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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에세이 - 화니짱
웬디 브라운은 동시대의 권력형태를 '꿈 작업'모델로 설명하였다. 꿈 작업이 하는 일은 작화된 일관성을 생산함으로써 이상 현상과 모순들을 감추는 것이다. 더군다나 꿈을 꿀 때 우리는 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꿈을 꿨다는 사실마저 망각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이와같이 우리에게 기억 장애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우리의 불만과 아이러니가 무마될 뿐 아니라,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러한 망각 구조는 미래에 더 이상의 혁명과 같은 극적변화를 기대할 수 없음을 의미하며, 또한 왜 현재의 다중들이 정치적 과정에 혐오감을 갖거나 흥미를 잃고, 상품에서만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는 상품에 대한 숭배와 함께, 보모국가와 복지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다는 것에서 정치적 합의점을 찾았다. 사람들은 이제 소비자로 호명되고 정부자체가 일종의 상품처럼 제시되고 있다. 소비자주체화의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생태위기에 대응하거나 책임 질 수 있는 주체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윤리적 주체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크 피셔는 이 시기에, 개인들에게 윤리적 책임을 호소할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차원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슬라보예 지젝에 의하면, 신용위기가 대두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체계는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개인의 윤리성을 강조한다. 비난의 대상을 체계 자체가 아니라 이른바 병리적인 개인 및 이들의 남용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의 원인이 기업이나 체계 자체에 있음에도 윤리적 책임을 개인에게만 물을 수 있는 이런 교착 상태는 단지 자본주의의 위장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의 배후 깊숙이 존재하며 조종하는 행위자는 없다. 즉 "중앙 교환국은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소비자주체의 모순, 패스트 패션이 숨기고 있는 전지구적 착취, 땅과 종자 등 유기체마저 기계적으로 대하는 몬산트 등, 그 끔찍한 실상을 계속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서 정치의 복원을 노려야 하지 않을까? 학교에서 학생들이 소비자주체에서 정치적 주체로 넘어올 수 있도록, 무의식적-의식적 충격을 가하는 수업을 기획해봐야겠다.
4번째 에세이 - 직진
끊임없이 발전을 해야 한다는 진화론적 강박증이 도사린 현대 사회를 나 역시도 빗겨갈 수 없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더라도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아가고자 부단히도 배우고 갈고 닦고 있다. 끝나지 않은 이 배움의 진행형이 과연 무엇을 위해, 왜 이렇게 사는지 질문은 던져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하나의 습관처럼 되어버린 지식 습득으로 깨달음을 얻는 기쁨도 있었지만 관심사 이외의 것을 잘 기억 못하는 결점도 가지게 되었다. 얼마 전에 했던 말을 또 하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심지어 5분전에 했던 말도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물론 스스로는 망각을 인지하지 못하고 주변 사람, 특히 가족에게 많이 지적받는다. 다량의 정보가 유통되는 인터넷을 잘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이 불편해 할 정도로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현실과 정체성들이 소프트웨어처럼 업그레이드 되는 상황에서 기억 장애가 문화적 불안의 초점이 되어야 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99-100쪽)’. 소프트웨어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도 늘 업데이트 되어야하는 상황이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랄까.
현실을 가장 잘 재현하는 것을 예술의 정수로 봤던 영화 이론에서의 리얼리즘은 지금 그 힘이 약해보인다. VR(가상 현실)과 AR(증강 현실)에 다수의 사람들이 주목하고 매혹되며 여러 투자와 지원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겪지도 않은 과거를 회상하는 상상적 노스탤지어를 바라기도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가상 현실과 현실 배경에 실시간으로 상상을 더하는 증강 현실에 이끌리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현시대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접적인 현실을 바라보는 게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4번째 에세이 - 바다사자
80순이신 우리 부모님은 하루에 9개의 드라마를 거의 시청하신다. 아침드라마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며 심야드라마와 함께 하루를 정리한다. 그 분들이 소비하는 드라마들은 모두 일정한 포맷이 있다.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 개인의 책임, 열등감과 우월감이 질투와 시기로 발현되는 경쟁관계, 그리고 반드시 heavy sweetness가 얼기설기 엉성하면서도 주류를 이루며 감겨있다. 공중파 방송 세 군데만 하더라도 아침드라마 3개, 저녁 일일극 3개, 심야의 미니시리즈 3개, 기본적으로 9개의 드라마 소비가 제공되고 있다. 유사한 문화의 재활용이 넘쳐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담뿍 담겨있는 드라마는 산업화 세대인 부모님의 노스텔지어이다. 이뿐인가 사이사이 더 할 수 없을 만큼 감각적인 광고는 눈을 사로잡는다. 빠져들게 한다.
