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에로스와 문명 – 마르쿠제 / 역자의 말, 서론, 1부 1,2장 /화니짱 / 2021.11.10.
역자의 말
p5 : 환자의 꿈과 말실수, 그리고 무질서한 방심상태와 변덕스러운 자유연상을 분석하면서 정신분석가들은 의식적 언술의 틈을 통하여 드러나는 무의식의 표현들이 그 나름으로 분절되고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의 체제에는 모순이 없다. 서로 반대되고 양립할 수 없는 충동들이 아무 일 없이 함께 있을 수 있다.(Ambivalence) 이 체계에는 시간관념이 없고 다만 현재가 있을 뿐이다. (7) 아이는 어머니의 신체에서 분리된 자신을 근원적인 결여(틈, 부재, 분리)로서 (주체를) 경험한다. 결여가 충동이나 성감대보다 먼저 아이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결여로 인해서 아이의 삶은 회복할 수 없는 불완전성의 드라마가 된다.
언어의 매개를 통하여 욕망(desire)은 요구(need)로 변형된다. 아이는 언어 속에서 욕망을 소외시키는 한에서만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언어는 욕망에 응답하면서 동시에 욕망을 금지하고 또 보호한다. 욕망과 요구가 갈라지는 순간은 아이가 언어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욕망은 말할 줄 모르고 요구의 언어는 진정한 욕망을 드러내지 못한다.
욕망을 결정적으로 소외시키는 언어는 미지계를 하나의 기호체계로 번역한다. 언어가 없으면 인간은 하나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아이는 자아와 언어와 사회로 형성된 3차원의 질서 속에서만 개별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8)가 출현하면 무의식이 구성된다(생성된다x)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을 구성하는 기본억압이란 언어의 출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기본억압은 맑스의 필요노동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어떠한 사회에서건 인간이 사람구실을 하려면 치르지 않을 수 없는 보편적 희생이다.
인간과 세계, 자아와 타자, 자아와 자아표현을 명백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존재양식을 라캉은 상상계(영상계x)라고 이름지었다. 주체가 주체로서 존립하려면 상상계에 차별과 구별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차이와 대립의 개념을 통하여 상상계는 상징계로 이행한다. 상징계는 서로 다른 주체들이 자기를 주장하고 서로 대립하며, 상호작용의 그물에 의존하여 자기를 다시 발견하는 공동의 터전이다. (9) 그러나 상징계는 주체에게서 그의 본질적인 국면을 박탈한다. 주체의 탄생을 보증하는 상징세계가 주체의 상실을 초래하는 것이다. 아이는 상징계를 정복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징세계에 복종함에 의해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상징계가 인간을 사회에 오려 붙이는 것이다. 상징세계에 굴복한 주체의 역사는 자기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이탈하면서 자기를 찾는 부질없는 탐구의 변증법이다. -> 주체는 공백이다/비어있다/비주체다/미완성이다/불안하다/고독하다/외롭다/불완전하다
: 개인의 불완전 -> 사회화(사회성), 타자가 보는 나 [자아심리학/대타자/교사나 부모]
“나의 개성” ->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옳다. -> 나? : 사회화된 나 / 취향으로서 표현되는 나 [자아 ENTP, O형] : 의미화(권력) / 시선권력 /
<-> 라캉, 마르쿠제 : 무의식의 차원, 분류가 안됨, 표현도 안됨. 의미화되지 않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존재의 본질이다.
해방의 언어 (나는 OO이다) : 행위주체/발화행위주체 -> 언어의 수행성[‘나는 이런사람이야’ 규정되서 2번 분류된다 -> ‘나는 이렇게 살겠어’ 무한한 가능성 : 잠재성]
기존의 사회체제(객관적인 현실)가 마치 모든 공격성이 제거된 조화로운 세계나 되는(10)것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사회적 순응주의는 어쩔 수 없이 경험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말 것이다.
