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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 /사이먼 말파스 / 20081월 윤동구옮김 /18.10.03모임용

 

p21 : 리오타르는 단순히 절망(‘세계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에 빠지지도, 지적이고 정치적인 합의가 사라지는 것을 축복(‘규범이란 건 없다. 내가 뭘 하든 상관없다.’)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단지 세상을 좀 더 공명정대하게 만들 수 있도록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들을 발견하고자 예술과 문화, 사회를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집요하게 탐색한다. 그래서 리오타르에게 포스트모던 사상가의 주목적은 무엇이든 좋다식의 소비주의에 명백히 내재된 가치들의 부재 현상 앞에, 그리고 다른 가치들보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서구의 극에 달한 시장경제가 지닌, 겉보기에 저항이 불가능해 보이는 힘 앞에 동시에 맞서는 것이다.

 

p42 : 핵심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의 삶과 정체성이 어떻게 작금의 앎의 구조 속에서(43)구성되는가? (44) 리오타르는 과거에 각국이 석유와 같은 연료나 땅을 두고 싸웠던 것처럼, 말 그대로 지식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때가 오리라고 예측한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 기반 경제가 도래함에 따라 기존 국가들은 가장 중요한 집단으로서 가졌던 권력의 지위를 상실해 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p46 : 리오타르는 담론의 두 가지 주요한 유형을 구별한다. 과학적 지식과 서사적 지식이 그것이다.

리오타르에게 서사라는 것은 공동체가 자신의 현존과 역사, 그리고 미래에 대한 포부를 제 자신에게 전하는 이야기이다.

과학적 진술도 물질세계를 묘사하는 서사 유형들로 제시된다. 심지어 수학조차도 새로운 발견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려면, 방정식을 서사로 변신시켜 결과의 함의를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서사는 인간의 경험과 사회를 가능케 하는 기본 원리가 된다. 서사는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주며, 우리가 믿고 바라는 바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상이한 담론들에서 사용되는 서사의 상이한 유형들은 상이한 규칙들을 따른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상이한 담론들을 가리켜 언어 게임이라고 부른다. (49) 주체로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서로 다른 일련의 규칙들을 지닌 이와 같은 언어 게임들의 연속체 내부에 존재한다.

 

p50 : 메타서사는 서사와 언어 게임의 규칙을 설정한다. 이는 메타서사가 언어 게임을 조직하고, 언어게임에서 이루어지는 각각의 진술이나 언어의 수의 성패를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근대성, 곧 모더니티의 근간은 메타서사 조직의 특정한 유형이다.

(51) 공동체의 각 구성원은 체제 안에서 화자로(52), 청중으로서,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서 각기 자리를 부여받게 되며, 이로써 그들의 정체성과 욕망이 구체화된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이는 전근대적, ()모던적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메타서사 조직의 유형이다. 한편, 과거(이야기 그 자체)와 현재(이야기하기)의 관계에 바탕을 둔 이것과는 다른 형식으로서, 리오타르는 메타서사의 또 다른 형식을 설명한다. 바로 근대, 곧 모더니티의 거대 서사들이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모더니티는 인간의 진보를 묘사하는 거대 서사에 의존하여 정의된다. 전통적 메타서사와 근대적 거대 서사의 차이는 후자가 사회의 현안들이 해결될 지점으로서 미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리오타르는 근대적 메타서사의 주요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사변적 거대 서사와 해방(또는 자유)의 거대 서사가 그것이다.

 

p52 : 사변적 거대 서사에 의거하면, 모든 가능한 진술들은 단일한 메타서사 아래 한데 집결되고, 메타서사의 규칙에 따라 그 진실성과 가치가 판단된다.

지식 그 자체가 목적인 사변적 거대 서사와 달리, 해방의 거대 서사는 지식이 인간 자유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지식을 가치 있는 것으로서 제시한다. (54)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간에, 이러한 거대 서사의 유형이 지향하는 목표는 계몽된 인류를 독단, 신비주의, 착취,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데 있다.

