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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中, <이탈리아 당의 공위(空位)기간 1923~24>
1923년 이탈리아, 사회당으로부터 분당을 주도했던 PCI(Communist Party of Italy, 이탈리아 공산당)의 보르디가가 체포된 이후 조직에 타격을 입은 틈을 이용해, 코민테른(러시아)은 PCI의 당 지도부 교체를 통해 통제력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PCI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그람시, 테라치니, 톨리아티, 스코치마로 등은 여전히 보르디가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내 우파인 타스카를 경계하였는데, 타스카가 코민테른의 지지를 얻어 당 지도권을 얻으려 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람시를 비롯 코민테른과의 불화에 대해 염려되었지만 그럼에도 보르디가를 향한 지지는 유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내부적인 불화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들에 대한 대응이 약화되는 문제를 가져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우려한 코민테른은 빠른 정리를 원하는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1923년 11월 그람시가 모스크바로부터 귀국을 준비(먼저 빈으로 출발)하며 PCI의 지도부로 자리하며 당을 이끌게 됩니다.
그람시는 귀국 당시 PCI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며(투옥, 해외 활동 등) 이탈리아에 남은 톨리아티 등에게 주도권이 주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공산당의 대중화를 노리는 코민테른에 반대해, 보르디가는 지속적으로 불참여주의를 표현하며 PCI는 좌파적 성격을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반대로 당내 소수 우파인 타스카는 코민테른의 노선을 따를 것을 적극 주장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중도적 성격인 인터내셔널파(세라티 주도)도 있었는데, 이처럼 당시 이탈리아 좌파가 세 가지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상황입니다. 따라서 파시스트에 대한 단결된 대응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코민테른은 파시스트 정권에 넘어간 이탈리아 정치상황의 문제가 크다고 판단하였고 이를 견제하고자 ‘혼합’지도부(74)를 세우기로 합니다. 보르디가를 비롯 PCI 다수파들은 이에 여전히 반대했지만, 코민테른의 의도대로 새로운 집행부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람시는 톨리아티, 테라치니, 스코치마로 등을 설득하여 새로운 지도부 구성으로 당내 의견을 모으게 됩니다.
그람시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탈리아 당의 출구를 모색한 시점(75)이 1923년 여름입니다. 당시 아직 러시아에 있던 그람시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몇 개의 사소한 일 외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병약한 몸으로 병원에서 보내고, 4차 코민테른 세계대회에 참석하고, 줄리아 슈흐트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등입니다. 그람시는 모스크바 체류 시에는 볼셰비키의 당내 좌파에 호의를 가졌습니다.(76)
그람시가 보르디가에 대한 태도로 오랜 지지를 보냈던 것은 당의 전술적인 차원이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후 그람시는 보르디가와 갈라서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둘은 통일전선과 사회민주주의 본질 문제에 대해 견해를 같이하였으며, 다만 보르디가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실제적 전략 부족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고, 당과 대중을 경직시키는 그의 생각에 대해서도 입장을 달리하였습니다.(76) 그람시는 이후 지도부에서 공산당의 대중화를 위한 신노선을 주창하게 됩니다. 그람시의 이런 입장에 대해서, 코민테른의 합당 정책에는 반대를 표하면서도, 당내 지도권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사하는 글이 남아 있습니다.(77)
“우리는 이탈리아 혁명의 미래를 방어하고자 한다... 우리는 실책을 범했을 수도 있으나 또한 그 실책을 기꺼이 바로잡을 태세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자들과 근본적인 문제에서까지 타협하고자 하는 새로운 분자가 우리의 (이념적) 중심부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우리는 그야말로 정당하다. 믿을 수 없는 분자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야말로 실책이다.” - <PCI와 코민테른의 관계>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탈리아의 상황에 진정으로 적합한 당 활동과 정치적 공작을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주장이 정당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우리는 ‘고독한 천재’인 양 해온 그간의 태도를 청산해야 한다.” - <톨리아티 등 동지에게 7월에 보낸 편지>
1923년 11월 귀국 이후 PCI의 주도권을 잡은 그람시에 대해서, 코민테른의 개입에 의해 이탈리아당이 좌지우지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할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보르디가가 러시아의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에 그람시에게 넘겼다는 식의 해석은 불충분합니다. 오히려 당내 우파인 타스카가 코민테른의 입장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람시의 정치적 시선은 명료합니다. “혁명정치는 역사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개입이어야 하며, 단지 ‘정확한’ 입장을 취해 그것이 옳은 입장임이 증명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는 것일 수는 없다”(78)는 표현처럼, 그람시는 실천에 나서고자 합니다.
