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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목표

1) 이슬람교의, 나아가 일반적인종교의 질병, 궁지, 불만을 추정하는 정신분석적 진단 너머에 있는 게 무엇인지 탐구(p. 261)

2) 정신분석의 주체가 어떻게 해서 자유-민주주의(혹은 알랭 바디우의 용어를 빌면 자본-의회주의) 국가의 제도 및 이상과 일치하는 규범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 질문(p. 262)

3) 정신분석과 철학 담론이 우리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공간을 유해한 방식으로 구조화하는 판타지들을 단순히 되풀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정치, 종교, 주체성 사이의 관계를 서술할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 생각(p. 263)

 

유일자의 광신

역사철학종교철학에서 마호메트교도를 개념적으로 배치한 헤겔은 광신의 주체성이라는 특정한 주체성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정치화된 종교로 이슬람을 인식하는 최초의 길을 텃다고 볼 수 있다(p. 264)

 

우리는 광신 개념이, 맹렬히 불관용적인 종교적 의식으로서의 계몽주의적 표상에서부터 헤겔주의적 도식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변화를 거쳤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헤겔에게서 광신은 특정한 신앙과 실천의 집합을 비합리적이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강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록 파괴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보편성의 양식이라는 관점에서도 서술된다.

 

이슬람교는 모든 특수성과 의존관계를 파괴하고 영혼과 성향을 완벽하게 청소하고 정화함으로써 추상적 유일자를 집중과 헌신의 절대적 대상으로 삼으며, 마찬가지로 순수한 주관적 의식 오직 이 유일자에 대한 지식 을 현실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 즉 무조건적인 것이 존재의 조건이 된다(역사철학, p. 365).

 

이슬람교에 대한 헤겔의 묘사

추상적 사유의 고등한 지점

세계의 모든 다층성을 넘어서는 단 하나의 무한한 권력을 향한 영적 고양을 명령

민족-국가적 특수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보편화하는 특수성의 발현(p. 266)

너무 멀리나간 보편주의

 

모든 특수성에 병행하는 유일자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주체성을 흡수(하고 무화)한다.

이 헤겔식 표상 속에서 이슬람교의 주체는 어떤 특징도 속성도 갖고 있지 않다.

 

이슬람교를 유일자의 종교로 묘사함으로써 헤겔은 유럽 오리엔탈리즘의 표준적 수사들을 반복하는 대신 재서술할 수 있었으니, 즉 이슬람교가 기본적으로 팽창주의적인 것(그리고 그 호저적인 주체들이 그토록 영웅주의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보편성 때문이며, 이슬람교의 사회 협약이 가진 비실체적이고 비유기적인성격으로 인해 그들 사회는 쉽게 정체하고 퇴화한다.(그리고 유일자를 향한 정열이 필연적으로 시들자마자 그 주체들이 무절제한 관능과 육욕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p. 267).

 

관념은 마호메트교도의 정신을 뒤흔든다. 그들의 목표는 관념적 숭배를 확립하는 것이었고, 그들은 최대한 열광적으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 싸웠다. 이 열정이 광신, 즉 관념적인 어떤 것, 기존 사물의 질서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지탱해 주는 관념적 생각에 대한 열정이다. 이것이 구체적인 것에 대해 오직 음울하고 파괴적인 관계만을 맺는 광신의 본질이다(철학의 역사, p. 358).

 

한 의미심장한 구절에서 우리는 이슬람교의 관념적 광신이 프랑스혁명 당시 공포정치의 관념적 평등주의와 동형으로서 제시되는 것을 본다(p. 268).

 

이슬람교의 원리에는 단지 신에 대한 두려움만 있다. 신은 유일자로 숭배되어야만 하기에, 이 관념 너머로는 진전할 수가 없다. 이슬람교는 그리하여 형식론, 그 형식에 반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다른 형식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완벽한 형식론의 종교다. 프랑스혁명에서도 역시 자유와 평등[이라는 관념]이 너무나 공언된 나머지 모든 영성, 모든 법, 모든 능력, 모든 삶의 관계가 이 관념 앞에서 사라져야만 했기에, 공공질서와 공공 구조를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와서 이 관념에 맞서 강제로 행사해야만 했다. 관념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이들은 어떤 명확한 것의 등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들의 관념과 대비되는 구체적이고 뚜렷한 것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종교철학, p. 218).

