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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철학사2」 아시아세계의 철학 이정우 2020.6.28. 바다사자
1부 잃어버린 길을 찾아서
3장 기의 세계: 신체, 생명, 문화
역 |
기 |
세계의 구조의 의미 |
흐르는 세계의 실체 |
문화적 삶의 차원 |
자연적 실체의 차원 |
현상세계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방식 |
궁극의 실재 |
선험철학 |
존재론 |
현상(現象) |
현상의 실체 |
현실성 |
잠재성 |
기가 머금고 있는 법칙성, 기가 흐르는 길은 ‘도’라고 불린다. 기가 공간을 채우고 있고 시간에 따라 계속 ‘화’하는 실체라면 도는 그 실체가 내포하는/드러내는 일정한 길이다. 도는 물질적 실체로서의 기와 기화의 방식 및 그 의미로서의 역, 그 외(130) 다양한 차원도 감싸는 최고의 범주이다.
기는 반드시 기‘화’로서만 존재한다. 멈추어 있는 기란 개념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동북아 사유에는 생성을 떠난 그 무엇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131).
1. ‘기’란 무엇인가
물질적 실체이다(131). 물질‧생명‧정신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기란 𝑑𝑥들의 총체이며, 물질성과 생명성과 정신성을 갖춘 궁극의 실체, 또는 철학적 입장에 따라서는 제2의 실체이다(제1의 실재는 도, 무). 기는 근본 실체이므로 그 자체는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132).
인식이란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다양한 측면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적-이론적 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 역시 이런 이해를 위해 생겨난 개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은 기의 어떤 양태 즉 기가 변해가는 방식들이다.
학문이란 사실‧현상‧사건 같은 구체적인 것들과 이론‧가설‧원리 같은 추상적인 것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행위이다. 기학 역시 이런 오르내(134)림의 운동을 통해서 추구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기 개념에는 일원성이 내재한다. 기를 초월하는 형상적(135) 원리는 인정되지 않았다.
기라는 개념은 묘한 양극성을 띤다. 극히 추상적인 개념인 동시에 가장 감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형이상학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인 동시에 현상학적이고 신체적인 개념이다(136). 춘추시대의 기는 신체의 기이며 전국시대가 되면 점차 무거운 형이상학적 의미가 접혀들어갔다.
두 유형의 기 개념이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신체의 기는 결국 생명으로서 기의 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기란 무엇보다도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어 우주를 살아 있게 만드는 생명이다. 물질적 차원에선(137) 만물에 깃들어 있는 에네르기이고, 생명의 차원에서는 만물을 살아 있게 해주는 생명이며, 정신의 차원에서는 인간을 신묘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놀라운 역능이다(138).
물질로서의 기
기 개념은 전국시대가 되면 철학적 뉘앙스를 띠며 한 대에 이르러 우주론적 성격의 기 개념이 성립한다(138).
동북아 사유의 특징은 상응체계에 있다. 기, 음양, 사상, 오행, 팔괘, 십간, 십이지, 이십방위, 이십팔수 등 다양한 형태의 분절 방식이 서로서로 상응해 거대하고 복잡한 체계를 이루는 것이다(142). 동북아 우주론에서는 모든 것이 상응한다. 여기에서 세계란 나무‧불‧흙‧쇠‧물 같은 오행, 공간적인 방향성들, 별들의 움직임, 땅의 구조와 흐름, 시간의 흐름과 분절, 인체의 구조와 생성 등등 모든 것이 상응하는 거대한 체계인 것이다. 이런 숱한 형태의 상응/조응이 가능한 것은 이 모두가 궁극적으로 기의 기의 흐름과 분절, 순환과 다름없기 때문이다(143).
생명으로서의 기
생로병사가 모두 기의 조화이다(143). ‘기’ 개념은 극히 넓은 의미에서 매우 구체적인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례들을 포괄한다. 근본 원리인 기는 숱한 구체적 의미들로 분화되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기’ 개념에는 여러 의미론적 층차가 내재되어 있다. 기가 우주적 차원과 생명적 차원에서 동시에 쓰인다면, 두 차원은 불연속적으로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해되었다. 두 차원을 이어주는 개념은 기의 ‘취산(聚散)’이라는 개념이다(144).
- 『장자』 인간의 생명이란 기의 모임이다. 모임으로써 살아 있게 되고, 흩어짐으로써 죽게 된다
생명체의 차원과 무생명체의 차원이 모두 기로 되어 있으며 연속적이다. 두 차원은 구분되기보다는 기의 존재양식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며,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것은 호흡을 통해서이다. 기 개념은 그 근본에서 연속성을 통해 이해되었고 생명과 자연 일반은 통일적으로 이해되었다(145).
