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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이론 산책하기 -전혜은 / 경성콤세미나 / 2021.09.04. / 화니짱
6장 퀴어 정동 이론
4. 감정의 문화 정치학 : 사라 아메드
p543 : 감정은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심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대상으로 구성하는 바로 그 구성 자체에 핵심인 것이다. 후자의 ‘객관성’은 그 구성 효과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문제들을 탐구하기 위해 아메드는 ‘감정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감정이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정동 이론을 구축한다.
1) 고통의 정치학 : 너만 아프냐 내가 더 아프다
p544 : 고통은 어떤 식으로 공적 담론에 소환·유통되고 있는가? ‘고통은 사적인 것’이라는 통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그 담론의 효과는 무엇이고 누구의 이득에 봉사하는가? (545) 첫째, 고통에 대한 공적 담론은 고통을 생산하는 구조를 은폐하거나 구조 혹은 공동체를 핑계로 가해자를 은폐하는 방식을 통해 가해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우리 모두의 고통’으로 부르고(546)모두가 참회해야 할 사회의 아픔으로 전유함으로써 피해자들로부터 그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 규정할 권리조차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둘째, 타자의 고통은 선량한 주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들러리로 쉽게 소비된다. (547) 타자의 고통을 다루는 공적 담론 상당수가 고통받는 타자 대신 ‘타자의 고통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우리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타자를 ’우리 느낌의 대상‘으로 박제한다. 타자가 저기 어딘가에 불쌍하게 붙박여 있을 동안 ’우리 주체‘는 타자의 고통을 대신 슬퍼하고 분노해주면서 역랴잉 강화되고, 그들을 구원해주기 위해 움직이는 기동성을 얻게 된다. 주체의 각성과 성장을 위한 땔감으로 타자의 고통이 이용되는 셈이다.
셋째, 이 적선의 구도에서 타자의 고통이 소비될 때, 주체가 도와줄 마음이 들 만큼 괴롭고 불행해야 하므로 타자의 고통은 늘 과도하게 재현된다. (548) 이러한 상황과 연관해서 네 번째 고려해야 할 것은 고통과 진정성의 골치 아픈 연결이다. 타자화된 존재들끼리 고통의 위계를 만들어 인정받을 자격을 경쟁시키는 문화에서는 ’누가 더 고통스러운가?‘가 ’누가 더 진정성 있는 피해자인가‘를 결정하는 척도가 된다.
아메드는 퀴어 페미니스트 법학자 웬디 브라운의 논의를 전유하여 사회적 소수자 운동의 정체성 정치에서 상처가 정체성의 토대로 물신화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상처가 정체성을 상징하게 되면 어떤 정치적 논쟁이 있을 때마다 ’내가 상처 입었으니 나에게 사과하라‘는 식으로 논지가 진행되며, 논쟁이 곧 ’누가 더 상처 입었는가‘를 증명하는 싸움으로 변질되어버린다. 이런 반응은 정치적 주장과, 당면한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행동할 역량”을 모조리 “복수”로 변질시켜버린다. 고통에 대한 발화는 권리 주장의 언어로 축소된다. 아메드는 이를 “보상의 문화”라 부른다. (551) 아메드는 상처를 역사화·맥락화하는 작업이 상처를 과거에 박제하여 물신화하는 대신에 현재를 변화시킬 정치적 행동을 이끌어낼 자원으로 다루는 방법이라고 본다.
2) 증오의 정치학 : 남 탓의 정치학
(552) 여기서 살펴볼 논의는 “우리 느낌의 출처로 타자들을 탓함으로써 주체를 집단에 동조시키는 방식”을 분석한다. 이 분석을 위한 핵심 개념은 정동 경제와 sticky이다. (554) 부착은 한 번 붙으면 영영 안 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끈끈하긴 하지만 스티커처럼 떼엇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것(sticky)이다. 예를 들어 혐오의 감정은 남민의 몸에 ’잠재적 강간살인마‘라는 기호를 붙게 하고, 인격이나 인권 같은 기호가 난민의 몸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정동을 이해할 때, 아메드가 “감정의 파문 효과”라고 부르는 움직임(같은 정동이 위치성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동원되고 다른 효과를 낳는 방식)을 분석할 수 있다. (555) 유사성과 동일성으로 묶일 수 있는 우리를 사랑하고 타자성과 차이로 갈라서는 저들을 미워하는 것이 증오의 작동방식이다. 이 자기애적 각본에서 규범적 주체들은 ’나는 좋은 사람인데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내 안에 끓어오르는 이 증오 감정의 원인을 타자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스스로를 피해자화한다.
3) 행복과 불행의 정치학
(1)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복할 자유
(562) 기존 권력 구조에 맞서는 소수자 정치는 고통과 거리를 두길 거부하고 “하버트 마르쿠제가 ’이 사회의 악행을 받아들이길 조장하는 행복한 의식‘이라 부른 것을 거부”하면서 그러한 과정에서 기꺼이 스트레스 받기를 감수하는 혁명적 행동일 수 있다.
행복으로부터 우리가 소외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연대를 구축하고, 사회가 규범적으로 강제하는 행복 각본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젖히려 노력하는 정치윤리이다. 아메드(563)는 이처럼 행복의 정치에 맞서는 대항 정치를 ’우연의 정치‘로 명명한다.
