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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에세이 - 화니짱
관료주의적 절차는 정말 바보들의 행진같다. 그 절차를 따르는 말단 직원이나 감독하는 관리직이나 진짜 본질에서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멍청한 행진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데, (마크 피셔에 따르면) 어딘가에서 우리의 행진을 지켜보는 대타자가 있을 것이라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성과나 실적은 직접 평가되지 않는다. 성과나 실적의 표상이 평가될 뿐이다. 따라서 진보적 교육감과 진보적 대통령 하에서도 관료주의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일제고사에서 pisa의 평가성적, 혁신역량평가 등으로 성취의 상징들과 표상들이 바뀌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대타자 자체와 조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과 대타자의 갭 사이에서 대타자의 의도를 누군가는 실무적으로 해석해줘야 하기에 관료의 권한이 확보된다. 하지만 그 관료 역시도 운신의 폭이 매우 좁다. 법률과 규칙, 매뉴얼이나 절차 등 이미 대타자에 의해 대부분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듯이) 관료주의적 리비도는 "죄송하지만, 우리 부서 소관이 아닙니다.", "선생님 말이 맞지만 규정상 이렇게 해야합니다" 와 같이 책임을 부인할 때 발휘된다. 이 경우 분통터진 민원인들이 말단 실무자들과 싸우다 보면. 결국 절망과 허무감을 느끼게 된다. 관료들 스스로도 아무런 재량권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닳게 되기 때문이다. 간혹 안전한 매뉴얼 뒤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다중을 위해 재량권을 발휘하는 관료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소비주체 앞에서 그들은 곧 불운에 직면하곤 한다. 이를 잘 드러내는 사태가 인헌고 사태이다. (다음 에세이에서 이어짐)
3~4장을 읽은 인상들 - 라온
1~2장을 읽고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우리 의식이 빠져나갈 수 없이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 확인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가? 그래도 우리가 노력할만한 것은 있지 않겠는가? 그런 노력들에 자본주의가 이미 자연화되어 자본주의 비판마저도 자본주의식으로 진행되어 도저히 자본주의 이 사회와 이 사람들에게 아무 균열을 낼 수 없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 이미 노동 시장에서 비정규직의 문제나, 위험의 외주화 등의 여러 사건들과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한 지점들이 만연한데 왜 균열을 낼 수 없다고 하는지, 우리 모두가 그 불안을 보고 있으면서 왜 방법이 없다고 하는 것일까? 정말 없는 것일까? 제발, 있었으면 좋겠다! 제발....
그래서, 3~4장을 읽으며 피셔가 자본주의 사회의 균열이 가능할 몇 가지 지점들을 제시할 때에 그리고 그 문제들에 공감이 되는 나는 ‘그래!’하고 눈을 번뜩이며 집중하였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자본의 문제로 발생하는 환경 재앙은 어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첫 번째 지점이었고,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의식화되고 자본주의가 몸으로 익혀지고 자본주의식으로 급속도로 시장화되는 교육의 문제가 두 번째 지점이었다.
15살 툰베리가 나서서 ‘어떻게 당신들이 감히~’라며 트럼프뿐만 아니라 모든 기성세대를 질책했을 때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환경의 문제는 정말 더 말할 필요가 없이 자본주의적 삶의 결과이고 여기엔 우리 모두의 인식이 달라져야 하고 긴급하게 실천해야만 한다. 무엇을?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내 아이들의 세대에서는 환경의 문제들이 적들처럼 언제 침입해들어올지 모른다. 자녀를 두고, 학생을 두고 성찰하면 우리 세대와 나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기반으로한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들을 빨리 깨뜨려야 한다. 구조를 어떻게 바꿀까, 과연 자본이 구조를 바꾸자고 할까, 이미 바꾸자고 하면 그 다음단계는 형태만 바뀔 뿐 자본의 우위는 바뀌지 않을 터이다. 공유경제시스템도 또 하나의 자본의 방식일 되어갈 것 같다.
