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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푸코가 1977~1978년도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한 『안전‧영토‧인구』라는 제목의 강의는 근대의 ‘통치성’의 계보를 다루고 있다(p. 243).
푸코는 통치 기술의 기원을 그리스도교적 사목, “영혼에 대한 통치”에서 찾는데, “기술 중의 기술”인 이 “통치”가 18세기까지 교회의 활동을 규정했다(p. 245).
통치란 실제로는 “오이코노미아[경제]의 형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기술”이며, 교회적 사목과 정치적 통치는 모두 본질적으로 오이코노미아적 패러다임 내부에 위치해 있다.
푸코는 아퀴나스의 『군주의 통치에 대해』의 분석을 통해 중세 사상, 특히 스콜라 처학에서 주권과 통치 사이에 여전히 실체적 연속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p. 246).
푸코에 따르면 이 연속성은 … 하느님은 “사목의 방식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원칙을 통해 세계에 주권적으로 군림함”을 보여준 16세기에 최초로 깨진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왕국과 통치의 분할의 최초의 싹은 삼위 일체적 오이코노미아에 있음을, 그것이 신성의 존재와 실천 사이의 분열을 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p. 247).
고고학 연구를 할 경우 어떤 정치적 개념이나 제도의 계보학은 처음에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한 곳과는 다른 장(예를 들어 정치학이 아니라 신학)에서 발견될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한다(p. 248).
이러한 방법론 상의 주의를 소홀히 함으로써 푸코는 통치성의 계보학을 끝까지 설득력 있게 분절화[명시화]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넬라르의 소중한 연구 『통치술』도 손상시켰다(p. 249).
5.2.
섭리에 대한 논쟁의 핵심 쟁점(p. 250)
- 일반 섭리와 개별섭리(또는 특수섭리) 사이의 구별
일반 섭리 긍정, 개별 섭리 부정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고대 후기 철학, 이신론
일반 섭리 부정, 개별 섭리 긍정 → 스토아학파, 유신론, 그리스도교 신학의 지배적 흐름
- 일차적으로 섭리의 계획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 / 부수적인(이차적인) 것으로 생산되는 것 사이의 구별
왕국과 통치가 신에게서 확실히 대립되어 분리되어 있다면 실제로 어떠한 세계 통치도 가능하지 않다(p. 251). … 통치가 가능한 것은 오직 왕국과 통치가 양극을 가진 기계에서 상관관계를 가질 때 뿐이다.
5.3.
섭리 기계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크리시포스의 『섭리에 대해』의 한 구절에서이다(p. 251).
섭리 기계는 상이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전략적 접합: 악의 근원과 정당화 문제, 세계통치 문제
크리시포스는 … 사물들의 본성 혹은 세계와 인류를 만든 섭리는 인간들이 면할 수 없는 질병들도 만들었는가라는 문제를 검토했다(p. 253). … 그러한 것들은 자연의 원초적 계획과 목적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고, 작품[자연에 의해 산출된 결과물]의 귀결로 나타났으며 단지 결과로서 현존하게 된 것으로 크리시포스는 이를 부산물로 규정한다.
5.4.
기원 후 2세기 경에 활동안 아프로디시아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자 알렉산드로스는 왕국 패러다임을 사목 패러다임(즉 여기에서도 또한 왕국을 통치)에 대립시켰다(p. 254). 목자는 자신이 돌보는 것들보다 하위에 있는바 목자의 완전함은 자신이 돌보는 안락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왕의 의무는 이처럼 시시한 일들을 몸소 관리하기엔 너무 고귀하고 고결하다.”
하느님이 모든 하위의 존재를 관찰하고 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이승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p. 255).”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섭리의 이중 분절화(p. 256)
‘일반 섭리’: 그 자체에 의한 섭리
‘특수 섭리’: 우연에 의한 섭리
알렉산드로스는 의지적 행동이라는 모델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 우연이라는 모델 모두를 피할 수 있는 하느님의 행위라는 패러다임, 즉 이른바 의식적 우연 또는 목표 없는 의식이라는 역설적 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패러다임의 개요를 그려 보인다.
