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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과 권력』 - 지배와 편집증 엘리아스 카네티 2021.9.8. 바다사자
아프리카의 왕들
가봉의 늙은 왕의 죽음과 후계자 선정(545) : 왕이 죽자 7일 동안 도읍 전체가 눈물에 잠겼다. 후계자 선정은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대관식 예비 행사인 의식으로서 주민 전체가 밀집된 군중 형태로 그를 빽빽이 에워싸더니 가장 흉악한 폭도들이나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욕지거리를 퍼붓고 때리고 발길질을 했다. 후계자는 모든 것을 견뎌냈다. 그 후 모두가 조용해졌다. 대관식이 끝난 후 모든 사람들은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엿새 동안의 잔치를 열었다. 모든 일은 선왕을 향한 ‘애도 무리’에서 시작된다. 새로 선출된 사람에 대한 공격은 선왕이 일으킨 적개심을 후계자에게 발산하는 것일 뿐이다. 주위에 모여 있는 ‘추적 군중’은 ‘역전 군중’이기도 하다. 이 군중은 후계자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왕을 겨냥하고 있다. 선왕에 대한 증오심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있는 것이다(547). 후계자가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전이된’ 적대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엿새 동안의 잔치는 새로운 통치자가 가져다주리라고 예상되는 증식을 표현한다. 새로운 치세의 시작으로서의 축제 군중은 미래의 증식을 보증하는 것이다.
나이지리아의 주쿤족의 왕 : 왕은 공개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맨발이 땅에 닿아서는 결코(548) 안 되는 것이었다. 먹는 일도 금지당했다. 왕이 중병이 걸리면 그를 조용히 교살했다. 왕의 음식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신 앞에 바칠 때처럼 복잡한 의식과 함께 그의 앞에 놓여졌다. 그는 비와 바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어졌다. 잇따른 가뭄과 흉작은 그의 힘의 쇠퇴를 의미하므로 밤에 은밀히 교살당했다. 후계자는 둔덕의 둘레를 세 차례 뛰게 되어 있었는데 그동안 고관들에게 주먹질을 당했다. 나중에 그는 노예를 한 사람 죽(549)여야 했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견제하는 안전장치들이 훨씬 강했다. 군사적인 원정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모든 전리품은 명목상 그의 재산이었다. 왕이 자기의 가치를 입증하면 7년 동안 통치하고 나서 추수감사제 때 살해되었다(550).
아프리카 왕국들의 공통된 특징으로서 왕은 ‘증식시키는 사람’이다. 왕의 권력은 증식 무리의 권력이다. 그 복합적인 실체의 모든 목적과 내용은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이전된다. 혼자라는 것 때문에 무리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속성을 확보한다. 왕은 자기 안에 증식의 온갖 힘을 담고 있는, 살아있는 그릇이다(551). 유일무이성, 고립, 간격, 귀중함 같은 특징은 첫 눈에 확정될 수 있는 중요한 특징들이다(552).
왕을 본보기로 삼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것은 감탄과 존경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왕이 하는 일 중 무의미한 것은 없다. 때로 정도가 지나치면 백성들은 왕의 모든 움직임과 말을 ‘명령’으로 간주한다. 명령의 힘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어떤 일도 우연히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명령은 본보기가 되는 행동을 통해 하달된다. 그의 모든 삶의 주요 관심사는 증강이므로 증식이 그의 국시인 셈이다. 궁전의 신하들이 그를 모방할 때 신하들은 일종의 증식 무리가 된다. 왕이 맨 먼저 어떤 일을 하면 모든 사람이 따라 한다. 군중결정체가 된 궁정은 자기의 근원, 즉 증식 무리로 돌아가게 된다(553). 환호와 갈채도 증식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동작과 언어는 갈채에 의해 강화되고 반복된다. 왕의 육체가 손상되면 사약을 받거나 교살당한다. 그 육체는 완전한 그릇일 때에만 증식의 힘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왕국들의 헌법은 왕 자신의 육체적 헌법이다(554).
왕위에 오르기 전의 모욕과 매질은 궁극적으로 그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음에 대한 암시이다. 죽음으로 그를 위협함으로써 그의 둘레에 모여 있는 추적 군중은 그가 통치하게 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그에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분명하게 밝혀준다(555).
아프리카 왕의 주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권력이었다. 그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는 엄청났다(560). 왕은 자기 맘대로 사람들을 죽이고도 이유를 대지 않았다. 몸소 피를 흘리지 않아야 하므로 사형 집행인은 궁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관리였다. 사형 선고는 언제나 왕의 권리였으며 왕이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채 상당한 시간이 지나게 되면 공포는 사라지고 경멸을 받았다. 왕은 사자나 표범으로 여겨졌다. 직접적인 후손이 아니더라도 그 자질을 갖고 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사자의 본성은 살육이다. 사자처럼 공포를 주는 것은 옳은 일이며 정당한 일이었다(561).