드라마의 유혹에는 나조차도 자유롭지 않다. 가끔 잘 만들어졌다고 평가되는 드라마에 빠져들곤 하니까. TV처럼 소소한 쾌락이 한껏 제공되는 장치가 더 있을 수 있을까. 부모님의 삶과 함께 하고 있는 드라마는 활력의 근원이며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수용하고 라캉이 말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게 한다. 사실 의식조차 못하고 순응적으로 반응한다. 정치적 행위나 정치적 사고조차 TV가 제공하는 감정의 안내와 함께 한다.
드라마가 제공하는 도대체가 너무나 달콤한 노스텔지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문화를 소비하게 하는 장치에 낚여있음을 자각함에도 이것이 싫지 않음을 자문해보곤 했다. 이지적으로는 비난하고 멀리하고자 했으며 로컬푸드를 다니고 ‘틈’을 찾으려 하는 행위를 하면서 이율배반적으로 그러한 문화를 만끽하고 소비하고 항상 돈으로 환산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사회적·경제적 불안정성이 익숙한 문화적 형태들을 갈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나?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지 못하는 무능이 나를 감싸고 있음에도 행복한 것은 왜일까? 익숙함이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나이때문일까?
4번째 에세이 -풍경
난 우리집 중학교 1학년 짜리 딸에게 거의 매일 두 가지를 말한다. 손에서 핸드폰을 내려놔라 그리고 일찍자라.
그러나 웹툰 그리기를 취미로 가지고 있으며 뮤지컬 배우를 꿈 꾸는 아이에게 핸드폰의 유투브가 보여주는 세계는 자기의 미래이며, 또한 학교, 학원에서 공부하다 지친 자신을 위로하는 휴식의 시간이다.
그래서 우린 공허하기만 한 싸움을 매일매일 질기게도 하고 있다.
또한 이번 학교에서 있었던 사건은 학교생활 잘 하는 반장과 학교의 문제아가 대립한 사태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마크 피셔가 이야기한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소소한 쾌락에서 미래를 꿈꾸며 즐기는 아이와 그것의 작용이 음울함으로 작동한 아이의 대립이었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 본 동일한 사태라고 여겨졌다. 즉 서로 앓고 있는 병리적인 문제는 근본적으로 같지만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 사태라고 난 바라보게 되었다.
내아이가 자신의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유투브가 아닌 실재의 삶의 풍경이 있는 창밖을 봐야 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항 저항의 방법도 단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것. 실재 보는 시각의 전환이지 않을까!
4번째 에세이 - 아날로그
7장. “하나의 현실과 다른 현실이 중첩되는 것을 당신이 볼 수 있다면”: 꿈 작업과 기억 장애로서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존재론적 불안정성이라는 이러한 상황에서 망각은 하나의 적응 전략이 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p97
이 존재론적 불안정성은 라캉의 주체가 구성되는 최초의 순간인 거울단계에서 그 연원을 들여다 볼 수 있다 . 라깡은 실제가 아닌 거울에 투사된 이미지에 매혹되는 이런 거울단계가 결국 주체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필연적인 계기이자 인간의 모든 지식이 허구적인 것에 기초하는데 주목하고 있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실제 세계의 충실한 반영이 아닌 주체의 욕망이 투영되므로 바라보는 사람의 환상과 연결되어 있다. 거울단계는 주체가 구성되는 최초의 순간인 동시에 영혼이 분열되는 계기다. 형성이 됨과 동시에 그 순간 주체가 분열되는 계기임을 알 수 있다.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은 누구나 일종의 신경증을 겪고 있다 .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이 가지는 불안을 ‘지위불안’이라고 정의한다. 현대인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지위가 능력에 따라 정해진다는 점에서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메멘토」에서 레너드를 괴롭힌 증상,즉 이론적으로 순수한 선행성 건망증도 이런 상황과 연관된 기억 장애다.이 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는 증상이 시작되기 이전의 과거는 온전히 기억할 수 있지만 새로운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할 수는 없다.이에 따라 새로운 것은 적대적이고 덧없으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으로 어렴풋하게 모습을 드러낸다.그리고 환자는 옛것이 주는 안도감 속으로 물러난다.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하는 무능,이것이 포스트모던한 곤경을 짚어 주는 간명한 정식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102-103
현대인은 일종의 자기 분열로서 이 불화에 대처 한다.