5.5.
섭리 이론은 알렉산드로스에게서 세계에 대한 통치를 정초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러한 통치는 우연적이지만 의식적인 방법으로 보편 섭리에서 유래한다(p. 259). 따라서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하느님은 통치를 가능하게 해준다. 다시 말해 통치란 섭리(또는 왕국)의 부대 현상이다.
섭리적 행위의 본성을 이런 식으로 정의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신에 의한 세계 ‘통치’의 규준을 전달했다.
섭리는 사물의 본성 자체를 통과하고 내재적 ‘오이코노미아’를 따라야만 한다(p. 260).
근대의 통치적 이성은 정확히 섭리의 이중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다(p. 261). 모든 통치 행위는 일차적 목표를 겨냥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부차적 결과(‘부차적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p. 262). … 이 부차적 결과는 중대한 것(전쟁의 경우 사람들의 죽음이나 도시의 파괴를 함축할 수 있다)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계산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통치의 논리의 필수불가결한 일부이다.
5.6.
섭리 개념의 기원은 스토아학파 사상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서 섭리 개념은 운명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p. 262).
플루타르코스의 논고 『운명론』에서 운명은 활동으로 “이리저리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흐름을 규정하는” ‘법’과 동일시 된다(p. 263).
“국가의 법”은 이런저런 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조건(‘전제’)에 따라 도시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조정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운명 또한 개별적 운명들 사이의 연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는 일반적 조건을 정한다.
비록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와 마찬가지로 통치패러다임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그것의 결과로 나타나는 ‘결과적’ 존재론에는 모종의 방법으로 통치 가능성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통치란 궁극적으로는 일반적인 것도 또 개별적인 것도, 일차적인 것도 또 결과적인 것도 또 목적도 수단이 아니라 양자의 기능적 상관관계를 겨냥한 활동으로 이해된다(p. 266).
근대과학의 세계상은 섭리에 의거한 세게 통치라는 신학적 개념과 종종 대치되어 왔다(p. 267). 하지만 개념상의 구조에서 양자는 통상 생각되는 것보다 더 서로 비슷하다.
세계의 질서는 최초의 기획을 소급해서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일종의 근인의 결과로 나타난다.
5.7.
알렉산드로스 『운명론』의 결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어떤 것의 주인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어떤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읏 때뿐이다(p. 269).”
실제로 근대 통치 기술들에서 본질적인 것은 이미 규정되어 있는 질서라는 이념보다 무질서를 경영할 가능성이다. 운명의 맹목적 필연성보다 무질서의 항상성과 계산 가능성이다. 인과적 연관의 중단 없는 연쇄보다 그 자체로 순전히 우연적인 결과들의 보전과 정향이다(p. 270).
5.8.
『테오드로스의 편지』에서 프로클로스는 운명 그리고 그것이 섭리와 맺는 관계 문제를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이 세계라는 시계를 일종의 초기술자로서 움직이고 하나로 통일시키는 원리가 운명 또는 섭리이다(p. 272).
어떤 자유도 또 신에 의한 세계 통치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는 이러한 세계-기계라는 일원론적 모델에 맞서 프로클로스는 섭리와 운명은 그와 반대로 위계적으로 두 수준으로 분절화된 체계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섭리와 운명은 함께 2행정 사이클로 이루어진 기계처럼 작동하는데, 거기서 결과들로 이루어지는 운명적 연관은 섭리에 의거한 초월적 선의 발산을 실행, 실현한다.
비록 신의 세계 ‘통치’라는 이념은 여기서는 아직 그 자체로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존재를 서로 명백하게 구별된 동시에 배열된 두 수준으로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통치 기계를 구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 전제조건이다(p. 273).
5.9.
그리스도교 신학에 섭리-운명이라는 장치를 전달해준 논문은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다(p. 274).
