업과, 진리가 역사를 가로질러 닿은 목적지 사이의 어떤 작용에 따라 늘 정리된다. 철학사는 고유명으로 지칭된, 고유명으로 지칭될 수밖에 없는 단위들을 항상 어떤 수준에서 조작한다. 이 단위들을 지칭하는 고유명들에 비하면 경험론이니, 범신론이니, 합리론이니 같은 단위들은 추상적 구축물이다.

사실상 철학사는 늘 개별성들의 분산으로 이해된다. 이 개별성들이 철학적 계기로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저런 형태로 진리 자체가 개별성들에 주어졌거나 뭔가 진리 같은 것이 개별성들을 통해 말했기 때문이다. 개별성들의 오류까지 포함해, 진리에 의해 야기되지 않는 것은 없다.

따라서 진리는 모든 철학 작업에 의해 정당한 권리로서 늘 사고된다. 각각의 독특한 작업과 관련해 모든 새로운 철학은 다른 철학이 사유하지 못한 것을 사유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철학사에 의해 반복과 주석의 상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각각의 철학은 다른 철학이 사유하지 못한 것을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철학사에 제안했던 과제와 매우 가깝다.

철학자들은 어떻게 보면, 말하면서 말하지 않은 셈이다.”(형이상학)

어떻게 보면 원리들이 이전에 모두 논의된 듯하지만, 달리 보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형이상학)

철학사에서 몇몇 원리들이 보장된다. 첫째, 내부성의 원리, 즉 외부에서 철학에 접근할 수 없다는 원리. 철학은 진리의 요소 안에 있기 때문에, 철학 담론은 항상 진리와 근본적으로 지울 수 없는 관계를 수반하기 때문에, 철학적이지 않은 어떤 담론이나 실천도 실질적으로 철학에 도달할 수 없다. 이미 사유된 사유 속에서 사유하지 않는다면, 철학은 지금 말해야 하는 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철학이 이미 사유됐던 것을 사유해야 할 권리 또는 필연성, 모든 외부성의 제거, 바로 이것이 형이상학A권에서 철학의 역사성에 부여한 형식이다. 이것은 그가 A권 첫머리에서 인식과 욕망의 게임에 부여했던 형식이기도 하다.

인식 이론과 철학사에 주어진 양상이 역사 내내 끊임없이 서로 호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외부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했다. 인식 이론의 외부, 그것은 욕망이었거나 적어도 욕망으로 상징화됐던 것이었다. 철학사에서 외부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것은 소피스트, 그리고 소피스트라는 인물이 수반했던 모든 것이었다.

과학이 철학 담론 내부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여기 놓인 문제의 쟁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배제를 통해 철학 담론의 바깥을 정의했던 몸짓 그리고 철학과 진리를 모종의 방식으로 묶었던 몸짓, 이 몸짓이야말로 우리의 지식의 의지를 특징지음에 틀림없다. 그 몸짓을 찾아내야 한다.

3) 이 텍스트는 그것이 함축한 철학사의 가능성 때문에 흥미롭지만, 그것이 배제하는 것 때문에 못지않게 흥미롭다. 이 텍스트가 배제한 것은 변증론마지막 권, 소피스트적 논박같은 다른 텍스트에 나온다. 그의 텍스트에서 소피스트들이 나오는 곳은 주로 그곳이다. 그가 소피스트에 대해 말하는 방식, 그리고 그들에게 내준 자리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 주어진 자리와 확연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소피스트가 문제가 되는 지점은 궤변술, 궤변, 소피스트적 논변, 논박, 담론이다. 모든 일은 소크라테스-플라톤이 소피스트들과 벌인 대토론이 마무리된 듯 진행된다. 소피스트적 논변의 추상적 위험말고는 소피스트에게서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듯 말이다. 모든 일이 마치 궤변과 소피스트가 서로에게서 떨어져나간 듯 플라톤 당시에는 아직 잘 분리되지 않은 짝이 이번에야 갈라진 듯, 소피스트는 쫓겨났지만 궤변은 포함되고 제어된 듯 진행된다. 하지만 이 점을 지적해야 하는데, 궤변은 거짓 추론이나 추론의 오류라는 일반 범주에 문제없이 있는 그대로 통합되지 않는다. 궤변은 변증술 토론에 끼지도 못한다. 궤변은 주변부에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 포함 자체가 의심스러운데 궤변에 대해 거둔 승리는 어쩌면 절대로 명확하거나 결정적이지 않을 것이다.

