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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이택광 / 출항, 에필로그 / 21.06.20. / 화니짱

버지니아울프북클럽 발제(21062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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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제국에 반대하다

이 소설에서 특기할 점은 원주민을 교육해서 문명인으로 만들기 위해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한다는 견해를 울프가 반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울프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 말이야말로 제국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허구라고 생각했다. (237) 울프 부부에게 제국주의는 다른 무엇도 아닌 자본주의의 문제였다. 울프 부부의 제국 비판은 나쁜 영국인들을 부각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백인의 임무라는 선의가 비참한 식민지 현실을 낳게 되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241)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가장 값싼 시장에서 사서 가장 비싼 시장에서 팔아서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원리, 이상, 의무를 수용한다. 이런 원리가 아프리카 문제의 근본 이유이다. 유럽은 아프리카인과 그들의 땅을 무엇인가 수익을 창출하는 곳, 가장 싸게 사서 가장 비싸게 팔 수 있는 곳으로 취급한다.” <아프리카의 제국과 산업>

 

(홉슨에 따르면) 민족국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제국주의는 국부 유출이고 영토 확장에 광분한 위정자들의 쓸데없는 낭비 행위일 뿐이다. 수익창출을 목적으로 하지만 사실상 고비용에 수익은 나지 않을 것이라는 관점이 지배하고 있다.(244)그러나 여성에게 조국이란 없다라는 주장을 펼친 버지니아 울프는 단순한 경제주의적 발상을 넘어서서 발언했다. 울프는 민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구축된 것인지, 젠더 정치가 어떻게 반제국주의의 문제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웸블리의 천둥세 닢의 금화에서 명쾌하게 밝혔다. 버지니아의 제국주의 비판은 자본주의 비판인 동시에 민족국가 비판이었다.(244)

 

울프는 글쓰기를 정치의 문제로 파악하고 새로운 주체화의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당대의 지식인보다 앞서 다가올 시대를 예견했다. 지금 여기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245)

 

에필로그

버지니아 울프에게 소설은 여러 쓰기 중 하나였을 뿐이다.(247) 당시에 책 읽는 여성은 영국의 상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248) 소설의 주인공 델러웨이 부인은 울프 자신이기도 했다. 이처럼 울프에게 글쓰기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도 했다.(249)잘 알려진 의식의 흐름기법은 울프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기 위한 치유장치였다. 그러나 울프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고 쓴 것이 틀린 진술은 아니다.

블룸즈버리그룹이 내세운 모더니즘 운동에서 핵심적인 미학적 기법으로 차용된 것은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 다중관점 그리고 시간왜곡이었다. 그렇지만 분명 프로이트의 글을 읽은 뒤에 쓴 소설 <등대로>는 정신분석학적인 통찰을 곳곳에서 보여준다.(252) 울프는 왜 마음의 문제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가졌을까? 울프는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고, 급기야 남편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명예죽음을 택하게 된다. 울프의 행동은 고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특유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울프가 어린 시절 오빠에게 성적학대를 당하고 그 상처를 직시하면서도 결코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키지 않았다. 그에게 글쓰기는 그 모든 상처를 넘어서는 냉철한 행동이었다.(253)

에세이라는 형식을 일컬어 울프는 거의 모든 에세이는 나로 시작한다.”라고 말하면서, 이런 일인칭 서술의 관점이야말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사적 에세이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에세이는 아무나쓸 수 있다. 울프의 동시대인들은 조상들보다 훨씬 더 쉽게 펜을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진보주의자 울프를 발견한다. 그러나 사적 에세이에 대해 그는 냉철하게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인쇄된 말들 아래에 어떤 신탁이나 무오류의 본성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상 그 잉크로 찍힌 글자들이 전달하는 것은 건조한 에고이즘의 표현일 뿐이라고.(255) 에고이즘이 꽃을 피우면서 등장한 사적인 글쓰기는 음악이나 문학 또는 다른 예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특정 대상에 대한 개인의 호불호를 표현할 뿐이다.(이슬아를 포함해 요즘 잘 나가는 에세이들이 불편한 이유) 비평이랍시고 쏟아지는 글들도 진리 따위야 무엇이든, 어떤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지극히 사적인 평가를 남발하기에 바쁘다.(256)

 

혁신적인 장치가 아니면 나에 대한 이야기만 넘쳐나는 시대에 소설은 제대로 진리를 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울프가 왜 의식의 흐름을 소설의 기법으로 사용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겠다. 울프에게 중요했던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흐르는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곧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했다.(257)

 

울프는 난무하는 나에 대한 신변잡기들이 무미건조하고 답답한 소음이라고 생각했고, 나의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무수한 다른 형상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특정 장소와 시간에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제약을 뛰어넘어 흐르는 것이었다. 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시간성에 속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과거를 말하고 미래를 말하지만, 항상 현재에 있다. 현재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를 살게 되고, 미래로 나아간다. (-> 미래공생교육)

 

(257)이런 울프의 의도를 이해하면, 의식의 흐름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다를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울프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상상력이지 분석이 아니었다.

울프에게 소설은 마음의 작동을 보여줄 수 있는 현미경과 같은 것이었다. 사적 에세이에 대한 비평에서 울프가 인정하듯이, 근대는 바로 나를 중심으로 구성된 에고이즘의 시대였다. 모두가 나를 주장하는 시대는 이율배반의 상대주의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이 허무하고 냉소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울프가 붙든 것이 바로 모던 픽션이었던 것이다.

일기와 소설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었다면, 에세이는 남의 이야기를 읽고 쓰는 일이었다.

울프는 문학 이론에 맞추어 글을 쓰거나 미리 청사진을 그려놓고 소설을 창작하는 것을 거부했다. 다시 말해서 몸의 작동이 글을 쓰는 것, 울프는 그렇게 온몸으로 밀고 가는 글쓰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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