그러나, 일본 제품과 일본 관광에 대해 민간에서 시작된 개인들의 운동과 참여가 일본을 압박하기 충분한 결과를 낸 사실을 보면 실천이 가능한 민간영역과 개인 영역에서 먼저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환경문제는 생명의 차원에서도 너무 긴급하기 때문이다. 내 자녀, 내 손주들, 내 학생들과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구조를 깨뜨리기 전에 개인들의 의식에서부터 먼저 변화하고 실천해도 좋지 않은가?
효율을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사고하고 작동하는 이 사회에서 불편을 감수하고 불편에 적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사회적 구조를 바꿔내야 하지만, 나 역시 내 몸이 익숙하게 적응하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들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나의 결심은 페트병을 더 이상 버리지 않기 위해 생수 구입을 하지 않기 이런 소박한 것들이다. 수돗물 마시고 끓이기! 그리고 두 번째는 정말 고민이다. 공유경제가 아직 활성화되기 전이라 여건은 미비하여 공유차를 안심할 수 없어 차를 아직 포기 못할 것 같다. 노후 경유차를 가지고 있는 나는 이 차를 현재에 바꾸기가 쉽지 않아 이 부분은 계속 고민중이다. 자전거 출퇴근도 생각하지만 아직 결정 못하겠더라.
두 번째, 교육의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균열의 지점들을 살펴보자. 학력인플레이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자본주의 시장구조에서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자기계발로 더 많은 비용을 투입하여 자격을 갖추어 잘 팔리는 상품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면, 학력 인플레이션의 현재 상황에서는 교육 시장의 재편성, 재구조화를 두고 교육부의 대학의 갈등과 폐해, 자본의 대학 잠식 등이 그렇다. 논문의 숫자에 연연하는 관료주의적인 접근들은 실제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편법과 꼼수들이 활개치게 하여, 허위와 가짜의 학회가 난립하기 시작하고 가짜 논문의 문제들이 진리의 전당이라 믿어져온 대학 안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한국장학재단을 통한 등록금 대출이 사회 초년생의 10년을 노예처럼 예속하게 한다. 계속 청춘을 인질삼는 것 같은 대학 장사, 평가 문항을 단순하게 떼어와 한 항목 한 항목의 수치를 맞추기 급급한 현재의 대학 평가들. 편린화된 평가들속에서 대학은 낭만도 없고, 진리도 없고, 자유도 없고 학생들은 취직의 노예들로 4년을 전당잡힌다.
그러나, 대학에 오기전까지의 교육과정 역시 비슷하다. 과외와 좋은 강사를 배치할 수 있는 자본력, 대학입시 문제들을 낼 수 있는 교수들과 연계하기 위한 로비 또는 거래들, 대학관계자들끼리 주고받는 인턴 품앗이들, 더욱 노골적으로 자신의 계급을 자식대로 이어주게 하기 위해 안되는 일까지 되게 만드는 필사적인 노력들은 ‘과정의 가치’를 진작에 우습게 만들고 있다. 능력대로만이라도 손에 잡힐 수 있다면 차라리 공정할텐데....능력주의대로 부가 배분되어도 공정할텐데....노골적이고 필사적인 육탄전을 벌이는 교육현장에서 우리는 시간을 저당잡힌 채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끌려가고 있다. 차라리, 확실한 목표로 쭈욱 달려갈 수 있는 자사고들의 모습이 차라리 남는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상산고의 자사고 지위 부여 여부에서도 얼마나 날카롭고 전면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뚫릴 수 있는 균열의 지점들은 많다. 이미 일상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앞으로의 사회에 대한 합의를 이룰 수 있을까? 그런 장이 어디에서 열려질까?
3주차 에세이- 아날로그
1.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읽으며 현재까지의 느낌
- 문화비평은 다양한 문화적 증상을 기반으로 사회전체에 대한
이해에 다다르려는 인문학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피셔가
살고있는 영국사회의 문화현상을 기반으로 할 것이다
모든 문화비평은 반드시 일정정도 경험주의적일 수 밖에
없으며(문화비평이 영미권에서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까?) 따라서
이러한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문화비평적 논의를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방법론은 참고 할 수 있지겠만... )
이 책 역시 이러한 난점들이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이 책에서 예를 들고있는 다양한 영화들..