왕의 모든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했다. 명령 중 어느 것이라도 무시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명령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오래된 형식, 끊임없이 사자의 위협을 받고 있는 모든 약한 짐승들에게 내리는 사자의 사형 선고와도 같은 그런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562).
델리의 술탄 : 무하마드 투글락
이븐 바투타가 투글락의 궁정에서 7년을 보내고 이 술탄의 성격과 궁정, 행정 조치에 관해 생생하게 묘사한 글을 남겼다.
무하마드 투글락은 당대의 가장 교양 있는 군주였다(563). 신앙심이 깊었고 술을 삼갔으며 정의를 아주 중히 여겼다. 천부적으로 다재다능했다(564). 외국인들에게 특히 인심이 후했다(566). 그러나 세인들에게 회자된 것은 그의 가혹함이었다. 크고 작은 실수들을 모조리 처벌했다(567). 그는 치세의 맨 처음부터 아버지를 죽인 자라는 혐의를 받았다. 그의 치하에서 델리의 술탄령은 최대 규모로 확장되었으나 그의 야심은 모든 세계를 그의 지배하에 두고 싶어했으며 야심적인 책략을 세웠다. 가장 야심적인 정복 계획은 호라산과 이라크에 대한 공격 및 중국에 대한 공격이었다(569). 세계 정복은 거대한 군대를 필요로 했고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돈이 궁해지자 적자를 단번에 메우기 위해 다수의 동전을 주조해서 그 가치를 은화의 가치와 같게 임의적으로 정한 뒤 금화와 은화 대신 동전을 사용하게 했다. 모든 주에서 동전이 만들어졌고 동전으로 조공을 바쳤으며 물건들을 샀다. 토후들, 촌장들, 지주들은 구리돈을 통해 부유해졌으나 국가는 가난해졌다. 결국 동전은 돌멩이와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고 거래가 정체 상태에 빠졌다. 술탄은 칙령을 철회했고 모든 동전을 국고에 사들였다. 국고는 거액을 잃었고 돈의 부족은(570) 더 심해졌다. 세금이 무자비하게 징수되었다. 도처에 반도 집단이 있었고 토지는 경작되지 않았으며 곡물 재배는 갈수록 적어졌다. 기근이 오자 반란이 더 잦아졌으며 그의 잔인함은 더 심해졌다. 그는 모든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자신의 잔인함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조치가 정당하다는 굳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571). 그는 반란을 통해 자기를 크게 괴롭힌 사람들 모두를 즉시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572). 역사가인 지아 바라니가 ‘모든 정치적 재난 가운데 가장 끔찍스런 것은 모든 계층의 백성들 사이에 퍼진 일반적인 혐오감과 신뢰의 결여다’라는 충고를 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방방곡곡의 불만은 쌓여갔으나 그는 통치의 정당성을 아바시드의 칼리프에게서 승인받기를 원했다(573). 여러 해 통신을 계속한 끝에 이집트로부터 인도의 칼리프 대리인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그의 가혹함은 그의 실패와 더불어 심해졌다. 26년을 통치한 뒤에 응징 원정에서 걸린 열병으로 세상를 떠났다.
그는 편집증적 권력자의 가장 순수한 예이다. 그의 정신은 네 종류의 군중, 즉 그의 군대, 그의 보화, 그의 시체들 및(574) 그의 궁정의 지배를 받았다. 거는 살아남는 자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던 간에 거기에는 언제나 그가 가까스로 유지하는 ‘하나의’ 군중이 있었다. 최고조에 이른 자기 명령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더 높은 권위에 의해 자신의 지위를 승인받으려고 애썼다. 무하마드 투글락은 근대 인도의 역사가들에 의해 옹호되어 왔다. 권력은 예찬가를 갖지 못하는 일이 결코 없다. 이런 사실은 권력에 전문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역사가들이 ‘시대’를 빌어 무엇이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575).
쉬레버의 병례, 제1부
■ 내부에서 권력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드레스덴의 고등 법원장을 지낸 다니엘 파울 쉬레버의 『회고록』만한 것이 없다. 그는 편집광으로서 정신병원에서 7년을 보낸 뒤에 세상이 망상의 체계라고 부를 것에 대해 책을 남겼다.
