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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인종주의 이전의 인종사상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인종주의자는 애국주의에서는 다른 모든 국제적 이데올로기의 대표자들보다 더 나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이 국가를 설립하는 원리, 즉 인류의 이념이 보장하는 모든 민족의 평등과 연대의 원리를 부정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324)
1. 시민의 ‘민족’에 대항하는 귀족의 ‘인종’
제3신분과 그들의 변호인인 지식인과 법조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집단의 정치권력이 증대하는 데 대항하는 논리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불랭빌리에는 프랑스 왕이 자신들의 제1인자로서 귀족계급을 대표하지 않고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자 했던 까닭에 군주제도와도 투쟁해야만 했다.
(325) : 제3신분, 지식인, 법조인 (부르주아 시민계급) + 왕 vs 귀족
그는 귀족(326)이 프랑스 국민과의 공통된 기원을 부정하고 국가의 단일성을 깨며 원래의 영원한 차별성을 주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번역했고 <신학-정치 논고>도 분석했다. 그가 스피노자의 정치사상을 수용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힘은 정복으로 바뀌었고, 정복은 인간의 민족의 본성과 특권을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로 작용했다. 여기서 우리는 권력 권리 학설이 차후 겪게 될 자연주의적 변형의 최초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 비르투 -> 정복, 자유주의적 권리 개념이 인종주의와 연결되는 단초.
p327 : 그는 시민전쟁(civil war)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프랑스로 하여금 시민전쟁을 준비하도록 만들었다. 많은 귀족들이 스스로를 국가의 대표자로 생각하지 않고 동포보다는 ‘같은 사교계와 조건’을 가진 외국인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진 분리된 지배계급으로 생각했고, 그는 이 귀족을 대표했다. 이런 반국가적인 경향이 이주민의 환경에 영향을 미쳤고 마침내 19세기 후반 새롭고도 노골적인 인종주의 교의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진정한 기원은 독일과 같으며 프랑스의 하층 계급은 더 이상 노예는 아니지만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귀(328)족에 의한 해방, 즉 천부적으로 자유로운 귀족의 은총으로 인해 자유로워졌다고 여겼다. -> 천부인권설에 대한 비판, 패러디
프랑스 혁명이 “이민족들간의 전쟁”이라고 굳게 확신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매국노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시 프로이센에 협력한 귀족들
“노예 출신으로 모든 인종과 모든 시대의 혼합물인 이 새로운 민족”(시민계급)을 공개적으로 경멸했다.
P329 : 프랑스 귀족이 부르주아 계급과의 투쟁에서 자신들은 다른 민족에 속하고 다른 계보학적 기원을 가지며 프랑스보다는 국제적 신분계급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초창기부터 프랑스의 모든 인종 이론은 게르만주의를 옹호하거나 아니면 프랑스인과 비교해서 적어도 북유럽인의 우월성을 지지했다.
역설적으로 프랑스인이 독일이나 영국인보다 더 먼저 게르만적 우월성을 주장했다.
2. 국가 해방의 대체물로서의 인종의 단일성
p330 : 독일에서 인종사상은 구 프로이센 군대가 나폴레옹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는 발달하지 못했다. 이 개념은 귀족과 그들의 대변인보다는 프로이센의 애국자들과 정치적 낭만주의 덕분에 발생했다. 시민전쟁의 무기이자 국민을 분열시킨 프랑스의 인종사상과는 대조적으로 독일의 인종사상은 외국의 지배에 대항하여 국민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에서 고안되었다.
(331) 프랑스와는 달리 프로이센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절대군주 정치의 지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적어도 프리드리히 2세 이후 합법적인 국민 전체의 대표자로 인정받고자 노력했다. 그러므로 인종사상은 귀족계급의 밖에서, 독일어권 민족들의 통일을 원하기 때문에 공통의 기원을 주장하던 특정한 민족주의자들의 무기로 발전했다. 프로이센 귀족의 배타적인 통치에 반대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공통의 기원이 공통의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한, 인종사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332) 유기체적인 단일성의 발전에 가장 적합하지 못한 민족인 독일인들이 순수한 비혼혈의 “진정한 민족”이 되는 행운을 가졌다는 아른트의 진술이 나온 것은 좌절된 민족주의 때문이었다.
