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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관념의 충돌: 마르크스의 종교관 재고
E. H. 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한 광신자의 신앙으로” 자기 이론의 정확성과 자기 대의의 정당성, 그리고 그것이 만들 세계사적 변혁의 미래를 믿었다.
그로 인한 결과는 “희생자의 선택이 너무나 광범위한 나머지 그 선택의 법칙을 찾아내기도 매우 어려운 …… 광신적 불관용”이었다(p. 297).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비판에 활용되는 두 가지 광신 개념(p. 298)
1) 천국 = 광신(세속적 등가물) / 혁명을 통한 역사적 변화에 대한 천년왕국운동 혹은 예언자적 비전
2) 자본주의론과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실천은 실제 세계의 다원성과 복합성에 차가운 관념 강요
작가의 의도
1) 위의 비판들과는 반대로 마르크스가 정치와 종교 간의 현재적 관계를 재사유하는 데 긴요한 공헌을 할 수 있는 입장을 어떻게 구축하는지 점검
2) 보편성과 관념의 정치적·사회적 역학과 긴밀히 얽혀 있는 현상인 광신에서 몇 가지 끌어내기
마르크스와 파국적 근대성의 재마법화
사회 변화와 정치적 동원의 요소로서 종교에 대한 오늘날의 연구에서 마르크스는 아무리 잘해 봐야 주변적 참조에 그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죽은 개” 취급을 받는다.
마르크스주의적 ‘대서사’에 반대하는 종교사회학의 복수
- “종교는 인민의 아편”
- 이란혁명,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 남미 해방신학
- 프롤레타리아의 ‘실제적 무신론’을 사회적 기정사실로 여겼던 혁명적 실천 이론을 당황스럽게 함
근대성의 ‘탈마법화’ |
→ |
인간 해방의 기획의 등장과 퇴장(20세기 초 사회주의, 아나키즘) |
→ |
파국적 근대성의 재마법화(인민주의적 이슬람교, 오순절파 기독교) |
덜 의미 있는 일 |
마르크스주의의 미덕 재진술 |
더 의미 있는 일 |
마르크스에 대한 묵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P. 301) 종교적 현상의 설명 및 자본주의사회의 소위 세속화에 관한 질문 종교-정치적 신념이 가진 주관적 요소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것(신념의 원동력) |
효과 |
-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문제들의 다채로움을 일부나마 회복 - 우리의 공적·학문적 담론을 지배해 온 종교, 사회, 정치에 대한 수많은 진부한 문구들 중 몇몇을 제거하는 데 있어 겉보기에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의 사유를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름. |
“속물과 통속적 경제학자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 사물들의 내적 연관성이 아닌, 자기 뇌에 반영된, 직접적 형태로 현시되는 관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네. 그런데 만약 이런 식의 상황이라면 과학은 무엇에 필요하단 말인가(P. 302)?”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자연주의와 무신론이라는 철학적 유산을 재긍정함으로써 종교로의 정치적 회귀를 설명하거나 지지하려고 하는 최근의 글들 중 다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내적 연관성을 보지 못하는 이 속물절 근시안이라는 점을 덧붙일 수 있다.
독일 및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이 시기(마르크스의 저작들 중 정치와 종교의 고리에 대한 지속적 글이 등장했던 유일한 시기인 1840년대)가 어떤 지적 개입을 했는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후 마르크스 작업의 전개에서 종교 문제가 어떤 모습으로 호명되고 변형되는 방식을 점검하는 데 필수적인 지침을 얻을 수 있다.
지상의 비판
마르크스의 입장은 종교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p. 303).
마르크스가 사려 깊게 언급하듯이, 종교를 세속화하고 철학적 논의에 노출시키는 것은 국가의 대리자들이 반신권정치의 맥락 속에서 정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이다. “만약당신이 종교를 법 이론으로 설명한다면, 당신은 종교 자체를 철학의 일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p. 304).”
종교가 신에게로 투사했거나 “소외시킨” 인류의 근본적인 감각적·지적 역량(혹은 유적 존재)에 대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재전유는 마르크스의 사유가 시작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p. 305).
포이어바흐는 … 신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징발을 종교의 폭력적인 비이성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에 연결시킨 바 있다.
