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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4강
아리스토텔레스는 궤변을 철학 게임의 바깥에 제쳐둔다. 궤변은 철학 담론의 외부에 놓인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궤변에 실재성을 부여하려 했던 몇몇 역사가들의 작업도 아리스토텔레스식 배제를 전제하고 있다. “그들(소피스트들) 역시 어떻게 보면 참된 담론, 존재를 이야기하는 담론, 존재 안에 있는 담론의 영역에 속한다. 그들은 철학의 한계 너머에서 생명도 육신도 없이 배회하는 그림자들이 아니다.”
소피스트와 철학자가 합류하는 공통 공간을 수립하지 않고, 그 거리를 있는 그대로 놔두고, 즉 배제 상황을 염두에 두며 소피스트 담론의 존재 양식과 기능 양식을 분석할 수는 없을까. 요컨대 궤변은 어떤 조건에서 존재했고, 또 사라졌을까.
참된 추론 또는 거짓 추론과, 오류 논변 사이의 대립을 철학 관점에서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궤변술을 ‘철학으로 나타나지만 철학으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으로 정의했다. 궤변이 ‘존재를 갖지 않는 철학’인 이유는, 추론의 ‘외견’을 취하고 있을 뿐 추론이 아닌 추론이기 때문이다. 다음 예를 보자.
“배우는 것은 바로 아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문법학자는 자기 제자들이 자기에게 암송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아테나이인에게 속하는 것은 아테나인의 소유물인가? 그렇다. 인간은 동물 세계에 속하는가? 그렇다. 그러면 인간은 동물 세계의 소유물이다.”
“코리스코스는 소크라테스와 다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따라서 코리스코스는 인간과 다르다.”
이외에 왜 또는 무엇을 묻는지 제시하지 않은 채 질문하기, 질문을 마구 쏟아내기, 빨리 말하기, 한 사람을 가리킬 때 중성 표현(‘이것’)을 쓰는 등 몇 가지 문법 현상 사용하기, 이미 마련된 논변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논의를 끌고 가기, 특수 테제에 대중 테제를 대립시키거나 그 반대로 하기 등등.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궤변들을 그 형식이 아니라 결과에 따라 분류한다. 이 궤변들은 오류 추론, 즉 외견상으로만 추론으로 보일 뿐 어떤 실재성도 없는 추론이다. 이 궤변이 산출하려는 효과는 이러한 ‘외견’을 취하는 것이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 다섯 개 분류를 제시한다.
- 논박하는 체 하는 궤변. 대화 상대가 제시한 명제와 모순되는 명제를 증명하는 척하기.(논박)
- 상대의 오류를 나타나게 만드는 척하는 궤변. (오류)
- 아무도 이성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특이 테제를 상대가 지지함으로 보이는 척 하는 궤변. 역설)
- 대화 상대가 자기 문법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법을 어기고 있다고 믿게 하는 궤변.
- 상대가 의미 없는 말을 쌓아 나가고만 있다고 믿게 하는 궤변.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 각각에 대응하는 궤변을 지적한다. 거짓 논박에는 동음이의가, 역설에는 기성의 진술, 어법 어김은 낯선 문법이 사용된다.
이처럼 추론을 말장난으로, 토론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이 모든 기법의 공통점은, ‘진술의 요소들을 물질적으로 변조하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와 철학이 ‘불법’이라고 판정한 이 변조는, 참된 추론에서 수행되는 변조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1) 사실 모든 정당한 추론의 변조는 소피스트식 변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예컨대 “모든 A는 B다. 그런데 모든 B는 C다. 따라서 모든 A는 C다.” 이러한 변조가 가능하려면 다음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첫째, 진술을 구성하는 여러 단위와 그것들의 구성에 관한 정의, 주어, 술어, 명제. 둘째, 주어, 술어, 명제를 이것에서 저것으로 치환하는 규칙, 범주, 동치, 종속.
반면 궤변은 이러한 기본 구조 대신 언표의 존재에 의거한다. ‘단어가 발설됐다는 사실’, 그것이 만들어진 그대로 또는 상대 마음대로 반복되고 재조합될 수 있는 것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궤변의 토대다.
