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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과 자본주의 비평 –화니짱
회사에 있는 전자제품들이 가끔 말썽을 부릴 때가 있다. 그때 관리담당 직원이 하는 말은 이렇다. “껐다가 켜보셨어요?” 놀랍게도 대부분의 고장은 그렇게 고쳐진다. 와이파이 공유기부터 스마트폰까지, 크기와 기능에 상관없이 말이다. 사람이 갖는 질병들도 그렇게 껐다 켜기만 해도 고쳐지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우린 이미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바로 잠이다. 충분한 잠은 우리 신체를 피로와 스트레스로부터 회복시킨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이 우울증과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수면부족으로부터 유래하는 것 같다. 나도 일년에 반절이상 설염, 구내염을 달고 산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직장 때려치고 잠이나 더 자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만성수면부족 때문인 것 같다. 잠은 지극히 사적인 활동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활동이라고 한다. 아마 그 때문일까, 내 짝꿍은 누가 자기 잠을 깨우면 매우 화를 낸다. 깨어있을 때 그렇게 귀여워하는 우리 강아지가 잠을 깰 때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강아지도 졸릴 때 누군가 건드리면 화를 낸다.) 어쩌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잠에 대한 섬세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 와치, 마약 배게, 수면제, ASMR 등등. 나도 미밴드라는 스마트 와치를 차고 생활한다. 미밴드는 매일 밤 나의 수면시간을 체크해주는데, 깊은 수면은 몇 시간, 얕은 수면은 몇 시간이며, 나의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을 기록해준다. 심지어 내 수면시간 질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위 몇 %에 해당되는지까지 분석해준다. 나는 보통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잠들고, 6시간에서 7시간 정도 수면을 취한다. 미밴드는 나의 수면시간이 1-2시간 부족하며, 취침시간이 너무 늦다고 10시 이전에는 잠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밤 9시 이후로는 금식하고, 10시 이전에 침대에 누워야겠다고 생각한지 벌써 꽤 됐지만, 성공한 적은 거의 없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오후 5시반쯤이다. 바닥에 쓰러져 누워있다가 배고파서 견딜 수 없을 때 다시 일어나는데 대략 7시이다. 대충 저녁식사를 만들어 먹거나, 외식하거나,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 8시가 넘어가 있다. 배도 꺼칠겸, 하루 종일 산책만 기다리는 우리 강아지를 위해 조깅을 나간다. 집에 돌아와서 강아지 목욕을 시키고, 간단한 집안일을 서둘러 마치면 벌써 10시가 다 되어있다. 샤워하고 나오면 10시반, 여기서 책이라도 한 권 읽으면 11시가 훌쩍 넘는다. 그나마도 칼퇴하고 집에 왔을 때 이야기이지, 회식이나 세미나모임이라도 있으면 이 일정에서 2시간은 뒤로 늦어진다. 그러다보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왜 벌써 잘 시간이지’이런 생각이 매일 든다. 스마트 와치, 귀마개, 안대 등 각종 수면상품이 나를 도와주는데, 나는 왜 점점 피곤해지는 걸까?