포이어바하의 불관용적 당파성을 가진 기독교 비판:
“종교는 인간이 그 자신의 본성과 맺는 관계다. 여기에 종교의 진리, 그리고 도덕적 개선이라는 종교의 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종교를] 자신의 본성으로 인식하지 않으며, 자신의 본성과는 분리되고 오히려 반대되는 것으로 여긴다. 여기에 종교의 비진리, 종교의 한계, 이성 및 도덕에 대한 종교의 모순이 있으며, 여기에 피비린내 나는 인간 희생의 주요한 형이상학적 원칙이 들어 있다.”
마르크스는 보편성과 자의식에 종교적 믿음이 끼치는 해로운 영향에 대한 브루노 바우어의 혹독한 반유신론적 비판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그렇긴 하지만,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들은 종교에 대한 공격이 필요하나 인간 이성의 해방을 성취하는 데는 불충분하거나 빗겨나갔음을 인식하였다. 무신론적 비판은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중심성을 과대평가하면서 국가의 세속화를 자체의 목적으로 삼는다.(p. 306).
‘천상의 비판에서 지상의 비판으로’
마르크스의 철학적 활동이 가져온 결과는 정치적·경제적 비판을 기독교에 대한 좌파 헤겔주의자들의 열렬한 관심과 분리시키고, 비판에 세속적 담론의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비판의 대상이 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 및 권위에 비판이 얽매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p. 306).
“비종교적 비판”
“종교의 틀로 정치적 조건을 [비판하는 대신] 정치적 조건의 틀로 종교를 비판해야만 합니다. …… 왜냐하면 종교는 본질적으로 내용이 없으며, 자신의 존재를 천상이 아닌 지상에 빚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혁명의 부수적 결과로써 종교가 “말라 죽을 것”
하지만 단순한 망상 혹은 음모로 종교를 표상하는 특정한 계몽주의 유물론에 반대하면서, 마르크스는 비록 자신의 전투적 무신론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의식의 형식이자 집단적 삶의 지배적 원칙으로서의 종교, 곧 우리가 종교의 사회적 필요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긍정하고 있다(p. 307).
마르크스의 종교에 관한 유물론적 인간주의의 한계 언급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자기소외라는 사실, 즉 세계가 종교적 상상의 세계와 세속적 세계로 이중화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것의 세속적 기초로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이 작업을 완성한 이후에도 중요한 것이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세속적 기초가 그 자신으로부터 이탈해 구름 속에서 하나의 자립적 영역으로 고착된다는 사실은 이 세속적 기초의 내적 갈등 및 내재적 모순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청년 헤겔주의자들의 종교 비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p. 308):
1) 관념의 사회적 논리에 대한 정교화
2) 관념의 지배가 제거되기 위한 실제적 기반으로서의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
종교적 관념의 지속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그 관념이 기입되어 있는 사회적 역학 및 그 관념이 의지하고 있는 기존의 생산 양식과 사회적 교류 양식을 조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지양은 인민의 현실적 행복을 위한 요구이다. 그들의 상태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p. 309).”
반종교적 투쟁이 진정한 정치적 투쟁의 우회로 혹은 은폐물일 수도 있다는 믿음: 마르크스는 무신론과 계몽주의의 목표가 의식적 혹은 단순한 교육학적 문제로서의 무신론 및 이성에 대한 노골적인 긍정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마르크스가 종교 비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통해 종교 비판의 작동 양식과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넓게 보아 칸트적인 의미의 ‘비판’ ― 단순한 비평이 아닌 사유의 형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밝혀낸다는 점에서 ― 에 속한다(p. 310).
청년 헤겔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비판은 종교적 표상을 생산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묻는데, 이는 이런 조건 자체가 어떻게 변형될 수 있을 것인지를 묻기 위함이다.
마르크스에게 “관념론자의 사유와 이상에 맞서는 싸움”으로서 종교적 지배에 대한 투쟁이라는 비전은 종교를 내적 조건을 통해서만 바라볼 뿐만 아니라, 관념의 생산(과 관념에 의한 지배)의 현실적 조건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초월에 맞서는 포괄적 싸움에 그쳐 버린 소위 급진적 사유가 다다른 난국의 전형이다(p. 310-311).
『자본』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무신론 자체는 권력 당국을 도발할 역량이라는 관점에서도 더 이상 전위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p. 312).
