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6장 냉전과 메시아: 정치 종교에 대해
세속적 비평가 |
종교적 논평가 |
그가 종교적(따라서 비합리적) 행동방식이라고 여기는 절대적 무조건성과 무매개적 관념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 행위 어디에나 광신의 혐의를 둠. |
근대 세계의 위험한 세속화에서, 진정한 신앙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알려진 오만한 주장들을 불러일으키는 허무주의에서 광신의 원천을 발견. |
양립할 수 없을 두 반광신적 형식들을 연합하게 만드는 공통의 적: - 이탈리아 파시즘, 독일 나치즘, 소련 공산주의와 같은 20세기 ‘전체주의적’ 운동들 - 세속 종교 혹은 정치 종교 |
20세기의 이슬람
전체주의의 급진적 새로움: 종교를 대체하려 함(p. 344-345)
- 세속화, 숙의적, 자유주의적인 정치 영역에 신념의 형식과 종교적인 행동 도입
- 영적 내면성 침범: 신앙과 성스러운 권위를 축출하려 했던 마키아벨리적 혹은 홉스적 단절이 반대로 위협
- 열정, 운동의 조직 형태, 운동의 궁극적 목표에서 종교적 요소 발견
러시아 공산주의에 의해 추동된 종교적 에너지의 변환:(니콜라이 베르댜예프)
1920년의 버트런드 러셀은 볼셰비키주의라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혼합물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특징과 이슬람교 부흥의 특징”이 결합되었다고 썼다(p. 347).
실용적이고, 사회적이고, 비정신적(?)이며, 세계의 제국을 획득하는데 관심이 있음(개인 종교인 불교, 기독교와 대비).
엘리 알레비: 사상의 국유화, 열정의 조직화
케인스: 레닌주의를 “열성과 불관용”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로 판단, 레닌은 마호메트적 인물
모네로: 공산주의는 “20세기의 이슬람교”
보편적 원칙으로 보편적 상태에 참여하려 하지만, 국가성의 극복이라는 이들의 공통점은 둘 모두가 경계에 아랑곳 하지 않는 운동임을 의미, 따라서 지구 전체에 위협적.
카를 바르트: “국가 사회주의가 사실은 새로운 이슬람교라는, 즉 그 신화는 새로운 알라이고, 히틀러는 새로운 알라의 선지자라는 점을 보지 못한다면 국가사회주의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p. 348).”
정치 종교 테제의 타당성과 한계가 무엇이든 간에, 이 논의가 가진 끈질김은 행위와 숙의에 대한 합리적 기준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정치적 신념의 형식으로 이해된 광신의 위협에 우리가 끊임없이 집착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p. 349).
정치종교의 광신적 특성
관념을 향한 열정(공산주의의 경우 경계없는 보편성)
고삐 풀린 총체성으로의 어떤 추동력
급진적인 조직적 통일성(당, 운동, 국가)
작가(알베르토 토스카노)는 정치 종교에 관한 각기 다른 관점들을 살펴봄으로써 인류학과 역사의 이런 얽히고설킨 관계를 탐구하고자 한다. 특히, 앞서의 광신 담론과의 연장선상에서, 정치 종교라는 개념이 모든 종류의 신념의 정치를 광신적 종교성의 대체 효과로 여기면서 페기시키는 데 기여하는 방식을 살펴보려고 한다(p. 350).
오늘날 종교로서의 정치에 관한 관점들이 부활
1) 존 그레이:
- 근대 정치는 종교사의 한 장일 뿐이다.
- 신자유주의, 볼셰비키주의, 이슬람 테러리즘, 신보수주의-민주주의적 전쟁도발 모두 정치 종교로 봄.
2) 콘
종교적 내용을 운반하는 수단으로서의 세속적 형식이라는 이론 제시
중세의 잉여 인구와 묵시록 선지자들의 결합이 소련 공산주의와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어두운 선지자
“지상에서의 집단적인” 구원을 갈구하는, 경계가 없으며 개혁을 넘어선 정치를 구현하려는 폭력적 대중운동들을 포괄하는 혁명적 광신이라는 초역사적 개념이 그 결과
광신적 조직의 동일한 패턴: 예언적 비전이 추종자 집단 형성 – 묵시록적 환상에 사로잡혀있으며 자기 무오류성의 확신으로 충만한 이 부단히 역동적이고 철저히 무자비한 집단은 자신을 인류 전체보다 더 고귀한 것으로 설정하고서는 자신의 사명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제외한 어떤 주장에도 귀 기울이는 법이 없다.