처음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놀라워하는 풍경이 있는데, 그것은 새벽 늦게까지 불야성인 도심의 거리이다. 밤 10시 가까이 혹은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 독서실, 술집, 클럽, 교회, 마트, 옷가게, 음식점과 병원들. 유럽은 오후 8시만 되도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한다. 9시 정도면 모두들 집에 돌아가 잘 준비를 하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반면에 난 고3때 매일 밤 12시가 다 돼야 집에 돌아가곤 했다. 모두가 열심이고,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잠을 줄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 늦게까지 오픈하는 가게들이 많은 이유도 같은 것 같다. 낮에는 이미 모두가 최선을 다해 경쟁이 치열하니, 노동시장의 블루오션인 잠(을 자야할) 시간대에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하기 때문에, 즉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으로 인해 잠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잠을 자거나 존다. 무엇이 우리 아이들을 피곤하게 했으며, 교사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대부분 온라인게임,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24시간 접속 가능한 인터넷 서비스 때문일 것 같다. 여기서 나는 스마트 와치, 귀마개, 안대 등 개인의 노력만으로 수면부족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닳았다. 포스트 자본주의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인터넷에 접속하라는 자본의 요구를 극복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약베게, 마약잠옷, 마약귀마개 등 새로운 구매목록이 아니라, 비소비, 비성장 그리고 이를 통한 자본의 중단만이 우리에게 평안한 잠을 보장할 것이다. 하루에 3시간만 일하고 9시간 자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깨어나라"고, "포스트자본적 꿈을 꿔야한다"고 쓴소리와 헛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슈퍼보모’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될 것이다. 자기배려, 타자배려와 같은 윤리적 실천은 결국, 정치적 구성체를 위한 상호 각성 활동과 그 장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부와 관종 사이/자는 아이 -바다사자
어떤 아이가 있다. 다른 학교에서 적응을 잘 못해 전학을 온 아이이다. 그렇다고 상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아이는 수업시간에 자주 잔다. 자는 아이들은 많지만 그 아이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표정을 보면 다르다는 느낌을 갖는다. 무심함인지 불신인지 거리두기가 느껴진다. 독서를 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때가 있기에 이런 아이는 홈스쿨링이 오히려 맞을 듯 하지만 가르침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이의 부재가 차선책을 택하게 했다고 여겨진다. 수업 장면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수업을 무시하진 않는다. 1학년 시절에는 줄~창 자기만 하더니 2학년 때 얼굴을 가끔 보여주기 시작했다. 간혹 맘이 동하는지 충실히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위적 의무감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 한 발만 살짝 들이밀고 있는 모양새다.
학교는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자본주의를 내면화시키고 심화되는 장의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세계화의 하부구조를 담당해 그 역할에 만족스러워하고 어떤 대학을 몇 명 보냈는가를 통해 자신들의 역할에 자부심까지 갖는다. 대학보내기 경쟁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이는 학교는 매번 패배감에 자조한다. 해마다 반복해서 주입해도 대상이 되는 아이들은 매번 바뀌기 때문에 교사의 내면화는 평생을 거쳐서 강화된다. 반복성은 교사들에게 지식을 가르치기 보다 자신의 경험을 주입해도 되는 구실을 제공한다. 굳이 독서를 통해 지식의 폭을 확장시킬 필요도 없다. 심지어 착각과 왜곡의 자부심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강력한 주입자인 교사들의 노력(?)에 저항할 수 있는 아이는 거의 없다. 가정에서부터 수용의 끈을 가지고 수업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요즘 수업은 간학문적 통합을 강조한다. 학생참여형 수업의 도입으로 ‘분류 불가능한 조합물’이 산출된다. 지식을 보여주고, 만들고, 몸으로 표현하게 함으로써 수업은 말과 글로써 전달하는 방식에서 총체적인 던짐과 토해냄을 강조하고 있다. 과정평가는 수업에서의 ‘현재성’을 붙들라는 것을 말한다. 현재는 중첩되는 과거를 거쳐 시험이라는 미래성을 가지고 있던 수업이 바로 그 순간을 평가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발표와 말하기 평가를 현재에 잡아두기 위해 미디어의 힘을 빌리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굳이 푸코의 통제를 떠올리지 않아도 수업은 그야말로 통제의 장으로써 역할을 단단하게 하고 있다.