(1) 궤변은 하나의 사건/물질처럼 만들어진다. 그것은 한 번에 결정적으로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대로 남는다. 이 사건의 각 부분들은 서로 동질적이다. 사건은 원하는 부분만큼 분할 가능하며, 그렇게 나뉜 부분들은 서로 동질적이다. 귀속 유형에 관한 이론, 요소들 사이의 치환 규칙이 여기에는 없다. 유일한 차이(차이화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게임과 관련해 내부와 외부의 차이. 둘째,기억 또는 망각의 차이.
(2) 그러나 궤변이 존재하려면 어떤 것이 말해진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떤 것이 ‘누군가에 의해’ 말해졌다는 사실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주체에게 어떤 언표를 귀속시키는 것은, 주체가 언표에 집어넣고자 했던 의미나, 뜻하고자 했던 의도 또는 그 주체의 생각을 가리키지 않는다. 주제는 스스로 그것을 말하거나, 그것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함으로써 ‘말해진 것’과 연결된다. 주체가 자신의 언명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다면 그 언명은 주체의 몫으로 계속 남게 될 것이고, 그는 궤변에서 이길 것이다. 그가 참을 말했느냐 거짓을 말했느냐는 중요치 않다. 궤변은 증명되지 않는다. 궤변은 이기거나 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이고 정당한 변조는 ‘익명의’ ‘변하지 않는’ ‘공통 규칙 체계’를 전제한다. 개인들은 이 규칙 안에 자리 잡고서 자신들의 언표를 만든다. 참된 추론은 규칙, 주체, 만들어진 언표, 뜻하고자 하는 의도 사이의 정해진 관계를 함축한다. 이 관계는 언표의 사건적 성격을 중화한다.
즉 철학에서 궤변을 특징짓는 관계(사건, 사건의 지속, 반복, 동일성, 전가 가능성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주체와 언표의 관계)는 배제된한다. 철학은 그러한 주체와 언표의 관계를 형식적으로 무질서하고, 도덕적으로 부정직하며, 심리적으로 유치하다며 배제한다.
2) 변조의 진리 효과 차이를 ‘궤변’과 ‘정당한 추론’에서 각각 살펴보자.
(1) 먼저 궤변. 궤변은 진리와 모순의 문제를 다룬다. 첫째, 하나의 명제가 대화 상대에게 긍정과 동의를 얻으면, 그것은 참으로 긍정된다. [예: 네가 잃어버리지 않은 것을 너는 갖고 있지? (그렇다.) 그런데 너는 뿔을 잃지 않았지? (그렇다.) 따라서 너는 뿔을 갖고 있다.] 둘째, 화자가 하나의 언표를 정식화해 놓은 다음 그것과 전혀 다른 언표를 내놓으면, 사람들은 그에게 그의 말이 모순되었다고 말한다. (예: 엘렉트라)
① 그런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제출되거나 인정받는 언명은 어떤 진리와 관련되는 게 아니라 말하는 주체가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키려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언명은 사실 확인의 질서가 아니라 맹세의 질서에 속한다. 궤변에서 무언가를 참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것을 견지하겠다는 다짐과 같다.
소피스트의 궤변에서 단어는 단어 고유의 물질적 실재성을 갖는다. 단어와 그 단어가 지칭한다고 간주되는 사물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다. 단어가 사물을 의미하지 않기에 우리는 진술에서 출발해 사물에 도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소피스트에게 진술은 진술이 말하는 대상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사물이다. 진술은 진술이 말하는 대상과 분리된다. 결과적으로 단어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고, 진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예컨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내뱉음으로써, 우리는 ‘이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을 존재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비존재가 존재하게 한다. ‘비존재’를 언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비존재가 존재하지 않게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비존재’라는 단어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소피스트를 제압하고자 했을 때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이러한 존재론이다. 이 존재론은 명제의 진리와 무방한 존재론이다. 그것은 한 언표를 한 주체에게 전가할 수 있게 해 주는, 끊임없이 해체되면서도 재개되는 존재론이다.