사실 본 영화가 몇 편 안된다는 난감함....
개그콘서트를 직접 보지않고 그것을 본 친구에게 개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랄까...
전 지구적 자본주의 현상은 분영있지만 듯하지만
'세부적인 결'은 조금씩 다르다
중요한 것은 이 '세부적 결'일지도...
2. 5장 ... 다시 읽어봐야할 듯..
3. 6장의 관료주의
신자유주의적 관료주의에 대한 이 책의 논지는 나에겐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역사적으로 관료주의 문제는 초기막스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현실화된 사회주의에서 스탈린주의로 대변되었고,
관료주의가 사회주의를 파국으로 치닫게한 중요한 요소로 평가되고 있다.
(이 평가는 사실 더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이후 관료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동의어 였고,
신자유주의자들은 케인주주의적 복지국가의 실패이유 역시 관료주와
복지정책에 의한 재정확대를 이유로 들고 있다
관료주의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케인주주의적복지정책(사민주의)에
스탈린주의의 망령을 덧씌우는 판타지 같은 역활을 하였다(그것은 마치
우리나에서 언제나 선거때면 되살아 나는 '빨갱이' 망령과 비슷한 효과였을 것이다)
그 결과 막강했던 영국 노동당은 대처에게 패배하며 무너져갔고,
대처리즘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가 본격화 된다
그러나 칼 폴라니가 그의 책 '거대한 전환'에서 밝히고 있듯이 관료주의는 핵심 요소가 아니었으며,
근본적 원인은 '브렌트우즈체제' 붕괴이후의 금융자본주의의 공세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제 다시 신자유주의 관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결국 언어(이데올로기)를 누가 가지는가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이며 관료주이라는 이 언어를 누가 갖는가가 핵심이 아닐까?
소통이라는 단어가 이명박의'국민소통위원회' 이후로 오염되어,
더 이상 타자의 담론으로 역활 할 수 없을때 , 우리는 그 영토를 버리고 다른 영토로의 유목을 준비 하듯...
관료주의는 그 자체가 권력의 문제이지만(계급과 체제가 없어지지 않는 한 지속될)
관료주의의 계보학이 있다면, 이 언어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전유하는가를 해명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일 듯..
갑자기 조국 사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ㅠㅠ
3주차 에세이 - 직진
'자본과 노동의 탈규제'로 '임시직화와 아웃소싱화'가 진행되면서 평생직장보다는 평생직업이라는 말도 있다. 평생직업이라는 말 조차도 현상황에서는 무의미하고 그때그때 임기응변에 맞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고정성보다 '유연성'을 요구하는데 이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근대의 액체성, 유동성과 맞닿아있다. 12월말이면 계약이 끝나는 나는 현재 재계약 여부를 조금 걱정하고 있다. 새로운 일을 찾으면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장황한 자기소개서와 지원동기를 써야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나인투식스로 근무하는 게 순간순간 지루하고 비효율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평범한 업무 환경에 대한 양가감정을 느낀다. 계약직으로 전전해야하는 게 막막하기 보다 여기에 적응, 순응, 체념한 쪽에 가깝다. 안정적인 게 불안하기도 하고 불안정적인 게 안정적이기도 한 역설적인 상황이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던 나에게 대학원의 어떤 사람은 개인적 의지와 평탄한 삶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다.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함부로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말할 수는 없음에도 말이다. 스스로도 자책한 적이 많았으나 사실은 사회 구조의 문제임이 점점 선명하게 다가온다. 유동적 공포. 예측할 수 없는 공포에 빠진 사회의 영향은 나에게도 미쳤다.