이 아이의 태도는 나는 당신들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지 않겠어! 날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끌어들이지 마! 난 자유로울거야!를 보여주는 듯하다. 흔히 수업에 잘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평가를 잘 받고 내신등급을 높여서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어!라고 협박해대는 교사들에게 온 몸으로 거부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이 아이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다.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아이들이 제법 있다. 자본주의 전령사인 교사의 눈으로 보자면 독특해 보인다. 교사들이 흔히‘미래에의 보장’이 이 수업 속에서 가능하다는 듯이 하는 협박에 결코 말려들지 않는다. 수업 중 자는 아이들은 많다. 자는 아이들을 들여다보면 참 상처들이 많다. 공부상처, 학교상처, 부모상처, 사회상처, 친구상처 등 다양한 무늬의 상처가 상흔처럼 있다. 이런 아이들은 그냥 잔다. 전날 많이 못 자서, 잠잘 시간에 친구와 노느라,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시간만큼 자는 게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잔다. 특별한 이유 없이 자는 아이들은 굳이 특별하지 않지만 몇 몇 아이들은 ‘저항’의 몸짓으로 잔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독특해보인다. 우스운 것은 특별한 이유없이 자는 애들이 독특한 몸짓으로 자는 아이들을 경원시한다는 점이다. 보이기는 다 같이 자는 모양새인데 절대 섞이지 않는다. 저항의 몸짓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그냥 자는 아이들에게 왜 자는냐고 궁금해하면 ‘그냥요’ 라고 한다. 서사를 좋아하는 나는 항상 묻고 싶어진다. 지극히 자본주의적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그냥요, 생각 안해요’ 접할수록 현재만 사는 아이들이다. 또 자는 아이들은 예외 없이 엄마가 집에 없다. 다들 일터에 계신다. 맞벌이 가정이다. 부모님은 무심하다기 보다 보육과 양육을 거의 학교에 맡기고 편해한다. 항상 바쁜 엄마는 자본주의 매트릭스위에 가정이 놓여져 있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의구심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저항의 몸짓을 읽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아이들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낮은 성적은 인정투쟁조차 좌절시킨다. 그래서 자는 아이들 중 몇은 다분히 공격적이다. 친하게 지내는 사이처럼 보여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물으면 돌아오는 답변은 항상 ‘몰라요’다. 친한데 사정을 모를 수 있어? 친하다고 다 알아야 하나요? 말 안해주기도 하고 알려고 하면 피곤해져요, 서로 편하려면 적당히만 아는 것이 좋아요. 참으로 개개인이 단속되어 있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sns로 해결한다. 교사인 나도 애들과 연락할 거리가 생기면 단톡에 올린다. 신속하고 효율적이다. 얼굴보고 의사전달을 하려면 하루 걸리는 일도 톡에 올리는 순간 늦어도 1시간 안에 해결된다. 매뉴얼도 간단하고 편리한 기능도 많다. 선택지를 만들어서 투표를 통해 사안을 결정하는 것도 쉽다. 이보다 효율적일 수 없다.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점만 빼면!
아이들에게는 서사가 없다. 서사의 부재가 우울증의 원인으로 여겨질 정도다. 멜리니 클라인이 말하는 우울적 위치를 극복하지 못한 존재들일 수도 있다. 순간 순간을 역동적으로 사는 아이들은 개개별로의 의미성만 지니고 있다. 각각의 시뮬라크르로 존재하며 서로 섞이지 않는 레이어들의 중첩들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자신의 미래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도 한다. 대출을 받아 어찌 어찌 꾸릴 계획을 간혹 세우곤 한다. 미래를 현재성으로 바꾸는 것도 잘 하는 일 중 하나이다. 아이들의 대화는 거의 모든 것을 물화시켜 관찰자로서 대상화한다. 주제로서 자아와의 화해를, 성찰하는 법을 모른다. 가르침이 없으니 배움도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리좀적 서사를 간절히 원하다는 것이다. 사랑과 연대로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의 행동들을 쉽게도 보여준다. 아들러는 주제로서 우뚝서기 위해서는 인정투쟁을 하지 않아도 됨을 말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관계 속 인정에서 찾고자 애쓴다. 관종을 쑥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상대방의 사랑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멜라니 클라인)과 대상을 파괴해버리고자 하는 시기심이 교차한다. 모순덩어리들이기는 하지만 맘 한켠이 싸아 해지는 짐은 나조차도 동질이기 때문이리라.