1923년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은 무솔리니의 정부 장악 이후, 반합법적 상태를 유지합니다. 정당활동은 유지되었지만, 지도자와 당원, 신문 등은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PCI의 세력도 많이 위축된 상황으로 동해 4월 5천명이 간신히 넘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11월에 8천5백 명까지 늘어서 조금 세력을 회복하지만, 1924년 다시 새로운 탄압이 시작되며 기관지가 몰수되는 상황으로, 파시즘 정권에 의한 정치 탄압이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보르디가가 석방되면서 불참여주의에 대한 입장을 재천명하는 공개장을 보내지만, 그람시가 이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11월에 빈으로 옮겨 새로운 반파시즘 활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보르디가 없는 새로운 중앙 다수파의 조직을 생각하고 코민테른과의 벌어진 사이를 매우고자 마음먹은 듯합니다.(79) 그람시는 벽에 부딪친 PCI의 출로(80)로 ‘신노선’(책에는 새로운 국내 전략)을 제시하여, 기존의 보르디가 중심의 당 자체의 쇄신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관지 <우니타>(의미: 단결, 통일)를 제안하여, 좌파 ‘이념의 준비’, ‘노동자․농민 연방공화국’(토리노=튜린 노동자 + 남부 농민), ‘남부문제’ 등과 관련한 새로운 당의 형태에 대해서 구상합니다.
그람시의 신노선에서 PCI는 대중적 기초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로 제시됩니다.(80) 노동자농민 정부 슬로건에 대한 선전,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과 노동귀족이나 개량주의 세력과의 투쟁과 남부 무장폭동, 당내 내부 분열 해결을 위한 정치교육 프로그램 개발, 해외 이민자들 사이에서의 코뮤니스트 활동 제고 등 다양한 노선을 통해 공산당의 대중화를 추진하고자 합니다. 이후 2년 뒤 그람시가 투옥될 때까지 PCI 전략의 기본 요소로 유지됩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을 코뮤니스트 입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이탈리아 혁명의 전제조건인 만큼 중요성을 강조합니다.(81)
1924년 봄, 부정과 폭력적 분위기(암살), 그리고 개악된 선거법 속(82)에서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파시즘은 부르주아지와 프티부르주아지의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며 성공하였고, 바티칸 지원을 확보하고, 금융산업의 지지를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에 PCI는 야당의 공동선거 블록을 제안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PCI와 제3인터내셔널파가 참여하여 선거명부를 구성합니다.(당시 세력 PCI 1만, 제3인터 2천명) 어느 정도 세력이 회복함을 알 수 있지요. 2월 기관지 <우니타>가 창간 후 2만 5천부의 발행을 하였고, 3월에 나온 <오르딘 누오보>는 6천부를 발행합니다. 선거에서도 성공한 편으로, 19명을 의회에 진출, 1921년 보르디가 주도 PCI에 비해 훨씬 좋은 결과를 얻어냅니다. 그람시도 의회로 진출하고 이를 계기로 5월에 귀국하게 됩니다.(파시즘 정권의 투옥과 탄압에서 의원직 활동가들은 보호되고 있기 때문, 이후 파시즘 정권이 이를 무시하고 그람시를 투옥시킴)
당시 보르디가는 아예 선거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비타협노선을 유지하며 문제가 생깁니다. 그에 동조하는 자들도 당에 비협조하게 됩니다. 이에 5월 귀국 후, 코모에서 PCI협의회가 열리고, 당내 좌파 테제(보르디가 중심, 비타협주의), 당내 중앙 테제(젠나리, 톨리아티 등, 인터내셔널 중심), 당내 우파 테제(타스카, 베르티 등, 코민테른의 통일전선정책)의 서명들이 각각 따로 나오게 됩니다. 여전히 세력은 좌파>중앙>우파이고, 좌파는 다른 두 파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표를 얻습니다.