기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분화는 양기와 음기이지만, 실체적 양태적 구분도 아니다. 스피노자에 유비할 경우, 다양한 형태의 기들은 기라는 궁극 실체의 양태들이라 할 수 있다. 심장의 심기처럼 특정한 존재자에 특유한 기들도 있고 수기‧목기처럼 고유한 성격의 과정을 가리키는 기들도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속성에 해당하는 기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역할을 바로 음기와 양기가 맡는다고 할 수 있다(147).
생명을 기의 흐름으로 보았기에, 동북아에서는 일반적인 의미 외에도 이 기를 길러서 장생불사하려는 기법들이 다양하게 발달했다. 기의 단련, 종교적 수양, 문학적 상상 등 여러 요소가 뒤범벅되어 있다. 가징 기초적인 것은 기를 순환시키는 ‘운기’로서 신체 내의 기를 순환시켜 맑게 하고, 안팎의 사기와 싸우고, 정신을 순화시켜 신선의 경지에 오르고자 했다(150).
정신으로서의 기
동북아 철학에서 ‘정신’이란 생명의 차원에서 인문의 차원에까지 두루 걸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단순한 자연적 차원과 구분되는 형이상학적 차원을 부여받았지만, 날카로운 구분은 아니었다. 정신이란 한편으로 생명에 뿌리 두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 고유의 차원 즉 역사와 문화‧사상의 차원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151).
동북아 고전적인 세계관 형성기인 전국시대로부터 한대에 걸쳐 정신은 혈기 및 심장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해되었다. ‘心’은 장기로서의 심장과 정신으로서의 ‘마음’을 동시에 뜻하므로 이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정신을 특정한 장기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들이 이어져왔다. 정신도 흐름이지만 그것의 구조적인 분포가 있었던 것이다. 오장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 중심을 이룬 것은 핵심(153) 장부인 심장이었다. 뇌는 정신의 장소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대개 정신이란 삶의 근본 에네르기인 ‘정’과 그 신묘한 운용으로서의 ‘신’의 총화로서 이해되었다. 뇌는 ‘수(髓)골수‘의 바다로서 에네르기의 저장소로 이해되었다. 정신과 밀접히 관련 곳은 얼굴이었다. 심장은 혀, 폐장은 피부, 신장은 귀, 비장은 입, 간장은 눈에 연결되어 이해되었다. 나아가 마음이란 정확히 신체의 외연에 갇히는 무엇이 아니었다. 신체가 마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신체로써 표현되었다. 이는 지중해 세계의 점의 사유와 동북아세계 사유의 선의 사유를 드러내준다(154).
’기‘ 개념은 물질과 생명, 그리고 정신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차원을 포괄하는 근본 실체로서 이해되었다. 기의 근본 성격이 ’흐름‘에 있다면 일정한 구조를 띨수 있게 해주는 원리는(155) 음양과 오행이다.
2. 음양과 오행의 존재론
음양과 오행은 기를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해주는 기초적인 논리학/존재론이다.
음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경험에서 가장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대대항들의 전형이 음과 양이다.
음기와 양기는 오로지 둘, 음과 양만이 존(156)재한다.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대항도 아니다. 모든 양태적 구분의 상위에 존재하는 일반 개념들만은 아니다. 음과 양은 단순히 양태적 차이 위에 존재하는 상위 범주인 것이 아니라, 각각의 양태에서 그때그때 작동하는 대대항이기도 한다. 결국 둘은 항상 두 대대항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양태적 구분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구분인 것만은 분명하다.
둘은 어떤 공통점도 없는 두 실체에서의 구분이지만 항상 섞여서 작동한다.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 음기와 양기는 서로가 서로에게로 화한다. 서로가 상호적으로 타자에게로 화한다는 점에서 동적 상관성을, 더 나아가 상호 침투적인 동적 상관성을 형성한다(157).
음기와 양기는 기의 두 표현이지만 결코 실체가 아니다. 음과 양이란 기라는 실체가 표현되는 과정이 띠는 성격/경향이라고 해야 한다. 음과 양은 기 자체도 아니고 그 표현 양태도 아니며 기가 각종 양태로 표현될 때 항상 동반되는 두 성격, 경향, 방향성, 구도인 것이다. 음과 양은 섞일 수 있으며, 더 정확히 오로지 교차배어법을 구사함으로써만 잘 작동한다. 음과 양은 서로 얽힘으로써 사태 전체를 통어해가며, 나아가 서로 섞인다. 서로가 타자를 내장한다(159). 섞임은 끝없이 계속되며, ’주름‘의 논리를 구사하면서 무한히 중층적으로 작동한다.
음양의 역동적 구조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예를 남과 여의 관계에서 보자면, 남과 여가 가정을 이루어 서로서로를 보듬어주면서 통일된 하나를 이룰 때 역동적 상관성의 경지에 달한 것이다. 둘이 이분법을 넘어 남 속에 여가, 여 속에 남이 존재할 정도로 완벽한 합치를 이룬다면 이는 상호 침투적인 동적 상관성에 이른 것이다(160). 음과 양은 단순한 외연적 관계로부터 고도의 다질-강도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의 얼개를 조성한다.
