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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다시 현해탄을 건너야 했던 사상사적 곡절
경성콤세미나 /내가 읽고 만난 일본- 김윤식 /21.05.09 화니짱
비평과 학문의 한복판에서
김윤식은 <내가 읽고 만난 일본>에서 ‘한국근대문학에 미친 일본문학의 영향’이 1970년도 도일 목적이었으며, 보기 민망할 만큼 실패했다고 선언하며 7장을 시작한다. 실패의 원흉은 3부류의 사람이다. 첫 번째가 루카치, 두 번째가 미시마 유키오, 마지막이 고바야시 히데오와 에토준.
첫째의 것은 인류사에 관련된 것. 김윤식은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너머의 황금시대와 그것을 카프 문학에 연결시키려고 했으나 역량부족으로 실패했음을 인정한다.
두 번째는 어째서 문학은 자살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탐구하지만, 정치적 죽음에 앞선 ‘문학적 죽음’의 깊은 의미를 알아내진 못했다.
세 번째는 문예비평가인 미야시 히데오와 에토준이 연구자인 김윤식을 가만히 두지 않고 흔들어댔다. 그에 따르면, 연구자의 길이란 도서관과의 긴 시간의 싸움이고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이나 괴물로 만든다. 왜냐하면 모든 일상사를 외면하거나 포기했기에 가까스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예비평이 날생선처럼 생기 있는 생명의 녹색이라면,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헤겔 또한 <법철학 서설>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야 비로소 난다고 하며 ‘회색의 시간’을 지혜의 시간으로 찬양한다. 모든 사태가 끝장 났을 때야 비로소 사태의 진상을 분석할 수 있으니까.(맑스와 니체는 ‘회색’의 시간을 비판한다. 그림자가 본체보다 길어지는 시간, 판타고리아)
한 인간의 삶이란 아무리 굉장하거나 시시해도 그의 죽음과 더불어 끝장나는 것, 반면에 그가 남긴 작품이란? <악령>, <죄와 벌>을 보시라. 김윤식은 그의 죽음까지를 다루는 쪽이 학문이라면, 그의 작품 쪽을 다루는 것이 문예비평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 작품이다. 이 아득함을 막아보고자 한 사람이 고바야시 히데오였다.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고전 속으로 도피하면, 헤맴의 강도가 크게 단순화되어 헤맴에 휩싸여 자기 상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에토 준은, 개를 방패 삼아 ‘아득함’을 막아보고자 했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몸을 살짝 비키기. 국가, 민족, 메이지유신, 천황제, 해군, 조상, 요컨대 ‘근대’라는 거대담론에다 헤맴을 해소시키기. <소세키와 그의 시대>라는 표제가 말하듯 작품보다 작가를 시대와 맞세우기. 영리한 속임수. 이에 비하면 무상 쪽에 잠겨간 고바야시 히데오가 오히려 정직했다. 그는 온몸으로 고전(작품) 속으로 쳐들어갔고 거기서 양처럼 순해져 스스로 장담한 <고린도후서> 5장 13절(For whether we be beside ourselves, it is to God: or whether we be sober, it is for your cause.)을 용케 피해갈 수 있었다. 에토 준의 자결은 이 점에 비추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강아지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처의 죽음에서 그는 비로소 진짜 ‘아득함’(고린도후서)에 직면했고, 이를 통렬히 지시해 준 것이 그 자신의 폐뇨증이었다.
2. 고립무원에 직면하다
이 두 비평가의 삶과 죽음이 김윤식에게는 미해결의 과제였다. 그는 학자도 못되었고 그렇다고 이어령의 <저항의 문학>같은 비평문도 한 줄 쓰지 못했다.
김윤식은 1974년 여름, 보안사에 연행되어 도쿄 체류 중 행적에 대해 조사받는다. 그는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 고립무원의 감정이 몸을 에워싸는 경험을 한다. 집에 들어가기 무서워 극장 단성사에 들어간다. 열린 공공장소였기에 무조건 들어갔을 뿐이었다. 극장 안의 어둠 속에서 화면의 환각을 백치 모양 멍청히 보고 있었다.