자는 아이들은 거부와 인정 그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조커란 현상을 이전의 방식으로 소비하지 않으려면 -초코
얼마 전 <조커>(2019)란 영화가 걸작인지 졸작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메이저 영화잡지 씨네 21을 통해 찬반 평론이 나란히 실렸다. 대게 <조커>는 토드 필립스의 DC 코믹스의 대표적인 반 영웅 조커의 역사적 기원을 설명하려 했던 시도로 읽혔고, 그랬기 때문에 실망한 관객도 적지 않았다. 포장지를 벗겨보니, 반 영웅으로서의 조커보다는 백인 중년 아웃사이더로서의 아서를 위시한 자본주의 풍자극이었다는 이유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 대륙의 평론가들이 극찬보다는 신랄한 ‘비난’을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뉴욕 타임즈는 영화 <조커>를 ‘아무 것도 없는 이야기’, ‘재미없다’며 비꼬거나 ‘백인 남성의 인종적 특권이 그 폭력의 공범’이라고 꼬집었다. 영화평론가인 김병규는 영화가 시각적 매혹으로 인물의 반동성과 서사의 진부함을 감추고 있다고 비판했다. “파렴치하게 반동적”일 뿐 아니라 “공동체의 소진 이후 그곳에 방치된 자들의 정체성을 되묻”지도 않고, “개인의 분노와 공동체의 충동이 세계와 충돌하면서 벌어진 결과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을 들여다보면 시나리오를 처음 구상할 때부터 토드에겐 뮤즈 호아킨 피닉스가 있었다. 호아킨이 맡은 배역은 대체로 <택시 드라이버>(1976)의 트래비스처럼 주변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고, 의존할 존재 하나 없이 처절히 내버려졌으며,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의 조처럼 세계의 그림자 속에서 유령 같은 존재로 살며, 거동이 불편한 홀어머니와 영화 <싸이코>(1960), 청부 살인사이, 삶과 자살 사이, 불행과 웃음, 실제와 착란 사이에서 오간다. 아서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조에게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동기 심리외상은 감정 불능이나 자해 망상, 만성적인 우울증과 부조리를 동반한다. 이처럼 무기력한 중년 남성의 기획 실패의 결과가 고담 시의 하층민들의 불만을 뿜어내며 거리로 등판하게 한다는 식의 연결고리는, 아버지의 부재와 가정 학대, 베트남 참전의 트라우마로 점철된 개인의 비극적 스릴러가 정부와 정치에 대한 불신과 함께 맞물리는 6-70년대 미국 반동서사의 전형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수많은 영화사의 레파토리 중에서 반동적인 서사를 긁어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무리가 아닐 수 있다.
이 ‘반동적’인 서사의 함의
‘반동적’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진보적이거나 발전적인 움직임을 반대하여 강압적으로 가로막는 경향’, ‘옛 체제를 유지 또는 회복하려는 경향’. 우리에게 어쩌면 “오로지 중요한 것은 국민 통합이다. 기타 인간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도날드 트럼프의 수구 민족주의적 발언이 반동적일 수 있고, 단순한 복고주의를 반동적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정치학적인 의미로 ‘반동’은 체제 전복을 꾀하는 날 것의 폭력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정치적 수사로서의 반동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현상이다. 오랜 시간동안 반공과 냉전의 그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반동분자’ ‘체제전복’ ‘내란음모’ ‘간첩 조작’ 등의 언어는 아직 두렵고도 혐오스런 낙인이 찍혀 있다. 내가 여기서 시도하려는 영화 조커에 대한 해석은, 평론계의 조커 논쟁에 편승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커란 캐릭터라기보다 아서의 환상에서 볼 수 있는 리얼리즘,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내적인 반향을 관찰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속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를 주목하면서 이 ‘반동적’인 서사의 함의를 유추해 볼 생각이다.
우선 기시감을 들 수 있다. 미 대륙의 역사적 맥락에서 조커의 대책 없는 실수가 낳는 아이러니한 결말-고담 시의 시위는 자본가와 유력 정치가들을 향한다는 점에서 몇몇 실제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하층민 노동자들의 총파업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복지를 일체 삭감하는 등의 배경은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종횡한다. 영화의 배경은 70년대이지만 21세기의 일들 가령 오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 street)나 킬 더 리치(Kill the Rich)운동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서의 개인사는 영화를 보며 목격할 수 있는 또 다른 갈래의 서사다. 주인공 아서는 그림자에 고립되어 망상에 시달리고, 타인들이 그를 모욕하며 조롱한다고 느낀다. 날선 피해의식이 결국 살인을 부른다는 서사에서 익숙한 한 사건이 떠오른다. 2018년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스물아홉의 피의자가 스물의 아르바이트생을 여러 차례 찔러 살해한 이 사건을 나는 아서와 직접적으로 비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피의자가 범행 동기를 ‘불친절’, ‘모욕적 언행’, ‘나만 바보가 된 느낌’이라 밝혔다는 점(목격자에 따르면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피의자의 심신미약이 논란이 됐던 점은 아서의 사례에 비춰볼 때 의미심장하다. 이런 맥락에서 아서를 인셀(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순결주의자)의 서사와 비교하기도 한다. 덧붙여 주목할 만한 점은 아서의 몇몇 행위들은, 그를 열연한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밝힌 것처럼 미성숙하고 유아적이란 것이다.
