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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세계사 3,4장 발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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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중국이 '바다의 제국'이었던 시대 - 유라시아 바다의 전성기

1. 정크와 도자의 길

정크 교역권의 확대

이슬람 상인의 시대에 이어 정크를 탄 중국 상인이 동남아시아에서 남인도에 이르는 대교역권을 형성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이슬람 교역권과 중국 교역권으로 유라시아 해역이 둘로 나뉜 것이다. 이 시기의 정점에 위치하는 것이 몽골 제국 시대였다. 서아시아와 동아시아가 모두 몽골 제국에 편입되면서 유라시아의 해상 교역이 눈에 띄게 활발해진 것이다. 교역이 선에서 면으로 바뀌는 이 시대를 '아시아 제2차 대항해시대'라고 할 수 있다.

10세기에서 15세기 초는 '육지의 제국' 중국이 '바다의 제국'으로 변신하여 해역세계로 적극적으로 진출한 시기였다.

도자의 길의 중심 삼불제와 고림

 동남아시아 해역에 진출한 정크는 이미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에 커다란 교역 네트워크를 갖고 있던 삼불제를 중계거점으로 이용했다. 한편 지중해에서는 이집트의 카리미 상인과 이탈리아 상인의 활약이 두드러져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이 성장기에 접어들었다.

2. 원나라의 번성과 마르코 폴로의 항해

신안 침몰선이 말해주는 것

도자기와 동전은 동남아시아와의 정크교역에서 주력 상품이었는데, 일본과의 무역(류쿠왕국이 아니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약진하는 국제 항시 자이툰(취안저우)

 자이툰은 원의 정크 교역의 중심 항구이자 몽골 제국 최대의 국제항이었다. 이슬람계 상인이 주도권을 쥐고 여러 민족들이 혼재하는 자이툰에는 1만 명이 넘는 이슬람교도가 살았으며, 6-7개의 모스크가 있었다. 그 외에 2개의 힌두교 사원과 3개의 카톨릭 수도원도 세워져있었다. 말하자면 현재의 싱가포르와 같은 국제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1342년부터 1346년까지 대사교를 지낸 뒤 1533년에 해로를 아비뇽으로 귀환한 조반니 마리놀리 수도사는 자이툰에 대해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도시로 매우 아름답다. 호화롭고 훌륭한 3개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원, 목욕탕, 수많은 상관이 있다"고 말했다.

참고로 해외 무역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이 시대에는 선원들 사이에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동양과 서양은 원래 동양 침로, 서양 침로라는 의미로, 항로에 면한 나라들을 가리켰지만 머지않아 일정한 해역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여러 책을 종합해보면 원나라 시기에는 말라카 해협을 경계로 남중국해와 자비 해 부근 해역을 동양, 그 서쪽의 인도양 해역을 서양이라고 부른 것 같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범선이 된 정크 

이븐 바투타는 "선주의 대리는 왕후와 비슷한 존재로, 상륙할 때는 사수와 흑인 등이 창, 검, 북, 피리, 나팔 등을 갖고 선도한다. 또 숙소 문 양측에 긴 창을 세워둔다. 시나 사람 중에는 많은 배를 가진 사람이 있어 대리인을 여러 외국으로 파견한다. 세계에서 시나 사람만큼 많은 제보를 가진 사람은 없다"라고 그 부유함을 지적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방문한 아시아 바다 

 마르코 폴로가 탔던 정크 선단이 호르무즈로 가기까지의 항로는 다음과 같았다. 타이완 해협에 면한 자이툰을 출항한 뒤 중국 연해를 남하하여 해남도 앞바다를 통과해 베트남 중부 참파에 이르렀다. 참파는 취안저우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약 2,4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베트남 중부의 부유한 대국이었다. 참고로 마르코 폴로가 탔던 선단의 항로는 후일 정화 함대의 항로와 기본적으로 겹친다.

3. 정화의 남해원정

'바다의 제국'의 종언과 대함대

주원장은 바다세계에 대해서 민간 상인의 해외 무역을 완전히 금지하는 해금정책을 취했다. 명나라를 세울 때 경쟁상대였던 장사성의 잔당이 당시 연해 지역을 유린하고 있던 왜구세력과 결탁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연해 요충지에 위소를 설치하여 상인들의 무역활동을 단속했다. 이러한 정치적 결단으로 인해 몽골 제국 시대에 남인도와 페르시아 만까지 이르렀던 중국 상인의 거대한 상업권은 급속하게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은 15세기 중엽까지 세계 최대의 조선국으로서 해양(오션) 제국이 될 수 있는 힘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한 점은 영락제(제3대)가 6회에 걸쳐 인도양에 파견한 2만 7,800여 명으로 구성된 정화함대의 남해원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보선이라 불리는 거대 정크는 길이 150미터, 폭 62미터로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배였다. 대형선만으로 함대를 편성하면 항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100척 정도의 작은 배를 더해 모두 200척 정도의 선단을 조직한 것으로 추측된다. 명나라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조선 대국이었던 것이다. 