그레이가 “현대의 혁명운동들은 다른 수단을 통한 종교의 연장”이라고 쓸 때, 그 기저에 깔린 가정
절대적 확실성이라는 특징을 가진, … 호전적 현상들을 무차별적으로 가로지르는, ‘종교’라는 이름의 기본적으로 정동적이고 인류학적인 충동 혹은 기능이 존재(p. 353).
구스타프 르봉의 종교성의 일반 정의
어떤 대의 혹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목표와 길잡이가 되는 개인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신적 자원을 퍼붓고, 자신의 의지를 그에 완전히 종속시키고, 영혼 전체를 광신의 열정에 쏟아 넣을 때 비로소 종교적인 것이다. 불관용과 광신은 종교적 감정의 필연적 동반물이다.
J.L 텔먼
뮌처보다 루소를 더 악당으로 여김
현대의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라 부르는 것의 기원을 18세기 철학의 “정치적 메시아주의” 및 합리적으로 접근 가능한 자연 질서에 기반을 둔 평등 사회를 현세에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찾고 있음(p. 354).
민주주의적이면서 전체주의적인 메시아주의를 도드라지게 하는 것은 예지적 환각이나 신성에의 도취가 아닌, 합리적 사회에 대한 이해 가능성과 그것의 실행 가능성에 대한 확신.
광신의 현대적 환생으로서의 정치 종교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정치에서 한계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다는 것. 그 기원이 묵시록이든 합리주의든 간에 세계가 인간 행위를 통해 바뀔 수 있다는, 그리고 평등과 같은 관념이 사회적 존재에게 강제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이야말로 재난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라는 것이다(p. 355).
콘, 텔먼, 그레이 등의 해석은 궁극적으로 구체성으로서의 역사와 정치를 제거한 자리에 비유와 은유를 설명으로 제공하는, 큰 틀에서의 세속화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p. 356-357).
흔히 계몽주의를 정치의 삐뚤어진 세속화라고 비난하는 이런 입장은, 악의 원천을 …… 이성에 대한 신앙 혹은 합리적 광신이라고 말하는 익숙한 버크적 주제로 돌아와 멈춰선다.
아렌트의 응수
아렌트는 정치 종교라는 개념에 대해 거세게 반대했다(p. 358).
자유를, 공산주의라는 세속 종교에 반대하며 만들어진 일종의 기독교화된 시민적 대항 종교와도 같이, 보호해야 할 독립체로 응고시키는 것은 아렌트가 보기에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지름길이었다(p. 359-360).
아렌트에게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은 종교적 사유에는 낯선 것으로, 그것은 종교적 제재와 교조적 확실성이 부재하는 세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이데올로기, 더 나쁘게는 자유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일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할 뿐이었다.
혁명적 노동자 위원회라는 ‘잃어버린 전통’을 향한 아렌트의 흥미로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미국 공화주의에 대한 헌신과 프랑스 혁명에 반대는 비판이 다다른 곳은 ‘자유세계’를 위한 철학적 옹호론이었다.
아렌트의 비판이 노리는 과녁은 반공 전우들이었다(p. 361).
- 발데마르 구리안: “사회적·정치적 세속 종교”로서의 공산주의 개념의 옹호자
에릭 푀겔렌: 보수주의적인 세속화 서사를 통해 종교 대용품[정치 종교]의 발흥 설명
쥘 모네로: 전체주의가 오래된 종교적 기능을 강탈해 자기 것으로 삼았음을 드러내기 위해 성스러움의 사회인류학에 의지
사회과학에 대한 특유의 의심을 통해, 아렌트는 공산주의를 기능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공산주의의 역사적·정치적 실체와 구체적인 발생 조건들을 무시하면서 그것을 일반 종교 범주의 한 사례 혹은 대체물로 바라보는 행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런 혼란은 연대기적 순서, 사실의 장소, 사건의 영향과 독특성, 원인의 실체적 내용, 일반적인 역사적 실재를 체계적으로 무시하면서 ‘기능적 역할’ 그 자체에만 오로지 초점을 맞추는 사회학자들의 특정한 관점에서 부분적으로 비롯되었다(p. 366).
