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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3,4장을 읽고 - 화니짱
자본주의는 비윤리적이다. 심지어 폭력적이고 퇴폐적인 약탈을 과시적으로 드러낸다. 마크 피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윤리적 가치’라는 범주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마치 막말을 통해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종국에는 대중의 무관심을 도모하는 정치인들이 떠올랐다. 윤리적 가치의 제거는 사람의 생명이나 교육과 같은 신성한(신성하게 여겨지던) 영역의 비즈니스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상이한 두가지 아포리아를 작동시킨다. 첫째는 정신건강(광기)의 자연화(비정치화)이다. 광범위한 스트레스와 고통의 증대가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것이다. 둘째는 관료주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자본주의의 성장은 관료주의의 강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잘 드러나는 곳이 교실이다. 학생들은 반성적 무기력과 우울증, 무능한 쾌락상태 등 광범위한 무기력과 학습불능 태세를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사람이 바로 교사이다. 교사는 학생들을 인구로서 통제관리(주로 시험을 통해 작동하는)하라는 관료주의적 명령 앞에 놓여 있으며, 동시에 소비자로서 학생을 왕으로 대하라는 자본주의적 요구 사이에서 존재적 떨림을 겪고 있다.(마크 피셔의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내가 그동안 교실에서 포착하고 표현했던 것과 일치해서 반가웠다.) 한편, 학생들의 경우에 두 권력이 가하는 명령은 엔터테인먼트-통제회로에 접속해 끊임없이 쾌락을 느끼라는 강제적 명령으로 작동한다. 난독증,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헤드폰을 착용하지도 않으면서 음악을 재생시키는 상호수동적 증상(자기계발적 주체는 이 현상의 음화로서, 듣지도 않는 영어강의를 틀어 놓은채 집안일을 하거나 웹툰을 살핀다.)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정서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교사들에게는 대리부모의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사목권력으로서 정서적인 지지를 제공하며 돌보는 훈육자의 역할 말이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정과 학교 등 기존의 훈육구조들이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에 의해) 붕괴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가장 절실하게 훈육자의 역할이 교사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열적 요청 사이에서 (이런 시스템을 포착할 만큼 충분히 계몽되어 있는) 교사는 도대체 어느 자리에 서야 되는 걸까? 분명한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이, 우리가 힘을 모을 수 있거나 모아야 하는 대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유연성과 탈중심화에 대한 반대는 자기 패배적인 것이 될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기술혁신, 교수법 혁신, 스마트 교실 등 항상 새로운 것으로 무장해오는 자본주의로 인해, ‘새로운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과 저항감을 쌓고 반동적으로 대응하면 안된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권력 및 특권으로의)복귀, 과거로의 회귀라는 것을 부각시켜야 한다. 즉 동기부여/동기상실의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자본주의 통제 프로그램과의 탈동일시가 낙담에 빠진 무관심과는 다른, 무언가로 등록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다시 ‘정치의 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올드 맑스주의로의 귀환이 아니다. 포스트포드주의에 고유한 불만의 형태로 개입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리얼리즘의 기저에 있는 ‘실재’들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라캉적인 그 실재는 ‘현실의 장 내에 있는 균열과 비일관성’ 속에서 발견된다. 즉 틈새를 통해서만 엿볼 수 있는 ‘외상적 공백’이다. 예를 들어 환경재앙은 너무나 트라우마 적이어서 체계 내로 동화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변태적 패티쉬즘, 성장에 대한 물신주의가 생명의 지속가능성과 대립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드러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는 ‘너무 자극받아 집중할 수 없는’ 청소년과 현대인들에게, 파란약의 세계인 매트릭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빨간약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슈가제로 콜라, 카페인제로 커피, 햄버거 니체 같이, '소화하기 힘든 위험성을 절삭해버리는 상품화'를 거부하는 진지함이다. 