무작위 폭력의 신화와 성숙한 시민 트라우마
칼럼리스트 윤지만은 한 매거진에서 “모르는 이가 무작위로 나를 공격하는, 통제되지 않은 공포스러운 상징이 바로 조커라는 캐릭터다......호아킨 피닉스의 조커가 저지르는 살인에는 이유가 있다...... 무작위로 남을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정당성이 부여될 때 위험할 수밖에 없다”고 적고 있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 조커까지만 해도 장르 영화의 캐릭터로서 무작위 폭력을 상징하는 비-인격이자 망령에 가까운 알레고리로 읽혔다.(무명과 가면은 리얼리티를 삭제한다) 윤지만의 주장대로 사람들은 히스의 조커에게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쾌락적으로 인지하기도 했다. 극도의 폭력적 본능에 의거하거나 그의 실제를 초월한 신념과 룰에 주목했던 것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하비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조커의 폭력이 어떻게 파급되고 대물림 되는 지 유추해볼 수 있다. 즉 조커의 악은 배트맨의 정의 실현과 거울쌍을 이루며 고담 시의 부조리를 공유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 조커를 옹호하고 찬양하는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디스토피아적인 반동과 연관된다. 위선으로 점철된 사회에서의 구원자는 선이 아닌 악의 등장이란 것이다. 그것도 자본을 포함한 어떤 ‘현실적 가치’에도 연연하지 않는 순수한 악 말이다.
호아킨의 <조커>는 이전의 조커를 둘러싼 대내외적 반응을 모두 포괄할 뿐 아니라 알레고리의 조커에서 이름과 얼굴을 가진 리얼리티의 인간 아서로 끌어 내린다. 이 과정은 악의 이유와 근원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욕망에 근거한다. 다만, 그 ‘첫’ 결실이 무작위 폭력을 단순한 미학적인 피날레로 장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남자의 망상을 통해 그것을 ‘극적으로 리얼하게’ 끌어내린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한국에서도 아서의 망상과 피해의식을 빌미로 혹자는 아서를 ‘인셀’과 ‘관종’일 뿐으로 못 박고 그에 대한 혐오감을 내비치는데, 이 불쾌감은 이 리얼리즘의 막을 뚫고 올라오는 리얼리티의 잔상 때문일지 모른다. 혹자는 <조커>가 히스의 조커, 즉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홀로 움직이며,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모든 걸 본능의 게임으로 치부하는 무법자가 아니라 허접한 열외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린다. 심리적으로 우월하게 여겨진 캐릭터가 하찮고 초라한 ‘루저’의 페르소나에 불과했다는 인지 부조화. 또 말도 안 되는 정당성을 범죄행위에 들이미는 나약한 범죄자들에 대한 불쾌감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 <조커>는 이와 같은 악의 무결성 신화를 깨뜨리면서 관객들의 특정한 심리 군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다만 ‘도회적’이고 ‘쿨내’ 나는 비난들을 단순히 답습하면서, 이 불쾌감을 모두 대체해버려 하진 않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품평과 논쟁이란 형식을 빌려 그러한 조급한 판단들이 행해지는 동안에, 다수의 순응주의에 휘둘리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벙어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커>는 그 현상을 풀이하는 첫 단추의 역할을 해내고 곧 여느 사건들이 그렇듯이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현실이라면, <조커> 논란에서 보듯 리얼리즘을 넘어서 리얼리티를 형성한다면, 조커 논란의 소멸과 함께 이 ‘이질적인 시공간’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 대해, 폭력과 상처에 대해 너무도 많이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망각과 혐오, 그것은 또 다른 망각과 혐오에 관성적으로 의존하는 방식을 고안해내고, 그것이 우리가 현재를 인식하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가해자가 조선족일 거란 소문이 돌았다는 점을 주목하자. 