나는 방대한 회사 자료를 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정부기관과 교류가 많은 회사인데 기관에서 홈페이지 사진 통계를 요청했다. 통계 작업을 하면서 이걸로 회사의 실적을 파악하기란 참으로 곤란한 일에 가깝다. 왜냐하면 홈페이지에 업로드 된 사진은 여러 경우의 수를 통해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필름 사진을 스캔하지 않은 경우, 사진이 많으나 세로로 되어있는 경우, 담당자인 나의 자의적인 판단 등등으로 선별, 공개된 것이다. 정부기관의 피드백은 아직 받지 못했으나 어떤 답변이 올지 내심 기대가 된다. 어쩌면 자료만 받고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겠지만 말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5-6장 감상문 - 초코
마크 피셔가 신자유주의(포스트포드주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무엇이든)의 결과로, 정신 건강을 주목하는 건 인상깊다. 정신분열부터 조울증, 망상, 사회부적응, 공황 장애 등의 문제의 발원에 노동시장의 변화, 계급 상승의 환상, 대타자 등 자본주의적 사회구조가 가미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가 개인들의 기분과, 망상, 자기 확신에 의존하고 그것을 재생산한다는 것.
우리는 정신질환을 개인의 문제로 원자화하고 신약 개발과 치료를 권장하는 한편, 개인들은 모든 책임을 떠안은 채 그 사실을 은폐하고 가장하며 살아간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는 공책에 "정신질환의 가장 나쁜 점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아닌 척 처신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라고 썼다. 사람들은 정신질환에 대해 불안과 불쾌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가지며 그것을 무작정 극복하고 배척하려 한다.
"우리는 사회가 만들어낸 열외자의 고통과 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주목하지 않으면서, 열외 되어 사회의 이상적인 형태에 금이 가게 만드는 이들의 존재에는 불쾌한 감정을 갖는다."
이희재, "'동백꽃 필 무렵'은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오마이뉴스
어쩌면 영화 <조커>에 대한 관객들의 불쾌감도, 알고보니 조커는 우리가 알던 위대한 빌런이자 안티히어로가 아니라 주변에서 볼 수 있던 단순한 열외자에 불과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열외자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가 심리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던 히어로에 대한 동경과 부딪히면서 부조화를 촉발시킨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망상과 자기분열이 성공적으로 해소되는 경우를 우리는 영화 <조커>에서 볼 수 있다. 주인공 아서는 매일 힘겹게 오르던 계단을 말그대로 "대타자"를 져버리는 순간, 아주 가볍고 흥겹게 내려온다. 물론 영화 속에선 조커란 캐릭터 설정에 맞게 극단적 폭력이란 결말로 치닫지만, 정신질환의 해소 측면에서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정신질환의 일시성, 특정 집단 안에서 유효하다가 집단을 벗어나는 순간 말소되는 경향을 띠는 정신질환은 그 발생이 사회체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령 군대에서 발생하는 우울증, 공황 발작, 자살 공상 등 정신질환은 신기하게도 대게 전역 이후로 사라진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정신질환자 자체에 의구심을 가지며, '너 그거 진짜야', '큰 그림 아니냐'와 같은 조롱을 내뱉곤 한다. 대게 이들은 '다 같은 고통'을 받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발작을 외면하곤 한다. 이 역시 인과관계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 채 마냥 그들의 정신력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에세이 3회차 - 풍경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의 실재의 바깥 테두리를 표지해 주는 상태라면 자본주의의 내부에는 양극성장애라는 정신질환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실재를 구조화 하는 것은 ‘스탈린 주의’라고 폐기처분된 관료주의적 조치들이다.
포드주의가 지닌 적대의 확고함은 노동조합이 제 역할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하였고, 노동은 일체의 기술을 습득하고 엄격하게 조직화된 위계 질서아래에서 진급할 수 있게 했다.
포스트포드주의에서 적대는 노동조합을 여전히 대항세력으로 내세웠으나 옛 스타일의 계급갈등에 관심이 있지만 자신의 투자 수익을 최대화하는 일에도 관심이 있는 노동자의 심리학에 위치해 있고, 노동자는 끊임없이 이 회사 저 회사를 전전하며 주기적으로 기술을 배우도록 요구받고 있다.
