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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목포청년운동과 지역엘리트의 성격에 대한 연구 최성환 / 22.04.25 / 화니짱

1920년대 목포청년운동과 지역엘리트의 성격에 대한 연구 (22.04.25 화니짱).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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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p31 : 목포는 섬과 바다로 열려있는 해항도시이며, 1897년 개항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진 지역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 글은 1920년대 목포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청년운동 전개과정과 지역엘리트의 성격을 분석한 것이다. 1920년대 목포는 물산공진회를 개최하는 등 전남의 대표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일본인과의 차별이 심했고, 식민지 수탈항 성격이 강했다. 그 가운데 부협의회에 진출하는 조선인 수가 늘어나고, 노동파업이 본격화되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2. 1920년대 목포의 사회경제적 배경

p35 :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은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3:1의 비율에 가까워진다. 이 시기에 목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상업회의소 활동을 기반으로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주로 목포에서 생산되는 원재료를 일본으로 보내는 일을 통해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1924년의 경우 수출품 총액 중 쌀은 50.2%, 면화는 42.2% 비율을 차지했다. 목포항의 대외 수출품이 쌀과 면화가 거의 대부분이고, 대상국은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철절하게 식민지 수탈항 성격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p37 : 지방통치 방식과 관련해서 1920년대 들어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1910년대 말 1920년 초 임명직으로 운영되던 부협의회가 선출직으로 변경되었고, 조선인 수도 늘었다. 모포의 경우 임명제 시절에는 총 7명 중 조선인이 2명 수준이었는데, 선출제에서는 최대 13명 중 조선인이 4명 수준으로 변했다.

 

p38 : 1920년대에는 조선인이 설립한 회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39) 개항 직후에는 주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조합들이 중심을 이뤘다면 1920년대 조합은 목포에서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들이 늘어났다.

 

3. 목포 청년운동의 전개과정

p40 : 목표청년단은 19201월에 야구단을 조직하기도 하고, 4월에는 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41) 독핍만세운동으로 수감되었던 청년들을 환영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한 것을 보면 이 시기 목포청년단 역시 민족주의 성향을 어느 정도 견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목포청년단의 활동이 이후 조직된 목포청년회의 모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p42 : 회장 김성섭은 경무관을 지낸 인물이다. 기타 변호사, 대지주, 사업가, 의사, 신문사 ᅟᅵᆽ국장, 검사, 판사 등이 임원이었고, 이렇게 출발한 목포청년회는 회칙에 명시한 대로 운동회와 강연회를 중심으로 청년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선행연구자인 박찬승은 초기 목포청년회의 성격을 유지내지 중산청년층의 모임에서 출발한 것으로 분석한 바 있다.

 

p45: 1923년 목포부협의회 선거에 앞서 목포청년회는 이사진과 지역 유지들의 회의를 개최하여 회원들을 입후보시키고 그 결과 두 명이 당선되었다.

또한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당시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단체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일본인과 조선인 시설의 차별철폐를 요구하는 시민대회를 개최한 것과 정명여학교 선교사의 여학생 구타사건에 청년회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목포사회의 대변자로서 앞장선 것을 들 수 있다.

 

p47 : 19249월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무산청년회가 목포에 조직되었다. 기존의 목포청년회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성격의 청년회가 별도로 조직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주도 세력은 목포청년회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때부터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진보적 인물들이 청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1919년 목포4.8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룬 경험을 지닌 인물들이다. (48) 무산청년회가 진보적인 성향을 띄고 관련 단체를 규합하는 활동을 전개했지만, 기존의 목포청년회와 대립하는 양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명여학교 맹휴사건이나 인근 무안군 자은도 소작쟁의 사례처럼 사회단체의 결집이 필요한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49: 19272월 민족협동전선을 표방한 신간회가 창립되고 목포지회도 그 해 618일 창립되었다. 자연스럽게 기존 목포청년회나 무산청년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주요 인물들은 신간회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목포지역 민족사회운동의 중심도 신간회가 되었다.

 

4. 청년운동을 통해 본 목포 지역엘리트

p52 : 목포지역 엘리트의 특징은 크게 5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첫 번째 특징은 퇴직 공무원들이 지역엘리트로 자리매김하는 현상이다. 개항장 업무를 관한하는 대한제국 관청에서 행정업무를 맡았던 몇몇 관료들은 퇴직 후 목포에 정착하였다.

토박이가 아닌 외부에서 발령받아 온 공직자들이 퇴직 후 목포사회에 정차갛고 지역의 엘리트로 성장하게 되는 현상은 목포의 독특한 특징이다. 목포는 향촌사회의 뿌리가 취약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사항은 더욱 의미가 크다.

 

p54 : 두 번째 특징은 목포 개항 이후 경제적 호황을 바탕으로 성장한 신진 상업인들이 중심세력을 이룬다는 점이다. (55) 한편, 문재철의 청년운동 경력 중 1922년에 청년회장이 된 후 불과 1년도 안되어 청년회 명단에서 이름이 빠지고, 차남진 중심의 이사체제로 목포청년회가 개편된 사실이 주목된다. 그 원인은 1920년대 중반에 치열하게 전개된 도서지역의 소작쟁의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1923년 암태도 소작쟁의를 시작으로 도초도, 자은도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이 소작쟁의의 투쟁 대상이 당시 섬 지역에 가장 많은 토지를 확보하고 있던 대지주 문재철이었다.

 

세 번째 특징은 목포 엘리트 가운데 경상도 출신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목포개항이 논의 될 당시 부산상인들은 부상상권에 적지 않은 타격이 올 것을 염려하여 목포개항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막상 목포가 개항되자 먼저 개항된 부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목포항으로 진출한 인사들이 많았다.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 마찬가지였다. (56) 1921년 경상도우회 발기총회에 184명이 참석했다. 1920년 목포청년회 발기총회에 83명이 참여했던 것에 비하면 당시 목포사회에 경상도 출신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았고, 결속혁이 강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57 : 네 번째 특징은 1919년 만세운동 관련자의 활동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경력은 당시 사회에서 활동기반을 갖추는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대표적 인물로 권영례와 배치문이 있는데 매우 대조적인 길을 걸었다.

권영례는 후에 부르조아적인 인사로 변모하였고 배치문은 줄곧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위해 활동했다.

 

p58 : 다섯 번째 특징은 1920년대 지역 엘리트 가운데 섬 출신이 많다는 점이다. 목포 주변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섬이 자리하고 있다. 1897년 개항과 함께 목포가 신흥도시로 발전하자 많은 섬사람들이 목포로 거주지를 옮겨 기반을 다졌다. 그 가운데는 섬 지역에서 간척사업을 통해 대지주로 성장한 후, 1920년대가 되면 섬을 벗어나 목포에 거주하면서 그들만의 담론을 형성하고 이를 이끌어나가는 지역 엘리트로 변모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59) 이와는 반대로 목포에서 사회주의계열 운동가로 활동한 섬 출신 인물들도 많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지도한 서태석과 박복영, 매화도 소작쟁의 지도자 서병인, 언론인으로 활동한 설준석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목포에서 활동하면서 섬 지역의 상황을 관찰하고, 소작쟁의 등 도서지역의 현안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지원하는 형태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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