섭리와 운명, 초월과 내재는 이미 플루타르코스에서도 또 프로클로스에서도 두 얼굴을 가진 체게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제 양자 사이에서 분명히 분절화되어 세계 통치를 위한 완전한 기계를 구성하게 된다(p. 275).
“섭리란 만물의 최고 통치자 안에 있어 만물을 지배하는 신적 이성을 말하는 것이요. 한편 운명이란 움직이는 사물에 내속한 배정 상태[이것은 오코노미아라는 라틴어의 의미를 전제하는 라틴어 어휘의 일부이다]이니 섭리는 이 상태를 통해 모든 사물을 자기 지령하에 종속시키는 것이다(p. 276).”
시간적 질서의 전개가 신적 정신이라는 관념과 합치하는 것을 섭리라 하고 또 이 하비가 시간 속에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운명이라고 한다. 이 둘은 각각 다른 것이나 하나가 다른 것에 속하는 것으로 운명의 질서는 섭리의 단순성에서 유래한다.
세계를 운영하는 권력은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영원한 초월적 원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분절화되는 내재적 오이코노미아 사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초월적 주권자는 원인들의 내재적 연관 속에서 나중에 그러한 원인들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어떤 운명을 강요할지를 인식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운명 ― 즉 통치 ― 은 그에게는 불가해한, 위압적인 기적으로 나타난다(p. 278).
통치 기계에서 섭리와 운명은 단지 하느님의 단일한 행동의 두 측면, 세계 통치라는 단일한 활동의 두 양식이다. 이 세계 통치는 용어상 의식적인 양의성에 의해 섭리/운명, 지성/배치, 초월적/내재적, 하느님의 정신 속에서 수축된 것/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나타난다(p. 279).
통치 기계는 끊임없는 변신론이 기능하는데, 거기서는 섭리의 왕국이 운명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정초하며 운명은 섭리가 정한 질서를 보증하고 작동하도록 만든다(p. 280).
『신의 통치에 대해』 2권은 성경에서의 예증을 통해(성스러운 증언을 통해) 섭리의 세 가지 형상을 규정하는데 할애되어 있다. 이 형상을 살비누스는 ‘현전’, ‘통치’, ‘심판’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 3자는 하나의 단일한 보유자 아래 다시 하나로 정리된다. 주권에 대응하는 현전은 감시하고 지켜보는 눈으로 상징된다. 통치는 이끌고 교정하는 손으로 상징된다. 심판(사법 권력)은 심판을 내리고 단죄하는 말로 상징된다. 하지만 이 세 권력은 엄밀하게 연결되고 서로 포함된다.
5.10.
신학적 통치 패러다임은 아퀴나스의 ‘세계 통치론[사물들의 통치 일반에 대해]’(『신학대전』 제103-113 문제)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통치는 테마가 아니라 일련의 ‘문제’의 분절화를 통해 규정된다(p. 283).
무엇보다 먼저 통치는 우연과 대치된다.
근거 1) 확실한 사물들의 질서는 세계의 통치를 명확하게 증명해준다.
근거 2) 사물들이 존재하도록 산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들을 목적으로 이끄는 것도 하느님의 선성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통치를 의미한다(p. 284).
하느님에 의한 피조물들의 통치에는 피조물들에 원래 속한 본성상의 필연성이라는 내용밖에 없다.
“화살의 운동에서 강제의 필연성은 궁수의 ‘겨냥’을 증명하는 것처럼 피조물들의 자연적 필연성은 하느님의 섭리의 통치를 증명한다.”
따라서 통치는 꽤 특수한 형태의 활동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비폭력적인 것이며 통치 받는 사물들의 본성 자체에 의해 분절화된다. 하느님의 통치와 피조물들의 자기 통치는 일치한다.
창조의 순간에 본성의 최초의 각인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러한 활동은 단순히 수동성 또는 ‘자유방임’과 일치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하느님의 개입은 창조의 순간에서의 본성과 ‘일하는 힘’의 최초의 증여에 한정되어 있다(p. 286).