포드주의에서 포스트 포드주의로의 전환은 노동구조가 탈 중심화 되고, 수평적 네크워크가 위계질서를 대체하게 되면서 ‘유연성’이 중요해졌다. 유연성은 노동을 영구적인 불안정성으로 만들었으며, 자본과 노동을 탈규제 시켰으며, 시간은 더 이상 선형적이지 않고 무질서해지고 점 형태로 분할되었다.
생산과 분배가 재구조화(포스트 포드주의) 되자, 우리의 신경계도 재구조화 되었다. 즉 우리가 예견할 수 없는 사건에 대응하는 능력을 발달시켜야 하며 전면적인 불안정성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러한 히스테릭한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 그 어떤 사회체계에도 없었을 정도로 사람의 기분에 의존하고 그것을 재생산한다.
자본은 이러한 정신 질환의 인과성을 부정하고 정신 질환을 개인의 문제로 간주하며 탈정치화 한다. 그러면서 도전하는 좌파에게 정신 질환을 재정치화 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이다.
자본이 노동을 탈정치화에서 재정치화 하는 과정은 ‘새로운 관료주의’이다. 즉 ‘스마트해지기’라는 에토스를 ‘창조성’과 ‘자기표현’이라는 것으로 발현하도록 하여 사람을 내재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이다.(이것은 격식을 따지지 않는 태도와 은밀한 권위주의가 혼합된 방식이다.) 이러한 통제 방식은 노동자에게 생산뿐 아니라 정서적 공헌도 요구하는데, 이러한 정서적 공헌을 저급하게 정량화하려 하면서 추가적인 관리 및 관료주의를 요구한다. 이러한 시도는 노동 그 자체의 성과나 실적이 직접 평가되지 않고, 표상을 생산하고 조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게 된다. (서비스를 향상시키지 않고 서비스를 정확히 표상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투입된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다. 관료주의 - 유토
관료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관료정치 아래 관청이나 사회집단에서 흔히 나타나는 독특한 행동 양식이나 의식상태를 비판적으로 이르는 말로
상급자에게 약하고 하급자에게 힘을 내세우려 하며, 자기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독선적인 행동이나 의식을 보이는 따위의 특성을 이른다.
인간소외, 목적 전치, 무사안일, 창의성 저해 등 부정적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스마크 행정, 적극 행정, 성과평가, 인센티브 등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목표, 전략, 세부실행 계획 등 계량화되고 정량화된 수치로 과학적으로 포장하여 노동자들의 성과를 평가하고 처음부터 청량화 하기 힘든 사무까지 측정하기 시작했다.
누가 더 가공을 잘 하는지 여부가 성과와 실적의 표상이 된다. 능력이 되어 우수한 직원으로 인정과 인센티브를 받는다.
“지방정부의 서비스들은 실제로 향상 시키기 위한 노력보다 그 서비스들을 정확하게 표상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투입되고 있다”고 표현이 그 단면이다.
관료주의적 데이터는 보통 홍보 역할을 수행할 목적으로 수집된다고 말하고 있다. 지방자치, 직접 민주주의 하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다양하게 수집되고 가공된 데이터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특정기관의 위신을 높여 줄 뿐 만 아니라 다양한 정책 입안의 기초 자료가 되는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원래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은 사라지고, 가공되고 변형되고, 확대되어 과장된 것, 축소되어 무의미해져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것을 우리는 과학적이고 유의미한 데이터로 착각하고 정책에 입안하고 실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우리 아이들은 쾌락의 매트릭스 위에 있다. - 바다사자
난 가끔 내 아이의 행동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다. 대화를 거부하기도 하고 ‘엄마와는 얘기가 안돼’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한다. 누구보다도 사랑하는데 진지함에 대한 온도차가 너무 크다. 엄마와의 대화는 ‘따분’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식에게 가는 사랑만큼 서글픔과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이 다가오는 순간이다. 세대간의 갈등은 삶의 매트릭스가 다르다는데 있다. 우리 사회는 급속한 속도를 가지고 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도 있다. ‘빨리빨리’ 라는 말은 그래서 우리의 속성을 드러내는 말이 되었나보다. 속도감이 강하다는 것은 세대가 겹치지 않음을 의미한다. 조부모 세대는 커녕 부모 세대와도 교집합이 없다. 내 나이 세대는 진지한 인문학적 매트릭스를 가지고 있으며 후기 산업자본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삶에 집중했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허상을 가슴에 담기도 했고 고귀한 사명(?)에 대한 부채의식 조차 가지고 삶을 살아낸 세대이다.