이는 각자가 정의하는 ‘사회악’에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을 끼워 맞추려는 경향을 반증한다. 진정으로 미해결된 과제는 우리가 폭력을 혐오하면서 열외자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동시에 열외자를 혐오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정신적 고통에 대해 지나치게 견고한 잣대를 들이밀고 투정이 아닌 성숙한 방식으로 풀어야한다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 지나친 성숙을 권고하는 것은 지배계층의 이념이자 개인의 말과 행위를 억누른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속 토마스 웨인으로 대표되는 엘리트 계층이 하층민들에게 끊임없이 미덕을 권고하면서 그들의 고난이나 실상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점은 흥미롭다. ‘나 힘들어’는 모두가 힘들고 그것이 어떤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라면 차라리 금기어에 가깝다. 우리는 힘 빠지는 소리를 싫어한다. 똑같은 부담을 감내하는 다 같은 사회 구성원이란 이유로. 우리는 모두 어떤 점에서는 피해자라는 이유로. 그러나 무엇보다 실상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의 대물림과 연원에 있어 가해자만큼이나 무지하다.
아서의 노트 중 “정신질환의 가장 나쁜 점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아닌 척 처신하기를 바란다는 점”이라는 문장은 되새길만 하다. 우린 자꾸만 숨기려고 들고, 아닌 척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우리를 잡아끄는 만성적 우울을, 역사적으로 대물림되는 불신과 피해의식들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계발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으면서도 몇몇의 사건들이 발화점이 되어 기어이 터지고 마는 게 아닐까. 영화 <조커>에서는 대규모의 소요사태로 촉발했지만 만약 우리라hjuop0면 갈 곳 없는 분노와 정치적 무능감을 삼켜야만 했을 것이 아닌가. 우리의 열외자가 되지 않으려는 발악과 그 이면의 극단적 노동주의로 대체되던 정치적 무능감은 서로서로를 의심하고 밀고했던 일제와 냉전의 트라우마라는 환영 속에서 견고하게 생존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숙을 가장하고 또 다시 비난의 타겟을 불행하고 미성숙한 개인에 씌운 채 이 ‘반동적’ 서사를 자꾸만 몰아내려고 한다. 이 고통의 정체를 밝혀내는 건 고사하고, 그저 악다구니가 아닌가. 그저 무능한 되풀이가 아닌가.
파이널 에세이-풍경
24/7의 조너선 크레리는 『24/7 잠의 종말』에서 현재의 자본주의(24/7)가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인간의 잠’을 잉여를 낼 수 있는 마지막 보루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자는 시간을 줄여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재개념하여 생산적 작동을 멈추지 않게 하는 것으로, 특히 3장에서는 근대에서 21세기까지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무력하게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쓰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이 내적성찰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중학교 1학년인 딸아이가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힘들어 했다. 난 아이의 말에 ‘그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음에 무력감을 느꼈다. 사회가, 선생님이, 부모가 포기한 학교에 아이들이 다니고 있다는 현실만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난 ‘내 아이 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졌다. 만약 조너선 크레리가 그의 책 『24/7 잠의 종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일상적인 삶이 자본주의에 의해 사라져 간 자리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라면 그 일상에 대안이 있지 않을까?