 

p55 : 리오타르는 오늘날 지식이 더 이상 인간의 보편적인 목표를 실현시키려고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던 지식은 시장 주도적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 아래 효율성과 수익성 측면에서 가치가 매겨진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바로 메타서사들에 대한 불신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와 같은 지식의 변형이다. (56) 자본주의가 거침없이 확산되면서, 인류 전체를 진보와 거대 서사로 엮어 주던 전통적인 사회적 유대는 파괴되었다고 본다.

 

p57 : 거대 서사들이 파괴됨에 따라, 주체 또는 사회에는 어떠한 단일한 정체성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들은 상충하는 도덕적, 정치적 규약들의 영역이 교차하는 장소가 되고, 사회적 유대는 파편화된다.

대처는 사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개인들만 있을 뿐이라고 공언했다.

하버마스는 근대성, 곧 모더니티를 미완의 기획으로 보고, 오늘날의 사회 분열을 극복함으로써 모더니티의 목표를 더욱 심화시키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서로 협상하여 다른 언어 게임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의 목표는 이것과 정반대이다. 리오타르는 거대 서사 자체가 줄곧 정치적으로 미심쩍었다고 본다. (58) 그런 이유로 리오타르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맞서는 최선의 수단이 언어 게임의 파편화를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어 게임이 정체성과 결부되기 때문에, 사회 내부에서 각기 정당성을 확보한 서로 다른 언어 게임의 폭이 넓어질수록 사회는 더욱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사회가 당면한 주요 위협은 효율성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단일한 체제로 지식이 환원되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반드시 일정 수준의 테러를 동반한다고 주장한다.

리오타르는 보편적 합의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지만 가치로서의 정의는 낡은 것도, 의심스러운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합의와 무관한 정의의 개념과 실천에 도달해야 한다.” (59)고 주장한다. 이때 실천은 개별적인 작은 서사들과 각자의 차이, 곧 이들이 효율성의 기준으로 완전히 환원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리오타르는 언어의 수가 게임을 새롭게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이미 존재하는 게임의 규칙(배리가 틀리거나 그릇되어 보이는 이유이다.)을 파괴할 잠재력을 갖게 되는 방식을 배리로 묘사한다. 이를테면 양자물리학이 도입되면 과학적 탐구의 규(60)칙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뀌어야 한다. 나아가, 리오타르는 지식의 체계란 언제나 방해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리오타르는 사변적 거대 서사나 국제적 자본주의와 같은 지식 체제가 파괴적인 비평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며, 이러한 체제들에 설명능력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힘을 꽂아 넣는 것이야말로 비평가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p78 : 포스트모던의 조건과는 달리,질문에 답함에서 이야기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적 시대 구분보다는 미적 스타일이 문제가 된다. 리오타르는 하나의 작품이 먼저 포스트모던적이어야만 모던적일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끝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생겨나고 있는 상태이며, 이 상태는 되풀이된다.”고 주장한다. , 포스트모던은 낡아 빠진 근대성, 곧 모더니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더니즘적 변환이 일어나는 상태(다시 태어나거나 존재로서 성립되는 상태)로서의 모더니티를 관통하며 되풀이되는 것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모던은 혁신하고 진보하려는 끊임없는 시도 때문에 항구적인 격변 상태로서 존재한다. 포스트모던이란, 자신의 이념과 범주에 도전하고 이를 붕괴시키는 모더니티의 격변 속에 있는 아방가르드적 힘으로서, 진보와 혁신이라는 지배적인 근대적 테마들에 저항하는 새로운 사유 및 행동 방식들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p79 : 사실 리오타르는 칸트의 철학이 모더니티의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서 특징지어진다. 동시에 모더니티의 에필로그이면서 포스트모더니티의 프롤로그이기도 하다.”라고까지 주장하는데, 이는 칸트의 저작이 모더니티가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모더니티의 붕괴를 가져오는 갖가지 테마와 개념을 도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모더니티의 중첩성에 대해 말하면서, 포스트모던 또한 대단히 복합적인 개념임을 밝히는 것이다.