종교의 정치학과 사회학에 관한 오늘날의 논쟁들에 말을 거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유중 다음 세 가지 측면이다.
1) 종교의 사회적 설명
2) 종교-정치적 주체성의 본질, 그리고 세속화의 과정과 세속주의의 정치학
역사 없는 것의 역사
종교적 현상의 필수품이며 특징인 ‘객관적 환상’을 조건 짓는 실제 사회적 과정을 파악하지 못한 채 신학의 영역 내에 머물러 있는 반유신론적 비판의 오류는 마르크스가 계몽주의 전통의 결점으로 여겼던 것의 본질이기도 하다(p. 313).
종교의 이질성은 그것의 원인을 성직자들의 음모나 심리적 망상에 돌린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단순한 교육학을 통해 치료될 수도 없다.
“자유로운 시민들이 경험하는 세속적 규제로부터 그들에 대한 종교적 규제를” 끌어내고, “신학적 질문을 세속적 질문으로” 바꾸며, “미신을 역사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우리는 국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금껏 존재했던 생산양식 및 교류 양식 전체”의 관점에서 이해된 “세속적 기초”의 “내적 갈등과 내재적 모순”을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p. 315).
종교적 현상의 독립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연속선상에 있긴 하나, 『독일 이데올로기』의 논쟁적 과녁들(포이어바흐, 바우어, 스티르너)을 넘어서는 『자본』은 유물론적 종교사의 가능성을 연다(p. 317).
『자본』의 표현에 의하면, “중세에 사람들이 카톨릭교에 의해서 생활할 수 없었을 것은 물론 고대 세계에서도 사람들이 정치에 의해 생활할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반대로 이들 세계가 그 생활 수단을 획득한 방식이야말로 왜 후자에서는 정치가, 전자에서는 카톨릭교가 주역을 담당했는지를 설명해준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 표상의 환상적 자율성과 분리를 물질적 기초에 연결시키는 문제가 아닐, 특정한 종교적 형식이라는 ‘환영’ 및 ‘승화물’이 사회-역사적으로 [왜] 필요했고,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를 보여주는 문제이다.
『자본』 중 상품에 관한 장
“상품 생산자 사회의 일반적인 사회적 생산 관계는 생산물을 상품으로, 즉 가치로 취급함으로써 그들의 개별적 노동을 동질의 인간 노동으로 환원시키는 데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추상적인 인간을 숭배하는 기독교, 특히 그것이 부르주아적으로 발전한 형태인 프로테스탄트나 이신론 따위가 가장 알맞은 종교 형태이다(p. 319).
마르크스의 저작에 담긴 정보들은 상품 생산하에서의 가치형태에 의해 달성된 명백한 자율성과 추상이 특히 기독교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점을 암시해주고 있다(p. 320).
“자본주의 생산의 발전은 부르주아 사회의 평균적 단계를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완전히 다양한 사람들이 가진 기질 및 성향의 평균적 단계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기독교만큼이나 진정 세계적이다. 기독교와 자본주의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관념적인 인간이다. 관념적 인간 하나는 다른 관념적 인간과 동일한 만큼만 가치가 있다. 한 경우에 그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면, 다른 경우에 그가 신용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한 경우에 예정설이 추가되어야 하는 것처럼, 다른 경우에는 그가 우연히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는지의 여부가 덧붙여져야 한다(p. 321).
“현실 세계의 종교적 반영은 모름지기 실제의 일상생활 관계가 인간들 상호간이나 인간과 자연 간의 합리적인 관계를 매일매일 투명하게 나타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소멸될 수 있다(322).
저항, 고통, 그리고 세속적인 것의 한계
(바디우, 네그리, 지젝 등의 글에서 나타나는) 전투적인 정치 주체의 종교적 기반에 대한 최근의 이론적 몰두에 비추어 볼 때, 마르크스는 종교적 주체의 정치적 원천들에 관해 ― 조직화된 종교와 제도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설명을 넘어 ―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좀 더 일반적으로, 우리는 종교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구조적’ 연구를 믿음, 열정, 행위라는 문제와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을까?
종교의 진보적 정치화에 관한 마르크스의 관점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해 암울한 편이며, 그의 “기독교에 대한 …… 특유의 혐오”에 단순히 기초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p. 324).
마르크스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창출하려 했던 당대의 많은 정치적 인물들의 시도에 경멸을 퍼붓는다(p. 325).