작자는 우리의 일상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근대 산업에서부터 찾는다. 조지프 라이트 그림 <아크라이트 방적공장 야경>은 산업화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한 글의 삽화로 많이 쓰여 진다고 한다. 그런데 작자는 12시간 교대로 쉬지 않고 돌아가는 방적공장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 속 인공조명은 해와 달의 움직임에 따른 주기적 시간성을 시간과 일의 추상적 관계의 합리화된 전개를 선포의 상징이라고 한다. 즉 시간의 재개념화는 자본주의의 이윤창출을 지점이며, 인공조명은 자연의 시간성에 따른 농경생활로부터 인간을 자동화기기의 변함없는 규칙성에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훈련의 상징인 것이다. 이후 자본주의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사회적. 개인적 삶에 일련의 의무적 일과와 절차를 수행해야 하는 장소들-공장, 학교, 감옥, 군대, 관료 사무실 등-로 온 세계에 방적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작자는 시간의 재조직화에서 반복과 습관의 지배를 받는 일상생활만은 자신의 구조 안에 농경적 삶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전체를 포괄하는 훈육기관에도 불구하고 규제되지 않고 조직되지 않으며 감시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존재로써, 전근대적 경험의 기본요소들이 재배치되는 저장고로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상은 너무나 무상(無常)하기도 하고 너무나 무한정(無限定)하기도 하고, 또한 자신의 안에서 분출되거나 그 안으로 침입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 종종 굴종적으로 적응하거나 자신을 변형시키기에 믿음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한계도 가지고 있어 근대화의 규준과 제도에 대한 역실천의 장이 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작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말 유럽과 북미에서는 일상생활의 영토를 되찾는 반란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이러한 반란이 무엇을 바꾸지는 못했나보다.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의 발흥은 개인용 컴퓨터의 판매, 사호회보호체계의 붕괴 등과 더불어 일상생활에 대한 공격에 포악성을 띠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을 들뢰즈는 통제체제라 부르고, 인공조명인 훈육권력보다 더 폭넓고 미세하고 내면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팬옵틱한 감옥들의 네트워크가 갈수록 확장된 것이라 한다. 즉 아크라 공장에서 생겨났던, 그리고 19세기 교통. 통신망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구현되었던 체제가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영속적으로 작동하는 통신 영역. 정보생산. 유통영역이 모든 곳에 영속적으로 침투되어 일상생활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였다.
그 습관의 형태는 1950년대의 텔레비전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공공세계와 잡담이 가장 사적인 공간에 침투하고, 개인의 존립에 필수적이라 믿었던 고요와 고독을 오염시켜 삶의 영역에 동질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을 만들었고, 그리고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인간의 수면패턴이 맞추어졌다. 이것은 또한 21세기 24/7 “주목경제(-관심을 이용해 돈을 번다)”에 필수적인 조건들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탈현실화를 경험하게 하고, 더 감지 가능한 직접적 세계의 후퇴를 가능하게 하며, 세계의 허구성을 육화하면서, 또한 진실한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위치도 없애버렸다. 이런 의미에서 24/7자본주의는 단순히 주의력의 지속적이거나 연쇄적인 포획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다른 일을 하든 간에 거의 동시적으로 여러 작업을 수행하거나 여러 대상에 주의를 배분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의 조밀한 다층화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24/7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시기에는 아동들의 자폐증 발생 빈도의 급격히 상승하였다고 한다. 대략 150명당 한 명의 아동이 자폐증에 걸리고 있는 사태는 안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유전적 소인, 확대된 진단 기준, 태아기의 사건, 감염, 부모의 연령, 백신 기타 환경적 요인들이 모두 가능한 인자로 제시되었는데 ‘환경적’인 것에 텔레비전 수상기와 같이 무해한 것으로 보이는 것에 그 의미를 확장했다. 이 연구는 발달중인 아동에게 텔레비전이 언어습득과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에 극단적이고 영구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으리라는 암시이다.
텔레비전은 습관처럼 보이나, 습관형성물질이 주는 가장 기본적인 보상을 제공하지 못하는 어떤 중독 –공허 속으로 빠져들어 나오기 힘들게 하는-현상을 가지게 한다. 저자는 24/7자본주의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무력화 형식은 백일몽의 무능화, 내적 성찰의 무능화라고 한다.
지금 우린 텔레비전세대 부모와 스마트폰세대의 아이로 이루어진 가정, 사회에서 일상을 잃어버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 공간에서 우린 누구도 중학교 1학년 교실의 일상이 어떠해야 하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다. 잃어버린 기억에서 일상은 어떻게 다시 복원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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