 

국가를 무시하면서까지

헤겔의 역사철학 관점, 특히 프랑스혁명에 대한 그의 이해로부터 우리는 필수적이고 정당한 광신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게 되는데, 이 광신의 파괴적이고 관념적인 힘이 어쩌면 근대화의 동인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법철학에 따르면, 정신의 역사적 모험에서 광신은 (근대국가에서) 더 이상 공격적이긴 해도 필수적인 어떤 계기로 제시되고 있지 않다. 이제 이 책에서 절대적 진리와 합리성을 넘어 옳음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광신은 국가를 뒤집을 수도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p. 269-270).

 

광신은 어떤 종교 공동체가 국가를 무시하면서까지, (표상적으로 고안된) 자신의 원리에 객관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는 법에 대한 증오이자 합법적으로 확정된 옳음에 대한 증오이다(p. 271).

 

헤겔이 광신과 근대국가의 세속적 기초를 병치하는 데서 드러나는 독특함은 이것이 (가령 볼테르의 관용론에서 그렇듯) 단순히 종교적 배타주의가 야기한 갈등에 맞서 사회를 방어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 병치의] 핵심은 종교적 의식이 자신에게 배정된 고유한 종속적인 위치를 거부하자마자 경쟁 관계로 들어가는 보편성들 사이의 철학적 갈등이다(p. 271).

 

법의 객관성과 사회의 분화가 종교적 의식을 능가함으로써 그것을 세속적 정치체 내로 흡수하는 근대국가에서, “논쟁적 경건함이라는 모습을 한 광신은 광신적 주체와 광신적 종교 공동체에 공히 귀속된 하나의 질병으로 나타난다. 이런 광신이 국가에 대한 도전인 한, “종교적 광신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속성을 가지게 된다. 실로 분명한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광신이다.”(p. 272)

 

이슬람교를 철저히 정치적인, 그 결과 팽창주의적인 종교로 개념화함으로써, 역사 및 종교철학에서 광신에 대한 헤겔의 논의는 유일자의 종교가 유일자의 정치가 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국가의 임무에는 종교적 주체 및 공동체가 법의 객관성과 신앙의 한계를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도록 교육하는 것 역시 포함된다(p. 272).

 

테러리스트, 도착자, 정신병자

이슬람교의 자기 파괴적이고 묵시록적인 성향에 대한 브루노 에티엔의 저작은 호전적 정치의 새로운 비정상적 인물들이 가진 내적 결정 요인의 핵심으로 광신에 초점을 맞춘다(p. 273)

 

에티엔은 이렇게 쓰고 있다. “정화 행위로서의 살인을 수행함으로써 다름을 제거하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신자]가 모든 면에서 공격받고 있음을 함축한다. 이 편집광적 폐쇄성은 자아의 모든 이상이 이상적이고 상상적이며 이슬람교의 절대적 단일성으로 결속된 우리와 혼동되는 데서 기인한다. 신의 유일성이 움마의 유일성을 낳음으로 인해 이 둘이 유일자로 융합되는 것을 뜻하는 타우히드는 바로 이 절대적 단일성의 원리다(p. 273-274).”

 

파나는 유일자 안에서의 소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광신자는 집, 즉 단일성의 사원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다. 광신자는 진리이고 이 진리는 하나다. 그것은 그에게 생명을 주고, 그를 선동하며, 그를 무장시킨다. 그는 의심 속에서 진리를 구하거나, 구성하거나, 발견하거나, 방황할 필요가 없다. 그는 지연되거나 교체되는 법 없이 즉각적으로 확실성을 즐기는데, 이 확실성이 그에게 완벽히 깃들어 그를 사로잡음으로써 앞으로 전진하게 만든다. 폭력적으로, 함께 모인 광신자들은 자신들만이 이 모든-참된 것, 이 유일자의 조직된 종이자 도구라고 믿는다. 그들은 이점을 무시하는 이들을 증오하며, 우주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유일자의 법 앞에 온 세계가 몸을 굽히기를 원한다.