아렌트는 전체주의 논의 속으로 “반신학적인 주장들”을 도입하는 것은 자신이 “많은 면에서 최종적이자 아마도 가장 위험한 무신론의 단계”라고 여기는 기능주의화의 징후라고 언명한다(p. 371).
지배와 구원의 경제
조르조 아감벤
“세계에서 신을 제거했던 근대성은 신학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섭리의 오이코노미아(가정관리 → 경영 → 경제 → 통치)라는 기획을 완성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p. 373).
위의 주장이 담고 있는 아감벤의 두 가지 핵심 원리
1)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천사론을 발전시키면서 교부들이 현재의 서양 근대성 체제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통치의 경제 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주장
2) 오늘날 정치철학 ― 자유주의, 보수주의, 마르크스주의를 막론하고 ―을 명목적으로 특징짓고 있는 무신론이나 세속주의가 기독교 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통치 기계‘라는 신학적 모체의 충동에서 발생하는 표면 효과들이라는 생각
정치의 최고 권위자의 위치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기독교 신학이 주권의 1) 정치 신학과 통치 관리의 2) 경제 신학이라는 두 개의 장치로 구성된 오늘날 정치적 행위의 결정적 근원을 이루는 그야말로 확고한 형식인 것이다.
아감벤은 스펙터클이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문제들을 지배하는 현상을 [기독교에서의] ‘영광’의 신학이 연장된 것으로, 즉 처음에는 신의 이미지, 현재는 자본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잠재력을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예찬하는 것으로 본다(p. 374).
[아감벤에게 있어] 근대 정치는 사회적·경제적 충동들에 의해 활성화되거나 제약받는 불안정한 힘의 장이라기 보다는 기독교적 섭리의 “경제”를 그저 완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르크스의 실천 개념은 “피조물의 존재를 신의 작품으로 보는 신학적 구상을 세속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라는 것이다.
카를 뢰비트
『공산당 선언』은 세속적 예언으로 변질되긴 했지만 메시아주의적 신앙의 근본적인 특징, 즉 “희망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p. 375-376).
아람벤은 문헌학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 이처럼 허점 많은 서사를 꺼렸을테지만, 마르크스가 기독교적 주제들을 세속화했다는 아감벤 자신의 진술은 뢰비트의 주장과 일련의 친연성을 시사한다.
경제의 “신학적 계보학”을 창출하려는 그의 시도는, 주권적 권력의 우월성이 삶의 통치, 즉 순전한 폭력적 지배가 아닌 개인과 인구의 생산적 관리를 주요한 목표로 삼는 권력에 의해 대체되고 재결합된다는 푸코의 ‘삶정치’에 관한 통찰을 연장시켜 나가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18세기 중엽 이래 정치 경제학의 초기 담론 속에서 ‘통치적 이성’이 등장함과 동시에 건강관리와 인구 생산성이라는 실천이 나타났다고 푸코가 특정했던 그곳에서 아감벤은 시계를 2천 년 전으로 돌려 경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크세노폰의 글들에서 그리고 바울에서 시작한 교부신학 내에서 이 개념이 겪는 운명에 주목한다. 이 과정에서 아감벤은 불연속성에 대한 푸코의 헌신, 그리고 이와 관련해 실체, 본질, 보편은 서로 다른 역사적 영역들을 가로질러 나타날 수 있다는 가정에 대한 푸코의 유명론적 거부와 작별한다(p. 378).
아감벤에게 “섭리적 장치는 근대적 통치의 인식론적 패러다임 같은 것을 담고 있다.” 근대국가는 “입법적 혹은 주권적 권력과 행정적 혹은 통치적 권력” 사이의 분리라는 형태를 통해 “세계의 통치라는 신학적 기계”를 물려받게 된다(p. 378-379).
세속화는 “정치적 개념이 자신의 신학적 기원으로 되돌아가게 잡아 주는 전략적 운영자이다.” 아가벤은 이 전략의 기초를 역사철학 그 자체가 아닌, 우리로 하여금 이르나 탈신성화된 현상으로부터 그것의 신성화된 기원으로 옮겨 갈 수 있게 해주는 지표 혹은 ‘서명’이라는 개념에서 찾는다. 따라서 오직 일부만이 “서명을 인식하고, 개념의 전통에서 그 서명이 작동시키는 탈구 및 변위 지점을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조금은 신비스런 가정이 등장하는 것이다(p. 380-381).