-> 독일에서 귀족과 왕가, 부르주아 계급 모두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음. 오히려 하나의 민족으로의 통일을 원하는 관점에서 인종 사상이 사용됨. 다만 민족주의의 내용은 귀족의 배타적 통치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인종주의라고 볼 수는 없었음. 독일은 당시 근대국가를 완성하지 못했음. 여러 가지 소국으로 쪼개진 연합체였음. 따라서 ‘영토, 국민, 주권’의 3요소 중 국민을 형성하기 위해 인종사상을 통한 민족주의를 동원한 것이다. 독일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기억이 없고 미래의 공동운명에 대해 모두가 냉담한 가운데”(331) 있었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호소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p333 : 초기의 프랑스 귀족 정치에서 인종사상은 내부 분할의 도구로서 고안되었고 결국 내전의 무기로 드러났다면, 독일의 초기 인종 교리는 국가의 내부적 통합의 무기로 고안되었지만 결국 국가 간 전쟁의 무기가 되었다. -> 1줄 요약!
p335 : 귀족과 부상하던 중산층 계급 사이의 갈등이 정치 무대에서 결코 투쟁으로 번지지 않은 독일에서 개성 숭배는 어느 정도 사회적 해방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발전되었다. : 낭만주의자가 인종 사상을 고안해낸 추가적 요인인데, 낭만화된 대상 가운데 하나가 국민이었다.
p336 : 지식인들은 출생의 권리와 자질(귀족)과 경쟁하기 위해서 부르주아 사회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던 ‘선천적 개성’이라는 새 개념을 만들어냈다.
부르주아 계급은 귀족의 계급적 오만에 대항하여 (...) 다른 민족을 낮추어 보려 했다.
p337 : 브렌타노는 선천적 개성, 천재적인 개인과 속물의 차이를 지적했다. 이후에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은 귀족이 전형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것으로 여긴 모든 자질(졸부 : 선천적 개성의 결핍, 재치와 생산성의 천성적인 부족, 타고난 장사 기질)을 다른 민족들의 특성으로, 맨 처음에는 프랑스인에게, 그 다음에는 영국인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항상 유대인에게 돌릴 것이다. ‘선천적 개성’이 출생 때 얻는다고 하는 신비스러운 자질은 지주 귀족이 자신의 것이라 주장한 것과 똑같다.
p337 : 독일의 민족주의자들이 1814년의 전쟁(나폴레옹의 패배, 워터루 전투 등) 동안 그리고 그 이후 공식화했더 주장, 즉 민족의 본질로서 종족의 공통적인 기원과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했던 천부적인 개성 및 자연적인 귀족성은 지성적 차원에서 독일의 인종사상의 길을 닦았다. 전자로부터 유기체적 역사론과 그 자연법 사상이 발생했고, 후자로부터는 19세기 말 초인(니체)이라는 기이한 인체 모형이 생겨나는데, 이 초인의 자연적인 운명은 세계 지배이다.
3.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결의 열쇠
p340 : 고비노가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즉 부르주아의 왕 루이 필리프 시대에 귀족계급의 운명은 확정된 것처럼 보였다. 제3신분의 승리는 이미 기정사실이었고 따라서 귀족은 단지 불평만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고비노가 표현했듯이 귀족들의 고통은 데카당스 시인들의 커다란 절망감과 흡사하다. (341) 그렇게 하여 그는 후대의 작가들과 전기 작가들이 그토록 칭송한 발견, 즉 문명의 몰락은 인종의 퇴화에 기인하며 인종의 몰락은 혈통의 혼합에 기인한다는 발견을 했던 것이다. 이 발견은 피가 섞일 경우 열등한 인종이 항상 우세해진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식의 논증은 세기 전환기 후에는 거의 평범한 것이 되는데, 그것은 적자생존이라는 다른 고정관념을 취했던 고비노의 동시대인들의 진보교리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 다윈 <종의 기원>의 자연선택과 역행하는 내용이, 다윈주의의 외피를 띤 채 과학이론으로 유행하는 현상, 오늘날의 사이비과학이 과학과 경쟁하고 우열을 다투는 것과 유사함.
p342 : 고비노가 정치에서 실제로 찾고자 했던 것은 귀족정치를 대체할 수 있는 ‘엘리트’의 규정과 창출이었다. 군주 대신 그는 ‘군주의 종족’인 아리안족을 제안했다.
백작은 하나의 정치적 사건, 즉 귀족의 몰락에서 두 개의 서(343)로 모순되는 결론을 끄집어낸다. - 인간종의 몰락과 새로운 선천적 귀족의 형성을.
p344 : 철저하게 반민족적인 고비니즘 경향이 프랑스 민주주의와 나중에는 제3공화국(보불전쟁 패전 후 대통령제공화정 체제)의 적(인종주의 신봉하는 귀족, 비시정권?)에게 실질적이든 허구적이든 국경을 넘어서는 동맹을 맺도록 도움을 주었다면, 인종과 엘리트의 특수한 혼합물은 국제적인 인텔리겐치아에게 역사의 대운동장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새롭고 흥미로운 심리학적 장난감을 마련해주었다.
