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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일국 인민의 지덕을 논함
후쿠자와는 4장과 5장에서 역사에 접근하는 전통적 사고 방법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챕터를 엮어서 ‘사회의 법칙과 문명사의 방법을 논함’이라고 바꿔 제목을 달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전통적인 역사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영웅사관, 치자사관 다시 말해 개개의 영웅, 개개의 치자가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시각입니다. 둘째로, 현실에서 위의 역사관과 다양한 형태로 결부되는 치란흥망사관을 비판합니다. 즉 역경에 있는 ‘다스림이 극에 달하며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면 다스려지다’는 시각입니다. 셋째로, 전통적인 역사관인 대의명분사관과 권선징악사관입니다. 이들 둘은 모두 대의명분을 내세워보입니다.
요약하면 훌륭한 군주가 윗자리에 있으면 세상이 다스려지고, 덕이 없고 못난 군주가 있으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는 중국의 정사에 일관된 사고방식을 후쿠자와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비판을 위해 그는 버틀의 <영국 문명사>를 끌어오고 있습니다. 버클은 신학적인 예정설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개인주의의 기초였던 자유의지 마저도 깠던 모두까기 인형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쿠자와는 버클을 자기 식으로 읽어, 기독교 대신 전통적인 대의명분사관과 그 안에 내재된 모럴리즘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p97 : 문명은 한 사람의 신상에 관해서 논해서는 안 되고, 국가 전체의 형국에 관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앞 장에 문명은 사람의 지덕의 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주 뛰어난 지혜와 덕이 있는 사람이 한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해서, 그 나라가 문명의 나라라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소수의 사람은 지덕이 탁월할지 모르지만, 전체를 모아보면 지덕의 수준이 높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버클의 영향이 느껴집니다. 개인이 아니라 집합체로 논할 때 비로소 통계학(statistics)의 방법을 적용해서 일반 법칙을 추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백성도 많이 있지만, 그 어리석음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현자에 의해 견재되어 제멋대로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거꾸로 아시에서는 아주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 “그 지덕을 마음대로 펼칠 수가”없습니다. 그 지덕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국에 행해지고 있는 기풍”입니다.
p98 : “그런고로 문명이 있는 곳을 찾고자 하려면, 우선 그 나라를 제압하는 기풍이 있는 곳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기풍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기풍이 아니라 국가전체의 기풍이므로” 대량관찰을 행하고, 거기서 규칙성 또는 법칙성을 찾아가는 통계적인 방법을 쓰는 수 밖에 없습니다.
후쿠자와는 자신의 방법론을 전개하기 이전에 역사론에서의 모럴리즘적인 방법론을 비판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든지 동기 같은 마음가짐으로 역사의 사건을 설명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인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꿈 속에서 또다시 꿈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연이은 성공을 듭니다.(102)
중국, 일본을 불문하고 아시아에서는 영웅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황당무계한 전설을 그럴듯하게 갖다붙여서 어릴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징조가 있었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미혹시킬 뿐 아니라, 역사가 자신이 자기 기만에 의해 그같은 혹닉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국인 버클씨의 영국문명사에서 말하기를, 일국의 민심을 일체로 간주하여 이것을 보건대, 그 작용에 법칙성이 있는 사실에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105)”
사람 마음의 움직임은 언뜻 보면 다종다양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규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건 가운데 자살만큼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존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846년부터 1850년까지의 런던을 보면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는 거의 일정합니다. “그 나라의 사정으로 이변이 생기지 않는다면” 메트로폴리스 런던에서의 자살자 수에 놀랄만한 규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에 의한 검증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선입견으로 마음대로 생각하는 동양의 억단에 맞서, 버클의 귀납법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역사에서의 법칙성’을 운운하는 것은 어딘지 촌스럽게 느껴집니다. 유럽에서는 신학과 형이상학의 마력으로부터 역사를 해방시켜 그 과학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마르크스조차도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용어를 통해 비인격적인 사회법칙의 지배라는 사고가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해봐야겠습니다.
후쿠자와는 과학적 방법론을 위해 화학의 비유도 사용합니다. ‘근인’과 ‘원인’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데요. 보다 많은 현상을 관련시켜 설명할 수 있는 것일수록 보다 일반적인 ‘먼 원인’이 되는 식입니다. 서투른 의사는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에 미혹되어, 사물의 먼 원인을 찾지 못하고 대증요법만 사용합니다. 그에 반해 명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에 눈을 돌립니다.
그는 이어 유교 이데올로기로 어디까지 현실의 역사적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끄집어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약자를 돕고 강자를 제지한다는 것”을 패권(116)이라 말하는 부분입니다. 춘추 4국이 전국이 되면 7국이 됩니다. 그들중 한 나라가 강해지면 그 나라를 중심으로 천하가 통일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약한 나라를 도와 강한 나라를 억누름으로써 균형이 잡히는 것입니다. 후쿠자와의 머릿속에는 서양열강의 동점에 대해 동아시아 약소국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그같은 power politics 상황에 하에서는 맹자가 인의와 왕도를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공허한 논의가 된다고 말합니다.