세계 통치라는 행위에 고유한 공간은 ‘신에 대한 질서’의 공간, 제1원인의 필연적 공간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질서’, 제2원인의 우연적 공간이다(p. 287).
하느님은 사물들 내부에서 은밀하게 작동한다(p. 288).
이 지점에서 ‘질서’의 구성적 분열의 의미 그리고 그것이 왕국/통치, 존재론/오이코노미아라는 이분적 체계와 맺는 연결의 의미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왕국은 ‘신에 대한 질서’, 즉 제 1원인에 대한 피조물들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통치는 ‘서로에 대한 질서’, 즉 사물들끼리의 우연적 관계와 관련된다(p. 289).
피조물과의 실천적인 통치 관계를 정초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하느님이 피조물과 가진 존재론적 관계인데, ―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내부에 있는 동시에 절대적으로 부능하다 ― 이 관계에서(즉 제2원인의 영역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무한정하다. 오이코노미아가 하느님 안에 도입하는 존재와 실천 사이의 분할은 실제로 하나의 통치 기계인 것처럼 기능한다.
5.11.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권력이 이처럼 근본적으로 이극화로 분절화되는 것에서 또한 하느님의 통치 활동의 또 다른 본질적 성격이 나타난다.
하느님은 통치 계획과 관련해 모든 것을 매개없이 직접 통치한다. 그러나 통치의 실행과 관련해서는 어떤 것들을 다른 것을 매개로 하여 통치한다(p. 290).
‘지상의 왕’은 통치를 위해 심부름꾼들을 이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의 권력은 존엄이라는 측면에서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에 의해 한층 더 빛난다(“신하들의 질서를 통해 왕권이 더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통치 ‘이성’의 실행을 다른 자들에게 맡기는 것은 당신의 통치를 한층 더 완벽한 것으로 만든다.
일반적인 질서 부여의 권력(‘통치 이성’, ‘질서의 부여’)과 실행 권력 사이의 개념상의 구별은 정치 영역에 등장하기에 앞서 신학 영역에서 등장한다. 권력의 분할이라는 근대적 학설은 섭리 기계의 그러한 분절화 속에 패러다임을 갖고 있다.
슈미트가 ‘입법 국가’라고 부르는 근대적 법치 국가에서 모든 통치 활동은 비인칭적으로 발효되는 법의 적용과 실행으로 모습을 나타내지만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국가는 왕국과 통치, 정당성과 합법성이 일치하는 섭리 패러다임의 극단적 결말이게 된다.
5.12.
아퀴나스는 섭리는 이성적 피조물들을 다른 피조물과 동일한 방식으로 정돈하지 않는다(p. 293).
이성적 피조물들의 최종 목적은 본성상의 능력을 초과하며, 따라서 하위의 피조물들과는 ‘서로 다른 통치 방법’이 요구된다. 이 특별한 ‘보다 높은 통치 방법’이란 은총이다.
자연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은총에서도 섭리적 통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강제를 부가할 수 없다는 원리가 성립된다(p. 294).
“하느님 또한 우리에게서 우리 모습에 맞추어 우리 일이 원인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강제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지에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강제로 선을 이루는 자는 아무도 없다.”
세계 통치는 은총과 우리의 자유가 합류하는 장이다(p. 295).
인간들에 대한 통치라는 섭리적 패러다임은 압제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것이다.
5.13. 통치 기게의 두 극 ― 왕국과 통치 ― 사이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대리적인 것임을 이해하지 않으면 통치 기계의 기능을 이해할 수 없다.
권력 ― 모든 권력 ―의 대리성이 특히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삼위일체적 오이코노미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이다. 말하자면 대리성이 최고 권력의 본질적 구조가 되고, 아르케를 내부에서 대리적으로 분절화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와 관련해 교황의 권력이 대리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임재의 지연에 기초해 정초되었다(p. 296).
바울에게서 명확한 패러다임을 찾아볼 수 있는 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권력 또한 아버지의 권력에 대해서는 대리적이다.