스콜라 철학 전통에서

1) 궤변 토론은 다른 논리 게임과 함께 교과서 연습 문제에 속한다. 필연적이지 않은 명제에서 모순 명제가 연역될 수 있을 때 해결 불능 명제가 있었다. ) 나는 거짓을 말한다.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상관없이 증명될 수 있을 때, 궤변이 있었다. / ) 논리는 학이다. 논리는 학을 통해 획득되기 때문이다. / 논리는 학이 아니다. 논리는 이식 방법이기 때문이다.

궤변 훈련은 어느 지점에서 필연성을 착각했는지 보여주는 교수의 개입에 의해 종결되어야 했다. 교수는 망상을 일소하고 무엇이 올바른 해결책인지 보여줘야 했다. 해결 불능 명제가 논리에 내재된 괴물 또는 난제였던 반면, 궤변은 일소할 수 있어야 하는 일시적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2) 장 뷔리당은 소피스트적 논박에 관한 주해에서 다음을 구별한다. 학문적 토론. 그것은 엄밀한 학문에 이르러야 한다. 변증술적 토론. 그것은 어떤 언명의 불확실성을 축소해야 한다. 시문적 토론. 그것은 제자의 인식을 계발해야 한다. 궤변적 토론. 거기서 진리는 도외시된다. 찰스 샌더스 퍼스는 궤변이란 겉으로는 논리적 엄밀함을 준수하지만 그 결론을 용인할 수 없는 추론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허울뿐이고 진리를 신경 쓰지 않는, 착각을 일으킬 뿐인 추론들을 철학이 걱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속임수이고 조잡한 계략일 뿐인 것을 쫓아버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참과 거짓만 신경 써야 할 담론이 어째서 도덕 경찰 노릇을 할 필요가 있을까? 참인지 거짓인지만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 이 정직과 부정직을 가르는 윤리 게임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을 검토해야 한다. 소피스트들이 부재하는 가운데 궤변이 처음으로 논박됐던 그 순간을 고려해야 한다. 그가 텍스트 내내 궤변과 거짓 추론의 본성상의 차이를 주장했음에 주목하자.

위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류 추론의 일반 범주 안에서 거짓 추론과 참되지 않은 추론을 구별한다. 결론이 참이어도 전제가 거짓인 경우 또는 결론이 거짓인 경우 거짓 추론이다. 이 거짓 추론 형식은 더 세분된다. 결론이 거짓인 경우는, 전제가 거짓일 때 또는 두 전제는 참이지만 결론이 합당한 방식으로 도출되지 않았을 때다.

그는 거짓 추론 맞은편에 궤변 추론을 놓는다. 궤변 추론을 두고 외견상의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수차례 말한다.

"그런데 어떤 추론들은 실제로 추론인 데 반해, 다른 것들은 추론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소피스트적 논박)

소피스트는 자발-비자발적으로 실수하는 자가 아니다. 소피스트와 무지한 자의 차이는 자발적 오류와 비자발적 오류의 차이가 아니다. 소피스트는 오류를 함정으로 만들고 거짓 추론을 교활한 무기마냥 이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소피스트는 추론의 외견의 편에 있다. 소피스트는 추론의 신기루 속에 있을 뿐 실제로 추론하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궤변가[소피스트]는 외견상으로는 지혜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지혜에 의해서 돈을 버는 자이다."(소피스트적 논박)

돈이 이 외견의 핵심이다. 문제는 이 추론의 외견이 무엇인지, 참된 추론 또는 거짓 추론의 저편이 무엇인지, 못지않게 수수께끼 같은 추론의 현실에 대립되는 이 수수께끼 같은 요소가 무엇인지 아는 데 있다.

