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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1-2장을 읽고 / 화니짱

나는 이 책 제목인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입에 잘붙지 않았다. 세미나 모임에 공지한답시고 「자본주의 유토피아」라고 부르기 일쑤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일상생활의 작은 실수들은 우리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내 무의식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길래, 자꾸 리얼리즘을 '유토피아'로 바꿔치기 했던 걸까? 아마도, 사회학을 공부한 내게 있어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자본주의를 현실이라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은 뭔가 굴욕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결코 견고한 현실이 아니다. 그건 자본주의를 유토피아로 생각하는 치들이나 갖는 착각 아닌가? 오히려 자본주의는 없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유/토피아 이다. 그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우리의  환상을 통해 작동하는 체계인 것이다.'라는 무의식적 사고를 했던 게 아닐까? 어쨋든 제목에 대한 이와 비슷한 반감을 품고, 대결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첫 두어페이지에서, 작가는 '자본주의 리얼리즘'라는 제목을 사용한 의도를 설명하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계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적 논리와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그때서야 부제였던 "대안은 없는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자는 (앞의 내 사례와는 반대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자본을 욕하고 허상이라 말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현실로서 숭앙하고 수락하기에, 입과 몸이 따로 논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저항을 소비하며 우리의 리비도가 세탁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허상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위치하기에, 환영이 지식 속에 있을거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고전적 개념은 무용하다. 자본주의는 실상을 은폐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폭력적인 실상을 느와르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냉소하고 거리두며 부인하려 하지만. 결국 무의식의 수준에서 자본주의를 깊게 받아들이고 만다. 그렇다면 의식의 저항을 넘어서는 반동적 리비도의 생성, 무의식의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까? 다음장이 무척 궁금해졌다. 저자가 제시할 "(없는 듯 보이는 그 희미한) 대안"이.

자본주의 리얼리즘 1,2장 에세이 / 초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저자 마크 피셔는 영화 <월 E>가 ‘상호 수동성’을 설명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영화 자체는 반자본주의를 견지한다 해도 그것이 관객들을 대신해서 고민하고, 관객들은 단지 영화표를 구입하며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올해 영화 <조커>가 개봉했을 때 관객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 동시에 ‘논란’이란 키워드가 덧붙었다. 베를린 영화제 황금사자상에 맞물린 찬사와 더불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조커가 아닌’, ‘정신 질환자에 대한 희화화’ 등의 모진 감상들이 쏟아졌다.

문화의 불모성에 대한 마크 피셔의 비판적 고찰은 영화 <조커>의 한 장면을 통해서도 경험가능하다. 일종의 극중극 형태로, 토마스 웨인을 비롯한 위력 재력가들이 영화관에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관람한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극장이란 현실 공간을 거울처럼 영화 속에서 발견한다. <모던 타임즈>는 알다시피 하층민 노동자들의 소외를 통해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재력가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에 바깥에선 분노에 찬 하층민들의 시위가 이어진다. 이에 대한 메타적 시선을 견지해보면, 우리 역시 하층민들의 아우성을 희화화한 영화를 보며 기만적인 행위에 가담하고 있다고 느낀다. 극장 밖 사회적 불평등, 차별, 폭력의 재생산 속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에 대해 ‘단지 극장에서’ 조커란 캐릭터를 기만적으로 소비하고 품평하면서 해소할 뿐이다. 정확한 발생 시점을 알 수 없는 ‘파멸’에 대한 나의 공모를 확인하는 순간, 더 이상 조커의 그 장면은 영화적 쾌락이 아닌 현실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

2019.10.30.  자본주의 리얼리즘 메모 / 풍경

마크 피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자본주의와 거리두기는 실패한 행동방식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지젝의 말을 가져와 우리가 아직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지식 속에 있는 것’이라는 고전적인 개념에 머문다면 오늘날의 사회는 포스트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일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념적인 머릿속에서만의 거리두기는 실제 행동에서 화폐의 물신주의와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양보)할 수 있다는 것 같다.