개인의 추측성 통찰과 유추적 사고에 너무나 많이 기대고 있는 서명 탐구라는 연구 방식에 대한 아감벤의 참조보다 더욱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신학적 기원이라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이 개념 뒤에는 슈미트저긴 다양한 세속화에 대한 아감벤의 공감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지평이 여전히 기독교 신학 담론 내에서 구축된 의미론적이고 관념적인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역사-존재론적 연속성에 대한 신념이 놓여있다(p. 381-382).
우리의 정치 전부가 종교이기에, 우리의 난관에 부합하는 것은 오직 철저한 변화인 메시아적 변화뿐이다.
그들[신학과 세속성/근대성]을 경쟁자이지만 분리할 수 없는 형제로 만들어낸 그 분리 이전으로 돌아가는 고고학적 작업만이 총체적인 경제-신학적 장치를 해체해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의 팽창으로 인한 종교의 소멸이나 정치적 매개체 내에 숨어있는 종교적 야망이라는 선형적 서사를 취하는 대신, 언제나 권위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형이상학, 교회와 국가에 대해 보수적인 관심을 기울였떤 슈미트는 어떤 역사철학의 손아귀에서도 빠져나가 버릴 만큼 고도로 불안정한 상황을 묘사한다. 더 정확히 말해, 공공연히 만동적인 관점을 가진 슈미트에게 혁명적 정치와 그 주체인 노동계급의 발흥은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국가와 교회 사이를 규정했던 경계선이 무너지는 사건이었다(p. 384).
“일단의 동지와 적이 역사 속에서 계속 변화한다는 점에서 볼 때, 신학은 반혁명뿐만 아니라 혁명의 정치적 도구가 될 수도 있다(p. 385).”
자유주의와 더불어 공산주의를 병적으로 관념적인 정치 인식으로 취급하는 슈미트는, 비록 정치 종교 테제의 근간에 놓인 역사철학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공산주의를 하나의 메시아주의로 바라본다(p. 386).
“나는 그런 진보적이고, 다가치적이며, 진화하는 사회는 그 체제에 내재하는, 따라서 또한 진보적이고 다가치적인 종말론만을 허용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종말론은 그러므로 오직 ‘인간이 인간에 대해 인간인’ 종말론일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이런 종말론은 희망의 원리에 바탕을 둔 유토피아이며, 그것의 내용은 자신을 생산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을 생산하는 ‘숨어 있는 인간’이다.” 교회와 국가의 초월성이라는 밧줄에서 풀려난 현대적 메시아주의는 숨어 있는 신에서 숨어 있는 인간으로 이동한다(p. 386-387).
보편의 혁명들
레드릭 제임슨
“떳떳하지 못한 종교라는, 즉 자기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하는 종교”라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난은 양날의 칼과 같다. 마르크스주의를 종교와 동일시하는 행위는 모든 종교를 세속적 이데올로기라는 지위로 축소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범주 아래에서는 사실상 내재성과 초월성,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유지하기가 훨씬 더 힘들어지고, 종교의 특수성을 옹호하기도 힘들어진다(p. 387-388).
종교와 이데올로기 간의 경계를 흐리는 일은, 최소한 기독교의 문화적 고양을 옹호하는 것을 중시했던 아렌트가 모네로의 작업에 대해 평가했던 바, 실제로 정치 종교 테제가 가진 “신성모독적” 차원이었다.
제임슨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경험구조들이나 개념적 유비 관계를 환기시키는 대신, 이미 나름대로 달성한 고도의 보편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초국가적인 사회적 환경(로마제국, 자본주의 세계)이라는 맥락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공히 보편주의적 기획을 촉진시키려 노력했던 “물질문화”로서 발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와 공유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적 상황이다. ……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도구들이 …… 서로 다르고 완전히 무관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동질화시키는 데 기독교가 사용했던 테크닉들과 구조적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p. 388-389).”