퇴조하는 훈육체제와 학생들의 집중력 저하라는 난제 앞에 서 있는 많은 교사들이 화려한 교수법과 유튜브, VR, AR 등 좀 더 자극적인 매체로 돌파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원초적인 자극을 활용하는 수업은 순수하게 쾌락에만 몰두하는 자본주의 엔터테인먼트를 돌파하기도 어려울 뿐더라, 학생들의 포스트렉시아적 증세 악화에 보탬이 됨으로써 교육불가능성을 강화시킬 뿐이다. ‘우울증적 쾌락’ 상태에서 학생들을 깨우기 위해 그들에게 자극의 역치를 넘어서는 충격이 필요하다면, 그건 오감의 자극으로부터가 아니라 ‘실재계’에 맞닥뜨린 외상적 충격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3장,4장 요약 -풍경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만연한 분위기에 가깝다. 그것은 문화를 생산하고,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자신이 조건 짓는다. 나아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그처럼 빈틈없는 그곳에 우리의 저항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도덕적 비판은 우리를 유토피아주의로 보이게 한다. 우린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비일관적이고 방어될 수 없음을 보여 줄 때, 자본주의의 표면적인 ‘리얼리즘’에 리얼리즘 같은 것은 없음을 드러낼 때만 그것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지난 30년 동안 윤리적 의미에서의 ‘가치라는 범주’를 제거했다. 그곳에 ‘비즈니스 존재론’을 확립, 단순히 자명한 사실로 간주하게 했다. -브레히트, 푸코, 바디우등 급진적 이론가들이 주장한 행방의 정치는 자연적 질서의 외양을 파괴하고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 우연적임을 폭로하는 것이며, 이전에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한때는 ‘불가능했던’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현실이란 단순히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자연적 방식이 아니다. 현실을 만드는 원칙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매개되기에 현실에서 펼쳐지는 상황들도 이데올로기적인 상황들이지 자연적인 인과의 장(場)들이 아닌 것이다. 물은 흐르는데 힘에 의해 방향이 바뀌어 진다.
-또한 실재는 라캉에 의하면 모든 ‘현실’이 억압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은 억압을 통해서 구성된다. 실재란 드러난, 펼쳐진 현실의 장 내에 있는 균열과 비일관성 속에서만 엿볼 수 있는 어떤 외상적 공백이다.
-그러면서 작자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대안으로 이 균열을 지목한다. 즉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품고 있는 현실 장의 균열과 비일관성은 정신건강과 관료주의이다.
3,4장 에세이 - 바다사자
실재는 모든 ‘현실’이 반드시 억압해야 하는 것, 현실은 억압을 통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한 가지 전략은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현실의 기저에 있는 실재들을 환기시키는 것이다(39). 나는 학교라는 물리적 환경에서 갑자기 낯선 나를 만나곤 한다. 나는 한 차시의 수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쏟기도 한다. 환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나’를 생각하는 저울질을 통해 ‘학생’들에게 도움과 열성이 솟아나도록 격려하기도 한다. 삶에 대해 거론하기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그럴듯하게 훈계하기도 한다. 한 차시의 수업 속에 많은 것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기호적 언어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중등 수준(국가 수준이다)의 언어마을을 형성시켜 주려고 노력하며 교육의 장에 학생들을 중심에 놓으려고 한다. 그러다 문득 우울 같은 ‘공백’을 만난다. 그 ‘공백’은 항상 회의와 방향감의 상실과 함께 찾아 온다. 상실하고 있는 목적을 느낌으로 느낄때이다. ‘앎’면서 몰라서, 더 서글픈 것은 ‘몰라서’ 모를 때이다. ‘재현될 수 없는 공백’이라는 문장은 이러한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가르침(감히)의 장에서 ‘공백’은 수행평가 점수와 내신성적으로 자본주의에 편입할 수 있는 길을 협박성 일갈로 가장 교육적인 양, 가장 도덕적인 양(그나마 윤리적이 아니어서 다행인) 다그칠 때, 바로 그 때 가장 크게 다가온다. 도대체 뭐 하자는 것인가.