역학에서의 음양은 “一陰一陽之謂道” 구절에 가장 압축적으로 들어있다. “一寒一署” “一閤一闢”은 단순히 전체의 절반으로, 외연적/집합적 논리에 입각해 이해할 수 있고 상관성에 입각한 이해도 가능하다. “剛柔相推“, ”剛柔相摩” 같은 구절은 이점을 잘 드러낸다. 1년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으로 표상할 때 음과 양은 보다 역동적인 상관성에 입각해 얽힐 수 있으며, 추위 속에도 더위가 더위 속에도 추위가 깃들어 있는 주름 구조를 생각할 때 상호 침투적인 동적 상관성에 도달하게 된다(161).
오행이란 무엇인가
한대에 이론체계로 화했다. 오행의 개념은 『서경』 「홍범」에 기자가 주 무왕에게 올린 아홉 개의 조목에 나타난다. ’물, 불, 나무, 쇠, 흙‘이다(163). 오행설은 전국시대 말 추연에게서 유래한다. 속류 유물론적 사유를 왕조의 흥상망쇠에 대한 사변을 무기로 행세했다.
5행설은 농업 중심의 일상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되었다. 오행 사이의 ’상생‧상극‘ 체계로 나아갔는데 ’목→화→토→금→수→목‘의 상생 과정과 ’목⇒토⇒수⇒화⇒금⇒목‘의 상극 과정이 확립되었다.(166).
숫자 5는 방위, 동‧서‧남‧북‧중앙이 출처이든지 춘‧하‧추‧동 계절에서 유래되었다. 방위와 오행은 서로 대응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동쪽의 나무, 남쪽의 불, 중앙의 흙, 서쪽의 쇠, 북쪽의 물’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는 오행의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는 기초적인 구도이다(167).
오행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상응시켜 설명하려는 한에서 그것은 전형적인 주술적 사고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세계에 대한 탐구를 근거로 한 것인 한, 무조건 폄하할 이유 또한 없다. 이 이론이 상대적으로 어떤 영역에서 유효한가를 물어야 하며 오행설은 인간이 신체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을 관찰해 얻은 결론이고, 그런 한에서 일상의 영역에서 일정한 유효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오행설이 비교적 높은 수준의 설명력을 가지게 된 영역이 의학 분야이다. 간장과 목, 심장과 화, 비장과 토, 폐장과 금, 신장과 수의 상응은 높은 설명력을 가지는 상응체계다(169).
오행 구조에서의 인과는 순환적이고 내재적이다. 인과가 항상 상생 과정과 상극 과정으로 순환하며 한편으로는 원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결과이기도 하다. 순환적이고 내재적이고 상호 침투적인 구도는 현실상으로는 적용이 어렵다. 그래서 기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곧 변화 즉 ‘기화’이다. 변화를 계속 따라가면서 기의 흐름을 계속 감지하면서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의 신체적 감응이 지속되어야 하며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면서 치료가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동북아 사유의 시간중심적 성격, 선을 따라가면서 이루어지는 사유, 추상보다는 구체가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특징이 잘 드러난다(170).
기학은 역학과 더불어 또 역학과 혼효하면서 동북아세계의 사상과 문화를 수놓아왔고 그것의 논리는 음양오행의 논리였다(171).
3. 기학과 동북아 사유의 전개
기학의 비중은 역학의 비중에는 미치지 못했다. 『주역』에 비견할 텍스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학은 동북아 사유의 기본 문법과도 같았다. 역학 또한 기학적 토대 위에서 논의되었던 점에서 역학보다도 더 메타적인 위상을 차지한 담론이었다.
기학과 동북아 철학사
기 개념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기‘학’이 체계적 사유가 형성된 것은 음양 개념 및 오행 개념과 결합되어 기‧음양‧오행의 사유로 확립된 때다. 전국시대와 한대에 걸친다. 전국시대의 음양가가 출발점이고 『회남자』와 『황제내경』이 결정판이다. 어떤 측면에서 교조화되기에 이른 것은 도가사상-특히 노자의 사상-과 맞물려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기학이 자연철학으로서만이 아니라 존재론의 수준에서 동북아 사유를 지배하게 된 것, 정치철학을 비롯한 다른 영역으로까지 확대 적용될 수 있었던 것은 도가적 존재론의 일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천하통일의 분위기는 각종 사상의 종합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불러왔다. 신체적 배치에서의 천하통일은 언표적 배치에서의 사상의 통일을 요청한다. 천하통일에의 열망은 곧 존재론의 요청과 맞물린다(173).