-> 대타자(마스터, 위대한 스승, 위대한 정답, 위대한 책, 위대한 지혜, 영웅)는 없다. 주체가 공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회도 구멍이 뚫려있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사회적 순응주의를 미국적 생활방식(속물, 동물 -코제브)이라고 보고, 그 안에는 과잉억압이 깃들여 있다고 보았다. 맑스가 잉여노동이라고 부르고 마르쿠제가 과잉억압이라고 부른, 계급구조의 토대를 개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가리는 데에 사회적 순응주의의 목적이 있다. 이러한 사회적 순응주의를 대표하는 믿음체계의 하나가 한계분석 경제학이다. 모든 인간은 비용의 비효용을 초과하여 수익의 효용이 극대화되도록 교환한다는 전제와, 모든 교환은 교환하는 사람의 효용을 극대화시키고 사회의 총효용도 극대화시킨다는 전제로부터 한계분석 경제학은 행복한 자본사회라는 결론을 유도해낸다. -> 경제학, 공리주의, 합리주의, 통계의 결론은 ‘행복한 우리 자본주의 세상’(GDP, 모두가 부자되는 것, 호모 이코노미쿠스)
p13 : 언어와 노동의 변증법은 결국 긍정의 길인 동시에 부정의 길이다. 언어의 출현으로 의식과 무의식이 갈라질 때, 무의식의 욕망을 억압하는 상징세계의 규칙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노동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상징세계의 영광과 비참을 긍정함으로써만 인간은 노동체계를 견뎌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있는 계급구조와 국가권력의 밖으로 나가려는 역사적 실험을 포기한다면 상징세계는 광대한 정신병원이 되고 만다.
p14 : 마르쿠제는 변(15)증법을 ‘사물을 부정하는 힘’이라고 정의하였다. 진정한 언어에서 낱말은 사물의 표현이 아니라 사물의 부재를 의미한다. 낱말은 사물을 사라지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어떤 보편적인 결핍, 그리고 그 낱말 자체의 결핍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서론
p21 : 사회에 유용한 활동과 표현을 위한 리비도의 강제적 굴절이 문화이다. (22) 인간에 의한 인간의 가장 효과적인 예속과 파괴는 인류의 물질적, 지적 성과가 정말로 자유로운 세계의 창조를 허용할 것 같은 바로 그때에 그 고도한 문명 (<-> 야만, savage)안에서 일어난다. (24)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는 신프로이트 학파(에리히 프롬 : 개인의 심리 + 사회학)에 의해서 맥이 빠졌지만, 깊은 차원에서 사회이론이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생물학적 요인에서 문화적 요인으로 중점을 옮기면서, 그들은 충동 속에 뻗어 있는 사회의 뿌리를 자르고, 대신에 근원과 정당성을 묻지 않고, 사회를 개인과 맞서는 수준에 있는 기존의 환경으로 보았다.
p26 : 본능은 프로이트의 충동이란 개념에 일치하는 것으로, 역사적인 변경에 종속되는 인간 유기체의 일차적 충동을 말한다. 그것은 신체에 나타날 뿐 아니라 정신에도 나타난다.
제1부 현실원칙의 지배
1장. 정신분석의 은폐된 경향
p29 : 인간 각자가 자신의 자연적인 충동을 추구하도록 방임한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충동은 지속적인 공동생활과 양립할 수 없다. 충동들은 자기들이 상호협동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를 파괴한다. 억제되지 않은 에로스(생명충동, 삶충동 : 원하는 데로 사는 것)는 그것의 정반대인 죽음충동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이다. (30) 승화, 동일시, 투사, 억압, 내사와 같은 정신분석의 개념들은 충동의 변하기 쉬운 성질을 암시한다. (31) 억제되지 않은 ‘쾌의 원칙’은 자연적 인간적 환경과 갈등을 일으킨다. 개인은 완전하고 고통없는 욕구의 충족이란 불가능하다는 외상(트라우마)적 실정을 깨닫는다. 이러한 실망을 경험한 후에 새로운 정신적 기능의 원칙이 지배권을 획득한다.(쾌의 원칙 -> 현실원칙) 포기와 억제를 통한 영구적 획득이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현실원칙이 쾌의 원리를(32)내쫓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보호하고 수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원칙의 확립에 의해서 쾌의 원리 아래서는 동물적 충동의 다발에 지나지 않던 인간이 조직적 자아가 된다. 조직적 자아는 유용한 것, 그 자신과 생활환경에 해가 되지 않는 쾌를 추구한다. 현실원칙 아래서 인간의 이성의 기능을 발달시킨다.
사고 활동의 오직 한 가지 형태만이 현실원칙의 지배를 벗어나 보존된다. 상상력은 문화적 변용으로부터 보호되어 그대로 쾌의 원리에 위탁되어 있다. (33) 쾌의 원리와 현실원칙의 교체는 인간의 발전-개인의 발전(개체발생)과 인류의 발전(계통발생)에 매우 커다란 외상이다.
