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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 르네 지라르 / 김진식 옮김 045/18.10.03모임용

 

[머리말]

우리는 성경텍스트에 대한 분석과 신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이 모든 비교 뒤에는 분위기만 있는 게 아니라 텍스트를 벗어난 현실이 있다는 것을 밝혀낼 것이다. 여기에는 지시체가 있는데, 이것은 항상 거의 같은 것을 지칭하고 있다. 똑같은 집단 행위로서, 사회적 위기가 절정에 달한 고대 사화에서 그때마다 어김없이 행해지던 만장일치적인 모방 폭력의 물결이 그것이다. 그 폭력이 진정으로 만장일치적이면 그때마다 폭력은 위기를 종식시키면서 하나의 희생물에 반대하는 사회를 다시 하나로 묶어준다. 그러나 이 희생물은 폭력과는 진정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처럼 폭력과는 관련이 없는 유형의 희생물을 두고 우리는 흔히 희생양이라고 부른다.

 

성서에서도 만약 빌라도가 위협적인 민중의 소요를 피하려고 예수에게 합법적인십자가형을 명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는 돌세례라는 집단폭행을 당했을 것이다.

(13) 그런데 이런 실제 사건이 모든 문화권에서 되풀이해서 일어나고 있다. 이는 어떤 유형의 갈등이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갈등은 바로 모방적 경쟁 관계인데 이를 두고 예수는 스캔들이라고 부른다.

 

p14 : 신화의 해석은 집단 폭력의 희생물을 죄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완전한 잘못이고, 환상이며 그러므로 거짓이다. 반면에 성경의 해석은 이 희생물을 무고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본질적으로 정확하고, 믿을 만하며 그러므로 참이다.

 

p16 : 신화의 주인공이 신성시되는 이유는 폭력을 폭력적으로 감추는 것에서 비롯된 데에 비해서, 그리스도가 신성시되는 이유는 자신의 무죄뿐 아니라 같은 유형의 모든 희생양들의 무고함을 분명히 드러내는 그의 말과 그리고 특히 기꺼이 받아들인 자신의 죽음이 가진 계시의 힘 때문이다.

 

1-1. 스캔들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p22 : 이 열 번째 계명이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살짝 내비치고 있는 것은 실은, 욕망 이해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다. 사람들은 욕망이 객관적이거나 아니면 주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욕망은 사실 그 대상을 가치 있게 만드는 타인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타인은 곧 가장 가까이 있는 제삼자 즉 이웃이다.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우리 욕망의 모델이라는 분명히 확인된 이 중요한 사실에 비추어서 금기를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모방욕망이라는 부르는 것이다.

 

p26 : 적대관계가 격화될수록 그 적대자들은 역설적이게도 점점 더 서로를 닮아간다. 그들의 대립이 예전에 그들을 갈라놓았던 실질적인 차이를 없앨수록 더 집요하게 대립한다. 선망, 질투, 증오는 이런 감정들을 대립시키는 사람들을 획일화시킨다.

요즘 차이에 대한 찬양이 많아진 이유는 실제로 차이가 많아져서가 아니라 차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p29 : 모방 욕망이 없다면 자유도 인간성도 없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모방욕망은 좋은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욕망,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것인 욕망을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욕망의 본질은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욕망하기 위해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해서 욕망을 차용해야 한다.

욕망의 이런 차용은 빌려주는 사람도 빌리는 사람도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모델에게서 그가 보여주는 태도, 지식, 선입견, 선호 등도 빌리지만, 그중에서 아주 중요한 욕(30)망의 차용은 특히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을 동물보다 상위의 존재로 만드는 동시에 동물 이하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로 모방욕망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끝없는 불화는 인간이 자유에 대한 대가를 할 수 있다.

 

모방적 경쟁 상태와 그 결과를 지칭하는 말은 명사는 skandalon이며 동사는 skandalizein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이 스캔들을 통해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31)가르침은 그 강한 어조로나 길이로나 아주 돋보인다.

이 말의 히브리어 어원처럼 스캔들은 부딪쳤다가 쉽게 피할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장애물이 아니라 거의 피할 수가 없는 기묘한 장애물이다. 스캔들은 우리를 물리칠수록 실은 우리를 더 끌어당긴다. 우리는 이전에 그 스캔들에서 상처를 많이 입었을수록 더 열정적으로 다시 그 스캔들에 빠져들어 더 큰 상처를 입는다.

 

모방적 경쟁 관계를 거짓으로 무한히도 만들어내는 스캔들은 선망, 질투, 원한, 증오와 같이 아주 해로운 독소를 퍼뜨린다.

그리스어 스캔들리젠은 다리를 절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나왔다. 절름발이는 무엇을 닮았을까? 절름발이는 보이지도 않는 장애물을 그림자처럼 뒤따라가고 있는, 그러다가 그 장애물에 발을 헛디뎌서 비틀거리고 있는 사람과 닮았다.

 

p32 : 스캔들은 아주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예수는 이를 경고하기 위해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과장된 어조를 사용하고 있다. “너희의 손이 너희를 스캔들에 몰아넣거든 손을 자르고, 너의 눈이 너희를 스캔들에 몰아넣거든 너희 눈을 빼버려라.”(마태복음)가 그것이다.

인간의 영광은 흔히 군사, 정치, 경제, 스포츠, , 예술, 지성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권력과 같은 이 세상 권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모방적 경쟁관계에서 이기는 것이 그 핵심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모방적 경쟁관계에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성원의 숫자가 많아지면 인간 사회는 이 경쟁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첫 번째 스캔들이 일어나는 순간 이 스캔들은 다른 스캔들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모방위기는 끊임없이 번져가면서 더 악화된다.