지금 세대, 특히 10대들은 어떤가.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열매를 먹고 자랐다.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자란 세대다. 2세대쯤 차이나는 내 나이 세대와 더더욱 교집합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 세대들은 아이들의 속성을 알아채고 이해하고 있는가,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있는가 반문해본다.
우리 아이들은 쾌락의 매트릭스 위에 있다. 아이들의 삶은 SNS로 분절되어 있고 관계의 불편함을 못 참아하면서 동시에 관계에 항상 목말라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면대면 상황을 피하면서도 갈등의 해소를 꿈꾼다. 수면 중에도 손에 쥐고 있을 정도로 중독적인 핸드폰은 아이들을 잠식하고 매일 배부른 포식을 한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순간 순간의 재미와 흥미를 쫓다가 금방 지루해하고 따분해한다.
그런데 수업은 쾌락의 매트릭스가 아니다. 인문학적 매트릭스다. 지루하고 따분한 매트릭스를 의무와 강요(?)-부모의 기대와 부르디외적 취향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수용하고 있는-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중고시절의 강한 억압과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은 졸업 후 어떻게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 섞인 생각을 하곤 한다. 요즘 갑자기 눈에 띄게 많이 보이는 개인병원이 있다. 정신건강과이다. 10여전 전만해도 병원이라곤 전북대병원 밖에 없어 그리로 학생을 보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현재 전주 시내 거리에서 제법 눈에 띄는 간판들이 되었다. 찾는 이가 많다는 것은 병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상담받을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우울과 함께 오는 심리적인 병리현상들이 우리 일상생활 가까이 영역을 넓혀왔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억압되어 있는 시기 특히 고등학교 시기는 프로이드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성적 억압이 강함을 경험한다. 그러한 억압이 일생생활화 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사회적, 백그리운드에 깔린 문화적 억압이 사라지게 되면 거기서 생겨나는 괴리가 아이들에게 병리적 신경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닐까. 데이트 폭력이나 몰카, 다양한 형태의 성추행이 연일 터져나오는 것이 그 방증일 수도 있겠다. 지인이 하는 말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많은 가정이 가정 내 한 명 정도는 상담 병원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는 가정조차 안정처가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가족조차 정서적 기댐을 버거워하게 되었고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주거나 대체할 수 있는 장치도 없다. 1인 가구가 가파르게 늘고 있는 추세를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고통은 나눌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 학교는 억압이 덜 하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 종일 수업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기행수업의 경우 베트남 교류학교 방문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다. 일년 내내 수업으로 진행되고 가기 한달 전부터 여러 교과에서 베트남 관련 수업을 진행한다. 교육과정 상에서 운영되기에 한 해로 끝나는 수업이 아니라 해마다 같은 학년에서 이루어진다. 다양한 행사가 일회성이 아닌 교육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비억압적인 수업이 운영됨을 의미한다. 뮤지컬수업, 발상과 표현, 노작 등의 수업은 일반 인문고에서 볼 수 없는 건강한 양상들을 생산해 낸다. 3개년의 과정을 겪은 후 일반 인문고에 진학한 학생들에 비해 오히려 심리정서적으로 훨씬 건강한 성인이 되어 졸업할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이 대안학교 정체성과의 접목점이 되지 않을까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5-6장)- 밤톨
“노동 구조가 탈중심화되고 수평적 네트워크가 피라미드식 위계질서를 대체하면서 ‘유연성’이 특히 중요해졌다.” p62
“대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해석하는 일에 종사하는 다소간 적대적인 태도의 공무원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행위, 이러한 책임지연이 바로 대타자의 모든 것이다.
