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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종언/리오타르/이현복 편역/ 93년11월 출간/ 발제:18.10.10세미나용
p10 : 리오타르는 자신이 거부하는 것은 계몽적 이성, 보편적 이성이며, 더 나아가 이런 이성에 의한 인류의 진보라는 믿음을 이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시되어야 할 것은 이성의 다수성, 아니 차라리 예술적, 미학적 이성이나 감수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1) 하나의 이성(보편적 이성) 속으로 포섭시키려던 모던적 꿈은 문법적 환상, 초월적 환상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적인 문화, 사회, 예술, 학문에 있어 다양성을 단일성으로 지양하는 하나의 규칙(메타규칙)은 존재할 수 없으며, 이것을 정초하려는 자는 불법행위, 테러행위를 범하는 것이며, 리오타르는 이것을 나치의 유태인 학살사건의 산실인 아우슈비츠에서 목격하고 있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은 시대구분에 따른 모던의 이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모던 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모던적 사유가 갖고 있었던 생생한 비판정신을 재생시키는 것이 포스트모던적 사유방식이라는 것이다.
p12 : 나약한 자는 기존의 규칙에 안주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종의 안락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강인한 자는 항상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을 추구한다. 이런 추세는 만족감보다는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이 고통으로부터 발생되는 야릇한 기쁨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모순된 감정, 고통과 기쁨이 병존하는 이 감정, 바로 이것이 리오타르가 ‘모던적 미학’, ‘미의 미학’서 떨어져나와 실험적인 아방가르드와 더불어 찾고자 한 ‘포스트모던적 미학’, ‘숭고의 미학’이다. 사유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 ‘지금’ 발생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가시화시키는 작업이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미학의 과제라면,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신보수주의의 논리’라고 규정해야 될 것인가?
질문에 대한 답변 : 포스트모던이란 무엇인가
p26 : 뒤샹의 기성품(ready made)은 회화 기법과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화가로부터 지속적으로 박탈하는 과정을 적극적이고 패러딕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32) 칸트에 따르면 숭고한 감정은 강력하고 모호한 정념이다. 이 감정은 쾌와 불쾌를 동시에 갖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감정에 있어 쾌는 불쾌로부터 나온다. (33) 구상력(imagination)이 개념과 일치될 수 있는 대상을 현시할 수 없을 때, 숭고는 나타난다. (35) 칸트는 절대적인 것의 현시를 일체 금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말지어다’라는 개명을 성경에서 가장 숭고한 구절로 인용하고 있다.
p39 : 현시능력의 무기력, 인간 주체가 경험하는 현전성에 대한 향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 주체를 사로잡는 모호하고도 부질없는 의지가 우선 강조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인식능력의 힘, 이른바 이 능력의 ‘비인간성’(왜냐하면 인간의 감성 및 상상력이 그것이 인식한 것과 일치할 수 있는가 여부는 오성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을, 그리고 회화적이든, 예술적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게임이든 간에 새로운 게임규칙들의 창안으로부터 나오는 존재의 증가와 환희를 강조할 수도 있다. (41) 근대미학은 숭고의 미학이지만 여전히 향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단지 결여된 내용으로만 드러내주지만, 형식은 그 인식가능한 일관성 덕택으로 독자나 관객들에게 위안과 기쁨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은 쾌와 불쾌의 내적 결합인 진정한 숭고의 감정을 형성하지 못한다. 여기서 쾌는 이성이 모든 표현을 넘어서고 있다는 데서, 불쾌는 상상력과 감성이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란 근대 속에서 표현 그 자체 속에서 현시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그것은 적합한 형식으로부터 생기는 위안을 거부하고, 불가능한 것에 대한 향수를 공동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취미의 합의를 거부한다, 그것은 새로운 표현들을 찾는다. 그렇지만 이런 것을 즐기기기 위해서가 아(42)니라, 현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더욱 예민하게 느끼기 위해서이다.