 

p38 : 사회를 나누고 분리하던 모방이 하나의 희생양에 반대하면서 사회를 결합시키고 통일시키는 모방으로 왜, 그리고 어떻게 갑자기 바뀌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방갈등이 변모해가는 변화 양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욕구 불만이 어떤 단계를 넘어서면 서로 대립하던 자들은 서로 다투던 그 대상으로부터 더 이상 만족을 얻지 못한다. 살아 있는 장애물 즉 스캔들에 의해 서로 흥분해 있는 그들은 이제부터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스캔들이 된다. 이리하여 모방의 짝패를 이룬 그들은 자신들이 다투던 애초의 대상은 잊어버리고 가슴에는 분노만 가득한 채 서로가 서로를 반대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들 각자가 맹렬히 뒤쫓는 것은 바로 모방의 경쟁자다.

대립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상대방과 차별화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이들은 더 똑같은 존재가 된다. 동일성은 똑같다는 사실에 대한 증오 속에서 완성된다. 로물루스와 레무스같이 신화에 나오는 쌍둥이나 형제-적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절정에 달한 순간이다. 이것을 나는 짝패대결이라 부르고 있다.

대립이 계속될수록 한층 더해지는 스캔들의 작용에 의해 이 대립자들은 더 이상 차이가 없는 하나의 군중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동질적인 집단 안에서 모방 본능은 더 이상의 장애물 없이 급속도로 확산된다. 이런 식의 변화는 정말 기이한 표변과 뜻밖에 재편성을 유발한다.

처음에 스캔들은 증오로 서로 영원히 분리된 상태의 똑같은 대립자에게 완전히 고정되어서 아주 단단해 보인다. 그러다가 이 과정 좀 더 진행되면 대체 작용과 대립자들의 교환이 일어난다. 스캔들은 기회주의적이 되어, 자기보다 모방적 매력이 더 큰 다른 스캔들에 쉽게 이끌린다. 요컨대, 스캔들에 빠진 사람은 떨어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애초의 적에서 떨어져 나와 옆에 있는 다른 스캔들로 빠져든다.

어떤 스캔들이 가진 매력의 크기는 그로 인해 죄를 지은 사람들의 숫자와 그 사람들의 명성에 따라 좌우된다. 작은 스캔들은 더 큰 스캔들에 뒤섞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더 큰 스캔들끼리는 서로 전염되는데, 결국에는 강한 것이 약한 것들을 흡수하게 된다. 스캔들에도 모방적 경쟁이 있는데 이 경쟁은 가장 강한 스캔들 하나만 남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단 한 명의 개인에 대해 공동체 전체가 동원되는 때가 바로 이 순간이다.

 

p41 : 모방 회오리의 희생양은 모방 그 자체에 의해 선택된다. 사정이 달랐다면 군중들이 선택하였을지도 모르는 다른 희생양을 대신하여하나의 희생양이 선택된다. 이런 대체 작용은 널리 퍼져 있는 소문이나 분위기를 이용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러나 보이지 않게 행해지고 있다.

 

12. 속죄양.

p196 : 폭력이 더 이상 제의화되지 않고 오히려 금지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는, 분노와 원한은 대개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원인에게 직접 풀어서는 안 되고 또 감히 그럴 수도 없다. 월급쟁이들은 사장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사장에게 직접 풀 엄두는 못 내고 대신 다른 곳에다가 푸는데, 아마 집에 있는 개한테 발길질을 하거나 아니면 애꿏은 마누라와 아이들을 야단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들을 속죄양으로 삼는다는 생각은 아마 꿈에도 못할 것이다.

 

p198 : 오늘날 대부분의 속죄양 현상은 더 이상 물리적인 폭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심리적인폭력으로 나타나는데 이 폭력은 감추기가 더 쉽다. 폭력의 전이에 가담한다는 비난을 받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자신의 무고함을 진지하게 주장한다.

주변 사람들이 속죄양의 유혹에 넘어간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몹시 분개하여 그들을 비난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범하는 속죄양을 맹렬히 비난하면서도 우리 자신은 정작 대체 속죄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 순간 우리가 갖는 원한은 합법적이며 증오도 정당할 뿐이라고 믿으려 애쓴다.

 

[맺음말]

p228 : 복음서에서 사탄은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존재가 아니다. 처음에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그 다음에는 만장일치의 희생양을 통해 그 공동체를 다시 재생시키는 모방폭력 작용과 스캔들 이론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사탄이라고 볼 수 있다.

 

위기가 절정에 이르면 이 욕망의 병은 자신을 스스로에 대한 해독제로 만드는 과정, 즉 희생양이라는 폭력적인 동시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만장일치 과정을 작동시킨다. 위기를 진정시키는 폭력의 이러한 효과는 그 사회를 안정시키는 여러 가지(229)제의의 시스템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사탄이 사탄을 물리친다는 말이 요약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모방위기와 그 폭력적인 해결 장면을 서술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서술자 자신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거기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에 모방이 일어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서술자는 거짓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는 모든 희생양의 유죄를 진정으로 믿기 때문에 그 거짓을 절대로 바로잡지 못한다. 신화가 바로 이 방법에 속한다.

두 번째는 모방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방법이다. 서술자 자신이 그 모방에 가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방법을 취하는 사람들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묘사할 수 있다. 여기서(230)부당하게 처벌받는 희생양들이 복권된다. 이런 방법에 속하는 것은 구약과 복음서뿐이다.

[옮긴이의 말]

p247 : 사탄의 근원은 바로 우리의 욕망 그것도 우리의 모방 욕망에 있다고 지라르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인류 사회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이 갈등은 바로 모방적 경쟁 관계’”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가 스캔들이라 부르던 것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를 죄악에 빠뜨리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모방적 경쟁 관계모방 욕망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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