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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신천하질서 : 새로운 중화, 새로운 천하

경성콤세미나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 쑹녠선 /21.05.16 화니짱

경성콤 210516 발제(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쑹녠선 4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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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부 외교’ : 권력과 문화가 된 조공

일강이 홀로 큰 구도 속에서 상대적으로 약소한 쪽은 흔히 대국보다 더 질서의 안정성에 의존하며, 또한 도의적 책임을 더욱 강조하여 대국의 권력을 제약한다. 이는 바로 원래부터 존재해온 자주의식의 체현이다. 이른바 소중화인식은 조선이 중화의 支脈(지맥)이 되는 것을 기꺼워했다기보다는 조선이 중화를 자인했으며 단지 규모가 조금 작았을 뿐이라고 해야 한다.(109) 만주가 중원을 차지하자, -이 관계의 비정상적 변화(화이변태)는 더욱 엘리트 사인의 문화적 위기감과 문화적 우월감을 자극했다. 여기서 중화는 먼저 국가적 의미의 중국이 아니라 이학도통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110) 청일전쟁 이전 수백 년 동안 종번 제도는 동아시아 범위 내에서 보편적인 제도였다. 역내 많은 국가들이 모두 이를 대외 교류의 원칙으로 삼았고, 그 가운데는 오랜 시간 동안 중원의 천자를 최고 권위로 여기지 않은 일본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의례 제도는 공식 무역의 권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유럽의 국가와 회사도 초기에 동아시아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제도에 참여해야 했다. 이는 오늘날 하나의 국가가 이미 성숙한 전 지구적인 무역 메커니즘(예컨대 WTO)에 가입하여 이 안에서 모든 국가가 함께 신봉하는 각종 제도적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111) 외교천하가 예제를 둘러싸고 건립된 하나의 등급 질서라고 인식하며, 현대 외교는 국제를 주권국가가 공법의 원칙에 따라 구성한 평등체계라고 인식한다. 두 가지 구상은 모두 단지 이상적인 상태를 묘사할 뿐, 현실 속의 권력 관계와는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양자는 유사하며, 어느 제도가 더 문명, 선진인지 말할 수 없다.(112)

 

2. 내륙아시아 제국: 만주, 몽골, 티베트 정치-신앙 공동체

종번 체제는 이른바 가족종법 제도가 내정과 외교로 확대된 것이다. 청은 동아시아 이웃 나라들과 몇몇 역외 국가에 대해 명의 종번(조공) 재도를 계승했다. 바로 앞에서 말한 예부 외교. 그러나 이와 나란히 또 다른 일련의 제도를 활용해 내륙아시아 변강을 관리했다.(113)

황족은 만인 제실에서 샤먼 의식을 거행했으며, 라마교 사원에서는 예불을 했고, 불교와 도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청 황제의 다원적인 역할을 각별히 구원해주웠다. 그는 중원 및 동아시아 제국에 대해서 천자였고, 만주에 대해서는 부족의 수령과 가장이었으며, 몽골에 대해서는 대칸이었고, 티베트 지역에 대해서는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 다원적 이데올로기가 청에서 하나로 섞이는 것은 두 가지 조건에 달려 있었다. 하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장기간의 적응을 거쳐 상호 포용하면서 배척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모든 정치 합법성의 자원들이 모두 天命(천명) 관념에 대한 숭배로 통합되는 것이다. 바로 이로 인해, 청 치하의 한, , , (티베트)은 모자이크 같이 제각기 운영된 것이 아니라 천명을 받드는아래 다원이 하나로 혼합된 것이다.(120)

 

3. 청과 러시아의 충돌: 유럽-아시아의 만남 속 중국의 재구성

지구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여겨지는 충돌이 흑룡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바로 러시아의 동진이 야기한 청-러시아의 충돌이다.(122) 16898월 러시아 대표 표도로 골로빈 백작은 청 측 대표와 네르친스크에서 처음으로 만나 경계 획정과 도망인 귀환 등에 관한 사안을 담판했다. 두 제국은 모두 상대방을 자신이 받드는 등급 질서 속에 포함하지 않았고, 담판 방식, 수단, 언어는 물론이고 좌석마저 평등하게 하려고 애썼다. 러시아 측에는 러시아, 카자크, 몽골, 폴란드인이 있었고, 청 측에는 만주, 몽골, 한인 및 유럽 선교사가 있었다. 그들이 의거했던 담판 정신은 당시 유럽에서 막 초기 형태가 출연한 국제법 원칙이었다.(125) 이듬해 완성된 경계비는 한 면이 라틴어와 러시아어로 새겨졌고, 다른 한 면은 만, , 몽 세 가지 문자로 새겨졌다. 청 측이 가리킨 중문이란 단일한 문자가 아니라 만, , 몽 세 언어를 포함하는 복수의 중국 문자였다. 국제 조약에서 중국 개념을 다언어 텍스트로 만, , 한 여러 지역을 포함하는 국가라고 고정한 것은 네르친스크 조약이 첫 번째 사례다.(127)

전 지구적 무역의 자극 아래 자유무역 체제도 청-러 관계 속에 도입되었다. 이러한 대외적 제도 배치는 전통적인 조공과 다르며, 종번 제도가 주도하는 천하를 더 다원적이고 융통성 있는 면모로 전개되도록 했다.(129)