 

이하 18.10.10 발제 부분

p81 : 리오타르가 볼 때, ‘무엇이든 좋다라는 생각은 포스트모던적이지 않고, 오히려 현 자본주의의 리얼리즘이다.

이는 날마다 이루어지는 당대의 문화체험이다. 소비할 수 있는 현금이나 신용카드가 있는 한, 온 세상은 자기 손에 쥐어져 있다. (82) 리오타르는 리얼리즘과는 다른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바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둘 다 이미지와 서사를 지배하는 규칙들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리얼리즘을 붕괴시키려 한다.

 

(p83 각주) 숭고 : 칸트에 따르면, 숭고의 감정은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하여 적절하게 재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할 때 생겨난다. 칸트는 고통으로 지각되고 생각되는 무언가를 재현하려 할 때 상상이 한계에까지 뻗어나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고통은 동시에 기쁨이기도 하다. 지각된 것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실망감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쾌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는 경험의 한계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통해, 우리가 재현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대상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숭고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나타낼 수 없지만, 그 감정을 통해 무언가가 존재함을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따라서 리오타르는 숭고를 다음과 같이 형식화한다. 현시 불가능한 무엇의 존재를 현시하기.

p84 : 리오타르는 모더니즘적 향수와 포스트모던적 환희라는 관점에서 이 차이라ᅟᅳᆯ 서술한다.

모더니즘적 숭고는 상실의 감정과 결부된다. 낡은 언어 게임들로는 더 이상 세계를 적절히 표현할 수 없으므로, 예전에 가졌던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가고픈 바람이 환기되는 것이다. 한편, 포스트 모던 숭고는 언어 게임의 정지에서 비롯되는 흥분으로 일어난다. 이는(85)‘옛 규칙은 작동하지 않는다’, ‘새로운 규칙을 발견해 내자등을 선언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이라는 구조의 와해가 세계를 경험하고 사유하는 새롭고도 상이한 비인간적방식의 가능성을 암시함에 따라, 개념화는 표현을 앞서가게 된다.

(87) 포스트모던 작품들은 혼란스럽다. 이들은 규칙을 위반하고 독자나 관객에게 익숙한 범주들을 훼손시키며, 바로 그러한 구조로써 예술이란 무엇인가?’,‘현실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리오타르는 혼란스럽게 만들고 분열시키며 도전하는 예술의 잠재력이야말로 예술이 갖는 중요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본다. 리오타르는 포스트 모던 예술이 표현 불가능한 것을 입증함으로써 총체성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p88 : 예술의 힘이 진리와 정의에 관한 언어 게임들 사이의 조화를 표현할 잠재력에 있다고 주장하는 하버마스와 달리, 리오타르는 예술이 역할이 세상이 돌아가는 양상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적인 이해를 깨뜨리는 데 있다고 본다. 리오타르는 리얼리즘적 예술이 이러한 상식을 재확인하는 데 이바지한다면, 모더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적 예술은 숭고를 사용하여 이해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이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p93 : 리오타르는 자신이 규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치가 함축하고 있고, 또 이로부터 정치가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규정이란 지시와는 다른 언어게임의 유형이다.

지시는 지식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언어 게임이다. 지시적 어떤 것을 지적하거나 기술한다. 예를 들어, ‘의자가 편안하다라는 문장은 의자와 관련된 사태, 곧 진술의 발화자가 의자를 편안하게 느낀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규정적 진술은 상이한 언어 게임의 일부이다. 규정적 진술은 사태를 기술하지 않고 사태를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러한 사례로는 문 좀 닫아 주십시오.” 식의 부탁이나 목을 베어라!“와 같은 명령을 들 수 있겠다. 두 경우 모두, 세계가 실제로 어떠한지에 관한 기술은 없으나, 요청한 결과가 나타나도록 해 달라는 요구는 존재한다. , 지시는 세계를 기술하고 규정은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시도한다. 지시와 규정의 이 같은 차이는 리오타르에게 정치와 정의를 사유하는 기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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