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포스트 모던의 조건 : 서문~8장(18.10.03모임용) / 리오타르 / 유정완 옮김 / 2018년8월 개역판 / 민음사
인무연 2018. 10. 3. 14:38포스트 모던의 조건 / 리오타르 / 유정완 옮김 / 2018년8월 개역판 / 민음사
서문
p23 : 포스트모던의 지식은 그저 단순히 당국자들의 도구만은 아니다. 그것은 차이에 대한 우리들의 감각을 세련해주고 통약 불가능한 것에 대한 관용을 강화해 준다. 그것의 원리는 전문가의 상동성이 아니라 발명가의 배리이다.
1. 연구범위-컴퓨터 사회의 지식
p32 : 지식은 팔리기 위해 생산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식은 이제 그 자체가 목적이기를 그만두고, 사용가치를 상실한다.
p38 : 지식 유통 가운데 일부는 ‘정책 결정자들’을 위해 비축될 것이고, 나머지는 사회적 유대와 관련하여 각 개인이 항구적으로 지고 있는 부채를 갚는 데 이용될 것이다.
2. 문제-정당화
p44 : 지금은 과학이 과거 어느 때보다 지배 권력에 더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으며,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과학이(45)권력 갈등에서 하나의 중요한 관건이 될 위험에 처해있는 시기이다.
무엇이 지식인지를 누가 결정하고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를 누가 아는가? 컴퓨터 시대에 지식의 문제는 다른 어느 때보다 통치의 문제가 된다.
3. 방법-언어게임
p51 : 즉 모든 발화는 게임에서의 하나의 수로 생각할 수 있다.
즉 말하는 것은 게임을 한다는 의미에서 싸우는 것이며 언어 행위는 일반 경기 영역에 포함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말은 우리가 꼭(52)이기려고 게임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묘수를 생각해 내는 기쁨으로 하나의 수를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상대를 이겼다는 성취감, 적어도 한명의 상대를, 만만찮은 상대를 이기고 난 후 느끼는 성취감에 달려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상대는 바로 기존의 인정받은 언어 또는 함축적 의미이다.
4. 사회적 유대의 성격-근대적 대안
p55 : 사회란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이루며 그 유기적 전체가 없으면 더 이상 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프랑스학파를 창립한 사람들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생각은 1950년대에 이르러 사회를 자기 조절 체계로 파악하는 파슨스의 개념과 더불어 또 한 번의 수정을 거쳤다. 이제는 이론적이거나 실질적인 모델이 더 이상 살아 있는 유기체도 아니다. (56) 현대 독일 이론가들의 체계이론은 절망적일 뿐 아니라 기술관료적이며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이나 체계의 진정한 목표, 그리고 체계가 스스로를 컴퓨터처럼 프로그램화하는 이유는 투입과 산출의 전체 관계를 최적화하기 위한 것, 즉 수행성을 최적화하려는 것이다.
p60 : ‘전통적’ 이론은 언제나 사회적 전체의 기획에 통합되어 수행성 최적화의 도구로 이용될 위험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전통이론의 단일하고 총체화된 진리 추구의 욕망이 체계 관리자들의 단일하고 총체화된 실천에 스스로를 넘겨주기 때문이다. 이원론적 원리에 기초해 있으면서 종합과 화해를 경계하는 ‘비판’이론은 이러한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p63 : 지식의 주된 역할을 사회의 기능 작용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그 결정에 따라 움직이려면 먼저 사회를 하나의 거대기계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이제 선택이(64)명확해진 것 같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의 동질성과 내적 이원성 사이, 기능적 지식과 비판적 지식 사이의 선택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어렵거나 자의적일 것 같다.
아예 이 같은 결정을 피하면서 지식을 두 종류로 나눈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우선 실증적인 지식은 인간과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기술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며, 체계 내에서 필수불가결한 생산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인 비판적, 반성적, 해석학적 지식은 가치와 목표 따위를 직간접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어떠한 ‘통합’에 대해서도 저항할 것이다.
5. 사회적 유대의 성격-포스트모던적 관점
구획을 통한 이런 식의 해결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해결책 자체가 포스트모던적 지식의 가장 중요한 양식과 어울리지 않는 대립적 사고에 여전히 얽매여 있다. (66) 이제 핵심 문제는 올바른 결정을 보장하기 위해 기계가 저장해야 하는 정보의 이용권을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더욱더 옮겨 갈 것이다. (67) 개인들은 자기에게 관심을 돌란다. 또 우리들 각자는 우리 자아가 대단찮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68) 개별 자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복잡하고 유동적인 관계의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
좀 더 쉽게 말해 인간은 언제나 여러 종류의 메시지가 통과하는 어떤 지점에 위치해 있다.
p70 : 어린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주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의 지시 대상으로 위치 지어져 있으며, 그 이야기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행로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 간단히 말하면 사회적 유대의 문제는 그것이 문제인 한 그 자체가 이미 언어 게임, 즉 탐구게임이다.