 

4. 중화의 초점을 잃은 천하

16세기 말에서 17세기까지 조선전쟁과 만주의 굴기가 가져온 지역의 동요는 정치권력과 이데올로기 두 측면에서 동아시아 지정학의 새로운 구도를 열었다. 그 가운데 주권국가로서 중국, 일본, 조선/한국을 포함한 현재의 동아시아는 이 구도를 매우 많이 계승했다. 만약 이를 동아시아 세계 초기 현대의 한 기점으로 상정한다면, 이때를 기준으로 과거와 가장 크게 단절된 면은 대체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중원을 중화로 한 명대의 그 천하는 변이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천하기제를 계승, 개조하면서 크게 확충했다. 그리고 중화는 다원 질서 속에서 이미 더 이상 유일한 참조 체계와 중심이 되지 못했다.(130)

만주정권이 중원을 지배한 지 4년 뒤인 1648년 독일의 베스트팔렌 지역에서 수십 개 유럽 국가와 신성로마제국 내의 여러 국가는 일련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30년 전쟁(그리고 스페인과 네덜란드 간의 80년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일련의 조약은 후에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통칭되었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시작이며, ‘현대국제체제 건립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 중요한 유산은 국가의 주권 지위, 각국 간의 평등관계, 종교적 자주, 상호 내정불간섭 등을 포함하여 몇 가지 기본적인 정치원칙을 도출한 것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진동과 마찬가지로 주권/민족국가의 흥기는 이미 흔들흔들 무너질 것 같은 유럽의 도통’(교권과 황권)을 더욱 중요치 않게 만들었다. 교황 또는 신성로마체국 황제는 더 이상 국가 정체성 인식의 참조 체계가 아니었고 각국 자체의 주체성이 전에 없이 강화되었다. 조약 체결 수년 뒤 영국인 홉스는 사회계약 정신으로 국가 절대 권위의 내재적 원칙을 논증했고, <리바이어던>에서 국가에 대한 종교의 제약에서 벗어날 것을 대담하게 주장했다.(135)

홉스는 ‘교황의 권력’을 ‘로마의 유령’이라고 부르면서, <리바이어던>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은 액막이를 하여 쉽게 그들을 쫒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쫓겨나간 로마의유령이 언제 다시 올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 그 유령은 중국과 일본과 인도제국의 메마른 땅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다. 로마의 유령보다 더 가증한 유령의 떼가 이처럼 깨끗하게 청소해 놓은 집에 다시 들어와 처음보다 더 나쁜 상황을 만들어놓지 않으리란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로마의 성직자들 외에도, 하느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 있다고, 그러니 시민국가의 권력과는 다른 어떤 권력을 행사하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또 있기 때문이다.”(<리바이어던> 2권 421쪽)

 

베스트 팔렌 체제는 천하 질서와 마찬가지로 지역성의 제도 배치일 뿐이었다. 유럽국가는 그것을 지구의 보편적 제도로 확장할 뜻이 없었다. 주권 평등이 해결한 것은 기독교 세계 내부의 세력균형 문제였다. 일단 기독교라는 천하에서 벗어나자 대체로 식민주의적 논리만 남았다. 페어 뱅크는 동아시아 질서의 현대화를 조공 체제가 19세기에 외래적, 평등한 조약 체제로 대체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체가 의존한 것은 주권 평등의 원칙이 아닌 무수한 불평등조약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 식민주의 원칙이었다. 그 최종 목적도 중국을 평등한 정상 국가로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루시안 파이는 중국은 단지 민족국가 체제에 속하는 또 다른 국가가 아니다. 중국은 하나의 국가로 가장한 하나의 문명이다.” 이 말은 마치 국가가 단지 주권/민족국가라는 형태만 있는 듯 오해를 살 수 있다.(137) 설사 1648년부터 셈하더라도 주권/민족국가의 존재는 300여 년의 시간에 불과하다. 그것이 진정으로 일종의 전지구적 체제가 된 것은 훨씬 늦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1955년 반둥회의를 지표로 삼아 식민에서 벗어난 광대한 제3세계 국가는 마침내 주권 평등의 원칙을 실행할 기회를 가졌으며, 중국은 바로 가장 중요한 추진력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때 냉전은 이미 시작되었고, 양극의 패권이 경쟁하면서 명목상의 주권 평등은 실질적으로 유명무실해졌다. 냉전이 종식되자마자 현대 민족국가를 탄생시킨 유럽은 오히려 초주권/민족국가 정치체(유럽연합) 건설에 속도를 올렸다. 그러니 보편제도로서 주권/민족국가가 존재한 시간은 실로 너무 짧다. 중국이 무슨 필요로 가장했겠는가? 가장을 지적하는 것은 어쩌면 현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역사의 연속성이 결국 단절성보다 크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현대는 하나의 목적이 설정해놓은 방향 또는 역사를 다루는 어떤 단일한 방법일 수 없으며, 유럽으로부터 전 지구로 확장된 기제는 더욱 아니다. ‘현대자체는 다원적이며, 서로 다른 현대간의 상호 영향은 또 그들 간의 상호 배척보다 훨씬 중요하다.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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