한 단어의 단순 동음이의에서 비롯된 궤변, 발음이 다르지만 철자가 비슷한 두 단어를 사용하면서 생기는 최악의 궤변, 진짜 문법적 문제 내지 논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궤변, 궤변적 기술 가운데는 우리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명제의 사용도 포함된다. 그리고 너무 빨리 말하거나 질문의 순서를 뒤집거나 제기된 질문 중 정말 중요한 것을 감추는 기술도 있다.

이런 난립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하는 궤변의 분류는 형식이나 원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획득된 효과에 따라 분류한다.

논박하는 듯 보이는 궤변, 상대의 오류를 드러내는 듯 보이는 궤변, 상대가 역설을 주장하도록 만드는 듯 보이는 궤변, 어법상의 잘못을 저지르게 만드는 듯 보이는 궤변, 상대가 객설에 빠지게 만드는 듯 보이는 궤변 등. 그러나 이것은 좀 이상하다. 이 설명은 거의 일반적인 것으로 주어지지만 궤변의 아주 작은 범주에 관련될 뿐이다.

"소피스트들은 실제로 논박을 수행하고 있지 않음에도 여러 이유 때문에 논박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들 가운데 가장 일어나기 쉽고 흔한 이유는 사용되는 이름들에 의존해서 이뤄진 논의이다. 왜냐하면 대화형식을 취해서 논의하는 경우 논의되는 바로 그 사물을 실제로 제시해서 논의할 수 없기 때문에 사물 대신에 상징으로서 이름을 사용하고, 그래서 이름들에서 생기는 것이 또한 사물에서도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소피스트적 논박)

이 구절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궤변 효과의 위치가 지정된 것이다. 진술의 실천에서 변조된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언어적 상징이다. 정확히 말해 사물의 이름이 변조된 것이다. 궤변은 이름과 사물의 차이, 상징적 요소와 상징화된 요소 사이의 차이에서 만들어진다. 이 차이는 무엇으로 이뤄질까?

그 차이는 이름의 수가 유한하고 사물의 수가 무한하다는 사실, 단어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 단어와 사물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수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 단어와 그것이 지칭하는 것 사이의 관계는 셈할 수 있게 해주는 관계와 동형적이지 않다. 달리 말해, 단어의 물질성에 고유한 성격(단어 부족)이 궤변을 낳는다. 소피스트는 서로 다른 두 사물을 말하기 위해 똑같은 단어, 똑같은 이름,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자이며, 따라서 소피스트는 말해진 것의 동일성 속에서 두 사물을 이야기 한다.

삼단논법에 대해 얘기해보자. 그것은 선행 추론의 결론에 반대되는 추론이다. 그러면 궤변이 논리적 제약을 통해서 덜 용인된 전제들로부터 출발해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대화 상대자가 설령 머릿속에 동일한 전제들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동일한 언표로 동일하게 말해진 것을 그것들의 물질적 동일성에서 붙들어두는 것으로 이뤄짐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들의 마주침, 혼란, 유사, 동일성 때문이다. 단어들의 근본적 부족에서 기인한 우발적 중첩 때문인 것이다.

이로부터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궤변은 결함 있는 추론 범주가 아니다. 궤변은 아예 추론이 아니다. 오히려 궤변은 추론의 뒤집어진 이미지다. 한쪽에는 진리의 강제와 타인의 납득이 있지만, 다른 쪽에는 상대가 말해진 것에, 말해진 것의 물질성에 붙잡히는 함정이 있다.