6. 서사 지식의 화용법
p80 : 지식은 일련의 광범한 능력 형성 수단들과 일치하며 다양한 능력 분야들로 구성된 주제에 구현된 유일한 형식이다.
한 국민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그런 지식의 경계를 정하고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외국인이나 어린아이)의 구분을 가능하도록 해 주는 합의이다.
(83) 서사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전통적 지식의 가장 핵심적인 형식이다.
첫째, 민담 자체가 긍정적 또는 부정적 교육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84) 둘째, 서사 형식은 발전된 지식 담론 형식들과 달리 그 자체가 여러 가지 언어 게임을 허용한다.
그러므로 서사로부터 그 기준을 제공받으면서 적용되는 여러 가지 능력 분야들은 서사가 형성하는 그물망 속에 함께 꽉 짜여 있으며 이런 지식의 특징인 통일된 관점에 따라 배열된다.
세 번째 속성은 서사의 전수에 관한 것이다. (85) 이야기를 잘할 수 있다고 이야기꾼이 자신의 능력을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는 그 이야기를 자신도 옛날에 들었다는 사실이다. (86) 서사는 원래 이야기에 충실하게 전달되었으며 영원히 이야기되어 왔다고 주장된다.
p87 : 이렇듯 서사로 전달된 지식은 결코 언명의 기능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방이 들을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서사의 대상이 되려면 (서술적 현실의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등을 일거에 결정한다. (88) 서사적 전통은 세 겹의 능력(노하우, 말하는 법을 아는 것, 듣는 법을 아는 것)을 정의하는 기준의 전통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기준을 통해 공동체가 자신이나 환경과 맺는 관계가 작동한다. 이들 서사를 통해 전달되는 것은 사회적 유대를 이루고 있는 화용 규칙의 집합이다.
p88 : 네 번째 측면은 시간에 대한 서사의 효과이다. 서사 형식은 하나의 리듬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끝없이 단조로운 노래로 불린다.
서사의 지시 대상은 과거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언제나 암송 행위와 동시에 존재한다. 서사가 일어날 때 “내가 들었노라.”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겠노라.” 사이공간을 점하는 찰나의 순간 속에 배열되는 것이 현재의 행위이다.
(91)이런 서사의 시간 양식이 찰나적이면서도 태곳적부터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이다.
마지막으로 서사 형식을 우선시하는 문화는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 문화의 서사에 권위를 부여하는 특수한 절차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92) 사람들은 제도 속의 ‘게임’에 서사를 위치시키고 자기 자신을 서사자의 지위뿐 아니라 피서사자와 서사의 위치에도 놓이게 함으로써 서사를 실행한다.
그러므로 직접 정당화를 제공하는 민간 서사의 화용법과 정당성에 대한 질문으로 서양에 알려진 언어게임 사이에는 통약불가능성이 존재한다.
7. 과학지식의 화용법
p94 : 첫째, 발신자는 행성의 행로라는 지시 대상에 관해 진실을 말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발신자가 말한 사실에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똑같은 지시 대상에 관한 반대 진술 또는 모순 진술들을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둘째, 수신자가 듣고 있는 진술에 대해 정당하게 찬성을 표하거나 반박하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이 말은 찬성을 표하거나 반론을 제기할 때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와 동일하게 (증거나 반박의) 이중적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수신자 역시 잠재적 발신자라는 의미이다. 수신자는 그러므로 코페르니쿠스와 동일한 자질을 잠재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셋째,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지시대상(행성의 행로)은 그의 진술에 의해 실제 사실과 부합되도록 ‘표현되어야’ 한다. (95) 하지만 내가 증명한 것이 진리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난제를 푸는 과학적 해결책은 두 가지 규칙을 준수하는 데 있다. 첫 번째 규칙은 변증법적이거나 아니면 변론적이라는 의미에서 수사적이다.
내가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현실은 내가 말한대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두 번째 규칙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똑같은 지시 대상이 모순된 증거 또는 일관성이 없는 다양한(96)증거들에 적용될 수는 없다.
이 규칙들이 합의의 지평을 두 상대자(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논쟁으로 옮겨 놓는다. 합의가 언제나 진리성의 표식은 아니다. 하지만 진술의 진리성은 필연적으로 합의를 도출한다.