그래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들어 외부성에 의해 성장한 자본이 이제 완전히 외부성을 통합해 버린 지금 ‘외부 없이 어떻게 기능 할 수 있는가?’를 물으며 이전의 전복과 통합사이에서 벌어졌던 투쟁이 끝난 지금 자본은 사전구성, 즉 자본주의 문화가 욕망과 갈등, 희망을 선제적으로 구성하고 형성하고 있다. 즉 리얼을 시장화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무력한상태에 이르게 한다. 즉 리얼이 사회적으로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1~2장을 읽은 1차 인상  / 라온

1~2장을 읽으며 최근에 본 영화나 순간순간 아이러니라고 느꼈던 순간순간들이 떠올랐다.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연결될 수 있으려나. 힙합하는 도끼의 자동차와 부에 대한 자랑을 볼 때 내가 알던 힙합정신과 자기 과시에 절어있는 힙합가수는 나에게는 아이러니였다. 이것은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볼 때 느꼈던 자본주의적인 느낌과 또 다른 것이었다. 열심히 곡 만들고 열심히 살아온 자기 삶에 대한 당당함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그러한 것마저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어 사람들의 의식 또는 무의식에 침입해들어오려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은 문화적 소양이 높고 아티스트들과 진솔하게 교류하는 세련된 재벌3세를 볼 때에도 느껴진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서 나오는 벤의 태도, 해미를 이해하고 관심을 보이는 듯하나 지루해하고 하품하는 그의 태도나 미스테리하게 사라진 해미가 아무래도 그의 소행으로 보이는 소름끼치는 느낌, 뭔가 계속 반복될 것 같은 더 이상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사회의 느낌이 계속 생각났다.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어떤 행위가 자본주의적이지 않을까?
뱅크시...그러나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의 모든 작품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아주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경매될 때에는 스스로 분쇄되도록 장치했어도 그 행위자체로 그 작품은 더 높은 가치와 가격이 매겨지게 되었다.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관계가 있을까? 봉사활동도 점수화, 실적화되어 이용될 수 있도록, 또 돈이나 권력 또는 인맥 자원을 통해 봉사활동도 교환가치를 갖게 되었다.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관심’도 사업화하여 돈으로, 무리한 행위로 ‘관심’을 구하고 ‘관심’은 광고 수입과 더 많은 기회, 제안들로 연결되며 자본주의적으로 유통된다. 

그러나, 이 무의식까지 침투하는 자본주의 세계에 한 가지 홍성마을의 마을화폐 경제와 그 마을의 시스템이 대안적이라고 생각한다.

1-2장 읽고, 쓴 에세이 / 밤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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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정교한 의례나 상징 수준에서 믿음이 무너진 뒤 남겨진 무엇이다. 이제는 그 폐허와 유물 사이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소비자-구경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라는 거대 담론을 나의 일상에 적용해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소비’였다.
주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소비로 풀고 있었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는데 왜 소비라는 방식으로 풀고 있느냐라는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생각해봤다.

스트레스의 근원지(직장)에 대한 질문
-회사는 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가?
-팀장은 왜 윗선의 일을 그대로 받아와 자기 의견을 덧붙여 던지기만 하는가? (사원은 위에서 수시로 내려오는 과업을 처리하기 바쁜 3분 대기조)
-직장에서 나는 왜 이렇게 소모품처럼 쓰이는가?
-의견을 내거나 대드는 것도 하루, 이틀, 일주일, 한달...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응하는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회의가 든다.
-외면하거나 모른척하고 싶다 서서히 무력해진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찝찝하다.
-어떻게든 나도 살려면 스트레스는 풀어야겠고,
-고로,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비’를 택한다.

그런데 소비를 통해 내가 원하는 걸 얻느냐고 되물으면, 글쎄. 뭔가를 구입할 때 느끼는 일시적 쾌락이 거의 전부인 것 같다. 이 억압(구조 혹은 체제, 근본적인 원인)을 풀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대안이라 여긴 공동체 혹은 협동조합의 형태로 지역살이를 운영해보자는 초기의 취지는 간데 없고, 행정의 눈치를 보며 외부에는 갑질을 내부적으로는 실적과 운영비(이윤)를 걱정하며 개인을 쪼는, 보통의 기업과 다르지 않은 어중띤 성격을 띤 이 조직에서 내가 느끼는 고민이 책을 읽으며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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