그리스도의 권력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대리적 권력으로, 여기서 그리스도는 말하자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동하고 통치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삼위일체 내부적 관계는 모든 ‘대리적 권력’의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볼 수 있다(p. 297).
삼위일체적 오이코노미아는 본질적으로 대리라는 패러다임에 따라 세 위격 사이를 순환하는 비아르케적 권력과 존재의 표현이다.
권력은 ‘대리로 경영된다’는 구조를 갖고 있다(p. 298). 권력은 본질 자체에서 ‘대리’이다.
주권 권력은 절대적으로 비실체적이며 ‘오이코노미아적’이라는 것이다.
통치는 분명히 왕국에 대해 대리적으로 행동한다.
대리성에는 어떤 존재론이 함의되어 있다. ― 또는 보다 정확히 하자면 고전적 존재론은 ‘오이코노미아’라는 패러다임에 의해 대체되어 있다.
권력의 실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오이코노미아’, ‘통치’만 존재할 뿐이다(p. 299).
경계영역
1. 섭리(통치)란 고전적 존재론이 서로 분리된 두 가지 현실로 분열된 것에 대처하기 위해 신학과 철학이 이용한 수단이다(p. 300).
2. 섭리(통치)는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또한 이와 동일한 정도로 세계 밖에 있는 신과 통치하는 하느님 사이의 여지주의적 분열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를 대변하는데,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러한 분열을 아버지와 아들의 ‘오이코노미아적’ 분절화를 통해 상속한 것이다(p. 301).
그리스도교적 세계 통치는 밖에 있는 세계, 계속 밖에 있어야만 하는 세계를 내재적으로 통치한다는 역설적 형상을 갖게 된다.
신학적 오이코노미아가 근대의 통치성에 전해준 이 ‘영지주의적’ 구조는 서구 열강(특히 미합중국)이 오늘날 지역적 규모뿐만 아니라 글로벌적 규모로 실현하려는 세계 통치 패러다임에서 극적으로 도달한다.
3. 비록 섭리기계는 단일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두 개의 상이한 평면 또는 수준에서 분절화된다(p. 302). 초월/내재, 일반 섭리/특수 섭리(또는 운명), 제1원인/제2원인, 영원/시간성, 지적 인식/실천. 이 두 수준은 서로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세계의 통치란 이러한 기능적 상관관계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4. 그 결과 통치 행위의 패러다임은 순수한 형식에서는 부차적 결과가 된다.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계산된 것과 원하지 않는 것 사이의 결정 불가능성의 지대. 이 지대가 통치 행위의 ‘오이코노미아’이다.
5. 권력의 분할은 섭리 기계와 동일한 실체를 갖고 있다(p. 303).
6. 통치 행위의 존재론은 대리적 존재론이다.
7. 통치는 통치되는 자들의 자유를 전제하고, 이 자유는 제 2원인들이 작동하는 것을 통해 표명된다.
사실 근대 국가는 세계 통치의 신학적 기계의 양면을 모두 계승하고 있으며 섭리-국가에서도 또한 운명-국가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입법 권력/주권 권력과 실행 권력/통치 권력의 구별을 통해 근대 국가는 통치 기계의 이중 구조를 받아들인다(p. 304).
국가는 초월적‧보편적으로 법을 제정하지만 관리 대상인 피조물들을 자유롭게 방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음험한 대리인이 입는 운명의 옷을 입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섭리적 준칙을 세부적으로 실행하고, 내재적 인과들의 집요한 연관 속으로 들어가도록 내키지 않아하는 개인들을 강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섭리-오이코노미아 패러다임은 민주주의적 통치 패러다임이다.
일반적 ‘오이코노미아’는 자체로는 전체적으로 아무런 효력도 갖지 않지만 그것이 없으면 어떠한 통치도 할 수 없다. 결과(통치)가 존재(왕국)에 의존한다기보다 오히려 존재하는 쪽이 존재의 결과 속에 존재한다(p. 305).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들의 오이코노미아적‧통치적 사명은 우발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학의 유산을 구성하는 일부로,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 유산의 수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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