억압은 역사적 현상이다. 억압적 조종에 의해서 충동을 효과적으로 정복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지배의 원형으로서의 원시적 가부장은 문명의 역사를 특징짓는 노예화와 반란, 그리고 강화된 지배의 연쇄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반란에 뒤이은 先史(선사)적 지배의 첫 번째 회복 이래 외부로부터의 억압은 내부로부터의 억압에 의해 지지되고 있었다. (36) 프로이트 저술의 특징은 문화의 고도한 가치와 성과가 억압된 내용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확고한 주장에 있다.
p37 : 무의식은 개인의 발전단계에서 완전한 만족이 획득되었던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거는 계속해서 미래를 요구한다. 무의식은 문명의 성과에 기초하여 낙원이 다시 창조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일으킨다. (최원 : 죽음충동[에로스]은 그리움이다.)
(38) 억압된 정신과정의 발달에 관한 프로이트의 분석은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수준에서 진행된다.
1. 개체발생 : 유아기 초기로부터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의 억압된 개인의 성장.
2. 계통발생 : 원시유목부족으로부터 완전히 제도화된 문명상태로의 억압된 문명의 성장.
(39) 우리는 먼저 문명화된 개인의 성숙상태를 향한 개체발생적 발전을 추구할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계통발생적 기원으로 돌아가 프로이트의 개념을 문명화된 인류의 성숙상태에까지 확장할 것이다. 두 수준의 끊임없는 상호관계는 잦은 전후 참조와 예상과 반복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2장. 억압된 개인의 기원 : 개체 발생
p41 : 프로이트는 개인의 충동구조 안에서 억압의 발전을 추적했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운명은 육체와 영혼, 자연과 문명이 참여하는 충동들의 투쟁 – 글자 그대로 삶과 죽음의 투쟁 – 에 의해서 결정되고 수행된다. 이러한 생물학적이며 동시에 사회학적인 동력학은 프로이트의 메타심리학의 핵심이다. (43) 그의 이론은 자기보존 본능(에로스, 생명충동)이 유기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의 길을 따르는 것을 보증하고, 유기체 자체에 내재하는 것과는 다르게 무기적 존재로 되돌아가는 길(죽음충동)을 가로막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단지 합성된 충동에 불과하다는 가설에 이르는 긴 여행이다.
p44 : 이제는 에로스(리비도 : 생명에너지를 수치화시켜서 / 자기보존본능 <-> 대상리비도)와 죽음충동이 두 개의 기본적인 충동이 된다. 그러나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면서, 프로이트가 그것들의 분화보다 그 충동들의 공통 본성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45) 평정을 향한 충동의 경향은 결국 삶 그 자체의 배후로의 퇴행이 된다. 완전한 만족을 위하여 노력(에로스, 생명충동)하는 가운데 정신구조의 일차과정은 모든 생물의 보편적인 추구- 다시 말하면 무기체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靜寂(정적)에 숙명적으로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충동은 죽음의 궤도 속으로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46) 그리고 쾌락의 원칙이 열반(nirvana)원칙의 표현으로서 열반원칙의 빛 아래서 나타난다. (쾌의 원리 : 아타락시아(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자극의 과잉X, 쾌감과 쾌락의 극대화X)
“자극에 의해서 내적인 긴장을 약하게 하고, 일정하게 하고, 제거하려는 노력(열반원칙)은 ...쾌락원칙 안에서 표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죽음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강한 근거 중 하나이다.”
에로스는 타나토스를 극복하고 지배권을 획득한다. 그것들은 계속해서 죽음으로의 하강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새로운 긴장이 에로스와 성충동의 요구에 의해서 충동적 욕구의 표현으로서 도입된다. (47) 삶충동은 비록 다른 충동들보다 고도로 보수적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다른 충돌들이 생물의 초기단계(->무기체)를 상기시킨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보수적이다. 성욕은 궁극적으로 죽음충동 같은 원칙에 복종한다. 후에, 프로이트는 성욕의 퇴행적인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생물은 태어날 때에 작은 조각으로 분열되어 성충동을 통하여 재결합되려고 한다는 플라톤의 환상적 가설(향연)을 상기시킨다.”
p49 : 성욕의 일원론은 이제 그 반대의 것, 죽음의 일원으로 전환된다. 반복과 퇴행충동과 궁극적으로 에로스의 가학적인 요소의 분석은 동요된 이원론적 개념을 획득한다. 죽음충동은 일차적 충동의 구조에서 자기의 권리로 에로스의 짝이 되고, 그들 사이의 영원한 투쟁은 일차적 동력학을 구성한다. (50) 만일 모든 유기체의 퇴행충동이 완전한 정적을 추구하는 것이고 열반원칙이 쾌의 원리의 근거라면, 죽음의 필연성은 전혀 새로운 빛 속에 드러나게 된다. 죽음충동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긴장의 제거를 위한 파괴이다.
