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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지중해 프랑수아 지푸루 / 2/ 2022.01.09./ 화니짱

아시아지중해 2부(22.01.09).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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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시아 지중해의 초기 윤곽 : 조공무역의 우세

 

4. 아시아의 교역왕국과 독립적인 도시공동체: 7세기부터 17세기까지

p97: 해양공화국과 한자동맹이 번영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국가로부터 독립된 도시라는 전통이 유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이 두 도시 모델은 상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법적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지중해와 발트해 모두에서 도시의 자유는 다음 네 가지 특징을 지닌 도시 주권이라는 개념을 형상화시켰다. 즉 자신의 해군, 영토 장악이 아니라 교역에 필요한 해상의 교통로와 전략적 지점에 대한 통제 의지, 시민법 전통의 보전과 공고화 그리고 입증된 상법이 그것이었다.

아시아에서도 국가로부터 독립된 도시라는 전통이 있었는가? 선례는 드문 편이나 교역활동이 활발했던 자치적인 정치체가 여럿 있었다.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수마뜨라의 스리위지야, 1511년 포르투갈에 점령되기 이전 15세기의 믈라까,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일본과 중국 간의 주요 교역지였던 류큐섬(현대의 오키나와)의 수도 나하, 오사카만에 위치한 일본의 해항도시 사카이, 마지막으로 1661년부터 청에 점령된 1683년까지 명에 충성했던 강력한 상인간문인 정씨 지배하에 있었던 타이완을 들 수 있다.

 

5. 아시아에서 교역의 조직화 : 중앙정부 독점체제의 무게

p117 : 지중해와 한자의 예와는 달리 아시아에서 역내 교역은 두 개의 특정 양식에 따라 전개되었다. 이러한 교육은 그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분석은 더욱 어려워진다. 하나의 형태는 조공무역으로, 이는 관료제라는 단단히 조여진 코르셋 안에 둘러져 있었으며, 외교의 장막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다른 형태는 비공식적 형태인데 때로는 사무역으로, 때로는 밀무역 심지어는 해적 행위라도 불린다. 이는 정부가 고삐를 느슨히 하면 번성했고 조이면 쇠퇴했다. (120) 1127년 이후 조공품을 실은 모든 무역 사절단은 해로를 이용해 중국에 갔다. 즉 해양실크로드는 북부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민족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의 접근이 봉쇄당했기 때문에 다시 활력을 얻었다. (122) 경제적인 어려움과 인구의 압력으로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12세기부터 계속된 이러한 대이동은 동남아에 첫 영주중국인공동체(화교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일상생활은 바다에서의 교역이었다. 이들은 부모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을 뒤에 남기고 주저없이 야만인과 함께 살았다.”

(125) 왜 중국에서는 교역의 다각화와 전문화가 제도화(상업혁명)되지 못했는가?

이탈리아에서의 관행은 비교적 정교한 해상 보험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바년 중국에서 위험은 투자자가 아니라 상인이 부담했다. (127) 서양에서 계약은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진 이상 법적 구속의 대상이 되는 둘 혹은 그 이상의 당사자 간의 합의를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중국의 계약법은 어떤 법적 형식 내지는 공식화 없이 발전되어온 다수 관행의 결과물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계약법에는 어떤 권위도 없었으며, 이는 관습법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129) 조정이나 타협을 중시하는 유교 도덕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정에 가서 시비를 가리는 일을 꺼리게 했따. 상업적인 분쟁이라는 영역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행정이 사법체제를 대신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중국과 서양의 전통을 구별짓는 본질적인 차이이다.