우파는 새로운 당 중앙을 환영하지만 좌파와 함께 책임을 져야 함을 주장하고, 중앙은 구지도부의 소수파에 대한 이념적 동조를 표현하지만 코민테른의 노선을 반대한 것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좌파에 표현합니다. 당 중안에서는 파시즘을 주적으로 두지 않았던 2년 전의 로마테제를 거부하고, 사회민주주의(파시즘의 좌익, 84)를 경계합니다. ‘노동자정부’는 PT(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 이전의 중간적 국면이라는 것은 환상이며, ‘파시즘’을 부르주아지와 대토지소유자 분파의 무장독재라고 주장합니다. 코민테른이 PSI에 걸었던 헛된 희망, 노동자정부 등의 구호가 가진 위험성에 대한 강조를 포함하여 테제를 제출합니다.
중앙과 우파가 상호 결합점을 가지며, 보르디가는 중앙이 우파의 타스카에게 굴복한 것은 아닐까 경계합니다. 독일에서는 KPD의 혁명봉기가 실패하고 코민테른 노선을 반대하던 좌파가 지도권을 장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스카가 중앙 그룹으로 기울면서 중앙파로 지도부가 교체됩니다. 이들은 대부분의 우파를 흡수하는데, 이는 그람시의 국내전략과 독창적 국제적 시각(85-87의 글)이 효과를 보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람시 지도하의 PCI 1924~26>
그람시의 PCI 지도시기를 ‘한 시대가 종막을 고하던 때’(87)라고 표현하며 시작하는데, 이는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 혁명 현실성에 대한 전략과 정세분석의 수립을 고민하며 러시아 당 내 투쟁의 상황에 얽매이던 시기로 해설합니다. 반면 이탈리아는 PCI의 독자적 활동이었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러시아적인 상황과는 별개로 국내적인 요인(88)에 의한 것이고, 이탈리아는 좌경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이 시기의 그람시 주도의 PCI에서의 활동은 그의 옥중수고의 저작을 이해하는데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옥중수고의 글이 쓰여진 시기의 정치적 세계와는 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88) 옥중수고에서는 당과 국가 등에 대한 정치적 서술이 불투명하고(아마도 검열이 큰 문제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에 따라서 당시 정치적 세계라 할 수 있는 인민전선주의, 스탈린주의 등에 의한 그람시 해석이 실패함에서 나타납니다. 그람시의 서술은 ‘진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는 데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울러 때로 모순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도 … 전체에 대한 설명을 추구하여야 할 것’(89)을 강조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인터내셔널 의장인 지노비예프 중심의 좌경화 경향은, 독일에서의 KPD의 혁명 봉기 실패 후, 그 계획을 주도했던 지노비예프가 KPD내 좌파를 지원하여 그들이 독일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하고 좌경화 경향을 주도하는 것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러시아 당내 반대 세력이 지노비예프를 실추시키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고 이런 움직임은 당내 싸움으로 이어졌지요. 특히 반대세력이 국제적인 동맹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되면서, 지노비예프는 좌경화적 노선을 유지하기 위해 보르디가를 포섭하려 하면서 이탈리아 당내 중앙과 우파의 결합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도는 보르디가의 비타협성과 PCI내 지도부 자리 거부라는 것에 의해서 좌절되고 마는데, 인터내셔널이 목적에 의해 보르디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그람시 주도 PCI의 반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대한 경계의 양면적 투쟁 현상에서 보르디가는 비참여로 인해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 [표현에 따르면 ‘근대자본주의의 오른손과 왼손’(91)이라고 말할 정도] 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동일하지만, 당시 당내 중앙의 의견이라 할 수 있는 톨리아티의 의견에 따르면, PCI의 대중정당화의 필요성, 농민에 대한 공작의 강화 필요성 등이 더욱 강조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람시가 당의 총서기에 선출되었고, 제5차 코민테른 세계대회는 좌경화 양상을 보입니다. 이는 기존의 이탈리아 좌파와 중앙의 주장과 대체로 일치하면서 코민테른과의 균열이 매워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그람시는 이에 대해서 “인터내셔널이 좌경화하였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92)고 말하며, 독일에서의 실패가 우파인 브란들러 때문이라는 지노비예프의 해명을 거부하고, 실패의 원인은 소요주의적인 전략(92)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그의 관점은 여전히 좌파적입니다.