(99) 어떤 사람이 지시 대상에 대해 진리진술을 생산할 수 있으면 ‘배운’ 것이 되고, 전문가들이 접근할 수 있는 지시 대상을 검증하거나 반증하는 진술을 생산할 수 있으면 과학자가 된다.
p104 : 과학자는 서사 진술들을 과학과 다른 정신 작용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과학자에게 서사 진술은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이거나 미발달한 것이거나 후진적이거나 소외된 것이다. 서사 진술은 견해, 관습, 권위, 편견, 무지, 이데올로기 등으(105)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서사는 우화, 신화, 전설 따위로서 여자나 어린아이들에게나 적합한 것이다. 그러니 기껏해야 이 같은 반계몽주의에 빛을 비추어 이들을 문명화하고 교육하고 발전시키려는 시도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징후들을 모두 알고 있다. 그것은 서양 문화의 여명기부터 있었던 문화제국주의의 전체 역사이다.
8.서사기능과 지식의 정당화
p107 : 국가는 과학이 하나의 서사시로 행사하도록 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 국가 자체의 신뢰성이 그 서사시에 기초하며, 국가의 정책 결정자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대중의 동의를 획득하기 위해 그 서사시를 이용한다.
(108) 과학이라는 새로운 언어 게임은 최초부터 자신의 정당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111) 서사지식에 의존하지 않으면 과학은 스스로의 타당성을 미리 전제하는 위치에 서게 되며 스스로가 경멸해 마지않는 부당 전제의 오류와 편견의 행진으로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서사를 그 권위로 빌려 쓴다 하더라도 똑같은 덫에 걸리지 않는가?
p113 : 담론의 조건들을 그 조건들에 관한 담론 속에서 정의하려는 현대적 경향에는 대중 서사 문화의 권위 부활이 뒤따른다. 서사 문화의 권위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에서 이미 뚜렷하게 나타나며 계몽주의와 질풍노도, 독일 관념철학과 프랑스의 역사학파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114) 그 무엇보다도 진보 개념은 지식이 축적된다고 생각하는 운동을 표상한다. 그런데 이 운동은 새로운 사회 정치적 주체로까지 확장된다.
과학자들이 새로 습득한 지식으로 규칙을 개정하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듯이 국민들은 자신들의 동의와 규칙들을 완성한다.
(115) 전통적 지식 이후 국민은 광범한 반계몽주의를 확산할 수밖에 없는 소수파나 잠재적 분리주의 운동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우리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 주체의 현실적 존재가 주체의 토론과 결정 공간이 되며 국가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루고 있는 제도들에 의존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국가의 문제가 과학 지식의 문제와 긴밀히 뒤엉키게 되는 것이다. (116) 그들은 법률을 제정한다.
국민은 따라서 진리를 다루는 지시적 발화뿐 아니라 정의를 주장하는 규정적 발화에 대해서도 능력을 행사한다.
지식의 타당성을 위해 서사를 다시 불러들이는 이런 정당화의 양식은 그것이 서사 주체를 인식적으로 재현하는가 아니면 실천적으로 재현하는가, 다시 말해 지식의 주인공으로 재현하는가 아니면 자유의 주인공으로 재현하는가에 따라 두 가지 방향을 취하게 된다. 이 두 가지 방향 때문에 정당화의 의미가 다양할 뿐 아니라 서사 자체가 그 의미를 적절히 기술할 수도 없다는 점은 이미 명백하다.
'세미나 발제문 > 랑시에르 & 포스트모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화 – 인정이론적 탐구 / 악셀 호네트 /18.10.03모임용 (0) | 2018.10.03 |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 /사이먼 말파스 / 2008년 1월 윤동구옮김 /18.10.03모임용 (0) | 2018.10.03 |
폭력과 성스러움 / 르네 지라르 / 18.09.26(작성중) (0) | 2018.09.26 |
관용 / 웬디 브라운 / 18.09.26 (작성중) (0) | 2018.09.26 |
인정투쟁 3부 / 악셀호네트 / 이현재 번역 /18.09.26 모임용 (8) | 2018.09.26 |
- Total
- Today
- Yesterday
- 마키아벨리
- 안토니오그람시
- 무엇을할것인가
- 그람시
- 로마사논고
- 신학정치론
- 공화국
- 검은 소
- 레비스트로스
- 개인심리
- 브루스커밍스
- 계급투쟁
- 옥중수고
- 딘애치슨
- virtù
- 의식과사회
- 스피노자
- 집단심리
- 루이 알튀세르
- 생산양식
- 루이알튀세르
- 헤게모니
- 생산관계
- 이데올로기
- 야생의사고
- 알튀세르
- 한국전쟁의기원
- 프롤레타리아 독재
- 이탈리아공산당
- 옥중수고이전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