p52 : 자아는 이드로부터 성장한 것으로서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 이드와의 관계 아래서 자아의 과정은 이차과정이 된다. 모든 사고는 만족했던 기억으로부터.. 같은 기억의 동일한 에너지 부착(cathexis 리비도 고착x)에 이르는 단순한 우회로이며, 그 우회로는 운동신경의 경험에 의해서 한번 이상은 도달한 적이 있는 길이라는 프로이트의 초기이론보다 자아의 종속적 기능을 더 잘 설명하는 것은 없다. (53) 부모와 다음에 부모의 사회적 대리자들이 개인에게 부과한 외부의 제한(하지마!)은 이제 자아로 내사(introjection / 내적투사)되어 양심이 된다. 이로부터 범죄 또는 이러한 제한의 위반(특히 오이디푸스 상황)에 의하여 생성된 처벌의 욕구, 곧 죄의식이 정신생활에 스며든다.
하나의 법칙으로서 자아는 초자아에게 봉사하거나 초자아의 명령을 받아 억압을 실행한다. 그러나 억압들은 곧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되고, 죄의식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이 된다. (54) 개인의 그 자신에 반대해서 엄격성을 발휘하는데 그것은 유아단계에는 한때 적합했었으나 개인적, 사회적 성숙의 합리적 가능성에 의해 오래 전에 무용하게 된 것이다.
-> 교사 / 목회자 자녀들에게 강박 성향 이 많은 이유
개인과 사회의 형성에서 과거는 이중의 기능을 드러낸다.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가 필연이 되는, 원시의 쾌락원칙의 지배를 살려내면서 이드는 이러한 상태의 기억의 흔적들을 현존하는 미래로 옮긴다. (에로스)
이드는 과거를 미래로 투사한다. 그러나 역시 무의식적인 초자아는 완전한 만족이 아니라 현재의 형벌에 쓰디쓰게 적응하는 과거의 이름으로 미래에 대한 충동의 요구를 거절한다. (타나토스)
p56 :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술어를 도입하고자 한다. (프로이트 + 마르크스)
1. 과잉억압 : 사회적인 지배를 위해 필요한 억제, 이것은 문명에서 인류의 영속을 위하여 필요한 충동의 수정인 기본억압과 구별된다.
2. 수행원칙 : 현실원칙의 역사적 형태
p57 : 현실원칙의 배후에는 아난케(필연) 혹은 희소성(homo-economicus : 경쟁 -> 재화의 희소성 / 돈, 연인)이라는 기본사실이 놓여 있다. 아난케란 일정한 제한과 포기와 지연이 없다면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지나치게 궁핍한 세계 안에서 생존경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을 바꾸면, 가능한 어떠한 만족도 욕구충족의 수단을 조절하기 위해서 노동, 즉 다소간 고통스러운 준비와 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합리화가 아무리 전체의 진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지배의 합리화이다. 희소성의 점차적인 극복도 지배의 이(58)익에 굳게 결속된 것이며, 지배의 이익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지배는 권위의 합리적인 행사와는 다르다. 노동의 어떠한 사회적 분업에도 고유한 권위행사는 전체의 진보를 위하여 필요한 기능과 조정의 관리에 한정된다. 그것은 지식에 기인하는 권위행사이다. 반대로 지배는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고양하기 위하여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서 실행된다. (능력주의 -> 특권 / 차별적인 대우 )
현실원칙의 어떠한 형태가 충동에 대한 억압적 조종을 상당한 범위와 정도로 요구함과 동시에 특정한 역사적 제도(미쉘 푸코 : 고고학적 방법론 )와 지배의 특정한 이익은 문(59)명된 인간의 공동생활에 피할 수 없는 억압적 조정 위에 부가적 조정을 다시 도입한다. 특정한 지배체계에 기인하는 부가적 조정을 우리는 바로 과잉억압이라고 하는 것이다.
p61 : 기록된 문명의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해서 희소성에 강제된 충동의 억압은 희소성과 노동의 계급적 분배가 강제하는 억압에 의하여 강화되어 왔다. 지배계급의 이익이 현실원칙 아래서 충동의 조직에 과잉억압을 첨가한다. 쾌의 원리는 그것이 문명의 진보에 대항할 뿐 아니라, 지배와 노고를 영구화하는 문명에 대항하기 때문에 제거된다.
p63 : “문명과 성욕의 갈등은 성적인 사랑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며, 그 안에서 제3자는 쓸데없거나 방해가 되지만 문명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관계애 기초한다는 상황에 기인한다. 사라의 관계가 절정에 이를때 주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용납할 여지는 전혀 없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그들 자신으로 충분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소유하는 어린애를 원하지조차 않는다.”