1924년 봄 이후 러시아당 다수파와 제휴하라는 압력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그람시는 러시아 당 내 투쟁의 해명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네 가지 요인으로 지배집단 쪽과 실제적인 제휴를 하였습니다. 1) 러시아 당 내 투쟁의 도구가 되었지만 코민테른 기구를 통해 해외 코뮤니스트들에게 전달된 제안사항들, 2) 코민테른과의 균열 해소와 이에 따른 중앙파 지도부의 국제적 승인의 건, 3) 러시아 반대파와 이탈리아 좌파 주장의 밀접한 연관성(좌경화에 의한 당 기강 확립 문제성), 4) 이탈리아 남부의 농민과 노동자와의 동맹 강화 때문입니다. 특히 1926년에 러시아 반대파가 스탈린의 친농정책을 비판하면서 이를 위협적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당시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연결 혹은 모순된 관점을 보이는 그람시의 태도가 옥중수고에 반영되어 있음을 서설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람시가 이탈리아로 귀국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924년 6월, 사회파 지도자인 마테오티가 파시스트 깡패들에게 암살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에 반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반파시즘 세력이 신망을 얻고 세력을 강화할 기회를 얻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심화되지 않으면서 공세를 취할 기회를 잃고, 2년의 시간을 수비적 활동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물론 1922년 그람시가 파시스트에 의한 독재는 불가능하다는 당시 당의 지배적 관점에 반대를 표하며 우려를 표현했을 당시, 그람시조차 파시즘 현상에 대한 적합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람시는 파시즘이 사회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했고, 보르디가의 입장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람시의 몇몇 판단에서의 실패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사회파 당원이었던 무솔리니가 전쟁에서 돌아와 파시즘의 진두에 서는 현상을 보며, 파시즘에 의한 독재의 미래와 가능성을 내다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람시와 보르디가의 전망에서의 유사점(부르주아 질서 위기에 따른 혁명의 현실성에 대한 믿음과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보르디가의 파시즘의 PT독재로의 대체의 급진적 혁명 관점과는 다르게, 그람시는 파시즘->사회민주주의->불안정 국면->내전의 양상으로 과정적인 혁명에 대비를 주장합니다.
암살사건 이후, 파시즘에 반대하는 다른 정당들은 국회를 거부하며 행동에 나서지만, PCI도 이에 참여했다가 이후 국회에 나가며 반파쇼 투쟁을 지속합니다. 이는 다른 정당에 대한 PCI의 태도에서 기인하는데, 파시스트 정당이 퇴출된 이후, 이를 대체할 것으로 보이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며, 이들 또한 준파시스트고, 주된 적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보르디가의 극좌적 관점(파시즘->PT독재로의 이행), 우익주의적 관점(파시즘->부르주아 민주주의 회복-> PT독재)의 양 관점을 모두 배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파시스트 정권의 힘을 너무나 과소평가한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결국 1924년 11월, PCI는 국회로 돌아와서 반파시즘 투쟁을 지속하려 합니다. 하지만 1925년 1월, 파시스트의 역공에 대해서 이를 막간극(96)으로 치부하며 이미 파시스트 정당에 대한 도덕적 승리를 선언할 정도로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후 파시스트 정권이 복귀하고 탄압이 지속되게 됩니다.