아메드가 이 정치로 제안하는 것은, 규범적 행복의 길을 따르려 애쓰며 삶의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형식에 끼어 맞추는 대신에, 삶에 우연히 일어나는 것들을 포용하고 행복을 목적이 아닌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로 바라볼 때 지금과는 다른 삶과 다른 세상을 창조할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2) 퀴어 느낌? : 우리에게 본질적인 정동은 없다
(568) 퀴어 정치학이 건네는 희망은 그동안 우리에게 금지되었던 타자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다른 길로 우리를 데려가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능성은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지거나, 글로벌 자본주의 교환 회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퀴어가 퀴어로서 효력이 있게끔 허용해주는 것은 퀴어의 비-초월성이다. 따라서 퀴어 희망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이 아님‘에 부정적으로 들러붙는 것을 견디는 삶의 형식의 끈질김에 직면한다는 점에서 퀴어 희망은 정서적인 것이다. 퀴어 느낌을 제일 먼저 퀴어하게 만드는 것은 규범과 가치들이고, 이 규범과 가치들이 끈질기게 지속된다는 점을 공표하는 한에서만, 퀴어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4) 슬픔의 정치학 : 타자의 고통을 가로채지 않는 애도의 윤리
(574) 고통은 심지어 우리의 가장 절친한 타자들조차 느낄 수 없는 것으로 환기된다. 동류의식의 불가능성이 그 자체로 상처의 확증이ᅟᅡᆮ. 그러한 고통을 공감을 통해 공유할 수 없는 고통으로 불러내는 것은 단지 주의 깊게 경청해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거주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는 행동하자는 요청이자, 집단적 정치에 대한 요구이다. 이때 요구되는 집단 정치는 우리가 화해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근거한 정치가 아니라 화해의 불가능성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에 기초한 정치, 혹은 우리가 서로와 더불어 살고 서로의 곁에 살아가지만 우리가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는 정치이다.
5. 나가며 : 당신의 감정은 무엇을 하는가
(576)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다음 세 가지 질문을 고민해줬으면 좋겠다.
첫째, 나는 어떤 틀을 통해 감정을 느끼는가?
둘째, 나의 감정은 어디서 나왔는가?
셋째, 나의 감정이 무엇을 하는가?
(582) 입학 예정이었던 트랜스 여성에게 쏟아진 그 수많은 공포와 분노와 혐오의 반응은, 그분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그저 트랜스라는 그 범주명 하나로 이 부정적 반응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특정 개인에게 공포와 혐오의 모든 책임을 전가한 것이었다. 당신이 이 공포와 불안을 성찰하지 않은 채 그저 방출하기만 한다면, 그 결과 트랜스젠더들은 감당하기 힘든 폭력에 노출된다. 당신은 그저 감정을 느꼈을 뿐이라도, 그런 개개인의 감정 반응이 모여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와 배척에 정당성을 부여해줬고, 혐오폭력이 비열한 놀이로 활성화되는 상황을 방치했다. (583) 트랜스 혐오과 관련된 주장에 어떤 전제가 깔려있는지 계속 살펴보고, 자신의 느낌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감정이 폭력을 정당화할 근거로 쓰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무리 : 퀴어 이론 아직 안 죽었다
p618 : 일단 퀴어 이론의 죽음을 선포하려면 퀴어 이론을 통일된 하나의 이론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퀴어 이론은 단일체로 묶일 수도 없고 완결된 학문도 아니다. (619) 섹슈얼리티가 인간 본연의 욕망이라는 정신분석적 전제를 기반으로 구축한 작업 중 상당수는 에이섹슈얼리티라는 항목이 들어오는 순간 바닥부터 다시 갈아엎어야 할 것이다. (620) 미국의 심리학자 실번 톰킨스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추고 중심으로 모이고 모든 현상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론을 강한 이론이라고 부르고 반대로 탈중심화하는 이론들을 약한 이론이라 불렀는데, 퀴어 이론은 그 성격상 약한 이론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점에서 항상 교차성 이론이어야 한다. 이 교차성은 '퀴어'로 묶이는 집단 안팎 모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621) 우리는 이 수많은 다름과 충돌과 얽힘에 우선순위를 매기지 않고 함께 힘을 모을 방안을 찾아야 한다. (623) 퀴어이론은 현실과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퀴어 이론은 이 사회의 규범 체계가 현실로 인정치 않는 다른 현실들에서 출발한 이론이다. 지금까지 '세상에 그런 사람 없다'는 말을 들으며 현실로 치부되지도 못했던 존재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이론이다.
(624) 그런 의미에서 퀴어 이론은, 버틀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능성에 가치 부여하고 불가능성을 요구하는 실천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현실을 생산하는 틀 안에 별 불편없이 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인정을 부여해주는 현재의 지배적 인식틀로부터 배재된 존재들에게 지금과는 다른 틀을 짤 가능성이 배제와 폭력을 넘어 삶을 인간답게 만들 희망으로 작동한다. 불가능에 대한 요구는 이 지구상의 모든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요구이고, 퀴어 이론이 나아갈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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