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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드레퓌스 사건

한나 아렌트 4장 드레퓌스 사건(22.03.29).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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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진상

 

p220 : 드레퓌스 사건이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생존할 수 있던 것은, 이 사건의 두 요소가 지닌 의미가 20세기에 커졌기 때문이다. 첫째 요소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였고, 둘째 요소는 공화정 자체, 즉 의회와 국가 기구에 대한 의혹이었다. 국민 대다수는 국가가 여전히 유대인의 영향력과 유대계 은행의 권력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다.

 

2. 3공화국과 프랑스 유대인

p227 : 파나마 스캔들은 두 가지를 만천하에 폭로했다. 첫째 의원과 공무원이 사업가가 되었다는 사실이고, 둘째 사적인 사업과 국가 기관을 연결시켜준 중개인은 거의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p228 : 정권도 과거처럼 유대인이 절실하게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정부가 이제 의회를 통해 과거의 절대군주나 입헌군주가 꿈조차 꾸지 못했을 정도로 폭넓은 재정적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도적인 유대인 가문들은 서서히 모든 공적인 경제 정책의 무대에서 물러났고, 귀족의 반유대주의 살롱으로 가서 좋았던 옛 시절을 되찾으려는 목적을 가진 반동운동에 뒷돈을 대주려는 꿈을 꾸었다.

 

p230 : 유대인은 어느 정도 동질적이고 안정된 국가 기관이 그들을 필요로 하고 그들의 보호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에만 사회 밖의 분리된 집단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국가 기관의 약화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하(231)나로 묶여 있던 폐쇄적인 유대인 집단의 해체를 가져왔따. 최초의 징후는 최근 귀화한 프랑스 유대인들이 벌인 사건에서 나타났으며, 인플레이션 시대의 독일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신참은 사업계와 국가 사이의 틈새를 메워주었던 것이다.

 

3. 공화국에 저항하는 군대와 성직자

p234 : 당시 카톨릭 교회가 누린 대중성은 일반 국민의 회의주의가 널리 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의주의는 공화정과 민주주의 치하에서 모든 질서와 안정, 정치적 의지가 상실되는 현상을 목도한 데에서 유래했따. 많은 사람에게 교회의 엄격한 위계질서는 혼돈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실제로 교회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는 이른바 지적인카톨릭 교파, 신앙이 없는 카톨릭의 대표자들이었다. 차후 왕정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 운동 전체를 주도해가는 이 카톨릭 교도는 교회의 내세적 토대에 대한 믿음 없이 권위주의적 제도에게 보다 많은 권력을 부여할 것을 요구했다.

 

p236 : 드레퓌스 가족은 프랑스 유대인 가운데 특유의 반유대주의를 채택함으로써 사회에 동화하고자 했던 부류에 속한다. (238) 유대인이 얼마나 결사적이고 정력적으로 군대 내에서 자리를 확보하고자 했는지를, 또 당시에도 벌써 이들에 대한 적대감이 얼마나 일상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몇 안 되는 유대인 장교는 언제나 지독한 모욕의 대상이었고, 끊임없이 동료와의 결투를 강요당했다.

p242 :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나 프랑스는 프랑스인을 위해같은 슬로건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대중과 현재의 정부 및 사회를 화해시킬 수 있는 마법 같은 공식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4. 국민과 폭민

p244 : 사회와 정치적 대의제도에서 배제된 폭민은 필연적으로 의회 밖의 행동에 의지하게 된다. 더욱이 이들은 몸을 숨기고 무대 뒤에서 활동하는 그런 운동과 영향력에서 정치적 삶의 실질적 힘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의 유대인도 프리메이슨단과 예수회와 마찬가지로 이 부류에 속했다.

 

p251 : 민족주의자의 특성이었던 허무주의는 반드레퓌스파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대다수의 사회주의자와 드레퓌스를 옹호했떤 만은 사람들, 게드와 같은 사람도 같은 투로 말했다. “드뤠뤼스가 무죄냐 유죄냐의 문제가 아니라 군대의 친구가 이기느냐 아니면 적이 이기느냐의 문제다.”

 

p253 : 이런 무관심한 분위기에서 노동자들 떼넨 최초의 인물은 국민의 열렬한 사랑을 받던 에밀 졸라였다. 그러나 유명한 공화국에 대한 고발장에서 그는 정확한 정치적 사실들을 비껴가면서 비밀 로마라는 유령을 불러냄으로써 폭민의 열정에 굴복한 최초의 인물이다.

 

p254 : 마침내 프랑스의 모든 계급과 심지어 모든 가정을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서로 대립하는 분파로 분열시킨 사람은 누구인가? 졸라와 폐기처럼 전혀 딴판인 사람들, 사건 직후 절교하여 각자의 길로 갈 사람들이었다.

 

5. 유대인과 드레퓌스파

p258 : 불운한 드레퓌스 대위의 사건이 온 세상에 보여준 것은 모든 유대인 귀족과 백만장자에게는 여전히 과거의 하층민 시절의 요소, 즉 나라도 없고 인권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가 기꺼이 특권 계층에서 배제하기를 원하는 그런 하층민의 요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p259 : 사회적 속물근성과 큰 사업, 그리고 이윤 기회의 무거운 중량 아래 정치적 열정이 억눌려 있는 그런 집단 속으로 그들은 급속하게 동화되어 갔다. 이런 경향이 불러온 반감을 그들은 가난하고 아직 동화하지 못한 이주 동포에게(동구 유대인) 돌림으로써 제거하고자 했다.

 

6. 사면과 그 의미

p261 : 의회의 정서를 드레퓌스에서 유리하도록 변화시킨 것은 결국 박람회가 보이콧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클레망소에게는 패배였다. 그는 최후까지 애매모호한 사면과(262)심지어 더 애매모한 특사를 비난했다. 졸라는 이렇게 썼다.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명예로운 사람과 폭력배를 악취 나는 사면으로 일괄 처리한 것이다. 모든 게 한 단지 속에 던져졌다.”

 

p263 : 유일하게 가시적인 성과는 그것이 시온운동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시온운동은 반유대주의에 대항하여 유대인인 발견할 수 있던 유일한 대답이었고, 자신들을 세계적 사건의 중심에 세웠던 적대감을 심각하게 고려한 유일한 이데올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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