정화함대가 남긴 거대한 족적

함대를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정난의 변으로 행방불명이 된 전 황제 건문제를 추적하기 위해서였다는 설, 명제국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장사성의 잔존 해군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왜구 세력 등과 결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명나라 원정을 시도하고 있는 티무르 군에 맞서 해상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서였다는 설, 명 제국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장사성의 잔존 해군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왜구 세력 등과 결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국의 세력을 과시하여 조공을 촉직시키기 위해서 였다느 설 등이 있다. 주로 국위 선양과 국영 무역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된 원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의 항해라면 기존 항로를 활용하는 편이 더 나은 것은 물론이다. 

1424년 영락제가 서거하자 천도에 따른 재정난의 이유도 거들어 막대한 비용이 드는 원정은 중지되었다. 환관을 중심으로 한 원정에 대해 반발하는 관료도 있었다. 전통적인 농업 제국으로 회귀하기를 원하는 명은 바다의 제국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정화의 항해를 마지막으로 바다세계에서 중국의 후퇴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송나라 이후 지속되었던 바다의 제국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4장. 바이킹과 북방 해역 개척 - 북쪽부터 개척된 해양세계

1. 바이킹 세계의 확대

바이킹과 '북쪽의 지중해' 발트해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족 발트 해 주변에 거주하는 바이킹은 한랭 기후 하에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교역과 식민으로 생계를 보조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푸른 눈을 하고 금발 머리에 키가 큰 바이킹은 빙하가 침식하여 생긴 '피오르'라고 하는 좁고 깊은 후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북구어로 '후미에서 온 사람들' 정도의 의미이다.

바이킹이 조종한 롱쉽과 크나르

바이킹은 주신 오딘의 마음을 달래고 그 보호를 받기 위해 노예와 죄수를 산 채로 제물로 바쳤다. 배를 진수할 때에는 많은 사람의 피가 흘렀다고 한다. 오늘날 배의 진수식이나 명명식에 붉은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은 피 대신 레드 와인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오늘날 배의 우현을 영어로 starboard, 좌현을 port라고 부르는데, 이는 예전에 배를 댈 때 키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좌현을 접안시킨 데에서 비롯한다. 스타보드란 말은 키를 달아놓은 현인 steerboard(키를 조종하는 현)에서 유래했다. 배의 조종을 책임지는 선장은 당연히 키가 있는 우현에 있어야 했기에 선장실은 스타보드에 설치했다. 여객선에서 좌현보다 우현을 더 좋은 자리라고 여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다. 

 대서양과 북극해 사이에 가로놓인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인 그린란드는 초지 전체의 85퍼센트가 빙하로 덮여 있지만, 에릭손은 이 섬을 '녹색 섬'이라고 이름 짓고 식민을 촉진했다. 에릭손은 또 그린란드에서 남쪽으로 진출해 북아메리카의 체사피크 만 부근에 도달했다. 그는 겨울에도 풀이 자라는 그 땅을 '빈란드(포도의 땅)'라고 불렀다.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사람은 바이킹이었다. 

유럽을 뒤흔든 바이킹 

서프랑크의 카페 왕조는 노르웨이 계 바이킹 지도자 로로가 진출한 지역을 영토로 인정하여 노르망디 공국에 세우게 하고 그 대가로 바이킹의 침략을 막도록 햇따. 프랑스 북부의 낙농지대 노르망디 지방이 그곳이다. 이 지역은 한랭한 기후로 인해 포도 재배가 불가능하여 포도주는 생산되지 않지만 바이킹이 고향에서 이식한 사과로 만든 '칼바도스'라는 브랜디로 널리 알려져 있다.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은 군선 700척을 포함한 3,000척의 배를 거느리고 폭이 32킬로미터에 불과한 도버 해협 건너편의 잉글랜드를 공략해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영국에서는 이를 흔히 '노르만 정복'이라고 한다. 백년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다른 나라가 될 때까지 영국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였다. 예를 들어 영어의 beef, mutton, pork 등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살아있는 소를 영어로는 ox, 프랑스어로는 boeuf라고 하는데 이것만 보아도 그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999년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이슬람교도의 용병으로 활약하고 있던 프랑스 바이킹의 후예는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고 머지않아 남이탈리아까지 영토를 확대했다. 이것이 바로 양시칠리아 왕국이다.  

 

2. 러시아 건국과 한자 동맹의 대두

호박의 길을 되살린 이슬람 교역권

바이킹은 강과 강을 연수육로로 연결하여 러시아를 '강의 나라'로 만들었다. 

러시아의 강길이 다시 되살아난 이유는 아바스 제국의 이슬람 교역 네트워크와 러시아의 강길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세계도 비단을 널리 생산하게 되면서 러시아 삼림에서 얻는 모피가 중요한 상품이 된 것이다. 발트 해 안쪽에 살던 스웨덴 계 바이킹은 카스피 해로 흘러드는 볼가 강을 이용하여 러시아에서 거둬들인 막대한 양의 모피를 이슬람세계로 운반해 은과 교환했다. 