요컨대 궤변의 진리 효과는, 사실 진술적[담론적] 사건과 말하는 주체 사이에 유사 법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소피스트에게서는 두 가지 테제가 발견된다. 첫째, 모든 것은 참이다(네가 어던 것을 말하자마자 그것은 존재에 속한다). 둘째, 아무것도 참이 아니다(네가 아무리 단어들을 사용한들 단어들은 결코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② 모순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궤변은 언표를 무효화하기 위해 모순을 사용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궤변적 게임에서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똑같은’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실체적으로 똑같은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즉 자기모순이란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철학에서 볼 수 있듯, 우리는 한 가지를 말한 후 모순에 빠지지 않고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궤변술에서 유일한 존재는 ‘말해진 것’이며, 이후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다. 똑같은 것을 말하거나 똑같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기(견지하거나 견지하지 않거나).
궤변이 존재/비존재, 모순/무모순, 참/거짓 같은 익숙한 대립을 사용하더라도, 실제 궤변 게임의 진행 방식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참/거짓은 그 등가인 ‘인정된/인정되지 않은’으로 기능한다.
- 존재/비존재는 그 등가인 ‘이야기된/이야기되지 않은’으로 기능한다.
- 무모순/모순은 ‘기각되지 않은/기각된’으로 기능한다.
즉 여기서 진술은 사건으로 존재하며, 대립은 승자/패자를 나누며, 실제로 이야기했고 나중에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전가되어도 좋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자가 승자가 된다.
(2) [철학에서] 진술문은 존재와 관련 있다. 진술이 존재하고 사건이 되며 만들어지는 수준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술이 이야기하는 것’의 수준에서 그렇다. 여기서 진술은 명제학적이다. 진술이 명제학적이라는 의미는, 특정 진술이 어떤 것을 존재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 그것이 존재한다면 참이고 아니라면 거짓이라는 뜻이다.(이때 언표의 물질성과 사건성은 배제된다.)
참된 명제는 모순을 배제한다. 예컨대 어떤 사물이 존재할 때, 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참이고 그 반대는 거짓이다. 따라서 이 사물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동시에 언명하는 명제는 참일 수 없다. 즉 여기서 모순 금지는 언표의 동일성이나 언표의 물질적 타자성과 관련이 없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진술문은 이중의 대립 체계를 바탕으로 수립된다.
- 진술문은 기원, 주문, 명령 등 참이나 거짓 명제로 귀결될 수 없는 모든 정식화 방식과 명시적으로 대립한다.
- 진술문은 진술의 형태를 띠면서도 사건적 실재성의 수준에서 작동하고 기능하는 언표들과 암묵적으로 대립한다.
즉 명제학은 언표와 존재 사이 의미작용의 (항상 관념적인) 수준에서만 관계를 수립한다. 의미작용에 자신의 장소를 갖는 이 관계를 통해 언표는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다. 이에 비해 궤변이 언표를 다루는 방식은 엉뚱한 추론, 추론의 그림자, 추론의 외견이 된다.
논리학의 거대한 대립이 진술적/비진술적 대립이라면, 철학 혹은 서구 지식 전체의 대립은 명제학과 궤변적 비판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술의 물질성의 배제, 명제가 참 또는 거짓이 될 수 있게 해 주는 조건을 부여하는 명제학의 출현, 기표-기의 관계의 지배, 진리의 출현 장소로서 사유에 부여된 특권. 이 네 현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서양 과확과 철학이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데 초석이 됐다.
결론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 관점에서 ‘궤변의 형태학’을 정리했다.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할 역사적 문제를 더 잘 정의할 수 있다.
1. 담론과 말하는 주체의 관계는 어떻게 철학적-과학적 담론을 낳는 방식으로 이동할 수 있었을까?
2. 궤변적 토론에서 작동하던 지배 관계는 어떻게 배재되고 제거되고 괄호 쳐짐으로써, 또는 망각되고 억압됨으로써 진술문을 야기할 수 있었을까?
이 이중의 변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대 소피스트의 사례는 이 변화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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