■ 영원에 대한 사고는 그의 책 전체에 깔려 있다. 영원 속에서 평(576)안함을 느끼며 영원은 그의 일부를 이룬다고 여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실제적인 확장이다. 자신의 육체를 하나의 천체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개인의 자리 또는 지위에 대한 감각은 편집광에게 기본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권력의 본(577)질 자체 때문에 지위에 대한 권력자의 감각은 편집광과 같다. 권력자는 군대로 자신을 에워싸고 요새 안에 스스로를 가두려고 한다. 쉬레버 역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며 재빨리 자신을 별들에 밀착시킨다.
■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 살해이다. 처음 병을 앓을 때 라이프치히 정신과 의사인 플레히지히 교수에게 치료 받았고 완쾌되었으나 두 번째 발병했을 때 의사가 다시 그를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영혼 도둑질’이나 ‘영혼 살해’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양심과 권력욕에 불탄 플레히지히가 신과 음모를 꾸며 쉬레버의 영혼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었다(580). 쉬레버는 그의 영혼 살해자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 모의와 음모는 편집광에게 중요하다. 그것은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그를 사로잡고 포위한다. 그의 적은 ‘무리’를 부추겨 그를 공격하게 만든다. 무리는 잠복해있으나 편집광의 예리한 지성은 언제나 그들의 가면을 벗긴다. 무리는 언제든지 적의 충실한 사냥개가 된다.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쉬레버의 이성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영원히 불치가 될 정도까지 그의 신경 질환을 몰고 가려고 했다(581).
■ 우주에는 죽은 자의 영혼들이 살고 있다. 만인은 낯익은 별 위에 자기에게 할당된 자리를 갖고 있다. 쉬레버는 병을 통해 갑자기 그들의 중심이 된다. 가장 큰 군중을 대표한 하나의 군중으로서 그들을 자기 주변에 모으는데 그와 접촉함으로써 점점 더 왜소해진다. 거인인 한 영혼과 왜소한 피조물인 다른 영혼들이 그의 속으로 들어가서 완전히 사라진다(583).
■ 영들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우주의 오랜 개념 가운데 하나로 위장하고 있는 그의 망상은 실제로는 ‘정치적’ 권력, 즉 군중을 먹이로 삼는 권력의 정확한 원형인 것이다. 쉬레버의 직관은 현실적인 상황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는데 군중을 형성하도록 개개인에게 강요된 강력하고 지속적인 흡인력, 개개인의 애매모호한 태도, 몸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생긴 개개인의 종속적인 몸짓, 스스로 정치권력을 상징하는 권력자에 매몰된다는 점, 권력자의 위대함과 연결된 대파국의 감정과 갑작스럽고 급속한 증대, 예기치 못한 자력으로(584)부터 야기되는 세계 질서에 대한 위기의식 등이다(585).
■ 살아남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은 진정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일 것이다. 이런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보낸다(579). 솔직하고도 간결하게 명명된 ‘신의 관(588)심’은 그의 권력의 증대를 갈망하는 것이다. 신을 방해하는 인간은 처치당한다(589).
■ 흥분된 상태에 빠졌던 그의 병의 초기(‘신성한 시간’)에 그 환상은 ‘첫 번째 신의 심판’의 기간이었다. 심판은 밤낮으로 계속되는 일련의 환상이었는데 그 핵심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 플레히지히 교수와 쉬레버 간의 싸움에서 신의 영역에 위험을 주는 위기 후에 프로테스탄트들은 더 이상 지도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가 전사가 되었다(591).
■ 편집광 혹은 폭군보다 더 군중의 속성에 대해 날카로운 눈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쉬레버가 관심을 두는 유일한 군중은 그가 공격하거나 통치하기를 원하는 군중이다. 쉬레버가 스스로 선택한 미래의 존재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592).
■ 편집광의 망상 속에서 종교와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세계의 구세주’와 ‘세계의 통치자’는 하나이며 같은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망상의 가운데 있는 것은 오직 권력욕뿐이다. 편집증은 ‘권력의 병’이며 이 병에 대한 탐구는 권력의 본질을 밝히는데 완벽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쉬레버와 달리 다른 편집광들은 그 지위를 ‘얻었다.’ 이들 중 일부는 그들이 등장한 자취를 은폐하고 완성된 체제를 비밀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의 성공은 전적으로 우연의 사건들에 좌우된다. 이 우연의 사건들이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환상(593) 아래 이 사건들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역사라고 부른다(594).