물론 PCI는 1924년 말에 2만 5천명으로 세력이 늘어나는 등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만, 파시즘에 대한 대응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기존 PCI가 노동계급 중심의 정당이고, 아직도 보르디가 지지의 좌파들이 당 조직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파시즘에 의한 독재란 불가능하다는 기존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PCI 내에서의 좌파 세력은 여전히 견고했고, 토리노, 밀라노, 로마, 나폴리 등 굵직한 동맹들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당 내 투쟁과 이탈리아는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브로디가가 이후 러시아 좌파인 트로츠키와 밀착하자 PCI와 보르디가의 갈등의 문제를 엮어서 다루게 됩니다. 이후 PCI 내에서 러시아 문제의 중요성은 커져갑니다. 보르디가의 트로츠키 주의의 좌파적 성향 지지에 대하여 그람시는 반박(98)을 합니다. 여기서의 논의가 이후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모든 전술은 대중 속에서의 선전․선동 활동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예측대로 하자면 러시아 국가의 전술도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람시의 반박(98)
하지만 여전히 PCI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조차 당 내 분파 문제를 다루고 있었지, 대중의 문제를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었고, 러시아 당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논의됩니다. 당시 코뮤니스트 정당들의 러시아의 내에서의 분파주의의 문제, 보르디가와 PCI의 투쟁에 대한 문제, 그리고 트로츠키에 대한 문제의 세 가지가 얽혀서 문제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람시는 러시아 코민테른의 분파적 논쟁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성에 대해 반대했고, 노동자-농민의 본질적 문제의 검토를 제안합니다.
좌파와 코민테른의 갈등, 좌파의 기강 거부와 고립, 좌파의 PCI내 지도적 역할 거부, 그람시의 공산당 활동, 마테오티 암살 사건 이후의 입당자들 포섭, PCI 내 중앙파 그룹의 영향력 등에 의해서 약화된 좌파가 자신들의 지지기반 확립을 위해 25년 6월 코미타토 딘테사라는 분파를 조직했으나, 코민테른의 비난과 최후통첩에 의해 해산되고, 이 시점에서 파시즘의 탄압도 때를 같이하며 좌파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1924년 5월의 코모 협회 이후로 18개월 지난 1926년 1월에는, 중앙파가 당의 90%를 장악하며 기존의 형세가 역전되는 상황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파시스트 정권은 더욱 강화되었고, “파시스트 정권이 빠른 시일 안에 무너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101)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PCI는 좌경화된 운동 성향을 보이며, ‘노동자․농민 위원회’ 슬로건으로 폭동(101)의 성격을 통해 정치적인 표명을 해야 함을 주장합니다. 1925년 4월 이후, 톨리아티의 체포와 사면, 테라치니의 체포 등 지도부에 대한 탄압 등이 벌어지고 이후 PCI의 활동은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위한 투쟁(101)에 맞추어 집니다. 이는 파시스트의 조합(corporation)이 만들어지자 협정에서 ‘조합’만이 인정받는 상황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분파적인 투쟁도 계속해야 하는 이탈리아 공산당 내에서의 내우외환의 상황이 지속됩니다. 외적으로는 파시스트 조합에 대항하여 “노동조합운동이 우리의 통제하에 다시 태어날 수 있게”(101)하는 것이 목표가 되지만, 내적으로는 좌파와의 불화, 타스카와의 불화 등에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1925년 11월 반합법성을 인정받은 <아방티>와 <우니타>를 제외한 야당계 신문이 분쇄(102)되고 파시스트에 의한 국가 통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1925년의 어려운 상황에서 유지해 나갔지만, 다원들에 대한 탄압으로 노동계급 당원이 상실되었고, 이를 농민부분에서 보강하게 됩니다. 따라서 상황에서 질적인 전환을 인정하고, <남부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에서 논의하였던 것처럼 1926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전략개념을 수립하기 시작합니다. 파시즘이 지배계급을 뭉치게 하였지만, 반면 경제적인 모순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그람시는 중간층의 이탈을 전망하고 이들을 포함한 북부 노동자와 남부 농민 사이의 동맹의 새로운 전개에 대해 말합니다. (ps. 특히 기존 노동조합을 이끌던 북부 노동자가 아닌, 남부 농민의 혁명 주제로서의 등장은 새롭게 남부의 실천지향적 지식인들을 조명하게 됩니다. 