후쿠자와는 사상가나 학자는 정치 문제를 논하는 경우에도 장기적인 시야와 전망에 입각해야 하며, 그때그때의 정치적 상황에 자신의 이론을 단락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공자를 ‘초상집에 기르던 개’(118)와 같다고 조롱한 일화를 듭니다. 자신을 거두어주는 군주가 없어서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을 형용한 것인데요. 성인의 가르침을 전제로 하면 천하사람은 모두 치자가 되고 피치자는 한 사람도 없어져버린다고 후쿠자와는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침-> 배움이라는 교육구조는, 기본적으로 교육자의 권위에 기초한 일방통행입니다. 그 구조를 치자와 피치자라는 정치적 지배에 적용하면, 치자는 치자라는 점에 의해 권력만이 아니라 정신적 권위까지 갖추며, 게다가 치자가 피치자를 일방적으로 교화시켜서 그것이야말로 정치적 미혹을 강화할 뿐입니다. 유학의 근본적인 오류는 가정 안에서,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를 타인과 타인의 관계에 그대로 미치려고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p124 : 영웅호걸이 때를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 시대에 만연해 있는 보편적인 기풍을 만나지 못해서, 이상이 어긋난 것을 말함이다. 그런고로 그 천재일우의 때를 얻어 대업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도, 역시 단지 시세에 맞아떨어져서 인민의 기력을 완수하게 하였던 것을 말할 뿐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인민주의-인민 수준에서의 지덕의 진보가 역사를 움직인다는 생각이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도자는 인민의 ‘중론’의 종속변수라는 것입니다. 군주에게 간언하여 어진 군주로 만든다는 전통적인 충성 의무를 역전시켜, ‘중론’을 이른바 간업해서 바로잡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가 됩니다.(128)
그가 공격하는 것은, 윗사람과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학자들이 모두 정부에 들어가려고 하는 경향입니다. 그와 같은 유교의 치국평천하 사상이야말로, 근본적인 혹닉입니다.
5장. 앞의 논의의 속
유럽국가에서는 소수의 지혜로운 자들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하면 보통 사람 이하의 어리석은 자들에게도 전파해가서 중론을 이룹니다. 하지만 간단헤 어떤 지혜로운 주장이 지배적이 되는 것은 아니며, 끊임없이 이론에 의해 도전받습니다. 그렇게 연마하는 가운데 겨울 일시적인 이설을 제압한 것이 국론이라고 합니다. 그 점에서 학자는 이단이라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어제의 이단이 오늘의 전통입니다. 세론에 속박되지 말고 소수의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중론의 변혁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후쿠자와는 혁명의 2단계로서의 양이론을 주장합니다. 먼저 문벌에 대한 불평과 반발이 표면화하지 않은 채 다양한 형태로 사회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런 때에 마침 페리의 내항이라는 충격이 외부에서 가해졌다. 그것을 계기로 축적되어 있던 반신분의 감정이 폭발해서 혁명적 중론의 변화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페리 내항이 혁명의 가까운 원인으로 자리매김하지만, 더 먼 원인으로서 인민 지력의 향상이 혁명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민들 사이에 분배된 지덕의 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각 개인의 지력의 향상보다 중요한 것이 구성원의 지력의 조합방식에 따라, 그 조직의 지적인 출력이 달라집니다. 동양 사람은 모이면 한 사람, 한사람의 지혜에 비해 조직으로서는 잘되지 않다고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유>에서 지적하고 잇습니다. “일본사람은 지적인 수준이 높지만, 그럼에도 자발적 결사를 만드는 것에 서투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발적 결사라는 결합 타입과 대조적인 것인 무라(마을) 공동체입니다. 많은 경우 부락 에고이즘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보편적인 공공정신이 결여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서양의 중론에서는 양이 질로 바뀌어 수준이 올라가지만 동양에서는 그와는 정반대라고 후쿠자와는 말합니다. 합의의 관심이 없고, 없는 것이 아니라 금지하고 있고, 사람이 모이면 제대로 된 것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당을 까다롭게 금지합니다. 그래서 악순환이 생겨나 점점 더 횡적인 public 정신이 자라나지 않고, 사람들은 집과 마을에만 틀어박혀 다른사람과 교제하는 습관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학문의 권유>에서 후쿠자와는 “지금의 인민에게 상하동권의 큰 뜻을 가르쳐 이치가 있는 것은 정부라 하더라도 감히 굽힐 수 없다는 취지를 알게해” 외국의 강한 적에 대항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인민의 습관을 바꾸는 거대한 과제를 학문에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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