반론이 제시된다. 단어의 물질적 부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서 모두는 아니고 몇 가지 궤변만 설명할 뿐이다. 그것은 동의어의 존재에서 기인한 궤변이나 모호한 어법의 존재에서 기인한 궤변, 그리고 강세 찍는 방식에 따른 애매함의 존재에서 기인한 궤변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한 궤변들의 분류를 모두 살펴보면, 간접-비간접적이든 진술의 물질성이 다양한 측면에서 늘 쟁점이 됨을 깨닫게 된다. 부족(상이한 것들을 이야기 하기 위해 입에 담거나 글로 쓴 하나의 단어, 하나의 표현)의 궤변 말고도 다음이 있다.

- 분리의 궤변. 진술은 단어들의 연속으로 이뤄진다. 이 연속이 성립되면 우리는 마음대로 분리하고 모을 수 있다. A, B, C. ABC, AB, C.

- 대체의 궤변. 진술은 어떤 조건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자리를 바꿀 수 있는 요소들로 이뤄진다. 소크라테스는 하얗다 / 하얀 것은 색이다 /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색이다.

- 연합의 궤변. 진술은 집단을 이뤄 의미를 갖는 요소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첫 번쨰 집단에서 분리된 하위 집단도 의미를 형성한다. 인도인은 검다 / 그런데 인도인은 치아가 하얗다 / 그러므로 인도인은 하얗고 검다

- 혼동의 궤변. 진술에서 연속적이지만 구분되는 어떤 요소들은 결합될 수도 있다. AB는 하나의 사람인가? / 그렇다 / AB를 때리면서 우리는 한 사람을 때리지 두 사람을 때리지 않는다.

- 선행성의 궤변. 진술은 명제의 무한정한 연속이다. 어쨌든 대화 상대가 그 연속을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화하고 동시적인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이상, 연속은 원하는 만큼 항상 연장될 수 있다. 그 명제가 정말 증명돼야 하거나(원리의 청원) / 그 명제가 거짓인데도 증명됐다고 믿게 만들 수 있다. / 아주 빨리 말하기, 말의 파도 속에서 상대를 압도하기, 질문의 자연스런 순서를 어지럽히기를 궤변의 계열에 집어넣는다.

- 무한정 증식의 궤변. 이것은 연속과 대체의 작용이다.

- 반복의 궤변. 이미 말해졌던 것. 그리고 말하진 대로 반복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나의 동일한 주제에 관해 이미 발설된 문장들의 집합이 있다. 토론을 이 주제 가운데 하나로 끌고 가 상반되는 명제들의 집합을 항상 반복할 수 있다.

- 문법의 궤변. 진술은 여러 요소들의 집합인데, 그 요소들 중 어떤 것은 사물과 관계하는 동시에 진술 자체와 관계한다. 진술의 요소들 사이에는 사물들의 관계를 재현하지 않거나 그 관계와 동형이 아닌 연결 관계가 있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궤변 분석은 온통 진술의 물질성 수준에 위치한다. 궤변은 이 물질성에 내재하는 하나의 전술이다. 또한 진술의 특정한 물질성은 이제 더 많은 차원에 걸쳐 등장한다.

첫째, 선형적 성격. 단어의 부족만이 아니라 진술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필연적으로 연속을 이루고 치환되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 계열적 성격. 더 넓게는 모든 언표가 이전 진술의 거대한, 사실대로 말하면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계열 안에 기입된다.

셋째, 사건적 성격. 진술이 일정한 수의 실제 사건들(말해진 것들), 즉 일단 만들어지면 변화될 수 없는 실제 사건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이 있다. “말해진 건 말해진 거다. 네가 그것을 말했다면, 너에겐 안 됐지만 어쩔 수 없다.” 라는 식으로.

넷째, 전략적 성격. 마지막으로 진술의 물질성이 토론하는 사람들의 투쟁, 경쟁, 전투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있다.

 

삼단논법과 궤변은 이제 이렇게 대립된다.

첫째, 삼단논법은 전제가 놓였다는 사실이다. 궤변의 특징은 문장이 놓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놓였다는 건 문장이 실제로 말해졌다는 의미다. 궤변이 인정됐든 아니든, 실제로 받아들여지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 문장은 말해진 것[사물]이다.