교육의 장에서 현실적인 것은 흔히 우리가 교육의 본질이라고 하는 실재를 가린다. 정작 나는 자신이 없기는 하지만 교사는 실재(본질)적 가르침을 주는 자여야 하며 배우는 자는 이를 수용하려고 의식적인 집중을 해야 할 것이다. 집중해주는 않는 아이들을 탓하면서 그런데 나는 뭘 하고 있나! 교육 현실은 항상 효율성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며 강요하지 않지만 강력한 요구를 한다. 그 효율성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리얼리즘이다. 수능 성적이 좋아야 하고 한 시간의 수업을 통해 가장 효율성 있게 외워야 할 죽은 지식을 최대한 많이 뷔페처럼 펼쳐야 하며, 아이들의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을 어떻게든 교과서 안으로 끌어들여 끊어내야 하며, 일상생활까지도 자본주의적 사고를 절대 접지 못하도록 레이어를 촘촘히 깔아야 한다. 올해 내게 화두는 대안학교 정체성이었다. 브레히트적 소격효과를 교사인 내게 느닷없이 들이대야 그 기저에 있는 것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었다. 그나마 대안학교가 ‘재현될 수 없는 공백’을 모색할 수 있는 대안이지 않을까 나름‘정리하고 있다’. 버리고 가는 아이들, 잉여인간을 양산해내는 경쟁 구도를 조금이라도 멈추게 하고 있지 않은지 의구심과 함께 버텨낸 한 해다. 지금 아이들이 베트남 뚜득 고등학교에서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을 보이는 행보를 하고 있다. 인문고에 진학했다면 분명 소외될 그룹에 섞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아이들이 독도 플래쉬몹을 기획해 베트남 아이들과 같이 춤추고, 사물놀이와 카드섹션, 달고나 부스와 네일아트를 하면서 즐거워하고 소통이 안되어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웃음 띤 표정 속에 자본적 효율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재현할 수 없는 공백’을 본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3,4장 감상문 -초코
오늘 날 성공한 사업가들에게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직관주의를 피셔는 포스트렉시아로 분류하고 있다. 포스트렉시아 혹은 렉시아라는 개념을 나는 모르지만 이 직관주의는 도전과 기회, 성공으로 이어지는(스티브 잡스의 그 유명한 캘리그라피 일화처럼) 하나의 대안 선택지다. 인생을 계획하거나 대비하지 말고 자기직관에 의지해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선택에 있어 후회가 적고 기성의 틀에 짓눌렸던 자존감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곳곳에, 심지어는 내게서도(?) 유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이 가면 자본이 따라온다는 것으로, 적자생존이 아니라 생존적자(오래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인 셈이다.
더 이상 힙합을 포함한 예술 활동들은 자본주의에 저항하거나 현실에 억압된 실재를 대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직관에 따라 그 분야에서 오래, 성실히 버티는 것, 현 세대가 시대를 견뎌내는 방법론으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직관주의의 팽배에서 교육은 한낱 '영감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교육은 어쩌면 모든 인간 행위, 가치들이 자본에 포섭될 수 있고, 또 자본주의 하에서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할 지도 모른다. 나는 피셔가 꼬집은 대로 교사와 학생이 처한 혼선, 각각 훈육제의 옛 모습과 소비자, 조력자 사이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연하다. 모든 미디어가 교육이 된 마당에, 공교육이 개인의 직관력을 키워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조력자 역할을 자처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의 혼선이 적절히 그 수준을 유지하며 '무한히 지연'되어야 할까? 한편 자기직관을 신뢰하는 세대에게 들뢰즈의 조언처럼 "자신이 무엇에 이용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 / 1∽4장 에세이 / 2019. 11. 7. / 진달래
‘자본주의 리얼리즘’, 용어 자체가 입에 붙지 않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처럼 ‘주의’ 옆에 또 ‘주의’가 붙어 있는 용어들은 낯설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매 순간 느끼고 있기에 책에 대한 호기심은 컸다.
