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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하는 공동체조르조 아감벤 2021.8.8. 바다사자

 

단상. 만회불가능한 것

안내

본 단상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9절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6.44번 명제에 대한 주해로 읽힐 수 있다. 두 텍스트는 본질과 존재의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다. 존재론을 끝까지 사유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지와 그 수준을 가늠해보고자 한다(123).

구원이란 세계의 세속성을 구원하는 것, 세계의 이렇게 존재함을 구원하는 것이다(124).

스피노자의 만회불가능한 것의 두 가지 형태, 신뢰(안전)와 절망은 동일한 것이다. 본질적인 점은 회의할 이유가 모두 사라졌으며 사물들이 확실하고 최종적으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125).

만회불가능한 것은 본질도 실존, 실체나 특성도, 가능성도 필연성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이미 양태성 속에 주어진 존재, 즉 자신의 양태성들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이렇게로 존재한다(127).

실존과 본질, 명시와 의미 사이의 노정의 관계는 동일성이 아니라 즉자성(사물 자체)의 관계이다. 철학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해 오해를 낳았다. 철학의 본 문제는 동일성이 아니라 사물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물이란 스스로를 향해, 자기가 존재하는 대로 존재하는 고유한 존재를 향해 초월한다(132).

나의 그렇게 존재함, 나는 결코 이것 혹은 저것이 아니며, 항상 그런 것, ‘이렇게이다. 소유가 아니라 한계이며 상정이 아니라 노정이다. 노정, ‘그러한 대로 존재함은 술어도 아니고 술어들과 다르지도 않다(133). 노정은 언어 자체와, 언어의 자리 잡음 그 자체와 맺는 순수한 관계이다. 그것은 언어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 즉 불린다는 사실에 의해서 어떤 것에 발생한 것이다. 자기 자신과 관련되는 한에서 그것은 조정된 것이다. 노정으로서의 실존은 어떤 ‘~대로존재함이다. 실존한다는 것은 어떤 특성을 띤다는 것, ‘~대로존재함의 고통에 몸을 맡긴다는 것이다(134).

언어의 기호작용에는 의미와 명시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세 번째 개념으로 사물 그 자체, 그러한 대로 존재함, 명시된 것도 아니고 의미된 것도 아닌 그런 것을 도입해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영원한 노정과 현실성이다(137). 영원한 감각적 인지다. 오직 자신의 노정된 존재이며 광운이며 한계다. 현존하는 자는 사물로서 현존하거나 무로 존재할 위험으로부터 영구히 안전한 존대이다. 존재 한 가운데 속에 맡겨져 있는 현존하는 자는 전적으로 노정되어 있다(138).

각각의 사물의 그렇게 존재함은 이념이다. 그것은 사물 곁에 거하는 곁현존 또는 곁초월이고 사물과 거의 융합될 정도로 밀착해 있으며 사물에 후광을 부여한다. 이념의 현존은 범례적 현존이다(139). 영원한 그러함의 성질, 이것이 바로 이념이다(140).

구원의 가장 내밀한 특징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순간이 되어야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구원이 있다-하지만 우리를 위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존재함, 자신의 고유한 존재양태로 존재함, 이것을 우리는 어떤 사물로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어떤 식으로든 사물성을 비운다는 것이다(141).

인간은 유일하게 사물들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가 오직 이런 부딪침 속에서만 비사물적인 것을 열어젖히는 존재이다. 역으로 인간은 비사물적인 것에 열린 존재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서 사물들에 만회할 수 없이 맡겨진 존재이기도 하다. 비사물성(영성)은 사물들 안에서 자신을 상실하는 것, 사물들 외에는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상실하는 것, 바로 이러한 세계의 만회불가능한 사물성을 경험함으로써 어떤 한계에 부딪히고 그 한계를 건드리는 것을 말한다(142).

당신이 세계의 만회불가능성을 인지하는 그 지점에서, 바로 그 지점에서 세계는 초월한다. 세계는 어떻게 있는가-이것은 세계 외부에 있다(146).