3. 식민지 수탈론의 시선에서 본 근대론
학문의 길을 버거워하던 김윤식이 혼신의 힘으로 알아낸 것이 프랑스혁명(1789)이래의 a 국민국가와 산업혁명 이후의 b 자본제생산이었다. a와 b를 지향하는 도중 식민지에 편입되는 특수성으로서의 한국의 현실. 따라서 c 반제투쟁 d 반자본제투쟁의 필연성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이 모순성을 극복하는 방도는 무엇인가. 김육식은 근대를 깊이 파헤치는 길뿐이었다고 말한다. 나라를 세우긴 했지만, 역사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조만간 또다시 식민지화되기 마련인 것. 애써 굳이 RK나 DPRK 따위를 만들면 뭐하느냐. 이 점을 학문적으로 필사적으로 밝혀 보라는 것이 남북이 인문사회학도에게 국가적 요청사항으로 강제했던 것이다. 요컨대 인문사회학이란 제2의 독립운동에 준하는 것이었다. 방법은 하나. 정면돌파, 곧 근대의 탐구뿐. 이 근대의 한가운데 높여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것이 문학 쪽에서는 카프였다.
근대란 곧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자체 내의 합리적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내적 발전으로서의 근대이며 그것은 당연히도 자본제 생산양식의 여부에서 판가름 나는 사안이었다. 일본을 통한 근대와는 상관없이 18세기 후반에 대해서 김현과 <한국문학사>를 쓴 것은 이 내적 발전론(자생적 근대성)이야말로 자존심의 근거이자 학문상의 성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윤식의 이러한 신념은 카프문학 앞에서 다시 아득해진다. 제2의 근대성이 거기에 가로놓여 있었는데, 두 가지 근대성끼리 서로 십자포화를 쏘고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제 생산양식에다 상상의 공동체를 양날개로 하는 근대란 그 자체가 우리가 놓여있는 현실 자체였기에 무시할 수 없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치열해진다. 왜냐하면 또 다른 근대성이 가만히 있지 않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김윤식이 단성사에서 본 환각이 바로 그것.
사람들은 이를 유토피아, 인류의 해방으로서의 근대라고 불렀다. 이 황금시대의 꿈, 이것야말로 진짜 근대성이 아닐 것인가. 자유가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보라. 조금이라도 이런 꿈을 내세운다면 또 다른 근대라는 이름의 현실이 여지 없이 쇠뭉치로 내리치며 저들의 감옥에 처넣게 마련이다. 현실의 근대가 황금시대의 근대(자유)를 몰아치고 있는 것, 그것도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문학적 현상이 카프문학으로 보여 마지않았다. 그것은 보편성으로서의 국민국가, 자본제생산과 특수성으로서의 반제투쟁, 반자본제투쟁의 관계와 쌍을 이루는 것, 곧 절대모순성이 그것. 여기에서 벗어날 방도는 있는 것일까. 이쪽에서 보면 저쪽의 황금시대란 근대이기는커녕 일종의 황당무계한 망집에 지나지 않는 것. 이 망집 쪽에서 보면 현실이란 감옥이거나 지옥에 다름 아닌 것. 현실의 근대는 이에 맞서가나 트집잡거나 어깃장을 놓는 망집을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망집 쪽이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 있으랴. 자유가 결여된 현실의 근대성이 옥죄어 올수록 절대모순을 뚫는 방도는 가까워질 수 있었다. 황당무계한 꿈을 벌주거나 제재할 어떤 방도도 현실의 근대성은 갖추고 있지 않았던 까닭이다. 모순성을 뚫는 길은 그 모순이 절대적 경지에까지 이르렀을 때 비로소 숨구멍이 열리는 것. 이를 반야심경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여 卽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 <아시스와 갈라테아>를 보고 싶은 내 욕망은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4.황금시대의 환각 - <아시스와 갈라테아>
문제는 이 자유의 개념에서 왔다. 환각으로서의 자유인 까닭에 과격함을 피하기 어려웠다.