심지어 포이어바흐에 대한 철학적 충성을 저버리기 전에도 마르크스는 이미 “기독교적 사랑을 인류애로 바꿀 가능성”을 거부했었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관념적 가치, 그리고 “동일 가치” 간의 상품 교환에 딱 “들어맞는” 상부 구조적 상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껏해야 자본주의에 맞서는 취약한 무기이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무화가 나뭇잎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 누구보다 먼저 교회와 국가를 분리했던 것은 기독교 아니었는가?” “당신들의 실질적 삶은 당신들의 이론이 거짓이라는 점을 매 순간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당신들은 사기를 당했을 때 법정에 호소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사도[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쓰고 있다(p. 326-327).
후기 마르크스의 정치적 여정에서 종교적 성격을 결여하고 신민들의 종교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세속적 국가 개념은 더 이상 비판과 해방의 목표로 비쳐지지 않으며, 단지 자본주의와 나아가 자유주의의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그러나 불충분한 “과도기적 요구”로 여겨진다.
“바우어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들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신들은 정치적 해방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역으로 이렇게 묻는다. 정치적 해방의 입장은 과연 유대인에게서 유대교를 철폐하라고, 인간에게서 종교를 철폐하라고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p. 328)?
마르크스에게 종교의 존속이란, 그것이 설명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해방과 인간 해방 간의, 국가의 세속화와 사회적 해방 간의 구별을 필요로 하는 증상이다. 그런 이유로“종교적 약점”의 비판은 그것이 속한 영역[종교] 속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국가의 비판‘을 통해서 수행되어야 한다(p. 329).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설명에 따르면 정치적 해방 속에서 종교는 (미국의 경우에 그렇듯이) 존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 번성하게 되는데, 이는 “국가 종교로부터 그 자신을 해방”하는 것은, 또 같은 맥락에서 사적 종교와 사적 이해의 지속을 용납하고, 또 실제로 양성하는 시민사회 자체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국가이기 때문이다(p. 330).
“완성된 정치적 국가는 그 본질상 인간의 물질적 삶과 대립해 있는 인간의 유적 삶이다. …… 정치적 국가가 자신의 진정한 발전 형태에 도달한 곳에서는 인간이 사상과 의식 속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천상의 삶과 지상의 삶이라는 이중의 삶을 살아간다.”
유사 헤겔적인 방식으로 마르크스는 민주주의적 세속 국가의 등장이 가진 엄청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정치적 신학 비판에서 국가-형식 자체에 대한 정치적 비판으로의 변화를 옹호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 속에서 절정을 맞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관념 형식의 운반물로 자유주의를 묘사함으로써 의심스런 “세속적 현상과 신학적 현상의 은유적 동일시”에 굴복하는 것일까?
일상생활의 종교
마르크스가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초감각적이기도 한 물적 존재 또는 사회적인 물적 존재”인 상품의 오묘한 존재론을 탐구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유사한 예를 찾기 위해 종교적인 세계의 신비경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여기에서는 인간 두뇌의 산물들이 독자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그들[산물들] 간에 또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자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p. 332-333).
보통의 심리학적 이해로는 파악하기 힘든 축적에의 충동에 사로잡힌 자본가의 주체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마르크스는 외양상 자율적인 관념에 의해 사회적 삶과 그것의 실재적인 관계가 지배받는다는 관점으로 『자본』에서 광신 개념을 수용한다(p. 334).
자본주의적 광신은 개인의 정신을 넘어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율” 속에 놓여있다. 도덕적 선택보다는 강박적 의식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것은 유사 종교적인 광신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자본의 종교』, 폴 라파르그, 마르크스의 사위
“그렇다면 이제 이 시기에 필요에 답하는 유일한 종교는 자본의 종교입니다. …… 자본이야 말로 진정하고 유일하며 전능한 신입니다.”
자본주의적 주체는 그 무조건적인 성향으로 인해 쉽사리 광신적이라고 인지되는 어떤 비인격적 충동의 인격화인 반면, 근본주의적 주체는 신앙의 시련보다는 과학의 확실성을 본보기 삼아 만들어진 “객관적” 진리에 의지하는 신념의 한 형식을 자신의 가장 광신적 행동을 통해 드러낸다(p. 33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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