(중략)
개인들은 특수한 몸짓이나 지침이 의미하는 바를 추측할 수만 있을 뿐이었다. 명확한 공식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최종 책임 기관에 호소할 가능성이 원리상으로도 없는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그런 모호성이 광범위하게 증대한다.” p87
‘유연성’,‘모호성’,‘책임지연’
(오늘도 나의 에세이는 직장 이야기다.) 한 달 전, 하루가 멀다하게 사람들이 떨어져나가는 이 불안정한 조직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며 등장한 인물이 있었다. 현 사무국장의 전 직장 사수. 당시 팀장이었던 사무국장에게 조직을 한 번 운영해보라며 국장이라는 직급을 수여한 이. 그가 컨설턴트라는 명분으로 우리 조직에 등장했다. 내외부적으로 조직이 불안정하다는 소식을 듣고 본인이 나서야할 때라 생각했나보다. 30여명의 전 직원을 불러 월 2회 워크샵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일환으로 SWOT 분석이 진행됐다.
각자 본인들의 SWOT을 적어 자리에 모인 다른 동료들에게 돌린 뒤, 동료가 바라본 나의 SWOT 피드백을 받아보는 형식이었다. 나의 직속 상사인 팀장이 쓴 본인의 강점은 ‘유연성’이었고, 나 역시 이 부분에 일정 부분 공감했다.
반면 팀장과 내가 각각 써 낸 그의 약점은 ‘결단내리지 않음’과 ‘책임지지 않음’이었다.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여 본인의 생각과 결합해 ‘해석’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 태도를 늘 견지하기 때문이다. 회사의 중간 관리자로써 사업을 이행하는 듯 보이지만 업무와 책임의 주체는 아니었고, 조언의 방식으로 사원에게 전달하고 결과가 어긋나면 방관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사실 이러한 상황이 팀장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팀장(중간관리자), 사무국장, 센터장, 행정 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상황은 마찬가지. 사업을 진행하는 주체와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책을 읽으면서 주체와 책임이 대타자의 존재인가 싶었다.- 행정에서 내려오는 사업을 받아와 사원들에게 ‘오더’를 내리고, 시시각각 내려오는 업무 처리에 급급한 실무자만이 있을 뿐.
5∽6장 에세이 -진달래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5.31. 교육개혁안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즈음이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창조적인 인재육성이 국가적 과제라며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안개 속 같은 정책 설명을 들으면서 자유와 자율의 기저 위에 선택과 재량이 강조되는 것을 보면 무언가 좋아질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교육을 하면 우리의 삶이 좋아지게 될 것인가, 청소년들이 더 이상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며 뛰어내리지 않을 것인가, 과연 우리가 바라던 방향인가 싶어서 미심쩍어 했었다. 실은 ‘자본’이 무한의 자유를 누리는 것임에도 마치 ‘개인’의 자유가 확장되는 것처럼 인상짓는 ‘신자유주의’, 헷갈리게도 이름 하나는 잘 지어 붙인다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5년이 지난 지금, 이제 더 이상 ‘신자유주의’에 바탕한 정책이나 교육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는 쓸데없는 짓이며 부적응자의 불만일 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반성적 무기력’이 공기처럼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다.
최근 ‘우리 시대 마지막 식민지는 여성이다.’라는 구호에 맞서 ‘우리 시대 마지막 식민지는 학생이다.’라고 주장하는 젊은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페미니즘이라는 현상이 말해주듯이, 이제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며,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태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좌충우돌 갈 길이 멀지만 ‘무리지어 함께 발을 떼었다’는 것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기사 제목을 뽑고 있는 와중에도 조용한 반향을 불러오는 징후가 그런 것을 반증한다고 했다.