남부 중심은 이후 파시스트에 대항 투쟁을 하며 행동당을 구성하는데, 그람시의 지식인에 대한 논의는 이렇게 새로이 등장하는 혁명 주체들에 대한 관찰로부터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26년 1월 리옹 당 대회에서 PCI 내 좌파의 대공세가 펼쳐집니다. 좌파는 공산당의 볼셰비키화에 반대하고, 당 지도부의 노선을 비난하고, 분파주의의 문제를 코민테른에 돌립니다. 반면 그람시와 중앙 지도부는 좌파의 분파주의와 지역주의를 비난하고, 볼셰비키화에 의한 세계공산당 건설을 주장합니다. 중앙파의 당 대회에서 발표한 테제에는 북부 산업자본가와 남부의 토지소유자의 지배계급 블록을 규정하고,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을 분석하여 혁명의 준비시기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북부 노동자- 남부 농민의 동맹 개념을 세우고, 통일전선 정책은 개량주의자들의 본성을 폭로하는 것임을 규정합니다.(104)
리옹에서의 당 대회 이후 중앙과 좌파의 이념적 갈등과 상황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람시는 당내 여러 경향이 당의 지도기구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105) 보르디가를 설득해 위원회에 참여하게 하고, 우파의 타스카를 참여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후 모스크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회의에 의한 당 내 투쟁의 입김이 이탈리아에도 미치게 됩니다. 특히 보르디가가 러시아 당 위원회의 요청에 정면도전하면서, 보르디가를 퇴장시키고 러시아 당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요구합니다. 이런 경향은 그람시가 체포된 이후에 PCI의 사실상 지도자가 된 톨리아티에게 러시아 지도부가 PCI의 좌경노선 수정에 압력을 가했을 때, 보르디가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람시는 러시아의 합동반대파가 노동자-농민 동맹을 위협하리라는 견해에 따라 지지선언을 보내지만 동시에 분파주의적 성격에 대해서 경계합니다.
1926년 11월이 되어 반합법적으로 인정받아 생존한 PCI의 영역도 축소되면서, 파시스트 정권은 더욱 강하게 탄압을 시작합니다. 무솔리니에 대한 암살 시도가 발표되면서 새로운 탄압이 시작되었고, 그럼에도 공산당 의원으로 국회 참여를 결정한 그람시는 이후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누구도 파시스트 정권의 장기화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 PCI의 패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람시의 선택은 <자전적 주해>(112)의 일부의 언급처럼 당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에 따른 선택이었음을 조명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옥>
탄압 이후, 1927~28년 당시 PCI는 지하활동을 지속하는 소수의 당원들만 남을 정도로 세력이 약화됩니다.(27년 6천 -> 34년 2천 5백) 망명한 지도부의 톨리아티, 그리에코, 타스카 등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1929년 러시아에서 좌경화 경향(부하린과 우파 분쇄)을 반영하듯, PCI도 좌익 반대파(청년조직의 롱고, 세키아 등)가 부상하였으며, 타스카는 PCI에서 제명되기까지 합니다. 이런 좌익 노선에 대해서 내부 반대파(레오네티, 트레소, 라바촐리니) 등은 비판하지만, 강한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1930년 초, 당 중앙을 이탈리아로 옮기자는 제안이 나오는 상황이었는데, 반대파는 이에 반대하였고, 대중적 성격의 지하조직을 수립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제안은 실패하고 트로츠키와의 연결로 제명에 이르게 됩니다. 당이 좌경화되면서 이전 지도부는 ‘산산조각’나며 기존 정치위원회 8명 중 5명이 제명되는 상황에 이릅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당원 대부분이 검거되면서 1934년 PCI의 세력은 최저점에 이릅니다.
그람시는 체포 후 시칠리아 북쪽의 우스티카 섬에 구류하며, 보르디가 및 다른 당원들과 만날 수 있었으며 1927년에 밀라노로 이송되었습니다. 1년 이상을 독방에서 보내며 제한된 생활을 보내다가 재판을 위해 1928년에 로마로 보내집니다. 1928년 5월 로마에서 그람시, 테라치니, 스코치마로 등 PCI 지도부 외 20명 피고에 대한 특별법정이 세워지고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서 유죄가 선언됩니다.(“우리는 20년 동안 이 자의 두뇌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놓아야 한다.”고 선언된 재판) 6월 4일 선고가 내려지면서, 테라치니는 22년, 그람시, 스코치마로, 로베다는 각 20년 등 중형이 선고되고, 7월 19일 튜리 형무소에 도착합니다. 이미 병과 탈진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이었고, 여기서 4년 반 동안 수감 상태에서 <옥중수고>를 집필하였으며, 이후 병의 악화로 인해 포르미아 병동으로 이감됩니다. 감옥에서 책을 보고 쓸 수 있는 등의 제한된 행동을 할 수 있었지만 건강이 악화되었고, 연인인 줄리아로부터의 소식의 단절(정신질환으로 모스크바 병원)이 고통을 주었지만, 줄리아의 언니가 여러 도움을 줍니다.