p42 : 이런 텍스트와 작품은 이미 알려진 범주들을 이런 것에 적용함으로써, 규정적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없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적 예술가와 작가들은 아무런 규칙도 없이 그리고 만들어질 것의 규칙들을 만들기 위해 작업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과 텍스트는 사건의 성격을 가지며, 그것들은 또한 그 작가들에게 항상 너무 늦게 나타나며, 혹은 같은 말이지만 그것들에 대한 작업은 항상 너무 일찍 시작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이란 전(post, futur) 미래(modo)라는 패러독스로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임무는 현실을 제공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될 수 없지만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암시들을 창안해내는 데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임무가 ‘언어게임들’간에 최소한의 화해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43)능력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것들은 어떤 간극에 의해 서로 분리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헤겔은 초월적 환상만이 이것들을 실제적인 통일성으로 총체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칸트는 또한 이런 환상의 대가가 테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19세기와 20세기는 우리에게 무수한 테러를 가했다.
이완과 진정화라는 전반적인 요구 아래에서 우리는 테러를 재개하려는 욕망, 현실을 포옹하려는 환상을 실행하고자 하는 욕망의 소리를 너무나 또렷하게 듣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 전체에 대항해서 전쟁을 하자. 표현될 수 없는 것의 증인이 되고, 분쟁들을 활성화하고, 그 이름의 명예를 구출하자.
포스트모던에 관한 짧은 설명
p46 : 자본주의는 근대성을 가리키는 이름들 중의 하나이다. (47) 자본주의는 규칙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인 작품을 추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미학은 미의 미학이 아니라 숭고의 미학이며, 그의 시학은 천재의 시학이다. 자본주의에 있어 창조는 규칙에 종속되지는 않고, 규칙(48)들을 창안해낸다.
벤야민이 ‘아우라의 상실’로 충격의 미학으로, 취미와 경험의 파괴로 묘사한 것은 모두 규칙을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 이런 의지의 결과이다.
(56) 이미 19세기 초에 스탕달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우리의 이상은 이제 고대인의 체력이 아니라 유연성, 신속성, 변신능력(저녁에 무도회에 가고, 다음날 아침에 저녁을 한다)이다.
의지의 무한을 날렵함과 조화시켜야 한다. :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이 배우고, 알고, 창안해내며, 유통되어야 한다. 정치에 있어 정의는 이런 방향으로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구매력을 떨어뜨림이 없는 노동시간의 단축에 대해 국제적인 일치를 언젠가는 보아야 할 것이다.)
‘포스트-’의 의미에 관하여
p62 : ‘포스트-’는 전향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 이전의 것 다음의 새로운 방향.
그러나 이제 이런 직선적인 연대순이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근대적’인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계바늘을 원점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68) 우리는 근대적 노이로제(지난 2세기 동안 경험했던 불행의 원천으로서) 서구의 정신분열증, 편집증 등을 한치의 변경 없이 반복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파악된 포스트모던의 ‘포스트-’는 컴백, 플래쉬백, 피드백 운동, 즉 반복운동이 아니라, 분석, 상기, 재생, 변형의 (원초적인 망각)을 완수하는 과정을 뜻한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할 것이다.
비트겐슈티인, ‘이후’
p77 :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제 남은 과제는 우선 문장체계에 대한 연구를 이런 인구학적 장애물로부터 해방시키고, 철학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의 사용자도 아니고, 언어의 목자도 아니다. 하나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듯이, 하나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명제들은 명사와 대명사를 그것들이 재현하는 세계 속에 위치시킨다. 철학은 자신의 규칙을 발견하는 것을 규칙으로 갖는 담론이며, 여기에서 명제들은 규칙없이 시도되며, 모든 것이 말해지는 것은 아니고, 무가 아니라 새로운 명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경이에 의해 명제들은 연결된다.
이야기들에 관하여
p84 : 기술과학은 근대의 기획을 완수한다 :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와 소유자로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이 기술과학에 의해 심각하게 불안정하게 된다. : ‘자연’이라는 개념 아래 인간 주체의 모든 구성성분들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85) STS라는 분야는 약 10년전부터 주체는 연구되고 변형되는 대상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발견을 통해서 생기기 시작했다. 상호적인 전위에 따라 : 대상들은 언어를 사용하고,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언어를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 속에 지능의 내재, 주체와 대상의 분열이라는 이런 상황 속에서, 지배의 이상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인간은 우주를 형성하는 일반적인 광선들의 상호작용 속에 있는 아주 기발한 교차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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