이슬람세계에서 들어온 은화는 대부분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서투르키스탄'의 사만 왕조가 발행한 은화였다. 러시아의 강길을 통해 스웨덴 계 바이킹이 실크로드 상인과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9세기 중엽 이븐 쿠르다지바는 발트 해와 흑해, 카스피 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활발하게 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루시인은 슬라브인이 사는 아주 먼 곳으로부터 로마인의 바다(흑해)를 건너 콘스탄티노플로 온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들의 상품인 비버 가죽과 도검을 판다. 혹은 그들은 슬라브인의 강, 즉 돈 강을 거슬러 올라가 하자르인의 중심 도시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작은 배로 갈아타고 주르잔에서 바그다드로 운반한다. 바그다드에서는 슬라브인 환관이 그들을 위해 통역한다." "루시"는 슬라브인이 바이킹에게 붙인 이름으로 '배를 젓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러시아의 어원이 되었다. 

10세기가 되면 초원 지대에 터키 계 유목민이 나타나 바이킹의 교역을 방해했다. 그 결과 이슬람 네트워크와 러시아 살림 지대는 서로 분리되고 키예프 공국이 들어섰다.

 한자 상인이 교역에서 사용한 코그선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13~14세기, 몽골 제국의 네트워크와 연결된 지중해, 북해, 발트 해의 교역은 모두 활성화되었다. 몽골 제국에 편입된 러시아와 인전해 있는 발트 해, 북해, 북대성야에서도 교역의 파고가 밀려들었다. 

 13세기 후반에는 플랑드르 지방의 조이데르 해에서 핀란드 만에 이르는 지역의 100개 이상의 상업 도시를 연결하는 한자 동맹이 설립되었다. 한자는 동료라는 의미이다. 한자 동맹의 최전성기에는 함부르크, 뤼베크, 브레멘, 리가, 단지히. 단치히(현재의 그단스크)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모피 집산지인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청어 집산지인 노르웨이의 베르겐, 양모 집산지인 런던 등지에 한자 동맹의 상관이 건설되었고, 도버 해협과 대서양 연안의 블르타뉴 및 포르투갈의 염전을 잇는 항로가 개척되었다. 

한자 상인은 러시와의 무역에서 모피, 꿀 뿐만 아니라 카스피 해와 볼가 강을 경유해 들어온 서아시아와 중국 등지의 산물도 구입했다. 몽골 제국의 네트워크는 지중해 교역은 물론 러시아를 경유하여 발트 해 및 북해의 교역도 활성화시킨 것이다. 

3. 개척되는 해달의 바다

표트르와 바다세계로의 야망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어 바다세계로 웅비하고자 한 사람이 표트로 1세였다. 10살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는 외국인 가정교사와 거류지 외국인으로부터 서구의 기술과 군사, 해사 등에 관해 배우고, 해양 국가 네덜란드와 영국에 대한 동경과 강한 호기심을 키워나갔다. 그는 유럽시찰단에 신분을 감춘 채 몰래 참가해 영국과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직접 잔담조선소의 직인이 되어 조선 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북해의 개척자 베링

표트르 1세는 죽기 3주일 전, 20년간 러시아 해군에서 근무한 덴마크 출신의 고용 외국인 베링에게 아시아 해역을 탐험하도록 지시했다. 탐험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캄차카에서 1척 내지 2척의 범선을 건조해 시베리아 동방의 바다를 항해하고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이 만나는 해역을 탐사해 지도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가 아직 불명확했던 시대였다. 

베링은 극한의 섬에서 60세의 나이로 인생을 마감했다. 그 섬은 후일 베링 섬이 되었고, 섬을 포함한 열도는 코만도르스키(러시아어로 대장, 지휘관의 의미) 제도로 불리게 되었다. 베링 해나 베링 해협 등은 모두 베링을 기념한 명칭이다. 

해달 모피가 연 북태평양

 베링이 생을 마감한 섬은 우연하게도 해달의 대규모 번식지였다. 

 거친 베링 해에서의 수렵에 익숙하지 않았던 러시아인은, 카약이라는 가죽배를 타고 바다를 드나드는 알류산 열도의 바다 사냥꾼 알류트인을 혹사시켜 해달 모피를 획득하는 데 열을 올렸다. 알트류인의 아내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 수렵을 강요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극한 지대에 사는 동물이나 물고기는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두꺼운 피하지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원래 육상 동물이었던 해달은 추운 바다에서 생식하는 동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하지방층이 얇다. 그러나 실은 바로 여기에 해달 모피가 유럽의 부인들을 매료시킨 비밀이 있다.  

해달이 극한의 바다에서 37도의 체온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피 속에 단열을 위한 공기를 많이 품고 있어야 했는데, 촘촘하게 들어선 털이 그 역할을 했다. 해달이 털을 다듬는 것은 멋을 부리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끊임없이 단열용 공기를 모피 속에 주입시키기 위해서이다. 단열재 역할을 하는 공기를 항상 품고 있는 해달 모피는 오랜 시간에 거쳐 보온이 가능한 밀도가 높은 털가죽이다. 그 밀도는 1제곱센터미터 당 10만 올에서 14만 올로, 세상에서 그 보다 더 밀도가 높은 모피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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