 

에티엔은 정신분석적 설명이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신학적 개념인 파나’, 특히 (테러리즘의) 행동으로 향하는 광신의 여정을 임상적으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 죽음충동 개념을 활용한다. “죽음 충동은 표상의 억제력이 모자라 흘러나온 에너지의 과도함에서 기인한다. 흥분의 과도함은 파열로 나아간다. 곧 행위자 혹은 대리자는 자신의 욕망을 비워 낸다. 이제 그는 전쟁 신경증을 배출하는 해방운동이 작동하는 객체가 된다(p. 275).

 

에너지의 과잉과 표상적 억제를 병치시킴으로써 에티엔은 고전적인 광신자의 형상 어떤 상징적·상상적 목록과의 특정한 관련성이 아닌 (종교적 교리와 시민사회, 성과 속, 자신과 타자 간의 차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된, 파괴적인 균질화의 열정이라는 특징을 갖는 형상 속에서 정치-종교적 반란, 폭력, 테러리즘 분석의 근거를 찾아낸다(p. 276).

 

지젝은 부예리의 초광신적인 선언 토의도, 시위도, 청원도 필요 없다. 오직 죽음만이 거짓으로부터 진리를 구별해 낼 것이다이면에, 분열을 타자에게 전치시키는 도착증자의 전술이 작동하고 있음을 본다. “도착증자는 (신이나 역사에서의 상대방의 욕망에 이르는) 대타자의 어떤 형상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언어가 가진 모든 모호함을 일소해 버리고 직접 대타자의 의지를 직접 수행하는 도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p. 277).”

 

분열의 거부가 나름의 방식으로 대타자에 의해 매개된다는 점은 융합적 광신이라는 가설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도착증자가 가진 지식의 외재화 역시 자신의 신념에 흡수된 광신자 라는 일반적 관점을 지지할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p. 278).

 

기독교적 표준

기독교 서양의 세속적인 특수한 길을 수반하는 심리적으로 어떤 특수한 길’, 그래서 정신분석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경로의 내재성 및 이슬람적 주체와 맺는 차별적인 (또는 규범적이기까지 한) 관계를 인식하도록 만드는 그런 길이 있을 것인가(p. 280)?

 

정신분석적 주체를 세속화하고 정신분석을 세속적 진료소로 전환하는 일, 즉 완고한 문화[이슬람 문화]가 탈마법화된 서양 문화에 흡수되는 정치적 보상을 취득하게 될 이 움직임이 가진 과정은 무엇인가?

 

유물론 신하과 바울주의적 호전성에 대한 몇 차례의 분석을 통해서, 지젝은 우리가 블로흐를 따라 기독교 내의 무신론과 무신론 내의 기독교라고 부를 법한 것을, 예컨대 바디우류의 학자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재진술하면서 옹호하고 있다. 기독교의 비도착증적 핵심에 대한 논쟁적 탐구 대타자의 부재에 기초한 윤리-정치적 주체성을 위한 암호로서의 기독교 를 통해 지젝은 특이한 보편성의 관점에서 정치적 주체에 관한 이론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p. 280-281).

 

지젝 자신이 언급하듯, 이슬람교는 성가신 시대착오성 어긋난성격으로 인해 목적론에 경도된 종교 역사가에게 골칫거리를 안겨 준다.

 

지젝은 그가 지금까지 유대교 및 기독교와 더불어 반복적으로 실행했던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사회학적인 것과는 반대되는) 일종의 철학적 대면을 이슬람교와는 아직껏 할 수 없었거나 혹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슬람교는 연속성에서 어긋나 있는 것, 즉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은 것을 통합하는 다시 말해 고유한 영역 속으로 분화하는 삼위일체 기독교와 국가의 능력을 무시하고, 그로 인해 정치적 권위와 사회적 힘이 세속화되는 길을 봉쇄해 버리는 어떤 변칙적이고 과도한 보편주의로 여겨진다.