쉬레버의 병례, 제2부
■ 쉬레버에 대한 적의 음모는 그를 여성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차츰 여성으로 되는 것이 인류의 영원한 생존을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시작됐다. 그의 자식들의 아버지가 될 유일한 존재는 신이었다. 전능한 신은 아름다운 여성인 쉬레버에게 갈수록 매혹되어 ‘신의 육체를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 편집증은 무엇에 의해서나 일어날 수 있다. 권력의 과정은 편집증에서 언제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595). 쉬레버의 체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자신의 이성이 공격당한다는 느낌이었다. 방어를 위해, 신을 위해서 여성이 되는 것은 신에게 복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을 지켜냈다(596).
■ 쉬레버의 방어는 첫째 ‘강제적인 사고’였다. 내면의 목소리들은 그의 수면과 휴식을 방해하려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질문이나 명령이나 모두가 그의 개인적 자유에 대한 침해였다. 이들은 권력에서 흔히 보는 수단으로(597) 온갖 사고는 통제되었다. 모든 것이 수색당하고 모든 것이 밝혀졌다. 그는 권력의 목표였다. 그의 방어 수단은 자신의 지식을 복습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말’의 안전이었다. 말과 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갈망하던 평화는 ‘말로부터의 자유’였을 것이다. 이 평화는 발견하지 못했다. 편집광에게 말이 갖는 중요성은 너무나 크다. 말들은 자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고 결합한다. 말을 통해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태도이다(598).
■ 편집광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연의 일치는 없다. 언제나 이유가 있는데 찾기만 하면 발견될 수 있다. ‘이유’를 발견하는 일은 하나의 정열이 되어 모든 것을 향해 발산된다. 모든 새로운 가면은 낯익은 것을 숨기고 있으므로 그 가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대담하게 찢어버릴 용기만 있으면 된다. 쉬레버는 그의 강제적 사고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 밝히고 있다(579). 가면을 벗기는 과정은 편집광에게 근본적인 중요성이 있는데, 편집광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 우리가 보는 모든 얼굴의 이면에서 한 사람을 발견하기를 ‘원한다’(600). 우리는 낯익은 얼굴만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자신을 숨겼으므로 낯선 사람들 속에서 그 얼굴을 찾아야만 한다. 편집광에게는 이 과정이 집중적이면서도 날카롭게 나타난다. 가면을 벗기는 일 자체 때문에 모든 것은 그에게 가면이 된다. 그에게 다수는 하나이다. 마침내 그는 오직 자신 및 자신이 지배하는 것과 함께 남게 된다. 이 일은 변신의 과정과는 정반대이다. 가면을 벗김으로써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내부로 쫓겨 들어가 단 하나의 위치에 한정되어 특별한 한 가지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가면들이 정체를 드러내면 변신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은 순수한 형태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601).
■ 편집광은 모두가 자기를 추적하는 적들의 무리에 에워싸여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기본적인 느낌이다. 도처에서, 사방에서 눈들을 본다. 그 눈들의 임자인 피조물들은 그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 그들이 짐승인 경우 그는 사정없이 사냥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몰살의 위협에 처하자 갑자기 그에 맞서 일어선 것이다. 편집증의 원형적인 상황이다. 짐승들은 더 위험한 형상으로 변하기도 한다. 숙적인 정신과 의사 플레히지히의 영혼이 다수의 ‘영혼의 부분들’로 분열된 ‘영혼분열’에 의해 신성한 광선을 공격한다는 망상은(605) 천체의 무리로 다수를 채택한 그의 망상의 가장 특징적인 개념들 중 하나이며 편집증의 구조를 밝히는데 ‘적대적인 무리’의 중요성을 명백하게 표현한다(606).
■ 자기를 돌처럼 만드는 일은 철저하게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며 권력을 고수한다. 모든 움직임을 피함으로써만 권력은 보호될 수 있다. 이 보존의 자세는 여러 세기를 일관한 그 동일시 덕분에 사회의 형태를 결정하게 되었다. 여러 나라 국민의 정치 구조의 핵심은 경직되고 세심하게 체계화된 한 개인의 자세인 것이다. 쉬레버는 ‘한 국민’의 왕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국민적 성자’로서 ‘한 국민’을 보살펴주었다(609).
■ 불사신에 대한 갈망과 살아남는 것에 대한 열정에서 편집광은 권력자의 정확한 모습이 있다. 내면적인 구조에서 그들은 동일하다. 편집광은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실패에 동요되지 않기 때문에 양자 가운데 편집광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것은 그의 망상이다. 모든 권력의 이면과 마찬가지로 편집증의 이면에도 자기가 유일한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인간들을 처치하고 싶은 욕구, 더 온건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떤 공인된 형식을 빌려 자기가 유일한 인간이 ‘되도록’ 돕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다(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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