둘째, 삼단논법은 온통 두 한계[전제 동의, 결론의 진리] 사이에서 전개된다. 궤변은 선행하는 언표들의 무제한 계열에서 작동한다.

셋째, 삼단논법은 개념의 강제, 이름을 통해 의미화된 것의 강제를 따른다. 궤변은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무관하게 단어 자체의 수준에서 자유 전술처럼 전개된다.

넷째, 삼단논법은 진리 효과를 산출한다. 궤변은 승리 효과를 산출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 궤변은 오류 추론이다. 궤변은 엄격한 의미에서 추론 바깥에 있는 것으로 추론이 아니다. 궤변의 조작은 상징의 물질성 수준에서 일어난다.

- 궤변은 차이를 도입함으로써 해소된다. 한편으로 이 차이는 개념을 구축하고, 의미의 관념성을 제어하고 조직하며, 종과 유를 나누고, 실체와 우연적 속성, 주어와 술어를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요컨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참된 언표 내지 거짓 언표를 정식화할 수 있는 의미의 전 우주를 구축할 수 있게 해준다.

궤변에서 벗어나는 수단들을 열거하는 장 내내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의 역할을 제시한다. 구별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줄기차게 말한다.

차이를 사고함으로써 진술의 물질성을 중화할 수 있다. 차이를 사고함으로써 진술의 물질성을 가로지르고, 물질성의 표면에서 작동하는 추론의 그림자를 흩뜨리며, 개념과 그것의 관념적 필연으로부터 추론을 조직하고, 그 대신 진술을 이 필연에 투명하도록 만들 수 있다. 진술의 물질적 실재성을 제거하는 수단인 차이는 진리 내지 명제의 오류의 장 같은 명제학의 조건이다.

궤변술은 진술의 어떤 질료적인 것의 수준에서 늘 유지된다. 궤변술은 현실 사건들로부터 전개된다. 궤변술은 물질적 성질이나 규정을 이용한다. 이로부터 궤변술이 도달하는 곳은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참된 명제가 아니라 두 상대방 가운데 한쪽의 침묵이다. 한쪽은 말을 이을 수 없고 이 물질성의 게임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명제학은 대상과의 연속적 관계맺음으로 정의된다. 궤변술은 주체의 배제로 정의된다.

궤변은 추론의 외견일 뿐이라던 아리스토텔레스 말의 의미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소피스트는 단어를 변조할 뿐이면서 마치 추론하는 척한다. 소피스트는 진술의 물질성과 관련한 코미디이자 가면극에 지나지 않는 추론의 무대 공간에 위치한다. 소피스트는 무대 뒤에서 진술의 그림자를 붙들 뿐이다.

이로부터 논리학사에 발생한 거대한 분열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진술의 물질성을 중화하는 개념과 차이의 논리. 이 논리의 문턱은 개별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일 테다. / 말해진 것의 물질성에서 출발해 의미와 비물질성이 출현하는 지점을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진술의 논리.

마침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플라톤이 그렸던 선에 포함되는지, 또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자리를 옮기는지 잘 알 수 있다. 결국 소피스트는 시늉, 비존재 그리고 소피스트 사이의 관계를 분석한 것이었다. 대화편의 핵심은 비존재가 로고스에 닿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소피스트의 목적은 논변을 논박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이방인을 통해 대답하게 만든 것은 거짓 진술이 있을 수 잇다는 것이다.

소피스트를 가능케 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존재, 비존재, 참여에 관한 거대한 프라톤 이론이 모두 필요했다. 소피스트는 거짓 진술이 있기에 가능했다.

궤변을 진정으로 배제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궤변을 참의 외견을 가질 수 있는 거짓 추론이 아니라, 참도 거짓도 아닌 추론의 외견으로 정의한다.

그는 추론의 외견을, 외상을 다루는 어떤 기예가 아니라 진술의 물질성에 대한 게임과 연결한다.

, 그는 물질성 속에서 말해진 것을 로고스의 관념적 현실에 출몰하는 비현실적 그림자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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