4. ‘영국인의 권리 대’ 인간의 권리
p345 : 독일 인종사상의 씨앗이 나폴레옹 전쟁 동안 뿌려졌다면 훗날 인종 이데올로기의 영국적 발전은 프랑스 혁명 동안 시작되었으며, 아마 그 기원은 프랑스 혁명을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위기”라고 격렬하게 비난한 에드문트 버크에게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346) 독일과 영국의 인종사상의 유사점은 두 나라가 프랑스를 격퇴시켰으며 또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을 외국의 발명품으로 홀대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사회적 불평등이 영국 사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까닭에 ‘인간의 권리’가 문제가 되었을 때 영국 보수주의자들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했다.
자유의 특성에 적용된 유산 개념은 영국의 민족주의가 프랑스 혁명 이래 특이한 인종 감각을 얻게 된 이데올로기적 토대였다. 중산층 작가(버크)가 고안한 이 개념은 작위와 토지와 함께 상속된 특권의 총체로서 자유라는 중세 개념을 직접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버크는 영국 내의 특권 계급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이 특권의 원리를 확장하여 전체 영국 국민을 포함시켰다. 다시 말하면 영국 국민을 전체 국가 가운데 일종의 귀족계급으(347)로 설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들의 시민권을 인간의 권리로 주장하는 자들을 경멸했으며, 그가 보기에 이 권리는 오직 ‘영국인의 권리’로서만 주장하는 것이 적합했다.
이런 식의 발전은 17세기부터 점점 더 많은 수의 젠트리들이 부르주아의 상층부를 흡수하여 종종 평민조차 귀족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까닭에 가능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귀족의 통상적인 계급적 오만은 상당히 줄어들었고 그래서 국민 전체를 염려하는 강한 책임감이 창출되었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로 봉건적인 개념과 태도는 어느 곳에서보다 더 용이하게 하층민의 정치 이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귀족적 기준의 수용으로 말미암아 영국식의 인종사상은 상속 이론과 근대적 등가물인 우생학에 사로잡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인류 개념에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을 포함시키려는 실질적인 시도를 한 이후 자신들과 다른 대륙에서 발견한 사람들 사이의 상당한 신체적 차이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p349 : 노예제의 폐지는 기존의 심각한 난관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내재돼 있던 갈등을 첨예화시켰다. 이는 특히 ‘영국인의 권리’가 인간의 권리를 천명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방향에 의해 대체되지 못한 영국에서 두드러졌다.
p350 : 1870-80년대 영국에서 다윈주의는 공리주의와 반식민주의를 표방하는 정다으이 손아귀에 있었다. 사회학을 생물학의 일부로 취급한 최초의 진화론 철학자인 하버트 스펜서는 자연도태가 인류의 진화에 유익하며 영구평화를 가져오리라 믿었다. 다윈중의는 정치적 논쟁에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제공했다. 하나는 필연적이고 자동적인 ‘적자생존’이라는 낙관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생존투쟁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의 삶으로부터 발전해온 인간의 진화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불확정적인 가능성(우연적 진화)이라는 개념인데, 이것은 우생학이라는 신‘과학’을 탄생시켰다.
p351 : 도태의 과정은 인간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자연적인 필연성에서 ‘인위적인’, 즉 의식적으로 적용된 신체적 수단으로 바뀌면 되었다. 야수성은 우생학에 항상 내재돼 있었다. 따라서 안락사는 “가족과 국가의 쓸데 없는 지출”을 절약해준다는 에른스트 헤켈의 언급은 우생학의 특징을 잘 말해준다.
p352 : 전체민족을 자연적인 귀족 – 그 중 가장 성공적인 표본은 천재나 초인으로 – 변형시킨다는 것은 비 정치적인 수단을 통해 구 지배계급을 새로운 ‘엘리트’로 대체하려고 꿈꾸던 좌절한 자유주의 지식인(사회적 개혁가)들이 만들어낸 많은 ‘관념들’ 중 하나였다.
p358 : 아프리카 쟁탈(인도 등 아시아 쟁탈도)과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로 인해 서구인들이 새롭고 놀라운 경험에 노출되지 않았더라면 인종적 관점의 사유는 분명 19세기의 다른 무책임한 견해들과 더불어 사라졌을 것이다. 설령 인종사상이 문명세계에 그때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국주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설명’과 변명으로 인종주의를 고안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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