카프문학 그것은 현문단의 분단문학과 노사문학 양쪽에 걸린 과제의 뿌리에 닿은 것이어서 골동품일 수 없다는 것. 그러나 한편 이것은 영락없는 골동품, 부엉이의 일종임도 사실이 아니었던가. 나는 실상 이 후자에 매력을 느꼈고, 여기에다 승부처를 두었다. 학문(과학)이 그것이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체계이다. 체계는 사관과도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다분히 간접적이다. 사관이 단일 뿌리에 비중을 둔 직접성이라면 후자는 리좀형이라고나 할까.
작품과 비평 사이에 놓인 역사란 실로 아이러니한 존재여서 어떤 때는 작품쪽에 서기도 하여 비평을 조롱했고, 또 그 반대현상도 서슴지 않았다. 이 괴물의 양가성을 제압하는 방도는 무엇인가. 작품에서 괴물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비평만을 따로 떼내어 독자적 영역 확보에 나아가기, 이를 비평사의 독립선언이라 부를 수도 있었다. 이 독자적 체계 우선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라고 여겼지만 몇 년을 두고 현실에 부딪쳐 보니, 대낮의 사상임을 동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일 이 대낮의 사상을 그대로 살리고자 하면 응당 김윤식은 5월의 광주에 끼어들었어야 했다.
현실이 두려워, 힘껏 뒷걸음쳐 도망한 곳이 희랍시대였다. 희랍시대가 루카치의 황금시대였을까. 루카치는 용감하고도 총명한지라 악마와 맞서 어깨를 겨누고자 했다. 환각을 현실 속으로 이끌어 내려 환각과 현실을 동시에 살고자 했다. 그 무기가 바로 비평이었다. 환각도 비평 앞에 무릎을 꿇었고 현실 또한 그러했다. 혁명정부의 교육상까지 맡을 만큼 그러했다.
유럽의 한복판,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맞붙은 인류사의 최첨단에 그는 서있었다.
5. 법화경 행자를 찾아서
환각과 현실의 무릎을 동시에 꿇게 한 비평이란 인류사의 전망 아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 DMZ와 5월 광주 속에서는 비평이라는 무기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었다. 김윤식의 비평은 헛발질일 뿐이었다.
그때 한 괴물, 아니 두루마기를 입은 중년의 촌로가 다가와 말한다. “아가야, 너는 시방 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앉지도 못해 엉거주춤 서 있다. 좀 더 가까이 오라”라고. 이 사내의 무기가 붓이라는 것. 무기가 아니라 빚 갚기 위한 붓이라는 것. 인류사를 위해 제우스의 번개불 칼이 요망된 루카치의 경우와 얼마나 다른 들판인가. 대체 붓으로 어떻게 빚을 갚을까. 또 대체 무슨 빛을 그렇게 졌을까.
그것은 민족에 대한 빚갚음이 아닐 수 없었다. 조상, 가족, 민족의 끈에 묶인 개인의 운명이 거기 있었다. 참회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벗어나기에도 시기상조인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는 것일까.
문명개화가 살해한 것이 님, 붓 한자루로 살해된 님에 대한 보답이 어떻게 가능할까. 민족과 개인의 관계 설정이 바로 이 한복의 중년에게 주어진 길이었다. 법화경 행자의 길. 김윤식이 그 무거운 이광수 전집 10권을 들고 현해탄을 건넌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강변 포플러숲에서 자란 소년이 드디어 까마귀와 붕어를 속이고 길을 떠난 이래 4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번에는 분명 나는 현해탄의 수심을 잴 수 있었다. 아무도 수심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겁도 없이 날아갔다가 날개가 젖어 공주처럼 지쳐 돌아오는 전례(<바다와 나비>, 김기림)애서 나는 벗어날 힘이 있었다. 악마가 나를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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