반면에 학생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하소연은커녕, 심지어 교육 3주체 중의 하나임에도 교육 문제에 있어서조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하는 행동이라고는 겨우 교실에서 난리를 치고, 수업을 방해하고, 선생님을 야유하고, 친구들을 따돌리고, 야한 동영상으로 인기를 누리고, 화난 몸짓으로 격한 감정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 그나마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이 교실을 점령하여 사유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행동의 뒷면은 ‘나 아파요’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조용하게 아파가고 있는 아이들이다. 내 가까이에도 우울증을 호소하는 청소년들이 부쩍 많아졌다. 이렇게 아픈 아이들이 선생님들을 공격하고 있기에 학교 선생님들도 함께 아프게 된 것은 아닐까?
사실 학교 현장에서는 양극성 장애의 조짐을 보이는 사례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약물 치료를 받는 사례가 눈에 띠게 늘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다수의 의사들은 약물 치료가 최우선 처방이라 말하며, 유전적 요인이라거나 뇌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우울증이 세레토닌 수치의 저하로 생기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왜 특정한 개인의 세라토닌 수치가 낮은지는 여전히 설명되어져야 할 문제다.” 라고 묻고 있듯이, 정신 질환의 화학-생물학화가 탈정치화로 이어지고 있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정신 질환과 사회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특히 자본이 맘껏 자유를 구가하던 그 시기에 분명한 증가율을 보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된다. 오래 전부터 의심해 왔던 바이기에 더 그렇다.
아이들이 이렇게 아픈 것과 관련하여 가정의 문제를 떠나서 생각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가족을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책으로 요구하고 있다. 부모가 자녀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없게 만들고, 부부를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참기 힘든 스트레스를 부과하면서, 즉 가족을 침식해 가면서 말이다.”는 바가 시사하듯이 우리의 가족은 파편화한 채 해체 수순을 걷고 있다. 특히 농촌에서의 조손가정은 대다수가 그러하다. 농촌의 소인수학급에서도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고 보통 수준의 교육성과를 기댈 수 없다고 하는 데는 이런 요인이 크다고 본다.
정신적 고통의 발생빈도가 증가하는 현상과 노동자의 성과를 평가하는 새로운 양식 사이에서 상응관계를 보는 일로 ‘새로운 관료주의’를 들여다보자는 말에서 웃음이 나온다. ‘너의 모습을 보여줘 봐’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관료주의는 만연하다 못해 모든 노동자를 관료화한다. 농촌 지자체의 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 전문상담사로 26년을 일해 온 어느 상담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상담을 성과로 보지 않고 상담으로 상담을 한 것은 10년 전까지의 일이였던 것 같아요. 지금은 모든 것을 평가를 염두에 두고 기록과 실적으로 보이기 위해 프로그램을 짜고 있어요. 상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담의 외주화를 열심히 하고 있지요. 보다 많은 강사를 섭외하고, 보다 많은 집단을 구성해서 수량을 채워요. 상담한 숫자가 중요하니까요. 상담의 경로와 내담자와의 관계나 치유의 과정은 성과로 나타나지 않아서 내담자에 집중할 수가 없어요. 상담할 시간을 내느니 업무를 우선 봐야 해요. 나는 이제 상담사가 아니라 공무원인 것 같아요. 군청 직원인 것이죠.”
지난 해, 다른 지역보다 실적이 적다는 것, 주민들에게 홍보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것, 센터장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 등 여러 이유를 들어 집단 해고되었고, 지난한 싸움 끝에 부당해고로 판명되어 복직되었으나, 이 결정적인 한방을 맞은 뒤부터 공무원들의 감시 아래 열심히 실적을 기록하고 탑재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무엇을 하면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겠는가고 매일 밤 묻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현주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무늬연마소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심리학 세미나에 문을 두드린 것은 나와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 아프기 때문이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 홍세화는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볼테르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광신주의자들의 열성이 수치스러운 것이라면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수치스러운 것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을 다시 떠올리며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무엇’과 ‘어떻게’를 고민하고 있다. 머지않아 고민을 끝내고 움직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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