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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화 – 인정이론적 탐구 / 악셀 호네트 / 강병호 옮김 / 나남신서 /2006년9월
[한국어판에 붙여]
p5 : 물화에 관한 탐구인 이 새 책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인정이론에 지금까지 하나의 근본층이 빠져있다는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나는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주로 서로 다른 인정형식들의 규범적 내용에 집중해왔기 때문에 모든 인정의 전제, 즉 인간 주체를 인격체로 지각하는 문제를 단순하게 지나쳐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특정한 속성에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쨌든 그들을 일단은 그러한 속성의 가능한 담지자로 “구성”했을 때, 그러니까 그렇게 지각하기를 배웠을 때 만이다.
나는 우리가 적절한 사회화 조건 아래 있다면 인(6)정의 이러한 기본 형식을 거의 자동적으로 배우게 된다는 논증을 전개한다.
타자를 통해 항상 이미 감응되어 있다는 이러한 사실을 나는 여기서 “선행하는 인정”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물화의 가능성, 그러니까 사람을 “물건”으로 지각하고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의 이런 기본 형식에 대한 차후의 망각이란 정황으로부터 설명한다.
p8 : 사람을 물건처럼 다루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물건들 사이의 관계같이 되어버렸다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끔 문득 갖게 되는 이러한 느낌과 직관을 사회비판을 위해 처음으로 사회이론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맑스이고, 이 직관에 “물화”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이론적 언어로 다듬은 사람이 루카치이다.
p27 : 루카치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물화는 인간들의 “제2의 자연”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한낱 물건과 객체라는 도식에 따라 지각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의 상습적인 습관이 될 수밖에 없다.
p29 : 루카치에게 물화란 ‘단지 관찰하는 습관이나 행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찰하는 관점에서는 자연환경, 사회세계 그리고 자신의 인성적 잠재력은 단지 초연하게 그리고 물건 같은 것으로 파악될 뿐이다.
p45 : 듀이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체험이 갖는 이러한 근원적 질에서, 행위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우선은 실존적 직접성과 실천적 관여를 통해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표현된다. 다른 곳에서 이와 똑같은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듀이는 “상호작용”이란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 개념은 중요한 것이 자기관련적, 자기중심적 태도가 아니라, 가능한 한 마찰 없고 조화로운 교류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상황 속의 모든 요소에 대한 염려라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이 세계는 우리 자신에 대한 마음씀 속에서 개시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상황을 체험하는 것은 환경세계와의 물 흐르는 듯한 상호작용을 보전하고자 하는 마음씀에서라는 것이다. 나는 세계 관련성의 이러한 근원적인 형식을 앞으로 “인정”이라고 부르겠다.
p48 : 이러한 사유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제 나는 인정이 인식에 대해 발생적으로만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p54 : “인간은 다른 인간을 모방함으로써 그제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 (...)
이러한 호감, 혹은 아도르노가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듯 대상에 대한 리비도적 집착이야말로 바로 유아가 타자의 관점에 서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리하여 그에 힘입어 주변세계가 확대된, 마침내는 탈인격화된 표상을 획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p55 : 하나의 유일한 지각 대상을 우리가 보다 많은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으면 그런 만큼 우리의 인식은 더 적절해지고 더 정확해진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관점들을 취하는 것은 – 그때마다 우리는 대상의 새로운 측면을 인식하게 되는데 – 갓난아이에게 그런 것처럼 우리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정서적 열림 혹은 동일시라는 非인지적 전제와 결부되어 있다. 이런 한에서 아도르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의 정확도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다른 관점들을 정서적으로 인정하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비례한다.
p64 : 루카치는 물화가 일종의 사고습관, 그 습관적으로 고착된 일종의 관점으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그 관점을 취함으로써 사람들이 사람과 사건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잃어버리는 그런 관점 말이다. 이러한 상실에 비례하여 주체는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찰자로 변해서, 그들에게는 사회 및 물리적 환경세계만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생활 또한 물적 존재자들의 조합으로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루카치의 믿음이었다.