철학을 종합하려면 추상적인 틀이 필요하고 도가철학, 특히 노자철학이 전체적 틀 역할을 했다. 여기에 유가철학 또는/그리고 법가 철학이 혼효되었다. 직하학파가 그 효시였고 『순자』, 『한비자』, 『여씨춘추』가 전형적인 예이다. 한초의 『회남자』에서 종합을 이루었고 의학에서는 『황제내경』이 성립되었다.
기학과 도가철학이 일체를 이루어 ‘존재론’으로서 기능했다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영역에도 적용되었음을 시사한다. 도가-기학-유가/법가적인 종합적 틀이 천하통일 시대의 통치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는 점을 말한다(174).
한 이후 다국화시대는 도가/도교(와 불교)에 의해 주도되었다(176). 도가는 기학과 본질적인 관련성을 가졌다.(177).
노자의 존재론이 ‘도→일→이→삼→만물’의 구도를 띤다면 역학의 존재론은 ‘역-태극→양의→사상→팔괘→만물’의 구도를 띤다. 핵심은 태극을 일과 동일시할 것인가 도와 동일시할 것인가이다. 한대의 철학은 도=태극=기의 구도를 띠었고 거대 담론으로서의 자연철학의 형태를 띠었다. 위진시대에 의리학이 출현하면서 기=유 위에 도=무를 놓는 경향이 등장하면서 ‘리’ 개념에 도=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無極而太極”싹트기에 이른다. 이처럼 기 일원론적 자연철학으로부터 리기 이원론적 형이상학으로의 이행을 만들어냈으며, 이후 동북아 전통 존재론은 이 두 갈래의 사유로 전개되었다.
성리학은 기 개념은 현학과 불교의 리 개념을 받아들여, 유‧불‧도를 통합하였다. 心, 性, 情, 命, 誠, 敬 등 많은 개념들을 새롭게 규정하고 체계화해서 유교형이상학을 세웠지만, 그 근간은 리와 기 개념이었다(179).
성리학의 단초는 주돈이이며 기→음양→오행의 시계를 설명하는 구도를 가다듬었다. 기는 태극이다. 태극은 음기와 양기로서 생성하고 음양과 오행의 조화를 통해 만물이 생성한다. 이 생성은 내재적이며 만물은 태극 바깥에 있지 않다. 이를 기 일원론이라 할 수 있으나 명백한 형태를 제공한 이는 장재(장횡거)였다. 그에게 모든 것은 태허로서의 기에서 연원하며, 역으로 모든 것은 태허로 돌아간다. 정호‧정이 형제는 ‘리’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성리학을 ‘리기’구도로 개편했다. 정호는 ‘性卽氣 氣卽性’이라 해서 기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정이는 리를 중시하고 ‘소이연’이자 ‘소당연’으로 사유하는 길을 열었다. 주희는 리의 질서를 ‘본연’으로서 확고히 정립하고 리의 체계를 ‘원융’하게 파악함으로써 세계를 완벽하게 이법적(180)인 것으로 이해했다. 태극을 리로, 음양을 기로, 오행을 ‘질’로 파악했으며, 성의 문제에서는 리를 ‘본연지성’으로 기를 ‘기질지성’으로 개념화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도덕법칙으로서 이해되어오던 리 개념은 주희에 와서 확고한 존재론적 위상을 띠게 된다.
근대 세계이후 리 중심이 아닌 기학적 사유가 등장한다. 리는 기를 제압해서 이끌어가는 선험적 원리가 아니라 기 자체 내에 함축되어 있는 조리를 뜻하게 된다. 화담 서경덕, 명대 나흠순, 담약수, 왕정상에 의해 형성되어 명말청초 왕부지, 청 중기 대진, 조선 말 최한기에 의해 대성된다. 기 일원론의 흐름은 세계관과 인간관에 거대한 변화(181)를 도래시켰다. 존재론의 개념으로 승격됨으로써 세계 전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게 되었다(182).
▶ 결론
동북아 세계는 ‘작’의 세계가 아니라 ‘생’의 세계이다. 따라서 조물주 개념은 탈각된다. 역학에도 기학에도 조물주의 개념은 없다. ‘생’의 사유에서 설계도 같은 것은 없으며 기 자체에 내재해 있는 질서만이 인정된다. 기에 구현되는 선험적 질서로서의 이데아 개념 또한 없다. 기 안에 잠재해 있고 기가 특정한 물로서 개별화될 때 비로소 확인되는 내재적 질서만이 있을 뿐이다. 동북아의 존재론은 철저하게 내재적인 존재론이다(187).
액체적 사유를 구사하는 기는 무엇보다도 ‘흐름’으로서 표상된다. 이 개념은 연속적인 차이생성을 전제로 한다. 기학은 기화를 대전제로 하며, 이 ‘化’는 곧 𝑑𝑥의 운동이다(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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