 

2001년판 후기 티쿤 드 라 노체[어둠의 구원]

우리의 시대는 그저 주장만 되었던 것-행위의 부재, 임의적 특이성, 블룸(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중심인물 리오폴드 블룸을 중심으로 불름이란 주체상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테마를 자유럽게 전개하고 있다)-이 현실이 되어버린 메시아적 상황의 이제껏 유례없는 일반화를 말한다(150)

무위는 인간의 진정한 영혼이다. 순수한 파괴행위, 탈창조적인 행위는 모든 생산적인 노동을 금하는 안식일의 휴식과 닮아있기 때문에 금지 대상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노동이 아니라 무위와 탈창조가 도래하는 정치의 패러다임이다. 이 책이 다루는 구원(티쿤)은 행위가 아니라 특수한 종류의 안식 휴가이다. 그 휴식은 스스로를 구제하지 못하면서도 구제를 가능케 하고 스스로를 만회할 수 없으(151)면서도 그 구원을 발생하게 한다. 따라서 이 책의 결정적인 물음은 어떻게 하느냐?”이고 존재는 그렇게보다 덜 중요하다. ‘어떻게무엇을 완전히 대체하는 행위이며 형태 없는 삶과 삶이 없는 형태가 삶의 형태로 합치되는 행위이다. 이 책의 노동은 이러한 무위를 노정하는 데 있다(152).

 

옮긴이의 말 아감벤 정치철학의 서문_ 도래하는 공동체에 대하여 (이진경)

이 책은 아감벤이 본격적인 정치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처음으로 드러낸 작품이다(아감벤에게 언어의 문제는 처음부터 정치의 문제였다.각주1)(154).

문헌학적이면서도 정치철학적인 비판정신에서 현대의 인간 삶/생명이 처한 주권의 아포리아적 상황을 논한 연작들에 비해 도공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156)는 삶의 형태/형식을 존재론의 관점에서 정식화한다. 전자의 저서들에서 부정성/수동성 형태로 암시되었던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 후자의 저서에서 긍정성/적극성의 형태로 명시되고 있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삶의 형태를 임의성의 형상에서 정식화한다(157). 임의성은 그 존재가 존재하는 대로 자신을 노정하는 특이적인 것이다. ‘임의적 특이성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성으로서 존재하는 존재를 말한다(158).

도공20세기 공산주의의 실패를 목도하면서 1980년대 초 프랑스 지식인들이 코뮌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사유의 흐름이다. 어떻게 특이성들이 동일성과 전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성을 이룰 수 있는지의 문제로 요약된다. 아감벤의 공동체는 비움과 부재로 특징지어진다(159).

아감벤은 소시민 계급에서 생명정치적 구분에 근거하는 정체성 정치를 종식시킬 수 있는 잠재성을 발견한다. 역사 종언의 시대에 전 세계를 지배하는 단일한 행성적 소시민 계급은 오히려 모든 사회적 구분을 폐기하는 파괴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스펙터클 시대를 임의적 신체가 출현할 수 있는 해방의 계기이자 새로운 언어 실험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162).

아감벤의 유토피아는 전적으로 세속적인 삶, 최후의 심판 이후의 삶, ‘만회불가능한 세계의 이념으로 표현된다. ‘세속화’, ‘역사의 종말에 오히려 구원의 기대를 거는 근거는 벤야민의 세속적인 것의 세속적 질서 역시 메시아적 왕국의 도래를 촉진할 수 있다(162)”의 사유이다. 텐안먼은 어떤 특정한 요구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국가에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고 어떤 정체성도 내세우지 않으면서 자신의 공통적 존재를 평화롭게 시위한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기존의 정체성 정치(164)로는 호모 사케르를 양산하는 국가·사법 체제에 어떤 균열도 가할 수 없다고 본다(165).

비판의 대상을 오히려 흡수·합체함으로써 그 대상을 극복하려는 사유 태도는 아감벤의 독특한 특징이다(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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