감옥 검열로 마르크스주의 관련 문헌은 제한되었지만, 평론과 비판서를 읽으면서 이를 보충하고, 잡지와 신문 등을 통해 이탈리아 문화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면서, 파시즘 아래의 이탈리아에 대한 비판을 서술하였습니다. 그람시의 서술과 편지들에 대해 설명하기를 “육체적 고통과 상실을 마주하고서도 결코 굴함이 없는 인내”(116)를 보인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1930년 후반 한 시기에만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과 토론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반대파인 3명의 소식과 제명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그의 형 젠나로에게 전달합니다. 하지만 젠나로는 톨리아티에게 그람시의 의견을 거짓으로 보고하였고, 1960년대의 회고에서 그람시는 좌경화로의 전환에 반대하였음을 밝힙니다. 그람시는 좌경화와 정면공격 정책을 비판하고, 파시스트 정권에 대한 과소평가를 비판합니다.
당시 그람시의 의견을 동료 수감자였던 리사(Athos Lisa)가 전하고 있는데, ①프폴레타리아트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당 개념, ②부르주아 국가 권력을 접수하기 위한 군사조직의 필요성, ③‘제헌의회’라는 중간적 슬로건의 중요성(동맹을 얻는 수단), ④슬로건(‘이탈리아 노동자․농민 소비에트 공화국’)의 변화 필요성, ⑤파시즘의 규정과 이탈리아 역사발전의 특수한 성격(왜곡된 부르주아 혁명으로서 파시즘), ⑥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 확립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런 열정과 날선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감상태에서 세 번의 심각한 건강악화를 겪었으며, 11년의 옥중 생활로 심각한 상태에 놓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옥중수고>가 작성되었습니다. 그의 첫 관심은 “구속이라는 것이 가져온 자신의 삶의 변화에 저항하고 대응하는 방식을 찾아내는 일”(118)이었으며, 감옥에서의 고립과 자포자기에 투쟁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웅변적이고 분명한 생각’(119)으로서 <대화>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의 깊은 고민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람시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음이 밖에 알려지자 그람시 석방을 위한 국제적 운동이 일어났고, 1933년 말 포르미아의 병동으로 옮겨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파시스트 형법에조차 없는 방식’(120)의 죄수 취급과 무자비한 감시, 수감생활의 타격으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이후 사면으로 인해 1937년 4월 21일 형기가 끝나게 되었고, 샤르데냐에서 휴양을 인정 받았지만, 너무 병약해 병원을 나서지 못하고 4월 27일 숨을 거둡니다. 줄리아의 언니인 타티아나 슈흐트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방에 있던 서른세 권의 공책을 빼내어 모스크바로 가져갔고 그람시의 “나의 내적인 삶의 초점”(121)을 알게 하는 흔적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졌습니다.
글은 서설의 내용에 대한 변명으로 마무리하면서, 그람시에 대한 일방적이고 당파적인 해석에 대한 오류를 지양하기 위해서 <옥중수고> 자체의 복합성을 자세하게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1920년대의 이탈리아의 정치, 경제, 사회적 갈등의 상황과 PCI와 파시스트, 러시아와 관계와 전략적 선택, 정치적 알력 등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그람시의 정치적 경험을 이해해야만, 그가 수감상태라는 제한적 상황에서 애매하고 암시적으로 서술한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람시가 PCI 지도부를 이끌어가던 시기의 보르디가의 엘리트주의, 타스카의 비관주의 등에 대해서 당내 규율을 세우고 전략적으로 투쟁했던 모습과, 노동자-농민의 결합을 위한 구상과 정치적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공산당의 대중화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계급의 유기체적 연결을 과제로 파시즘이라는 폭력적인 권력장악 아래에서 혁명적인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전위정당과 변증법적인 연관’에 대한 배경을 통해 <옥중수고>를 더욱 진지하게 읽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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