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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 웬디 브라운 / 18.09.26
[옮긴이 후기]
p330 : 정치적 적대와 모순을 자리옮김하고 상상 속에서 해소토록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기능이라면, 관용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331) 오늘날 관용 담론이 생산하는 핵심적 효과는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된 차이를 자연화하고 본질화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세기 후반, 관용의 대상이 신념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에서 정체성과 문화의 문제로 변화한 것은, 이러한 차이의 물화 및 존재론화를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운은 이러한 관용 담론의 변화가, 특정한 규범과의 내밀한 연결고리가 폭로되면서 위기에 처한 자연주의적 보편의 정당성을 관용이 보충하는 과정에서 촉발된 것으로 본다. 예컨대 오늘날 자유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인간 개념이 사실상 백인-부르주아-기독교인-남성이라는 규범들에 기반한다는 정치적 공정성(political corretness)의 목소리는 대중적 상식이 되었다. 이제 관용 담론은 이러한 위기에 맞서, 자유주의적 보편의 정당성을 새로운 후(後)보편적 상황 속에서 재정초하는 어렵고도 아이러니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호출된다.
브라운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은 일단 문제가 되는 정체성과 차이 자(332)체를 관용의 이름하에 본질화, 자연화함으로써 특정한 규범들의 지배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정치적 배경들을 삭제하고, 이렇게 본질화된 차이와 정체성에 ‘특수한 것’ 혹은 ‘관용받는 것’의 자리를 배정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적 규범들의 지위를 중립화, 재보편화하는 이중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자유주의적 관용 담론은 동성애가 개인의 자연적인 성적 취향이기에 관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은밀히 이성애라는 지배적 규범의 구성 역시 자연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에 따라 차이가 가질 수 있는 횡단적이고 전본적인 힘, 즉 정체성/동일성의 구성 자체를 문제시할 수 있는 힘은 중화된다.
더 나아가 관용 담론은 이렇게 무력화된 차이들에 ‘특수한 것’ 혹은 ‘관용받아야 하는 것’의 위치를 배정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적 규범들에 자연스레 ‘중립적인 위치를 할당한다.
p334: 웬디 브라운이 반복해 주장하는 것처럼, 이러한 관용의 이중적 운동에 따른 차이의 본질화는 급속한 탈정치화를 수반한다. 그리고 이러한 탈정치화는 관용의 논리가 역사와 정치를 통해 설명되어야 할 문제를 개인의 태도와 감수성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오히려 더 눈여겨보아야할 것은, 관용담론이 부추기고 역으로 관용담론의 확산을 뒷받침하는 이러한 교묘한 자연화와 자리 할당의 메커니즘이, 특정한 차이가 공적 논의를 통해 정치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로 상승할 수 있는 통로를 폐쇄한다는 데 있다. 이제 차이는 새로운 가능성을 생산할 생산력을 박탈당하고, 단순히 ‘관용받아야 할 특수한 것’으로만 남게 된다. 특정한 정체성 내부에서의 단절과 정체성의 변형, 그리고 보편성으로의 도약이 고유한 정치성 기반이라는 오늘날 정치철학자들의 논의에 동의한다면(랑시에르) 우리(335)는 본질화된 정체성을 부여하고 기존의 지배적 규범을 중립화하는 관용의 논리 속에서 보편적 공간의 폐쇄와 이에 따른 정치의 죽음이라는 후기자유주의의 (탈)정치적 조건을 발견할 수 있다.
혹 좀 더 섬세한 눈을 가진 사상가라면 표상 및 담론적 차원에서의 관용의 증대와 실제 현실에서의 배제의 강화를 현대 사회의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조건으로 꼽을지도 모르겠다.
p336 : 오늘날 대립적인 가치로 표상하는 “관용 대 안전”이라는 구도 자체가, 실은 공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차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회피하는 후기 자유주의의 탈정치성의 결과라는 것이다.
차이와의 조우를 통해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없는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이들을 어떻게든 견디거나(관용), 이들을 안전의 이름으로 배제하거나 둘 중의 하나뿐이다.
오늘날 관용과 안전은 대립하기보다는 타자성 관리의 두 핵심 축으로 서로 맞물려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낯선 요소가 주인/숙주를 파괴하지 않는 한에서 공존 가능한 한계”라는 관용의 사전적 정의에 걸맞게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는 한에서 관용하며, 이는 역으로 관용 담론 자체가 안전을 위협하는 적들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식별하고, 이 관용 가능한 범위에서 벗어난 대상들에 대한 선제공격을 사전에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좀 더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오늘날 안전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관용이며(문명인은 관용하며, 야만인은 불관용적이다.), 역으로 관용 가능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안전이다.(오늘날 관용의 문을 여는 구호는, 보안과 감시, 통제와 규제이다.)
p337 : 따라서 다시한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늘날 서로 대립되는 가치로 표상하는 관용과 안전 중 하나를 옹호하거나, 불관용의 제국에 관용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문제를 역사 및 권력과 결부시켜 다룰 수 있는 정치적 담론과 공간의 부활, 다시 말해 정치의 부활을 위한 노력일 것이다.
p339 : 적과 나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곧바로 차이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과 자유주의에의 무조건적 투항으로 귀결되어선 안 된다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그 사이에서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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