토크빌은 종교와 혁명 사이의 익숙한 유사성들을 열거하고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보편성이다. 권리와 자유가 특정한 주장과, 구체적인 민족, 계급, 영토의 운명과 연동되었던 이전의 정치적 반란들과 달리, 프랑스 혁명은 [권리와 자유를] “인간 본성 자체”로 다룬다는 점에서 종교적 격변에 훨씬 가깝다(p. 390).
“종교는 관념적이고 일반적인 성질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법, 기후, 인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퍼져 나간다”고 토크빌은 쓰고 있다(p. 391).
토크빌 자신의 정치 종교에 대한 이해의 바탕에 깔린 것은 주관적인 믿음의 질이 아닌 혁명의 확장성 보편성이다.
프랑스혁명은 “동시대 인들을 그토록 경악케 했던 종교혁명의 외양을 취했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혁명은 그 자체로 새로운 종류의 종교가 되었다.”
이전에 헤겔이 그랬듯, 토크빌도 이슬람교의 정치 속에서 혁명적 평등주의라는 관념적 열정과 지구적 야망에 대한 기대를 발견한다(p. 391-392).
버크에서 모네로까지, 그리고 이들의 21세기판 아류들도 포함된 혁명의 비판자들은 민족적 차이, 자연적 위계, 인간적 가능성의 한계를 무시하고 짓밟는, 보편적 해방이라는 이름의 기하학적 특성을 가진 뿌리 없는 개념들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해 왔다.
자신을 반광신적 맹비난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보편성을 긍정하길 원하는 우리 시대의 정치에서 이런 문제가 가진 변함없는 성격은 자크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등 몇몇 저명한 사상가들에 의해 제기된, 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인 형상에 대한 최근의 호소 속에서 아마다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주장
구원이라는 종교적 개념의 정치적·철학적 호출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광신을 향한 비난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 이 호출은 한편으로는 옹호할 수 없는 역사철학,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에 대한 체념이라는 진퇴양난 사이에서 항해하면서 동시에 급진적 변화의 정치라는 주장을 지키려는 사유가 처해있는 복잡한 곤경의 징후라는 것이다.
지식의 종언
지정학의 영역으로 회귀한 종교라는 것이라는 맥락(예루살렘에서의 유일신교들의 “세계대전”에 관한 그의 과장된 진술을 떠올려보라) 속에서 글을 쓰면서, 데리다는 종교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에 결합시키는, 시간적으로 코드화된 두 서사의 관점에서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상속받는 문제를 다룬다(p. 393-394).
데리다는 칸트적 광신 비판의 주요한 몸짓들 중 하나를 반복한다. 그는 어떻게 특정한 철학적 입장이 순전히 규제적인 것을 확실한 것으로 다루는 데 의존하는지, 어떻게 도덕적 진리가 세속적 지식으로 위장해 들어오는지를 보여 준다. 이 묵시록적이면서 광신적인 이상과 사실, 진리(혹은 신앙)와 지식의 융합에 맞서는 상대이자 아마도 해독제는 정치적 희망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적 용어를 활용하는 또 다른 시간적·경험적 양식, 곧 메시아적인 것이다(p. 394-395).
결론
ㅇ
'세미나 발제문 >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3. 심리적인격의 해부 프로이트 2020.9.23. 바다사자 (0) | 2020.10.07 |
---|---|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프로이트 20.9.23 바다사자 (0) | 2020.09.23 |
광신 / 알베르토 토스카노 / 5장 관념들의 충돌 / 2020.9.13. (0) | 2020.09.13 |
광신 / 4장 동양의 혁명: 이슬람, 헤겔, 정신분석 / 2020.9.6. 세미나 (0) | 2020.09.06 |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29-30강 / 20.09.02 / 케이 (0) | 2020.09.02 |
- Total
- Today
- Yesterday
- 루이 알튀세르
- 그람시
- 의식과사회
- 옥중수고
- 로마사논고
- 공화국
- 생산관계
- 프롤레타리아 독재
- 레비스트로스
- 딘애치슨
- 브루스커밍스
- 생산양식
- virtù
- 계급투쟁
- 검은 소
- 스피노자
- 한국전쟁의기원
- 이탈리아공산당
- 알튀세르
- 야생의사고
- 루이알튀세르
- 옥중수고이전
- 신학정치론
- 개인심리
- 헤게모니
- 마키아벨리
- 집단심리
- 안토니오그람시
- 무엇을할것인가
- 이데올로기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