 

프로이트로의 귀환

기독교 세속주의를 역사적이고 심리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면에서 정치와 문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사유를 방해한다. 이런 행위는 종교 텍스트 자체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판타지들을 전제로 하여 무슬림개인의 심리적 동요와 정치적 어려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추정함으로써 무의식을 윤리화하고 문화화 한다(p. 285).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개인적이지도 집단적이지도 않다. 개인적 무의식이 사회 구조에서 비롯한 것인 반면, 집단적 무의식은 규정된 집합체, 즉 그 무의식이 속하는 공동체를 요구하지만 이미 주어진 그런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격파들과 공론가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신학적으로 합치하는 일이자 경전과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종교를 내세우곤 한다는 그 사실로 인해 비평가들과 학자들마저 똑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p. 286).

 

이런 역사-정치적 맥락에서는 신학적 서사들을 개인-정치적 무의식 속에 즉각적으로 현시되는 것으로 바라보기보다, 명백히 정치적인 심리적 형식들의 힘과 영향을 고찰하는 편이 훨씬 유용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이 문명주의적 혹은 문화주의적 사유의 오류를 연장하는 대신, 우리의 정치적 사고를 구축하는 판타지들에 대해 심오하게 변증법적이며 역사적으로 예리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알랭 그로리샤르의 술탄의 궁전이 가진 가치는 매우 크다.

 

그로리샤르에게 있어, 정신분석에 기반을 둔 이데올로기 비판의 대상은 타자의 ()정치에 대한 판타지가 우리의 정치학을 구조화하는 방식, 타자가 믿는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믿지 않음을 믿게 만드는 방식이다(p. 287)

 

정치·문화·종교가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곳을 탐구해 들어가려 할 때, 판타지라는 범주를 가지고 작동하는 정신분석 비평은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판타지가 언제나 타자의 믿음에 대한 판타지이자 사실은 타자의 판타지에 대한 판타지라는 원칙에 기초해야만 한다(p. 287-288).

 

정치적 판타지들에 관한 연구는 타자(그리고 타자의 부재)와의 관계가 우리의 취약한 동일시를 어떻게 구조화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로리샤르와 돌라르가 제기하는, 판타지에 대한 관계-정치적 접근은 강력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반면, 신학적 텍스트나 신화에 관한 연구를 통해 우리가 타자의 집단적인 정치적 무의식을 통찰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게 하는 표현-문명적 모델은 그렇지 못하며, 오히려 자율과 관대함이라는 자기 충족적 정치 판타지를 단순히 강화할 뿐인 또 다른 신화들을 생산해 낼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사이드는 무신론, 관용, 자유주의 등 우리의’ (기독교적) 유산에 대해 거드름을 피울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집착적이고 세속적인 역사철학에는 문을 열어두지 않는 인간주의적 세속주의에 대한 옹호를 제안했다(p. 289).

 

어떤 판타지 혹은 신화 묶음이 다른 묶음에 비해 우월함을 다소 은밀히 옹호하는 문화주의 담론의 편안함에 맞서, 인간의 무력함에 응답하면서 인류 문명 과정을 구축하는 종교적 환상들에 대한 프로이트의 묘사는 이니자르가 공격하는 기독교적 종교 관념 및 이 관념을 떠받치는 변명조의 기독교 세속화 서사로부터 건전히 거리를 두고 있다.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적절한 거리나 구별에 초점을 맞추는 많은 세속주의 담론과는 달리, 프로이트의 급진적이고 탈마법화된 계몽주의적 관점은 인류를 환상에서 해방시킬 가능성에 집중한다(p. 289-290).

 

프로이트의 일반적 종교 범주 사용은 언제나 어떤 종교가 더 좋고, 더 해방되었고, 더 문명화되었는지, 혹은 기독교에 대한 헤겔의 표현을 쓰자면, 정점에 달했는지를 선택하는 행위를 내포하고 있는 문화주의적 종교 담론의 편협함과 결별하는데 있어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만약 정신분석 방법론이 무신론적이고 과학적이라면, 정신분석은 기독교의 끝없는 세속화라든가 혹은 먼 나라 사람들의 표현물로 가정되는 문화-종교적 판타지에 관한 탈정치적 연구 등을 위한 매체 역할을 해서는 안된다. 대리로 믿는 것 타자의 믿음을, 타자의 광신을 믿는 것 이 우리의 환상에 맞서는 고된 투쟁을 대체하지는 않는다(p. 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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