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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국가 7장 발제.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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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명(), 토사(土司)와 위소(衛所)체제

 

명이 원을 축출하고 1368년에 중국을 통일적으로 지배한 사건은 돌출된 이변으로, 세계의 중심이 요동으로 이동하는 흐름에 대한 중국의 일시적 저항으로 이해될 수 있다. 명은 강남에서 일어난 국가로, 강남이 개발되면서 중국의 경제적 중심으로 성장, 이시기에 정치적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명의 수도는 남경이었다가 성조 영락 19년에 북경으로 천도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강남은 정치적 역량이 미숙한데 비해 북경은 10세기 이후 통합국가의 연속 출현으로 요동과 중국을 통합할 수 있는 힘을 보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명은 중국의 전형적인 국가들이 그랬듯이,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나라들은 *기미위소체제 안으로 내속시키는 한편, 독립된 국가 체제를 갖춘 나라들은 책봉-조공 체제를 활용하여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황제 국가(제국)을 재현시킬 수 있었다.

*기미위소(羈縻衛所)란 중국밖의 군장 혹은 추장들에게 관직을 주어 중국국가의 일부인 것처럼 외양을 꾸미는 것으로, ·당대는 지방 행정 조직의 형식을 빌렸는데, 명은 군사 조직의 형식을 빌렸다.

 

명은 경사에서 군현까지 위소(衛所)를 세웠다. 지방은 도사(都司)가 통제하고, 중앙은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의 통제를 받게 했다. 위소제는 부자(父子)로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군호(軍戶)는 군적에 등록되어 병역이 세습되었고, 민호(民戶)는 납세의 의무만 질 뿐 병역의 의무는 갖지 않았다. 명의 관제는 이전 관제에서 승상을 없애고 중서성의 권한을 육부(六部)로 나누었고, 상서(尙書)가 천하의 일을 책임지고 시랑(侍郞)이 그 책임을 나누었다. 지방은 도((() 삼사(三司)를 설치 병사, 형법, 전곡 등의 일을 나누어 맡았다. 이는 중앙과 지방 모두 군사, 민정, 감찰 등 삼권이 나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삼사중에 도사만 설치된 요동도사, 대녕도사, 만전도사는 중국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매우 독특한 체제로 명나라에 내포되어 있었다.

- 대녕도사(올량합 삼위)는 더 독특한 체제가 운영, 이곳은 몽고화한 거란인과 여진인, 토욕혼, 거란인 거주지로 명의 위소로 존속했지만, 실제로는 책봉-조공 관계만을 유지했다. 사실상 명의 지배권 밖에 놓여 있었다. 삼위가 명조에 행한 조공은 고통을 수반하는 의무가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동반하는 권리였다. 이들은 공물을 바치고 중국의 하사품을 탐했다.

- 여진 거주 지역인 노아간도사와 그 부속 위소들도 그 추장에게 관직을 주어 그 부족을 통령하면서 조공하게 했다. 그러나 입공의 이름을 빌려 교역했다. *마시(馬市)

- 서남이 지역, 티벳지역도 명의 영토 안에 내속되어 군현적 지배를 받는 것 같은 형식을 취했지만, 추장들은 고속(古俗)’에 따라 자치했다. 책봉에 따른 조공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였다. *중건다봉(重建多封)과 차마호시(茶馬互市)를 열어 티베트 인을 기미(羈縻)했다.

 

명사에 외국전(外國傳)전이 있는데, 외국이란 동아시아 범주에 속하는 나라로 조선과 안남, 일본, 유구 등이 있다.

- 일본은 명과 책봉-조공 관계를 제도화하지 못했다.

- 유구는 먼 바다 한 가운데 떨어져 있는 약소국으로 10년에 한번씩 입공하는 예를 행했다.

 

명과 전형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명이 주도한 동아시아 세계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국가는 안남과 조선이었다.

안남은 당 이전에는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오대 시기에 토인(토착민?) 곡승미가 점거했다. 명이 건국된 뒤, 정식으로 수교하여 책봉-조공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안남에서 역성혁명이 일어나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여조(黎朝-역성혁명을 통해 일어난 왕조)는 명조로부터 안남국왕의 책봉을 받으면서도 자국에서는 황제를 자칭하며, 토사(土司)를 침공하자 명이 대군을 보내 안남국을 격파, 군 현을 설치했다. 그러자 안남의 도처에서 저항군이 일어나 독립을 선언, 그 중 여리가 강 력했고, 이후 여리의 아들 인을 안남국왕으로 책봉했다.

안남국왕은 국내에서 칭제했고, 제국을 지향했으나 명은 변경을 경계할 뿐 안남과의 책 봉-조공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이에 반해 조선과 명의 관계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전형적인 책봉-조공관계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조선이 건국된 시기와 원과 명의 교대 시기가 비슷, 명 주원장 원년에는 고려 공민왕과 책봉-조공관계를 수교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몽원이 북쪽으로 가면서 무주공산이 된 요동을 놓고 경쟁했다. 친명파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성공, 조선을 건국한 뒤에도 요동문제 로는 여전히 갈등했다.

명 건문제가 1401년 조선 정종과 책봉의 절차를 마무리하고, 13(三使)도 수용해줬 다.

 

명과 조선의 책봉-조공 관계는 다른 주변 국과는 달랐다. 중국의 주변국가들이 책봉-조공관계를 맺는 까닭은 중국적 세계질서에 의해 구축된 집단 안보체제에 참여함으로써 국가 안보를 보증받고, 책봉이라는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여 국내의 정치적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으며, 조공와 회사를 통해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른 중국의 고급한 문화를 수입, 향유하고 중국의 물자와 자국의 물자를 교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는 역성 혁명을 합법화하고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동기가 크게 작용했다. 조선의 관계는 전형적인 책봉-조공 관계임과 동시에 전형적인 사대(事大)-자소(字小)관계였다. 그러나 실질에 있어서는 명분과 관계없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결정되었다.

 

요동은 그 자체로 독립된 역사 공동체를 포함하고 있다. 건주여진, 해서 여진, 야인여진으로 건주와 해서는 매년 조공했다. 여진인의 중국물자에 대한 욕구는 노아간도사체제를 무력화시키고, 요동도사체제를 붕괴시켰다. 대규모 살육과 노략을 저질렀다. 건주여진의 누르하지는 이틈에 여진을 모두 통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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