(64) 어떻게 해서 성욕의 비사회적인 성격이란 개념과 사랑의 관계(혹은 정서적 결속)가 집단심리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가정이 일치할 수 있을까? 파괴적인 내용을 성욕의 초기개념에 귀속시키고, 건설적인 것을 에로스에 귀속시키는 것으로는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65)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우리의 에로스/생명충동/성욕을 가족제도, 사회재생산의 도구와 부불노동, 재생산노동, 돌봄노동으로 치환시킨다.), 성욕과 문명의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갈등의 개념에 대항해서 병든 문명에 속박되고 마멸된 에로스의 통합하고 충족시키는 힘이라는 개념이 도전한다. 이러한 관념은 자유로운 에로스가 지속적이고 사회적 문명의 여러 관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쾌락원칙을 부정하는 원칙 아래 있는 사회관계의 과잉억압적 조직을 배제할 뿐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지배자들이 현실유지를 위해)
(66) 문명은 파괴적인 변증법으로 침잠한다. 에로스에 대한 영구적인 억압은 삶의 충동을 약화시키고, 그들이 소집한 데에 항거하는 힘인 파괴충동을 강화하고 해방한다.
결국, 현재의 문명에 내재하는 일반적인 억압의 범위와 한계를 밝히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이 문명의 기원과 성장을 지배하는 특정한 현실원칙에 의해서 그것을 기술하여야 한다. 이 법칙 아래서 구성원이 수행하는 경제적 경쟁에 따라서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것을 수행원칙이라고 부른다. 수행원칙은 단지 역사적인 현실원칙만은 아니다. 사회조직의 다른 양식들이 원시적인 문화에 일반적일 뿐 아니라 현대에도 살아 있다.
(67) 일하는 동안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욕구와 능력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소외 속에서 작업한다. 일은 이제 일반화되고 리비도 위에 가해진 억제도 일반화된다. 개인의 생활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시간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왜냐하면 소외된 노동이란 만족의 부재이며, 쾌락원칙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위축된 충동적 활력은 (노동에서) 그것의 사회적 유용화가 개인의 생명을 유지하고, 충실하게 하기 때문에 승화되지 않은 공격적 충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리비도에 부과되는 억제는 합리적이며 합리적일수록 보편적이면 보편적일수록, 전 사회에 더 잘(68)침투된다. 그것들은 외적이고 객관적인 법으로서, 또는 내재화된 세력으로서 개인을 조종한다.
성욕과 문명의 갈등은 이러한 지배의 발전으로 전개된다. 수행원칙의 지배 아래서 육체와 정신은 소외된 노동의 도구로 바뀐다.
시간의 분배는 이러한 변형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은 작업시간중에 제한된 몇시간만 소외된 수행의 도구로서 존재한다. 그 시간의 나머지는 그 자신을 위한 자유시간이다.
그러나 자유시간을 지배하는 쾌락원칙은 쾌락의 일시적인 분할에 항거하고, 소량의 분리된 투약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의미에서 시간을 초월한다. (각주) 양립할 수 없는 갈등은 일(현실 원칙)과 에로스(쾌락 원칙) 사이에 있지 않고 소외된 노동(수행원칙 : 객관적인 현실은 넘어 지배질서를 위해서 현실처럼 작동하는 원칙)과 에로스의 사이에 있다.
p70 : 성욕의 조직은 수행원칙과 사회조직의 기본적인 특징을 반영한다. 프로이트는 집중화의 양상을 강조한다. 이것은 특히 부분적 충동들의 다양한 대상들을 이성이라는 하나의 리비도적 대상으로, 그리고 성기가 우세하게 확정된 상황으로 통합하는 조작이다.