책을 펴기 전 나는 ‘자본 혹은 자본주의’에 대해 일상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이것과 관련하여 당혹스런 일이 생길 때는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는지 먼저 돌아보았다. 익숙하게 누리고 있으며, 시대가 이러하니 자본주의에 길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과 함께 자본을 앞세워 길들이려 하는 것들에 비난을 쏟거나 저항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1, 2장을 읽으며 몹시 혼란스럽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자본주의의 바다에서 살아가기 위해 허우적거리며, 그래도 좀 잘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는 냉정한 직시는 너무도 가혹하다.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 용어를 선호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더 깊고 훨씬 더 만연한 고갈의 느낌,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불모의 느낌’ 때문이라고 한다. 즉 ‘대안은 없다’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여겨진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표제에서 드러나듯이 말이다. 자본주의 문화가 욕망과 갈망, 희망 등을 선제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사태이며, 이러한 세계에서는 성공마저도 실패를 의미하는데, 성공한다는 것은 체계가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고깃덩이가 된다(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리자면)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한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반자본주의적 몸짓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무너뜨리기는커녕 더 강화한다는 것, 우리가 시위를 조직하고 모두가 참여한다 해도 우리는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하게 되며 훨씬 더 가혹하게 자본의 무자비한 분쇄기 안에 들어가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 책의 부제는 ‘대안은 없는가’라고 넌지시 대안의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데도 말이다.
3, 4장을 읽으며 폭풍 공감을 한다.
“실재는 재현할 수 없는 X, 겉으로 드러난 현실의 장 내에 있는 균열과 비일관성 속에서만 엿볼 수 있는 외상적 공백이다.”와 관련하여 ‘환경 재앙’이 그러한 실재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우리가 꿈을 통해 언뜻언뜻 무의식의 세계를 들여다보듯이 환경 재앙을 통해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언뜻언뜻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예민하게 들여다볼 때만 보인다는 것- 또한 녹색 쟁점과 관련하여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품고 있는 두 개의 상이한 난제로 정신 건강과 관료주의를 꼽은 장면에 이르면 낯설기만 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나의 문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마크 피셔가 이 둘에 초점을 맞춘 이유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명령이 지배하는 문화 영역인 교육을 묵직하게 특정 짓고 있다고 말한 부분에서 더욱 문제의식을 같이하게 된다. 특히 정신 건강과 관련하여 스트레스의 개인화를 수용하는 대신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는 것,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위로에 머물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유일한 사회 체계이기는커녕 내재적으로 고장 나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 몇 년 사이 청소년들을 만나는 현장에서 부딪치는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가 바로 무기력 현상이다. 대한민국의 청소년에게서 보이는 우울증, 난독증, 우울증적 쾌락 등은 2008년 책 출간 즈음, 영국의 10대가 보였던 모습과 겹쳐진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 다만 우리의 청소년들이 사태가 나쁘다는 것을 ‘절실히’ 알고 있는지는 조금 의문이다. 쾌락을 얻지 못하는 무능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측면에서 스마트폰과 게임, 음악과 동영상으로 소비하는 나날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이들은 ‘무한히 지연되는’ 삶의 양식 속에서 ’통제 중독자‘로 살아남아 있다. “어른들이 다 만들어주면 그냥 몸만 가서 놀을 게요. 우리더러 무엇을 생각해 보라고, 계획해 보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한 사람에 하나의 역사, 한 사람에 하나의 별”이라며, 사람 하나하나는 소우주라고 감동적으로 노래하고 있지만, 시간성을 상실한 청소년들에게 ‘한 사람이 역사로 다가올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처음이 <칠드런 오브 맨>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 -불모의 땅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기적, 경외를 보여주는- , 자본주의는 우리의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명심하라고 한 점, 정치엘리트들은 실제로 우리의 하수인이라고 강조한 점. 곳곳에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틈을 드러내고 있어서 나는 그래도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기후변화에 대한 아스퍼거 증후군 소녀의 정치적 발언을 상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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