-> 유교적 통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엘리트 관료제가 상업주의와 사법체제를 모두 압도하는 형세. 그렇다면, 최근 한국사회에서 사법권이 정치적 해결책으로 도래하는 국면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6. 조공무역과 비공식무역

조공무역체제는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즉 당에서 청까지 중국의 외교관계를 지배했다. 그 목적은 유교의 덕치에 부합하는 위계질서를 세우는 데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131) 명 조정은 조공무역에 내재해 있는 손실의 규모를 제한하기 위해 조공의 빈도는 물론 공물을 실은 선박의 숫자, 화물의 양과 가치를 정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136) 교역의 공간은 내해였다. 이 용어는 동해 혹은 일본해보다 더 적절한 용어이다. 이는 하나의 해역이다. 그리고 이 용어는 중국의 해안 지방 뿐만 아니라 한반도, 일본 서부, 류큐제도 그리고 동남아를 포괄하고 있는 해역의 통일성을 잘 드러내준다.

(138) 명조가 선포한 해금(해외로의 여행과 해외 교역 금지)정책으로 인해 수천 명의 중국인 상인이 중국을 떠났다. 15세기 초에 이들은 강력한 해외 화교사회를 형성했다. 이들은 명 조정에 보내는 조공사절에 살짝 끼어서 계속 중국과의 교역에 종사했다. (139) 사무역이 불법이었던 이런 맥락에서 해적이 출현하는 것도 당연했다. “강도와 상인은 같은 사람이다. 시장이 열려있고 교역이 허용되는 곳에서 강도는 상인으로 변했으며, 시장이 닫치고 교역이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 상인은 강도로 변했다”. (139) 공식적으로 무역 허가를 얻기 이전에 유럽인들의 지위는 허가를 받지 못한 다른 중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명 왕조는 포르투갈인을 새로운 형태의 해적으로 보았다.

 

7. 아시아 역내교역에서의 일본의 위치 : 중국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

p144 : 네덜란드에게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동남아와의 해상 교역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인들로 이들은 네덜란드의 교역 사업을 위태롭게 했다. 네덜란드는 일본인 선박이 동남아와 교역하도록 허용되는 한 가톨릭 선교사들이 몰래 일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힘들 것이며 종교적인 복음주의와 상업적인 야심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얽히게 된다고 쇼군을 설득시키기에 이르렀다. 같은 맥락에서 네덜란드는 일본에 대한 다른 동인도회사들의 이기적인 의도를 일본정부에게 알려주었다. 1635년 막부는 주인선 무역이라는 교역체제를 종결시켰다.

(147) 도쿠가와 시기 일본은 자신을 중국과 동등하다고 여겼다. 이는 참으로 쇄국의 긍정적인-동북아에서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이라는-측면이었다. 역사가들은 부정적인-유럽국가들과의 단절이라는-측면을 보아왔다.

(150) 일본인은 스스로가 오랫동안 기본적으로 농업에 치중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때로 일상의 많은 부분을 바다에 의존했다. 그리하여 아미노 요시히코는 중세 일본을 국가가 아니라 해민의 공간, 벼농사 공간, 산악 지대 등이 착종된 공간으로 파악한다.

 

8. 아시아의 해양 체제

(165) 송은 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항구 기반시설의 증강, 구축과 조선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중국인은 강력한 원양 무역 함대를 건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이 세워진 지 겨우 두 세대도 지나지 않은 1433년에 이르면 언급할 가치가 있는 중국인의 해양활동은 거의 없게 된다.

(166) 해상활동의 금지, 조공제도, 관세제도는 중국인의 외부 세계와의 상거래를 바다 깊숙이 가라앉게 만든 세 가지 메커니즘이었다. 중국은 무역에 대해서는 국가 독점이 유지되고, 상업에 대해서는 경멸하며, 상인공동체는 집단적인 약체를 드러내고 있는 국가인 것처럼 보였다.

사무역은 조공 사절로 위장했다. 해금은 밀무역의 번성을 심각할 정도로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밀수는 세관이라는 제도 바로 그 아래에서 자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왜구를 비롯해 해적은 물론 수많은 중국인을 비롯하여 동남아의 상인들은 해상 교역에 부과된 제한을 뛰어 넘으려고 노력했으며 얼마간은 성공했다.

제국이 교역 흐름에 부과한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구속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내해를 가로지르는 교역이라는 해류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수많은 이들을 개입시켰다. 이 해양체제의 활력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럽 세력을 끌어들일 정도로 강력한 촉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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