(65) 우리는 물화과정을 근원적인 참여적 관점이 중립화되어서, 결국에는 객관화하는 사고의 목적에 봉사하게 되는 바로 그 과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듀이와 더불어 물화가 다름 아니라 바로 반성적 거리두기, 즉 인식이란 목적을 위해 우리의 모든 지식이 먼저 정박해있던 상호작용에 대한 질적 경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러한 이해가 옳다면, 그러니까 물화가 실제로 우리의 사고의 객관화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러한 객관화를 요구하는 모든 사회적 과정은 이미 물화과정의 징표일 것이다.
p69 : 우리가 인식활동을 하면서 그것이 인정하는 자세 취하기의 덕택이라는 감을 상실하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한낱 감각 없는 객체로 지각하는 경향을 발전시킨다. 여기서 한낱 객체, 나아가 “물건”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기억상실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몸짓 표현을 우리에 대한 반응요구로 즉각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인지적으로 여전히 인간표현의 전 영역을 지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지각된 것으로부터 감응되기 위해서 필요한 결속감이 결여되어 있다. 이런 한에서 내가 모든 물화과정의 핵심으로 개념화하고 싶은 이러한 선행하는 인정에 대한 망각에, 다른 쪽 편에서는 또한 실제로 세계에 대한 물화된 지각이라는 결과가 상응한다. 사회세계는 자폐아의 지각세계와 거의 비슷하게 심리적 동요와 느낌이 없는 한낱 관찰가능한 객체들의 총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p72 : 사회세계만이 아니라 물리적 환경세계와 관련해서도 우리의 지각이 물화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아직 단지 중립적으로 파악하고 외부 관점에서 지각한다면,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물건들, 바로 그것들과도 더 이상 적절하게 관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p74 : 주체가 다른 사람들의 태도들을 리비도적 집중을 통해 하나의 동일한 대상에 보다 많이 결합시키면 시킬수록, 그 대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면서도 마침내 보다 풍부한 측면을 주체에게 드러낸다. 이런 한에서 아도르노는 인간이 아닌 객체들에 대해서도 “인정”이 말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p75 : 이제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자연의 잠재적 “물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것들에 부여된 모든 추가적 의미측면들에 대해 주의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 존재가 물화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하나의 “특정한 종류의 눈멂(blindness)- 아드르노”이 인식에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동물, 식물, 물건을 –그것들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여러 실존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지 못한 채 – 단순히 객체로서 확인하며 지각하고 만다는 것이다.
p78 : 인간의 “눈멃”에 대해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주변에 있는 사물에 부여한 실존적 의미를 무시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그 사람들에게 부주의한 것이고, 나아가 그들을 무시하는 것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p81 : 널리 퍼져있는 생각에 따르면 주체의 자기관계는 우리가 이른바 객관세계와 맺는 관계를 본으로 해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런데 앞에서 루카치, 하이데거, 듀이의 고찰을 요약했을 때, 우리는 객관세계에 대해서 인식하는 관계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를 이미 보았다.
p101 : 표준화된 파트너 찾기 방식은 인터넷 이용자들로 하여금 우선 자신의 속성들을 이를 위해 마련된 수치화된 난에 기입하도록 강제한다. 이를 통해 속성들이 충분히 겹쳐진다고 확인되면 그들은 컴퓨터를 통해 선택된 쌍으로서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이메일로 그들의 감정을 서로 교환하도록 촉구된다. 이러한 길을 통해 자기의 욕구와 의도가 더 이상 인격적 만남의 빛에 비추어 표명되지 않고, 가속화된 정보처리라는 기준에 따라서만 파악되며, 이른바 시장화 될 수밖에 없는 자기관계의 형식이 촉진될 것이라는 것을 그려보기 위해서는 별로 큰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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