카프카의 『시골혼례 준비』에서처럼 옷을 입힌 육시에게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하고 , 자기는 침대에 남아있는 것이다-사람, 장소, 환대 (공)저: 김현경
그리고 환자는 옛것이 주는 안도감(쾌락원칙 속으로 물러난다.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하는 무능(주이상스의 상실?),;이것이 포스트모던한 곤경을 짚어 주는 간명한 정식이다.
포스트모던한 곤경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카르페 디엠(Carpe Diem)'으로 손쉽게 대처해 버리는 간명한 정식이다
8장 . “중앙 교환국은 없다”
-하지만 콜센터에 대한 불쾌한 경험이 보편적이더라도 자본주의가 본래부터 효율적이라는 가정이 깨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마치 콜센터의 문제가 자본 논리의 체계적인 결과는 아니라는 듯이,즉 이 조직은 실제로 무언가를 판매하지도 못하면서 이윤을 만드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곳이라는 듯이 말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p109
-“마을에서 성으로 전화가 제대로 연결되는 경우는 없고,우리의 전화를 연결해 줄 중앙 교환국 같은 것도 없어요.” 110(프란츠 카프카,권혁준 역, 『성』(창비, 2015), 106쪽.)
K는 ‘부름을 받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서의 ‘성‘을 배회 한다.
K가 끝내 도달할 수 없었던 ‘성’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한 세기 내내 현대 문학계의 화두였다.
어떤 방식으로도 그 사물의 중핵(‘성’)을 돌파하지 못한다는 인식론적 곤궁이 드러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변증법적 유물론적 시점이 '열리는' 것이다.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은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빌린다면) 다른 어떤 관점들로도 환원되지 않은 가장 '타자적'인 관점이다.
실재(‘성’)는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으로 파노라마처럼 주위를 빙 돌아가며 아~~! 대충 이러한 것이려니 하고 이해는 할 수 있지만(K는 전화 속 저쪽으로부터 소음이외는 듣지 못한다) 결코 도달하지는 못한다.(중앙 교환국 같은 것은 없음으로..)
4번째 에세이 - 초코
현재 참여하고 있는 아카이빙 사업의 일환으로, 나는 전주에 거주중이고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 중인 비보이들을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 춤에 대한 열정은 퍽 인상적이었고 당시 이들을 지도한 교사의 입을 통해서도, 춤을 출 때 모든 열정을 쏟아넣던 눈빛들을 전해들었다. 간혹 이 '성취'의 사례를 교육의 탁월한 사례로 보고 청소년교육에 접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던 동료 연구자는 단지 요즘 아이들의 열정이 상실되었다는 진단만 가지고, 당시 넘치는 열정으로 열악한 환경을 극복했던 시대처럼, 현대 아이들에게 보장되는 수혜를 억제해야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당시 비보이 문화가 붐이었던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까지는 대중 문화에 외국의 힙합이 첫 발을 디디고 있었고, 청소년들에게는 그다지 많은 멋의 기준, 자의식, 반항적 기질을 표출하며 그들을 매료시킬 만한 새로운 형식이 많지 않았다. 힙합과 비보잉이 자신을 표현할 (넘쳐흐르는 열정을 해소할) 거의 유일한 종목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그것은 외려 경로를 아주 단순화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직접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자신의 자의식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고 멋을 추구할 통로가 다양해졌다. 흔히 취향의 시대라 불리는 지금은, 어떤 매체와 내용을 소비할 것인가 하는 '선택 행위' 자체가 우리가 가져야 할 귀중한 가치가 된 셈이다.
현재를 비추어, 한국의 청소년들의 '열정이 식었다'며 호들갑떠는 목소리들은 정작 이러한 새로움을 창출해내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새로움'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화를 접근하는 데 있어, 무엇이 현재 우리들을 사로잡는 가 물을 필요가 있다. 선택/소비행위를 제외하고 사로잡힘(열정)을 쏟을 만한 것이 있는가? 혹은 그럴 환경이 되는가? 여기서 환경은 재정적 안정성이나 안락함(그러니까 우리가 과거에 비해 누리고 있는 수혜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을 진정으로, '개방적'으로 허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우리는 밥벌이에 대한 불안함 등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그 어떤 것도 허가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 자신에게도. 게다가 우리가 떠안고 있는 (작가 박찬경 등이 한국문화의 우선 과제로 방점을 찍고 있는)'문화 지체 현상' 역시 그대로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시도 때도 없이 문화 융성, 개혁, 혁신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면서도 도대체 무엇에 발목이 잡혀 있길래 내용이 부재한 외침만을 끝없이 양산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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