이러한 과정은 육체를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비성화하는데 성공한다. 리비도는 신체의 거의 전부를 노동의 도구로 사용되기에 편리하도록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신체의 일부에 집중된다. 리비도의 시간적 축소는 그것의 공간적 축소에 의해서 보충된다. -> 짧은 전희, 자위와 같은 섹스
(71) 도착은 성욕을 생식의 질서에 예속시키는 문명과 이러한 질서를 보증하는 제도에 대한 항거의 표현이다. (72) 도착은 현실적인 자아에 쾌락적인 자아가 완전히 예속되는 것을 반대하는 듯하다. 억압된 세계에서 본능적인 자유를 요구하면서, 도착은 성의 억압을 수반하는 죄의식에 대한 강한 거절로 흔히 특징지을 수 있다.
성욕을 유용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고용하는 사회에 반대해서 도착은 성욕을 목적 그 자체로 옹호한다. (사드 with 칸트)
p73 : 도착은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의 궁극적인 일치 또는 죽음의 본능에 대한 에로스의 굴복을 암시한다. ‘파괴적인 본능을 해롭지 않게 만들려는’ 리비도의 문화적 임무(삶의 임무)는 여기서 무력해진다. 궁극적이고 완전한 충족을 추구하는 원초적 충동은 쾌락원칙으로부터 열반원칙으로 퇴행한다.
p74 : 문명의 전 과정은 죽음의 본능과 그것의 파생물을 변형하고 유용하게 함으로써만 이룩될 수 있다. 일차적인 파괴력을 자아로부터 외부세계로 전환하는 것은 기술적인 진보를 양육한다. 초자아의 형성을 위하여 죽음충동을 사용하면 쾌락적 자아를 현실원칙에 예속시키게 되어 문명된 도덕이 보증된다.
p75 : 이드의 비현실적인 충동에 대항하는 방어적인 역할과 오이디푸스 복합심리를 끊임없이 정복하는 기능에 의해서 초자아는 자아의 통일을 형성하고 보호하며, 현실원칙 아래서의 자아의 발전을 안전하게 함으로써 초자아는 에로스를 위하여 활동한다. 그러나 초자아는 자아를 이드에 대항하도록 지도하고, 파괴본능을 개성에 대들게 하고, 개성의 전체적 통일을 파괴하고 분열시킴으로써 이러한 목적을 달성한다. 초자아는 삶충동의 적대자에 기여하면서 활동한다. 이러한 내부지향적인 파괴력은 성숙한 개성의 도덕적 핵심을 구성한다.
-> 자기비판, 자기반성, 자기파괴의 힘이 있어야 나르시시즘이나 거대한 자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성장할 수 있다.
p76 : ‘인간이’ 타인들에 대한 그의 공격적인 경향을 제어하면 제어할수록 그는 자아이상 안에서 더욱 독재적이고 공격적이 된다.
“초자아의 공격에 시달리고, 또 때로는 그것에 굴복하면서 자아는 스스로 창조한 분해물에 의해서 파괴되는 원생동물의 경우와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
(77) 이러한 문맥 안에서 프로이트의 메타심리학은 치명적인 문명의 변증법과 마주서게 된다. 문명의 진보 자체가 증대하는 파괴력의 해방으로 통한다.
-> 한편으로 문명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공격본능, 야만이 아닌 문명이 공격성을 승계한다.
'세미나 발제문 >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로스와 문명 – 마르쿠제 / 1부 5장 철학적 간주곡 /화니짱 / 2021.11.24. (0) | 2021.11.24 |
---|---|
에로스와 문명 - 마르쿠제/ 억압된 문명의 기원, 문명의 변증법 / 개벽크 / 21. 11. 17. (0) | 2021.11.17 |
2021.11.07. 철학사 2.5기 세미나.『천하국가』7장 발제 . 풍경 (0) | 2021.11.07 |
에리히 프롬 –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제 9장/10장/11장 요약 및 발표 콩빠 (0) | 2021.11.03 |
정신분석과 유물론 6-8장 노그래 21.10.27 (0) | 2021.10.27 |
- Total
- Today
- Yesterday
- 집단심리
- 브루스커밍스
- 이탈리아공산당
- 루이 알튀세르
- 야생의사고
- 개인심리
- 로마사논고
- 프롤레타리아 독재
- 검은 소
- 안토니오그람시
- 공화국
- 헤게모니
- 계급투쟁
- 생산관계
- 신학정치론
- 알튀세르
- 딘애치슨
- 레비스트로스
- 한국전쟁의기원
- 무엇을할것인가
- virtù
- 이데올로기
- 옥중수고이전
- 스피노자
- 의식과사회
- 루이알튀세르
- 그람시
- 마키아벨리
- 옥중수고
- 생산양식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